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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에 기여한 독일 기업들 

동독 재건의 밑바탕 된 독일 기업인의 비전 

이기준 기자
독일 통일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돌발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서독의 기업들이 기간에 동독에 대규모 투자를 실시해 통일 독일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이 분단됐던 때부터 통일을 꿈꾸며 경협을 준비해왔던 기업인들의 힘이 컸다.

▎독일 통일 이후 구 동독 지역인 작센주 츠비카우에 설립된 폴크스바겐 공장 전경.
‘수천 가지 냄새의 거리’. 과거 동독 지역이었던 작은 마을 비터펠트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터전을 자조적으로 이르던 말이다. 동독 정부가 대규모 화학 공단을 운영하던 이 지역은 화학약품으로 인한 오염이 심했다. 온갖 화학물질이 날아다녀서 바람이 부는 방향이 바뀔 때마다 공기의 냄새가 달라진다는 뜻에서 이런 별명이 붙었다.

오늘날 비터펠트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인근 마을과 결합해 비터펠트볼펜이라 불리는, 인구 약 4만 명의 소도시는 통일 이후 독일 정부가 구 서독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대대적인 환경정화 작업을 벌였다. 오염물질을 내뿜던 화학단지는 현대화하고 석탄 채굴을 중단시켰다. 수년 만에 바이엘, 바스프 등 구 서독 굴지의 화학·제약 업체들이 비터펠트에 진출했다. 오늘날 바이엘은 비터펠트 공장에서 연간 90억 개의 알약을 생산하고 있다. 한화큐셀이 건설한 축구장 50개 규모의 대형 태양광 발전소도 이곳에 있다. 호르스트 티셔 전 비터펠트볼펜 시장은 “지금 도시의 모습을 옛날과 비교하면 정말 천지가 개벽했다고 할 정도로 많이 변했다”고 강조했다.

비터펠트볼펜은 통일 이후 서독 기업의 투자가 동독 지역을 어떻게 바꿔놓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운데 하나다. 쇠락한 동독 지역 도시가 다시 일어나는 데는 서독 자본의 역할이 컸다. 1990년부터 매년 서독 국내총생산(GDP)의 5% 정도가 동독에 투입됐다. 2010년까지 20년간 들어간 돈만 2조 유로가 넘는다.

고향 재건에 힘쓴 동독 출신 기업인


▎독일 통일 당시 폴크스바겐을 이끌며 서독 기업들의 동독 투자를 주도한 카를 한 폴크스바겐 명예회장.
서독 민간 자본의 동독행 선봉에는 당시 폴크스바겐 사장이었던 카를 한이 있었다. 1990년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동독 출신인 한은 통일을 앞두고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기업들에 동독 재건을 위해 투자해줄 것을 요청했다. 동독 사람들 사이에선 공산주의자들이 카를 마르크스슈타트로 바꿔놓은 한의 고향 도시 켐니츠를 이젠 카를한슈타트라 불러야 한다는 말이 농담처럼 나돌 정도로 동독 재건을 향한 한의 의지는 강력했다.

한이 나고 자란 켐니츠는 독일의 주요 공업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자동차 영업직원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한은 어려서부터 주변에 새 공장이 들어서는 것을 보았고, 그중 한 자동차 공장에서 수습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19세가 되던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공산주의자들을 피하기 위해 한은 정든 고향을 떠나 서독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부터 한은 고향인 동독의 경제, 특히 쇠락한 자동차 공장을 자기 손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고 다짐했다. 한이 이끄는 폴크스바겐은 통일 전인 1984년에 동독 측에 매년 28만6000개의 자동차 엔진을 납품한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서독 자동차 업체로서는 분단 이후 동독과 진행한 첫 경협이었다.

이 같은 동독과의 협력 경험은 한이 통일 이후 본격적으로 동독 재건에 뛰어드는 밑바탕이 됐다. 한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직후인 1989년 12월 동독 지역인 작센주 츠비카우에 19억 달러를 투자해 새 공장을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동독의 국영 자동차기업 IFA와 합작회사를 설립해 1994년까지 연간 25만 대의 자동차를 생산할 역량을 갖춘다는 계획이었다.

