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남의 TRAVEL & CULTURE] 이탈리아-피사(Pisa) 

기울어진 종탑이 유혹하는 갈릴레오의 고향 

글·사진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 서쪽에 있는 작은 도시 피사는 한때 베네치아, 제노바, 아말피와 함께 지중해의 막강한 4대 해상도시공화국 중 하나였다. 피사는 10세기와 11세기에 걸쳐 강력한 해상공화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여 12세기에는 서부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더욱 강대한 해상공화국을 건설했으며 스페인, 북아프리카와 교역하면서 황금기를 누렸고 십자군 전쟁을 지원했다. 이 시대에 피사는 화려한 대성당을 비롯해 여러 세례당과 종탑을 세웠다.

▎기적의 광장에 세워진 세례당, 대성당, 기울어진 종탑. 어둠 속에서도 ‘중세 암흑기’라는 표현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찬란한 모습을 드러낸다. / 사진:정태남
토스카나 지방 서쪽에 있는 피사는 아르노강이 바다로 흘러가는 곳에 위치한다. 아르노강 변에는 산타 마리아 델라 스피나(Santa Maria della Spina: 가시의 성모 마리아 성당)라고 하는 작고 예쁜 고딕양식 성당이 먼저 눈에 띈다. 이 성당의 기원은 12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곳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면류관 가시 하나가 보존되어 있었다. 건너편 강 뒤쪽에는 갈릴레이가 교수로 재직하던 유서 깊은 피사대학을 비롯하여 피사의 유구한 역사와 관련된 건축물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하지만 피렌체처럼 장엄함이나 화려함은 별로 느낄 수 없고 수수하고 소박하기만 하다.


아르노강에서 북쪽으로 역사의 향기가 짙게 밴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약 1킬로미터 가면 갑자기 시야가 트이면서 여태까지 봐왔던 것과 완전히 다른 황홀한 광경이 펼쳐진다. 기적의 광장이다. 완벽하게 보존된 중세의 도시 성벽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또 푸른 잔디가 융단처럼 깔려 있는 이 광장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통일된 대성당, 종탑, 세례당, 캄포산토 묘지가 남국의 밝은 햇빛 속에서뿐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중세 암흑기’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찬란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광대한 외부세계와 교역하던 해상공화국 피사의 황금기를 가장 확실하게 증언해주는 건축물이다. 이 네 가지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교 건축물은 기능은 모두 다르지만, 같은 재질과 색, 디자인 요소 등을 공유하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보면 마치 한 세트의 보석처럼 보인다.

중력의 법칙에 도전하는 피사의 사탑


▎기울어진 종탑과 대성당의 표면. 재료와 디자인 요소들이 동일하여 일체감을 준다. / 사진:정태남
해상공화국 피사는 10세기와 11세기에 걸쳐 지중해의 강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고, 제노바와 노르만의 해군과 함께 이슬람세력을 이탈리아반도 서해에서 몰아냈다. 12세기에 피사는 지중해 서쪽의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더욱 강대한 해상공화국을 건설했고, 스페인, 북아프리카와 교역하면서 황금기를 누렸으며, 십자군 전쟁을 지원했다. 이 시대에 피사는 대성당 옆에 종탑과 세례당을 세우는 등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를 다지며 크게 발전했다. 하지만 1284년에 강력한 라이벌 제노바와 치른 전쟁에서 패하는 바람에 역사의 뒤안길로 밀리기 시작하다가 1406년에는 피렌체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기적의 광장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기울어진 종탑, 즉 ‘피사의 사탑’이다. 역설적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밀린 도시가 그래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종탑이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기적이란 인간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현상을 말한다. 똑바로 서 있는 것보다 기울어진 채 불안하게 서 있어서 오히려 더 매력적인 이 종탑 때문에 이곳을 ‘기적의 광장’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중세의 도시 성벽 성문을 통해서 본 기적의 광장. 대성당과 기울어진 종탑이 보인다. / 사진:정태남
이 종탑은 총 8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높이 약 56미터, 지름 15.5미터이며, 수직축에 대해 약 4도 기울어져 있으며, 기초 깊이는 3미터다. 종탑 입구에 붙어 있는 명판에는 1173년 8월 9일에 착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누가 설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보난노 피사노(Bonanno Pisano)가 세웠다는 설이 있으나 세례당과 디자인상 유사점이 많기 때문에 당시 세례당을 세웠던 디오티살비(Diotisalvi)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 종탑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기울어진 채 서 있을까?

이 종탑은 3층이 세워지고 나서 4층 공사가 진행될 때쯤, 마치 사양길에 접어든 피사의 운명을 점치듯, 지반이 가라앉으면서 서서히 기우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됐다. 그 후 1세기가 지난 1275년에 공사가 재개되었는데 이때 마치 중력의 법칙에 도전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기울어진 채 그대로 세우기로 했다. 하지만 당시 건축을 담당한 시모네 피사노와 조반니 피사노는 5, 6, 7층을 올리면서 구조적 안정을 위해 조금 덜 기울어지게 했다. 그냥 눈으로 보면 거의 감지할 수 없지만 자세히 보면 종탑의 중간쯤에 기울어진 각도가 다름을 알 수 있다. 그 후 다시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 일곱 개 종이 설치될 최상층은 가능한 수직에 가깝게 세워졌다. 이리하여 이 종탑은 거의 200년이 지난 1372년에 완공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 종탑은 어쩔 수 없이 애초부터 의도적으로 기울어지게 세웠던 셈이다.


