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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의 ‘세계의 컬렉터’] 정신분석학자 마크 제게르스(Marc Segers) 

심리치료와 예술의 공통분모 

박은주 전시 기획자
벨기에 브뤼셀의 정신분석학자이며 심리치료사인 마크 제게르스는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한 모범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마크에게 숨 쉬는 것만큼 쉬운 것은 공부였다. 의사가 된 후 어느 날 학회에 참석한 그는 처음 발을 들였던 갤러리에서 한 그림에 매료되었다. 학회가 끝날 때까지 온통 그 작품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의 컬렉션은 그렇게 시작됐다.

▎마크가 크리스티안에게 선물한 작품은 거실 중앙에 있다. 오른쪽은 쥴리 메르튜(Julie Mehretu) 드로잉 왼쪽은 프랑크 니치(Frank Nitsche) 페인팅. / 사진:Photo by Bernard Coutant
문학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던 그는 진로를 이과로 선택했고 삶을 의술에 헌신하기로 결정했다. 브뤼셀 자유대학교(université libre de bruxelles)에서 의학공부 7년, 정신의학 전문분야 5년, 총 12년의 의과대학 과정을 마쳤다. 전문의가 되기 위한 12년의 과정은 그야말로 연구에만 몰두했던 시기였다. 마크는 여러 분야를 인턴으로 연수하면서 정신적인 치유를 하는 학문인 정신의학에 본능적으로 끌렸다. 그리고 정신의학을 통해 환자들에게 심리치료를 하면서 정신분석학 전문의가 되었다. 자신의 병원을 개업한 후, 환자들에게 마크가 처방해주는 유일한 치료 도구는 단어의 연결인 문장, 즉 ‘말’뿐이다. 치료는 상담을 하면 이뤄지기 때문이다.

아내는 정신지체 아동 특수학교 교사


▎거실의 케이트 셰퍼드(Kate Shepherd) 작품(창문 왼쪽 붉은 페인팅). / 사진:Photo by Bernard Coutant
아내인 크리스티안느(Christiane)는 6세부터 12세까지의 정신지체 아동들을 돌보는 특수학교 교사로 50세까지 일했다. 이후 정신지체 아동들의 지적 계발을 도모하는 연구 활동과 더불어 17개 특수학교 현장을 방문하면서 연구 결과를 알려주고 그 현장에서 이뤄지는 교육에 반영되도록 자문했다. 몇 년 전부터 크리스티안은 성인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24시간 상담센터(centre d’ecoute)에서 전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21세기, 성인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의 원인은 ‘제대로 말할 줄 모르고,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그 사람 앞에서 마음을 여는 것이고, 이때 자신의 기준에 맞춰 조언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 곁에 있는 부모와 같다. 크리스티안은 평균 15명과 통화하는데 한 사람당 최대 20분을 초과할 수 없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말하기의 필요성을 느낀다. 마크는 말로 환자를 치유하고 크리스티안은 말을 들어줌으로써 고통받는 현대인의 동반자가 되어주고 있다.

조부모까지 통틀어봐도 마크의 가족 중 수집가는 없었다. 예술은 단 한 번도 가족들의 삶에 들어와 자리를 갖지 못했었다. 마크는 의사가 된 후 어느 날 학회에 가게 되었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비를 피하기 위해 발길을 멈추고 어떤 건물 앞에 잠시 서 있게 되었다. 소나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동안 불현듯 갤러리가 눈에 들어왔다. 난생처음 발을 들였던 갤러리에서 한 그림에 매료되었는데 학회가 끝날 때까지 온통 그 작품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결국 회의가 끝나자마자 갤러리에 들러 그 작품을 구매했다. 30년 전 폭풍우 속에서 마크가 구입했던 작품은 1250유로의 가치를 지녔었다. 그것이 마크가 운명적으로 구입한 첫 소장품이었다. 그러고 나서 한눈에 홀딱 반해서 구매하는 작품의 수는 늘어났고 점차 강박적으로 구입하게 되었다. 그 상황에 처할 때마다 작품을 사지 않고서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해소가 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르롱 갤러리에서 구입했던 케이트 셰퍼드의 작품은 3만5000달러였는데 그 비용은 은퇴 후를 대비해 저축한 자금이었다. 작품을 구매한 날, 마크는 아내 크리스티안에게 “아트 컬렉션 때문에 결국은 망할 것 같다”는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으며 밤잠을 설쳤다. 마크는 첫 작품을 구매했던 그 당시처럼 한번 작품에 빠지면 강렬하게 갖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던 중 새로운 컬렉터 그룹을 만드는 티에리 랑보에게 회원이 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티에리는 이미 10년 동안 [Chablis 샤블리] 컬렉터 클럽의 회원이었었다. 평론가 피에르스텍스의 조언으로 10년 동안 컬렉션을 하는 벨기에 컬렉터 그룹[네오스 NEOS]의 회원이 되는 데는 큰 자금이 필요하지 않았다. 네오스는 마크에게 좀 더 이성과 지성이 동반된 컬렉션에 대한 경험을 제공했다. 피에르 스텍스는 10년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마크의 시야를 열어준 멘토이자 인생의 스승이었다. 바닷가 모래알 속에서 진주를 찾는 것처럼, 광활한 컨템퍼러리 아트 분야에서 훌륭한 작가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피에르가 선별한 작가들을 소개 받고, 그 작가들이 왜 훌륭한지에 관한 강연을 듣는 것은 매우 흥미로웠다. 마크는 피에르 스텍스를 만나기 전에는 그의 흥미를 끌거나 마음을 빼앗는 작품만 구매했다. 그러나 아트 컨설턴트인 피에르를 만난 뒤 과거의 어떤 작가가 현재 생존 작가들과 어떤 내적 관계성을 맺고 있으며, 오늘날 작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지 알아볼 수 있는 지적인 힘을 길러나갈 수 있었다. 피에르의 조언 덕분에 구매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역량도 키울 수 있었다.

