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진호의 ‘음악과 삶’ 

교향곡이 되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에너지 

김진호 안동대 음악과 교수
노래방에서 노래 한 곡 끝냈을 때 소비했다는 칼로리의 양을 영상에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노래 부르기는 에너지 소비 과정이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에너지가 소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열역학 제1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창조되거나 파괴되지 않으며 늘거나 줄지도 않는다. 형태를 바꿀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다른 모습의 에너지다.

▎‘음악을 근육으로 듣는다’고 했던 니체는 정적인 오페라 [파르지팔](왼쪽)을 비판하며 [카르멘](오른쪽)을 높이 평가했다. [카르멘]은 강렬한 리듬이 압권이다. / 사진: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제공, 중앙포토
음악은 작곡가에 의해 창작되어 연주가에 의해 연주된다. 감상자는 그것을 듣고 본다. 이 모든 과정에서 에너지가 문제시된다. 우선 작곡가는 악상을 떠올려 잘 정리하고 처리해 음악으로 만드는데, 그가 떠올린 악상은 특정한 에너지 상태와 관련된다. 작곡가의 뇌에서는 뉴런(인간 뇌를 구성하는 세포)들이 켜졌다가 꺼지는 등 전기 및 화학에너지가 발생한다. 이 에너지는 선율과 화음으로 어우러진 어떤 악상으로, 혹은 그런 악상을 만들어내는 음악적 개념들로 작곡가에게 의식된다. 작곡가의 뇌는 음악적 발전기(generator)이며, 그것이 작동하려면 에너지원이 필요하다. 에너지원을 얻기 위해 작곡가는 한편으로 무언가를 먹고 마셔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 무언가를 느끼고 생각해야 한다. 음식 에너지를 입력받지 못해 굶어 죽은 뇌에서 음악은 출력될 수 없고, 살아 있되 느끼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뇌에서도 음악은 출력되지 못한다.

잘 느끼지 못하고 생각할 수 없었던 작곡가들은 실제로 작곡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현대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픽병(Pick disease)을 앓았고 그래서 점차 사유기능이 상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아주 드문 신경퇴행병인 픽병은 뇌의 신경세포들을 점진적으로 파괴시키며 환자를 치매 상태로 내모는데, 라벨은 1932년에 교통사고를 당한 후 이 병을 앓기 시작했을 것이다. 한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과 [물의 희롱] 등의 걸작을 만들어냈던 라벨은 사고 이후 무려 5년 동안 작곡을 거의 못 하다가 죽었다.

표현 욕구도 에너지


▎공간에서 퍼지는 파동에너지는 감상자의 의식과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오페라 [탄호이저] / 사진:BNY MELLON 제공, 유튜브 영화 [아마데우스] 캡쳐
좋은 악상이 있더라도 그것을 표현하겠다는 욕구 혹은 지향이 없다면 일은 더는 진행되지 않는다. 몸이 몹시 아프다거나, 세상이 저주스러울 때면 마음속 교향곡은 세상의 빛을 볼 수 없다. 욕구 혹은 지향이 있다면 작곡가의 마음속 음악은 이제 물적 형태로 바뀌게 될 것이다.

표현 욕구 혹은 지향 역시 에너지다. 표현 욕구를 가진 작곡가는 손을 움직여 작업한다. 표현 욕구의 기저에 있는 에너지가 출력 혹은 변환된 것이 작곡가의 손동작일 수 있다. 이 변화의 장소는 작곡가의 뇌에서 손으로 연결된 경로다. 이 경로를 따라 전해진 명령이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며 종이로 된, 혹은 컴퓨터 파일로 된 악보를 그리게 한다.

1985년 국내에 개봉되었던 영화 [아마데우스]의 마지막 부분은 죽어가는 모차르트를 보여준다. 임종 직전 천재 작곡가의 머릿속엔 마지막 작품 [레퀴엠]이 있었다. 영화는 한편으로 매우 지쳐 있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모차르트를, 다른 한편으로 그의 음악적 구술을 받아 적는 살리에리를 그려낸다. 악보를 적는 운동적 행위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잘 알려주는 장면이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와 동시대 작곡가로, 음악적 능력은 모차르트에 비해 좀 떨어지나 다른 능력을 발휘해 당대에 성공했다. 영화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한 것으로 그리지만, 실제의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여러모로 도와주었다고 한다. [레퀴엠]은 죽은 자를 위한 가톨릭 미사곡으로, [진혼곡]으로 번역된다. 베르디나 브람스, 포레 등 여러 작곡가가 레퀴엠을 작곡했다.

그런데 악보에 적힌, 음악적으로 의미 있는 ‘정보’는 운동에너지 외에 다른 에너지를 더 필요로 한다. 그것은 상술한 악상과 관련된다. 정보 체계로서의 악보는 손가락 운동에만 몰두하는 작곡가가 아닌, 세계와 대면해 깊은 고민을 하고 사유하는 작곡가가 만든다. 후자의 뇌 속 뉴런들이 일으키는 전기에너지와 화학에너지를 통해 현상되고 의식되는, 내적 악상 혹은 개념의 외적 등가물이 악보다.