▎피사 시내를 흐르는 아르노강. 오른쪽에 보이는 산타 마리아 델라 스피나(가시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면류관 가시 하나가 보존되어 있었다. / 사진:정태남


근대과학의 선구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아버지


▎기울어진 종탑. 기울어지는 해상공화국 피사의 국운을 암시라도 하듯 공사 초기에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약 200년 후에 기울어진 채 완공됐다. / 사진:정태남
피사와 가장 관계 깊은 인물은 단연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다. 그는 사탑 위에 올라가서 물체 자유낙하 실험을 했고, 대성당 안에서는 길게 늘어뜨린 커다란 샹들리에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추의 진동이론을 정립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그의 제자가 나중에 그럴싸하게 기록한 것인데 진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피사에서 태어났고 피사대학에서 공부했으며, 학생들을 가르쳤던 갈릴레이는 이론과 실험을 중요시한 근대과학의 선구자였다. 그런데 그의 실험정신은 당시 유명한 음악가이자 음악이론가였던 아버지 빈첸초 갈릴레이(Vincenzo Galilei: 1520~1591)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었을까? 피렌체 근교 태생의 빈첸초 갈릴레이는 피사의 귀족 집안 규수와 결혼하여 아들을 일곱 낳았는데 장남이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다.

빈첸초 갈릴레이는 르네상스 음악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이론과 실험을 병행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한 음악가였다. 옛날부터 음악이론이란 화성이나 음정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었으니, 현의 길이 비율이 어떠해야 조화로운 음을 얻을 수 있으며, 어떻게 1옥타브를 나눌 것인가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는 현의 장력과 음정 간의 관계를 알기 위하여 현 끝에 무게가 다른 추를 달아 음정의 변화를 실험하기도 했다. 그가 이런 실험에 몰두하고 있을 때, 아들이 곁에서 그를 도와주었을 것이다.


▎대성당 내부의 샹들리에. 샹들리에가 흔들리는 것을 본 갈릴레이가 추의 진동이론을 정립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 사진:정태남


캄포산토와 ‘죽음의 승리’


▎완벽하게 보존된 중세의 도시 성벽과 이에 어울리는 산뜻한 디자인의 노점 키오스크. / 사진:정태남
기적의 광장에서 관광객의 발길이 비교적 뜸한 곳은 ‘거룩한 뜰’이란 뜻의 캄포산토(Camposanto)묘지다. 좌우로 길게 뻗은 이 간결한 묘지 건축은 대성당과 세례당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데, 1200년대 십자군 전쟁에 참전한 피사 해군이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에서 가져온 흙을 이곳에 깔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1330년대에 그려진 벽화 ‘죽음의 승리’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맞아 많이 훼손되었지만, 죽음은 사냥에서 돌아오는 화려한 옷차림의 남녀와 기사들을 짓밟으려 하고, 천사는 구원받은 자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고, 악마는 죄지은 자들을 불 속에 던져 넣는 장면이 어렴풋이 보인다. 이 벽화는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신의 자비를 구하는 인간의 모습이 담긴 13세기 중반의 중세 성가 ‘진노의 날’을 그대로 형상화한 듯하다. 1838년부터 1839년에 걸쳐 이탈리아를 순례하던 대음악가 프란츠 리스트는 이 벽화를 보고 깊은 영감을 받아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로 그린 ‘벽화’를 구상하게 된다. 이리하여 탄생한 곡이 [죽음의 춤]이다. 이 곡은 악마적인 힘과 서정적인 매력뿐 아니라, 강력한 표현과 극적인 박력도 갖추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마치 죽음과 투쟁하는 삶의 모습을 오케스트라와 피아노를 대비시켜 극적으로 묘사한 듯하다.


▎대성당 외부와 세례당. 재료와 디자인 요소들이 통일되어 있다. / 사진:정태남
캄포산토는 피사의 유명한 역사적인 인물들이 묻혀 있는 곳인데, 이곳을 거닐며 명상하던 리스트는 피사가 낳은 가장 위대한 인물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묘소가 이곳에 없다는 사실에 의아해하지 않았을까?

이탈리아어로 ‘갈릴레오’란 ‘갈릴리 사람’이란 뜻이고 ‘갈릴레이’는 복수형이니 그의 이름은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셈이다. 하지만 그는 죽어서 이곳에 묻히지 못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식으로 장례가 치러지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고수했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와 어긋난다는 이유로 교황청으로부터 미움을 산 것이다. 로마에 소환당하여 서슬이 퍼런 종교 재판소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그는 1633년부터 피렌체 근교에서 가택 연금을 당한 상태에서 1642년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그가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사과’를 받은 것은 1992년이었다. 그러니까 죽은 지 자그마치 350년 만이었으니, 늦게나마 ‘죽음의 승리’를 쟁취한 것일까? 고개가 갸우뚱해질 뿐이다. 기울어진 종탑처럼.


▎세례당(왼쪽)과 대성당(오른쪽) 사이 좌우로 길쭉한 건물이 캄포산토 묘지다. 피사의 유명인들이 묻힌 곳이지만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묘소는 없다. / 사진:정태남


※ 정태남은…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201807호 (2018.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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