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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티. 듀퐁클래식에 새긴 그의 스토리] 번역가 황석희 

번역은 실패의 예술 

대담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
외국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최종 단계는 번역이다. 누군가는 ‘해석의 차이’라고 말하지만 그 차이로 인해 전혀 다른 맥락으로 빠져들게 만들기도 한다. 사범대 출신의 황석희는 부부 번역가다. 황씨는 주로 극장 영화, 아내는 TV 시리즈를 번역한다. 그는 원문에 대한 존중과 겸손이 번역가의 덕목이라고 했다. 그는 셔츠에 ‘세상을 번역하다’라고 새겼다.

▎번역가 황석희를 서울 용산구 갈월동 카페 모(Mo)에서 만났다. / 사진:S.T.듀퐁클래식 제공
송길영: 미국의 인기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을 좋아한다. 다만 (내용 또는 대사의) 흐름이 빨라서 해석이나 의역이 필요할 때가 있다. 신랄한 풍자가 있어 대중문화의 코드를 알아야 하니 마치 주석처럼.(웃음)

황석희: 자막의 한계가 아닐까. 요즘 관객들은 모든 걸 이해하고 싶어하는데…. 그래서 ‘엔차 관람’* 이란 말이 나온 거 아닐까 싶다. 내가 번역한 영화 ‘데드풀’도 엔차 관람이 상당했다. 그런데 엔차 관람하시는 분들은 의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더라.

*엔차 관람 같은 영화를 2회 이상 재관람하는 최근의 영화 관람 트렌드. 시리즈 영화의 마니아들은 수십 회를 관람하기도 한다.

송길영: 의역을 오역으로 보는 사례도 많은 것 같다.


황석희: 영화 ‘포레스트 검프(1994)’에서 주인공이 얼마나 큰 부자인지를 표현하는 대사가 나온다. 한국에서 개봉할 때 “난 정주영처럼 돈이 많다”고 번역했다. 이런 번역은 2000년 초반까진 통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당연히 지적을 당할 것 같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수준이 높아졌고 외국 문화에 대한 이해와 같은 배경지식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직역을 좋아하시는 것 같다.

송길영: 선택의 문제인 것 같다. 맥락 또는 일관성의 이슈 아닐까? 표현의 레이어라는 게 톤을 업 또는 다운시킬 수 있으니. 자기와의 싸움이란 생각이 든다.

황석희: 영화 한 편에 보통 1200~1400개의 자막이 들어간다. 많으면 1800개 정도. 아론 소킨(미국 드라마 ‘뉴스룸’작가)의 작품은 대사가 3000개가 넘는다. 번역자는 자막의 수만큼 선택과 갈등을 한다. 번역을 하다 1000번이 넘어간 상태에서 표현의 레이어를 바꾸는 경우도 있다.

송길영: 나의 주관이 영화를 보는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상징과 함축의 문제이기 때문에 감독조차 영화 속에 다양한 장치를 마련한다. 그런 점에서 번역 작업을 하는 번역가의 시선을 독선으로 볼 위험도 있을 것 같다.

황석희: 맞다. 언제 지뢰(오역 논란)를 밟을지 모르는 매우 위험한 작업이다. 최근엔 주류 남성 감독조차도 여성을 코드에 넣고 인권 코드를 넣기 때문에 이를 반영하기 위해 감독에 대한 정보와 작품 의도 등 맥락을 챙겨야 한다. 그럼에도 언젠가 지뢰를 밟을 각오를 하고 있다.

송길영: 과거 인기를 끌었던 ‘남녀탐구생활’이란 프로그램을 얼마 전에 봤다. 지금의 젠더 감수성으로 보면 위험한 장면과 대사가 많더라. 마찬가지로 현재의 감수성으로 번역했는데 10년 후 작품을 보고 평가받을 경우 억울한 상황도 생길 수 있지 않을까?

황석희: 최근 영화 ‘타이타닉’이 재개봉했다. 당시 자막을 그대로 썼는데 당시는 자막이 좋다고 했는데 지금은 자막 사고, 오역이라고 지적을 하더라. 여성이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존대하는 말투엔 화를 낸다. 지금은 당연한 것 같은데 10년 후 분명 ‘어떻게 저런 자막을…’이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자막은 영원히 남고 관객 수준은 높아지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송길영: 그런 점에선 자막에도 유효기간이 있으면 좋겠다. 의역이 들어 있으니.

황석희: 그랬으면 좋겠다.

송길영: 이런 이슈에 대해 재개봉하는 제작사나 수입사의 입장은 어떤가?

황석희: 최근 재개봉하는 영화가 많아졌다. 자막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하는 수입사도 있지만 내부 감수하고 그냥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자막의 퀄리티가 흥행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관객들이 제대로 영화를 경험하려면 재번역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송길영: 제작사에서 번역료 비중은 어떤가?

황석희: 홍보 마케팅 비용에 비하면 번역료 비중이 매우 낮다.

송길영: DVD 덕분에 자막의 퀄리티를 검증하는 게 쉬워졌다. 영상 기술의 발달은 번역가 입장에선 불리할 것 같다.

황석희: 들리는 것과 자막이 다른 경우를 찾아내는 사례가 많다.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엔 외화를 보면서 자막에 오류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 해봤다. 하지만 요즘엔 초등학생도 영어를 잘하니 오역을 지적한다. 또 예전엔 번역가가 영화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다르다.

송길영: 번역 횟수가 늘수록 오역할 확률도 높아진다. 사람들은 타율보다 케이스를 기억하니까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자막을 대하는 관객도 변했을 것 같다.

