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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30년 사건과 인물들(3) 

중소기업청의 탄생 

최영진 기자
1995년까지만 해도 벤처 지원 정책을 전담하는 부처는 없었다. 1996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중소기업청이 속전속결로 신설되면서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의 전담 부처가 생겼다. 1개월 만에 중기청이 신설되면서 다양한 사건이 일어났다. 중기청의 준비부터 신설 과정과 위상 정립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살펴봤다.

▎1996년 2월 12일 김영삼 대통령이 과천 중소기업청(구 공업진흥청) 청사에서 관계자들과 현판식을 열었다. / 사진:국가기록원
# 1996년 1월 1일 당시 장지종 통상산업부 중소기업정책과장은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왜 나를 들어오라고 했는지 이유를 몰라서 많이 걱정했다”고 말할 정도로 급박하게 이뤄진 호출이었다. 청와대는 그에게 “중소기업청을 만들어야 하니까 조직 관련 자료를 만들라”고 요청했다. 당시 장 과장은 “공업진흥청을 모태로 해서 중기청을 만들면 될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가 중기청 신설을 위한 T/F의 실무를 맡았다. 1월 5일 김영삼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중소기업청을 신설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당시 통상산업부 중소기업정책과에서 작성한 ‘중소기업청 설립 추진현황’에 따르면 중기청 신설을 위해 통상산업부, 총무처, 재정경제원, 국무총리실 등 관계부처가 협의를 진행했다. 1개월 동안 정부 부처의 협의를 거쳐 2월 12일 중소기업청이 탄생했다. 중기청 신설 T/F 실무를 맡았던 장지종 전 중소기업연구원장은 “오랫동안 중기청 신설이 잘 안 됐는데, 김영삼 정부가 여러 이유 때문에 밀어붙인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중기청은 첫해 인원 900여 명과 예산 3조2000억원으로 시작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중소기업과 벤처 지원 정책을 책임지는 부처가 탄생했다. 1995년 12월 벤처기업협회 창립에 이어 1996년 2월 중소기업청 신설은 한국의 벤처 생태계 활성화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이때부터 벤처와 창업이라는 단어가 젊은이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 1996년 12월 서울대에서 공대 학생이 주최한 ‘한국의 빌 게이츠여 모여라’라는 이름의 행사가 열렸다. 학생 500여 명이 참여할 정도로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대학가에 창업이라는 단어는 흔하지 않았고, 창업을 꿈꾸는 것도 어려운 시기였다. 공대생은 대부분 대기업이나 연구원 등으로 진출했던 시기다. 이 행사를 주최한 공대생은 곧바로 대학에 ‘벤처’라는 창업 동아리 설립을 주도했다. 서울대에 처음으로 창업 동아리를 만든 것이다. 창업에 관심 있는 멤버를 모집했고, 그들과 항상 모여 이야기하며 창업의 꿈을 일궈나갔다. 송병준 게임빌 대표 이야기다. 송 대표는 “왜 그 행사를 준비하게 됐나?”라는 질문에 “이 행사를 하기 전에 마침 서울대 선배들이 나와 도전의 길을 제시하는 강의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당시 이민화 메디슨 대표와 변대규 휴맥스 대표를 만났다”면서 “그분들의 강의를 듣고 큰 감흥을 받았고, 용기를 얻어 적극적으로 창업에 도전하게 됐다”고 이메일을 통해 답변했다. 이 강연을 시작으로 포항공대, 인하대, 카이스트 등 전국 주요 대학에 ‘벤처창업 로드쇼’라는 행사가 열렸고, 대학생들 사이에 벤처와 창업 열기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취업만을 진로라고 생각했던 젊은이들의 가슴에 ‘창업’, ‘벤처’라는 단어가 들어서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벤처(스타트업) 30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슈가 중기청 신설이다. 처음으로 벤처 지원 정책을 총괄하는 정부 부처가 탄생한 것이다.

중기청 신설은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한국 정부 역사에서 1개월 만에 신설된 부처는 중기청이 유일할 정도다. 오래전부터 중기청 신설 요구가 많았지만, 번번이 가로막혔다. 김영삼 정부가 중기청 신설을 신속하게 진행했던 이유가 뭘까.