마크는 세 가지 방식으로 작품을 수집했다. 첫째 네오스 그룹 회원 자격으로, 둘째 네오스 컬렉터 그룹이 선별한 작가 목록 가운데서 동일 작가의 작품을 골라 구매해 개인 컬렉션을 구성한다. 예를 들어 토니 크랙, 빔 델보예, 카일리앙 양, 황창하, 프랑크 니취, 크리스토퍼 울, 줄리 머레투, 마크 데그랑셩, 아담 제인스, 마이클 델루치아, 로버트 슈에이몽, 치하루 시오타, 로빈 로드, 요린드 보이트 등이다. 셋째 네오스 컬렉터 그룹과 별개로 아트 컨설턴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스스로 선택한 작가의 작품을 구매한다. 마크가 누구의 조언도 받지 않고 스스로 연구한 결과로 구매한 케이트 셰퍼드의 작품에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끼는 이유다.

피에르 스텍스 사후 네오스 컬렉터 클럽 계약 10년이 만료되자 그 아쉬움은 여전히 남았다. 그래서 절친한 친구, 베르나와 부인 이자벨과 함께 두 부부가 새롭게 공동으로 아트 컬렉션을 하기로 했다. 작품을 구매하면 네 사람 소유가 되며 작품들은 두 집을 오가며 6개월에 한 번씩 순회한다. 네 사람은 공동의 작품을 구입하기 위해 스위스와 홍콩 바젤, 파리 피악, 아트 브뤼셀 등 아트 페어를 함께 방문하고 현장에서 구매를 결정한다.

작가의 내적 관계성 찾아가는 힘


▎침실에 있는 모세카와 랑가(Moshekwa Langa) 페인팅.
이러한 아트 컬렉션 과정은 그 자체로 마크의 삶에 훌륭한 도전이 됐다. 컬렉션을 할 때마다 짜릿한 모험가로서의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엔 1년에 한두 번 박물관에 가서 마크가 이미 알고 있는 유명한 작품만 둘러보곤 했는데, 마치 산책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트 컬렉션을 통해 예술사에 더욱더 관심을 갖게 되면서 박물관에 가서 많은 작품을 둘러보기보다 특별한 몇몇 작품만 심층적으로 살펴보는 습관으로 바뀌었다. 마크는 피에르 스텍스가 존경하던 질 들뢰즈(1925~1995)의 철학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고전예술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 컨템퍼러리 아트에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예술은 음악, 연극, 문학, 뮤지컬 가운데 하나지만, 문화의 일반 영역을 초월하는 또 다른 영역이기도 하다. 아트 컬렉터가 되기 전부터 마크는 크리스티안과 함께 오페라하우스의 정회원이었고 컨템퍼러리 음악에 열광했다. 자전거, 스키, 달리기,수영 등 스포츠는 일상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바캉스 때마다 산과 바다, 사막 여행을 다녀왔다. 이처럼 문화와 스포츠를 즐겼던 경험은 아트 컬렉션의 토대가 되었다. 문화 활동은 또 다른 예술이기 때문이다.

아트 컬렉션은 마크에게 단순한 기쁨이나 쾌락을 넘어서는 주이상스(Jouissance)와 마주하게 한다. 살아 있는 한 결코 채워지지 않는 영원한 결핍을 메우려는 만남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런 상태는 깊은 차원에서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감정이며, 개개인의 고유한 체험이다. 각자의 결핍과 욕망이 다르기 때문이다. 컬렉터는 늘 다른 작품들을 보충하고 보완하면서 더 많은 것을 갈망한다. 외부인의 시각에서는 강박적으로 작품을 구매하는 사람으로 비춰진다.