황석희: 얼마 전까진 영화 끝나면 바로 실수를 찾아내 인터넷에 올렸다. 최근엔 오역이 있을 수도 있다고 이해하신다. 다만 번역가가 나태한 걸 못 참는다. 왜 관련 분야를 공부 안 했냐, 조사 안 했냐고 지적하신다. 수준이 상당하다.

부쩍 늘어난 재개봉 영화, 재번역도 필요


▎사진:S.T.듀퐁클래식 제공
송길영: 웹툰 ‘삼국전투기’와 ‘GM’을 그리는 최훈 작가에게 “왜 역사와 야구 만화만 그리시냐?”고 물었더니 “독자를 이기기 위해서”라고 답하더라. 두 토픽은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공부하면 관객에게 지지 않는다고 설명하더라. 포커로 돈을 따서 대통령 선거를 예측하는 재미난 일을 하는 미국의 통계학자 네이트 실버의 책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누군가 농구 게임을 겜블링에 적용한 시스템으로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런데 야구 게임을 적용했더니 실패했다. 이유는 그 사람이 농구를 잘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번역가의 경우 배경지식을 모를 땐 어떻게 해결하나?

황석희: 대부분 배경을 모른다. 영화 ‘스포트라이트’를 번역할 땐 기자들을 만나 해당 업의 용어를 배웠고 ‘밴드 오브 브라더스’ 시리즈의 경우엔 포대장 출신의 지인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 덕분에 그럴듯한 작품이 나왔다. 또 법정 영화는 변호사들을 만나 공부했다. 관객들이기도 한 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협조를 정말 잘해준다. 영화에 일조할 수 있음에 기뻐하더라.

송길영: 구글에서 신경망번역*을 시작했다. 기사 번역은 2년 전보다 완성도가 높더라. 번역가에게 수혜는?

*신경망 번역 문장 전체의 맥락을 먼저 이해하고 구성 요소들을 번역하는 기술로, 구문에 기반한 통계 번역과 비교해 완성도 높은 번역 서비스를 제공한다.

황석희: 전문 번역의 경우는 AI 번역 초기부터 일부 도입한 것으로 안다. 다만 영상, 책 번역에까지 영향을 끼치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결국 비용과 시간 같은 효율성 때문일 텐데 지금도 일부 영화사는 번역가가 아닌 번역회사에 1차로 일을 맡긴다. 어설프더라도 번역회사에서 온 내용을 내부에서 만져 개봉하는 식이다. 통째로 번역을 대체하기까진 시간이 꽤 걸리지 않을까?

송길영: 영화는 작품이면서도 상업적 흥행을 위한 콘텐트이기도 하다. 원문을 살리는 방법과 쉽게 이해도를 높이는 방법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황석희: 설득은 하겠지만 결국 클라이언트 의견에 따른다. 난 순수예술가 아닌 기술자이기 때문이다.

송길영: 번역 작업을 스크리닝하는 인사이드 그룹을 만드는 건 어떨까?

황석희: 그런 그룹을 영화사가 운영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오역을 짚어줄 때도 있고 리포트를 작성하는 경우도 있다.

송길영: 우디 앨런의 영화처럼 대사량도 많고 냉소적인 유머가 뒤섞여 있으면 팬이 지독하게 물고 늘어지는 경우도 있겠다.

황석희: 말맛을 잘 살리는 작가주의 감독의 작업은 정말 어렵고 괴롭다. 그렇지 않더라도 기존 배경이 있는 작품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 예전에 번역한 영화 ‘엑스맨’에서 ‘이 괴물은 뭐야?’라는 자막을 썼다. 개봉하고 피드백 메일이 왔더라. 메일의 내용은 ‘엑스맨이라는 작품은 1960년대 인종차별을 메타포로 만들어졌다.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 영화니 돌연변이 사이에선 괴물이란 말 사용하면 안 된다’였다.

송길영: 언어가 사회성이나 계급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들에겐 일상이 타인에겐 낯선 말일 수 있으니. 내가 속한 문화를 성찰하는 것도 중요하겠다.

황석희: 맞는 말씀이다. 트렌드에 밝아야 한다. 어제 웹투니스트의 글을 읽었는데 ‘몸빵’이란 말을 넣고 싶은데 몸빵이란 말이 과거의 ‘육체노동으로 대신하다’란 뜻과 달리 ‘성상납’을 의미하는 좋지 않은 표현으로도 사용되고 있어 난감하다는 내용이었다. 언어 트렌드를 모르면 관객을 좇기 어려워졌다. 번역가로서 공감하는 말 중에 ‘translate is art of fail(번역은 실패의 예술이다)’이란 말이 있다. 번역이 원문을 이길 순 없다.

송길영: 극장 번역가는 꿈의 리그다.

황석희: 운이다. 운 또는 기회. 우리나라에서 극장 번역가로 활동하는 이는 5명 정도니까. 번역서에 ‘황석희 옮김’ 하나 넣으려다 이 길을 걷게 됐다.

송길영: 운이 없으면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우니까. 그런데 영화가 좋아서 번역가가 된 게 아니라는 게 의외다.

황석희: 영화를 좋아한다면 번역가는 별로다. 기대하는 영화를 완성되지 않은 채 먼저 본다는 게 그리 유쾌하지 않으니까.

송길영: 영화를 좋아해서 번역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황석희: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말은 쉽다. 현실에선 드물다. 그 행복을 갖기 위해 희생할 게 많다. 내 경우는 일을 꾸준히 하다 보니 영화가 좋아졌다.

- 대담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 진행·정리 유부혁 기자 yoo.boohyeok@joongang.co.kr

201806호 (2018.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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