김영삼 대통령 지시로 1개월 만에 중기청 신설


▎1998년 1월 정해주 통상산업부 장관은 중소기업 대표 20여 명을 비롯해 중소기업청과 금융기관 등 중소기업 지원기관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사진은 인사말을 하고 있는 정해주 통상산업부 장관의 모습.
중기청에 벤처 정책을 도입하게 한 주인공으로 꼽힌 송종호 전 중기청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1995년 무렵부터 기아, 진로, 삼미 등 대기업이 부도가 나면서 중소기업의 줄도산이 이어졌다. 당시 마산에서는 중소기업 대표가 자살하는 일까지 일어나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거셌다. 정부가 중소기업 지원과 육성에 나서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정치적인 상황도 중기청 신설을 가능하게 했다. 바로 1996년 4월에 예정되어 있던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다. 임기 후반부에 접어든 김영삼 정부가 선거에서 좋은 성적표를 받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하는 시기였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는 말이 있다. 급할수록 여유를 두고 일을 처리하라는 의미다. 중기청 신설 과정은 그러지 못했다.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중기청에 실질적인 권한이 별로 없었다는 것. 신설 과정에서부터 여러 부처의 반발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장지종 전 중소기업연구원장은 “중기청 기능 확대를 위해서 금융 기능을 가지고 있는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을 중기청 산하에 두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면서 “청와대 총리실도 이 안을 지지했지만 재정경제원이 산업 지원 조직이 금융 기능을 할 수 있느냐며 반대해서 좌절됐다”고 설명했다. 또 “미국의 중소기업청(SBA)은 보증기금을 운영하고 있는데 보증기능과 금융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 정부도 타협점을 찾은 게 신보와 기보에 운영위원회를 만들고 중기청 담당 국장이 멤버로 참여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8월 중기청이 중소벤처기업부로 승격된 후에야 기술보증기금은 중기청 산하로 이관됐다. 금융위원회 산하에 있는 신보도 중기부로 이관하는 방안이 모색되고 있다. 신설 과정에서 좌절된 사안이 20여 년 정도 지난 후에야 바로잡힌 셈이다.

통상산업부는 중기청의 시어머니 노릇을 톡톡히 했다. 한국의 실물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통산산업부는 중기청 신설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통상산업부가 전체 산업을 관장하는데 중기청이 생기면 산업부는 대기업부가 되는 것이냐?’는 논리를 편 것으로 전해진다. 송종호 전 중기청장은 “원래 중기청은 산업부의 중소기업국과 공진청을 합치는 방안이었다”면서 “그런데 산업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산업부 중소기업국은 중소기업정책관실로 이름만 바꿔 유지됐고, 공진청 조직만 중기청으로 이어지게 됐다”고 회고했다.

산업부와 마찰은 이후에도 계속 됐다. 중기청을 만든 후 정책은 산업부가 맡고 집행은 중기청이 담당하는 것으로 정리됐지만 실상 집행의 독립성을 찾기 어려웠던 것. 장지종 전 중소기업연구원장은 “중소기업 육성 정책도 중기청장이 아닌 산업부 장관이 결정하는 문제가 발생했다”면서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순위가 뒤로 밀렸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 탓에 초기 중기청은 중소기업 육성을 전담하는 역할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이런 문제점이 해결되기 시작한 계기는 당시 정해주 특허청장이 2대 중기청장에 부임하면서부터다.

정해주 전 통상산업부 장관은 통상산업부 차관보와 특허청장을 지낸 후 1996년 12월 2대 중기청장에 임명됐다. 산업부 출신의 현직 공무원으로는 가장 맏형이었다는 점은 산업부가 중기청에 대한 간섭을 줄여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사안을 두고 중기청과 산업부 간에 마찰이 생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1997년 1월 정 청장은 송종호 창업지원과장에게 벤처 육성 정책 보고서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2월 정 청장은 이 보고서의 요약본을 가지고 김영삼 대통령과 독대했다고 한다. 벤처기업을 육성하면 경제의 새로운 활력이 될 것이라고 보고한 것. 청와대는 ‘3월 말 대통령이 주재하는 확대경제장관회의에 벤처기업 육성 정책을 보고하라’고 중소기업청에 지시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송종호 전 중기청장은 “원래 중기청이 보고를 해야 하는데, 당시 산업부 장관이 보고하겠다고 나섰다”고 설명했다. 산업부 출신 고위 공무원이 중기청장으로 임명됐지만, 산업부의 위세를 느끼게 된 계기였다.