츠비카우는 독일의 세계적 자동차 브랜드 아우디가 탄생한 대표적 공업도시였으나 분단 이후 경쟁력을 크게 상실한 상태였다. 한은 통일 직전인 1990년 9월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와 함께 츠비카우 공장 부지를 방문해 초석을 놓았다. 한은 그 자리에서 “이 공장들에 45년간 아무런 발전도 없었다는 사실이 아주 슬프다. 이 낡은 공장엔 노동자들의 피땀이 서려 있다”며 동독의 자동차 산업이 옛 영광을 되찾게 만들겠다는 자신의 비전을 기자들에게 설파했다.

40여 년에 걸친 경협 시도가 빛을 보다


동독 지역은 치안이 불안정했고 환경도 좋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기술의 수준도 서독보다 현저히 낮았다. 제대로 영업을 개시해서 이윤을 내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외부에선 일본 자동차 기업이 미국 시장에서 폴크스바겐의 점유율을 빼앗아 간 데 이어 유럽 시장까지 넘보는 상황이었다. 폴크스바겐이 동독 투자를 발표할 때 도요타와 혼다는 영국에 공장을 짓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한의 과도한 동독 투자가 합리적 판단에서 나온 결정이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에 휩쓸린 결과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왔다.

이처럼 서독 기업인들에게 동독 투자는 단지 이윤 추구를 위한 전략적 결정만은 아니었다. 조 케저 지멘스 회장은 “독일 대기업들은 갑작스러운 독일 통일 과정에서 책임과 리더십을 다했다. 상황은 어려웠고 상당한 비용이 소모됐지만 우리의 목적과 운명을 잊은 적이 없었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독일 기업인들에게 동독 재건은 사업적 기회인 동시에 독일인으로서의 책임이자 운명이었다.

독일의 대표적 전기·전자 기업 지멘스가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동독에 막대한 투자를 실시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멘스는 통일 직후 동독 기업 11곳을 인수하고 12개 인력센터를 세워 2만 명에 달하는 구 동독 노동자를 고용했다. 특히 반도체공장을 지은 드레스덴엔 약 27억 마르크(1조4000억원)라는 거금을 투자했다.

이처럼 발 빠른 투자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지멘스는 분단 시기부터 지속적으로 동독 측과 협력하고 교류하면서 경협의 창구를 열어왔다. 지멘스는 1847년 베를린에서 영업을 개시한 이래 독일 전역으로 빠르게 사업을 확장했으나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분할 점령되면서 동독에서의 사업권을 완전히 잃었다. 1949년 동독 정부가 공산주의 이념하에 동독의 지멘스 사업부를 국유화하고 지멘스라는 이름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지멘스는 동독 지역 내에 3만 명 가량의 직원을 두고 있었다.

지멘스로선 회사의 반쪽을 느닷없이 강탈당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지멘스는 동독 지역과 협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서베를린을 거점으로 삼아 동독과 공동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매년 봄이면 지멘스는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열리는 무역박람회에 부스를 냈고, 가을에는 동독 경영자들이 서독 하노버에서 열리는 무역박람회를 찾았다. 1984년엔 동독의 국제무역기구가 구성한 컨소시엄과 함께 장기적인 과학기술 공동연구 협약을 체결했다. 그 결과 지멘스의 동독 지역 매출은 1980년대 초 4650만 마르크에서 1980년대 후반엔 1억5000만 마르크로 세 배 이상 늘었다.

지멘스 역사연구소의 자비네 디틀러는 “이처럼 좋은 사업관계를 체계적으로 가꿔온 덕분에 통일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1990년 봄에 지멘스는 이미 동독 기업과 합작회사까지 설립할 준비가 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지멘스 측에 따르면 지멘스는 1990년 초부터 불과 몇 달만에 동독 국영기업들과 20여 건의 협정을 체결하며 인수합병의 바탕을 마련했다. 동독에 서독과 같은 방식의 영업·서비스 조직을 구축할 준비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독일무역투자기구의 프랑크 로바쉬크 대표는 “동·서독의 경제통합과 동독 지역 경제 부흥에는 서독 기업들이 큰 역할을 했다”며 “독일의 피렌체로 불렸던 드레스덴은 이제 독일의 실리콘밸리로 유명하다. 그 바탕엔 서독 기업들의 과감한 투자가 있었다”고 평했다.

- 이기준 기자 lee.kijun@joongang.co.kr

201806호 (2018.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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