악보에 담긴 정보대로 연주자가 연주를 하면 새로운 에너지의 출현과 그 형태 변환의 과정이 다시금 개시된다. 지난 호에서도 지적했듯이, 연주자는 운동에너지를 만들어낸다. 그 운동에너지는 바로 악기의 진동에너지로 변환된다. 바이올린과 피아노, 가야금 등의 현이, 팀파니의 막이, 오보에와 클라리넷 같은 목관악기 내부의 공기 기둥이 진동한다.

악기의 진동은 악기 주변 공기의 진동을 불러일으킨다. 즉 악기의 진동에너지는 공기의 진동에너지와 그에 따른 파동에너지로 변환된다. 공간에서 퍼져나가는 파동에너지의 일부는 감상자의 바깥귀를 통과해 속귀에 전달된다. 그 과정에서 고막, 유모 세포와 같은 물질들을 연쇄적으로 진동시킨다. 즉 공기의 진동 및 파동에너지는 고막 등의 진동에너지로 바뀐다. 이 진동에너지는 이후 청각을 담당하는 뉴런들을 점화시켜 뇌 속 전기에너지로 변환되고 이 전기에너지는 특정한 화학적 에너지인 신경전달물질들을 방출하게 한다. 전기에너지와 화학적 에너지가 감상자의 음악적 의식으로, 종종 어떤 감정으로 현상된다.

음악이 무용한 소리에너지가 아니려면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는 죽어가는 모차르트의 구술을 살리에리가 받아 적어 ‘레퀴엠’을 완성시키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장면이 실화인지는 불분명하다.
음악을 듣고 어떤 감정을 느낀 감상자는 춤추는 등 어떤 운동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감상자의 뇌에서 발생된 에너지가 그의 운동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다. 이 과정은 종종 통제되지 못한다. 음악을 듣는 우리가 자연스레 춤을 추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음악을 근육으로 듣는다”라고 말했던 독일 철학자 니체는 이상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프리드리히 니체는 기독교를 싫어했는데, 그에 따르면 기독교는 내세를 중시하며 현세의 생명적 약동을 싫어했다. 한때 그가 열광했던 독일 작곡가 바그너는 [탄호이저]와 [니벨룽의 반지] 같은 오페라들에서 비기독교적 세계관을 표현했다가, 마지막 작품인 [파르지팔]을 통해 기독교적 세계로 복귀했다. 생명적 약동은 음악에서 강렬한 리듬으로 표현되며, 그런 리듬을 담은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근육을 움직일 것이다. 현세적/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을 강조했던 니체는 리듬감이 거의 없고 정적인 [파르지팔]을 거부하며 프랑스 작곡가 비제의 [카르멘]을 평가했다. 담배공장 노동자들과 집시 여인 및 투우사 등 현실적 군상들이 출연해 왁자지껄 법석을 떠는 오페라 [카르멘]은 강렬한 리듬과 세속적 분위기로, 초월적이며 신화적인 [파르지팔]과 대조된다. [카르멘] 같은 작품을 들을 때 우리가 모종의 열광 상태에 처할 가능성이 큰 것만큼은 분명하지만 그게 좋은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악기의 진동이 야기한 악기 주변 공기의 진동을 디지털 정보, 즉 전기신호의 단속(斷續/on-off)적 연쇄로 바꾸어 CD 등에 기록할 수 있다. CD를 틀거나 컴퓨터 파일을 열면 CD와 파일 안 정보가 이번에는 파동으로 변환되어 결국 당신의 고막을 진동시킨다. 연주자로부터 CD 혹은 파일, CD플레이어와 컴퓨터로부터 스피커를 통해 귀와 뇌에까지, 에너지는 다양하게 변화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기에 전기가 소비되는 과정이 일어난다. 음악을 CD나 스마트폰, 컴퓨터를 통해 듣는 일은 전기에너지를 소비하는 일로 여겨진다.

하지만 상술했듯이 열역학 제1법칙 혹은 에너지 보존 법칙을 생각하면 에너지는 낭비되는 것이 아니다. 에너지는 단지 쓸모 있는 에너지로부터 쓸모없는 에너지로 변화될 뿐이다. 이것은 열역학 제2법칙이 알려주는 바다. 물리적 관점에서 전기에너지는 쓸모가 있고, 소리에너지는 현대사회의 산업적 관점에서 볼 때 보통 쓸모가 없다. 전기에너지로는 쉽게 라면을 끓일 수 있지만, 전기에너지가 변환되어 만들어진 소리에너지로는 라면을 끓이기가 어렵다.

쓸모 있는 에너지가 쓸모없는 에너지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엔트로피가 증대된다. 이 용어는 에너지 낭비 상태 혹은 세상의 무질서 정도를 표현한다. 모든 계에서 엔트로피는 증대하는 불가피한 경향이 있고, 극대치의 엔트로피는 주어진 체계의 쇠락과 죽음을 가져온다.

쇠락하여 죽음에 이르는 체계가 우리가 사는 지구 생태계일 수 있다. 수십억 음악 감상자들이 CD나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는다. 그렇게 전기를 낭비하는 건 아닌지, 세계의 엔트로피를 더욱 높이는 것은 아닌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전기에너지는 우리 마음속에서 가치 있는 어떤 것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마음이 바뀐 우리가 지구 생태계의 쇠락을 늦추는 데 도움이 되는 행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진호는…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의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201806호 (2018.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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