정해주 중기청장은 1997년 11월 산업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후 중소기업 육성 정책과 벤처 육성 정책 등을 중기청으로 이관했다. 1997년 말 산업부에는 벤처 정책을 담당하는 벤처기업국을 신설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 정해주 통상산업부 장관은 벤처기업국을 중소기업청에 신설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송종호 전 중기청장은 “정 전 장관은 통상산업부 장관으로 가자마자 산업부의 지나친 간섭을 없애도록 했다”고 평가했다. “중기청장으로 일하면서 겪은 서러움을 알기 때문에 중기청에 독립성을 준 것”이라고 덧붙였다.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공약 중 하나는 ‘중기청의 중기부 승격’이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부 승격을 시도했지만, 부처의 반발에 밀려 성사되지 못했다. 대신 1998년 2월 미국의 중소기업청(SBA)을 참고해 대통령 직속의 중소기업특별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인들이 염원했던 중기부 승격은 20여 년이 지난 2017년 7월에 이뤄졌다.

[박스기사] 송종호 전 중소기업청장- “중기청 설립 과정에서 통상산업부와 갈등 많아”


송종호 전 중기청장(12대)은 중소기업청 역사에서 벤처 지원 정책을 기획하고 수립하는 전 과정에 관여한 인사로 꼽힌다. 상공부를 거쳐 중기청에서 창업지원과장과 창업벤처 본부장 등을 지내고 중기청장에 오르면서 ‘벤처 송’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중기청 창업지원과장으로 일할 때 발표한 ‘벤처기업 활성화 대책’ 보고서는 한국 벤처 지원 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기청 창업지원과장으로 일할 때 ‘벤처기업 활성화 대책’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1997년 2월에 작성한 보고서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설픈 보고서지만, 벤처 지원 정책의 개념과 방향이 다 들어 있다. 창업 보육 시스템의 필요성, 코스닥 시장 활성화 방안, 벤처기업의 범위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벤처기업협회가 설립됐지만 대다수의 정부 부처가 벤처에 관심이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정해주 중기청장이 나를 창업지원과장에 임명하면서 ‘벤처 지원 정책을 만들어보라’고 지시했다. 이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1개월 동안 거의 집에도 못 들어간 것으로 기억한다. 그해 3월 31일 김영삼 대통령이 주재하는 확대경제장관회의에서 이 보고서를 기초로 한 벤처 지원 정책이 보고됐다.

당시 벤처 지원 정책은 산업부에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벤처 지원 정책을 중기청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상황이었나?

정해주 전 통상산업부 장관 덕분에 중기청이 벤처 지원을 맡는 부처로 거듭났다. 당시 산업부 내에도 중소기업국이 있었다. 벤처 정책 지원에 대해 산업부가 시시콜콜한 것까지 간섭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해주 전 청장이 통상산업부 장관으로 가면서 정리를 해준 것이다. 당시 산자부의 반대가 심했지만, 정 장관이 해결했다. 중기청이 벤처 지원 정책을 독립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은 전 장관 덕분이다.

벤처정책국 신설이 큰 의미가 있는 일인가?

정부 조직 내에서 전문성을 확보하려면 과 체제로는 힘들다. 적어도 국 체제를 갖춰야만 한다. 그런 면에서 중기청에 벤처정책국이 신설된 것은 큰 변화다. 중기청에 벤처정책국이 신설될 당시에도 여러 부처가 벤처 지원 업무를 가져가려고 했던 것으로 안다. 정해주 전 장관이 중기청에 법률 발의권을 주고, 창업지원법 등을 모두 준 덕분에 중기청이 벤처 주무 부처가 될 수 있었다.

2002년 2월 발표된 ‘벤처기업의 건전화 방안’이 벤처 정책의 후퇴였다는 분석도 나온다.

2002년 벤처 업계에는 문제가 많았다. ‘무늬만 벤처’, ‘묻지마 투자’ 등 업계에 부작용이 많이 발생했다. 벤처 업계를 이상하게 보는 시선도 많아졌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건전화 방안은 그런 상황에서 나왔다. 코스닥 건전화 방안, 벤처 인증 제도 강화 등 후속조치가 이뤄졌다. 이런 조치 때문에 벤처 생태계가 위축됐다는 이야기가 나오던데, 당시 상황을 이해했으면 한다.

중기청은 통상산업부 외청이던 공업진흥청을 흡수해 만들었다. 반발은 없었나?

알다시피 중기청은 짧은 시간에 설립됐다. 1996년 1월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지시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반발할 시간도 없었다. 당시 공진청은 제품의 KS나 품질관리를 하던 곳이다. 그런데 90년대 들어서 삼성이나 LG 같은 대기업이 제품의 품질관리를 직접 하면서 역할이 많이 줄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공진청의 반발은 없었다.

- 최영진 기자 cyj7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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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호 (2018.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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