▎왼쪽 로버트 슈에이몽(Robert Suermondt) 페인팅, 오른쪽 요리스 반 드 모르텔(Joris Van de Moortel) 설치작품. / 사진:Photo by Bernard Coutant
종종 컬렉터들을 바라볼 때, 내면적으로 결핍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결핍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 컬렉터들의 내면에만 존재하는 감정이 아니다. 만약 인간이 결핍을 느끼지 않으면,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핍 증상이 없다면 완전히 우울증에 빠진다. 결핍으로 인해 인간은 무언가를 욕망하게 된다. 예컨대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다면 그리움을 느끼게 된다. 이 그리움은 결국 결핍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그리움이 피어날수록 상대방을 더 사랑하게 되고 더 보고 싶게 된다. 즉 마크에게 아트 컬렉션은 사랑이라는 인간의 감정과 연관된 행위이며, 인간의 복합적인 감정형식을 수반하는 취향이다.

30여 년의 컬렉션 경험을 이어가는 마크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향후 이 작품의 가치가 상승할 것인가가 아니다. 작품을 구입하기 전 매일 연구하고 감정적, 경제적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최종적으로 구입한 작품을 집에 들여왔을 때 집에서 이 작품을 바라보지 않는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작품을 구입하기 전에 더욱더 연구하고 숙고한다. 다행히 그의 집에서는 지금까지 구매 후 후회한 작품은 한 점도 없으며, 그는 늘 작품과 함께하는 충만한 삶에 행복해한다. 그리고 아트 컬렉션 때문에 망할 것이라고 걱정했지만 지금까지 망하지 않고 잘 살고 있다.

작품 구입 때 평소 감상할 수 있을지 숙고


▎마크가 크리스티안에게 선물한 작품은 거실 중앙에 있다. 왼쪽 황창하 페인팅, 오른쪽 토니 크랙 (Tony Cragg) 조각.
마크에게 소장 작품들은 삶의 분신이기에 언제나 그것들을 봐야 한다. 종종 ‘아트 컬렉션은 컬렉터의 거울’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그의 아내인 크리스티안에게 선물한 토니 크랙의 조각은 마치 세 딸을 염두에 둔 듯 세 개가 하나로 완성된 형상이다. 마크에게 컬렉션은 컬렉터를 반영하는 거울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반영한다는 것(reflect)은 이미지에 그칠 뿐이며, 그 이미지는 평면적이다. 마크에게 아트 컬렉션은 이미지의 표면을 넘어선다. 오히려 그의 내면 깊숙한 곳과 관련된다.

마크에게 중요한 예술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과 세계를 보여주며, 일상생활에서 경험할 수 없는 또 다른 현실을 향한 열린 문, 열린 구멍을 제공해주는 작가들이다. 어머니에게는 카일리앙 양, 딸들에게는 로버트 슈에이몽, 조르주 루스, 손자들에게는 에로와 피에르 알레신스키의 에디션 작품들을 선물했다. 자신의 열정을 다른 가족들과 공유하는 것도 큰 기쁨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방문하는 갤러리에서 마크는 카탈로그를 구해 작품 세계를 발견하면서 동시에 평론에 주의한다. 평론을 접할수록 스스로의 언어능력도 세심해진다. 그의 세심한 언어 구사 능력은 환자들에게 돌아가 치유의 힘을 키워준다. 여전히 마크는 혼자만의 결정으로 폴 베르지에, 이자벨 봉종, 슈 유 청 등 작품들을 구입하며 치유와 연구자의 길을 걷고 있다.

※ 박은주는…박은주는 1997년부터 파리에서 거주, 활동하고 있다. 파리의 예술사 국립 에콜(GRETA)에서 예술사를, IESA(LA GRANDE ECOLE DES METIERS DE LA CULTURE ET DU MARCHE DE L’ART)에서 미술시장과 컨템퍼러리 아트를 전공했다. 파리 드루오 경매장(Drouot)과 여러 갤러리에서 현장 경험을 쌓으며 유럽의 저명한 컨설턴트들의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2008년부터 서울과 파리에서 전시 기획자로 활동하는 한편 유럽 예술가들의 에이전트도 겸하고 있다. 2010년부터 아트 프라이스 등 예술 잡지의 저널리스트로서 예술가와 전시 평론을 이어오고 있다. 박은주는 한국과 유럽 컬렉터들의 기호를 살펴 작품을 선별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201807호 (2018.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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