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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재 요즈마그룹 한국지사 대표 

“한국 스타트업은 자기가 ‘백조’인 줄 모른다” 

김영문 기자
이젠 한국 대기업마저 이견이 없다. 선순환하는 창업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인수합병(M&A)이 활성화돼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다. 늦었지만 시작이 반이다. 노련한 선배 격인 이스라엘 벤처캐피털 요즈마그룹도 이런 한국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원재 요즈마그룹 한국지사 대표는 “한국에서 벤처투자 펀드를 조성해 바이오뿐 아니라 ICT와 4차산업 분야 사업에도 투자를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타들어가는 한국 블록체인 업계에 동아줄을 내려준 곳이 있다. 이스라엘 벤처 분야 모태펀드인 ‘요즈마(히브리어로 ‘창의’, ‘시작’이라는 뜻)펀드’다. 지난 5월 29일 한국에서 이갈 에를리히 요즈마그룹 회장, 이원재 요즈마그룹 한국지사 대표, 이정희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 대표가 손을 맞잡고 블록체인 사업 육성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한국 당국이 블록체인 규제 수위를 두고 갈팡질팡하는 사이 요즈마그룹은 벌써 블록체인 분야에 투자를 결정했다. 펀드부터 조성하고, 이들이 보유한 막강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한국 블록체인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을 적극 알릴 셈이다.

말뿐이 아니다. 2014년 요즈마가 한국 대구, 천안, 판교에 세운 벤처 육성·협업 공간 ‘요즈마 캠퍼스’에 입주한 10여 개 스타트업의 인큐베이팅을 딜로이트 스타트업 자문그룹에 맡겼다. 이 자문그룹엔 블록체인 전문가 800여 명이 합류해 블록체인 기술을 실제 산업화하는 데 주력할 예정이다. 벤처 투자로 미국 나스닥에 상장한 경험을 살려 글로벌 진출의 산파 역할도 자처했다. 게다가 곧 블록체인 산업의 메카로 불리는 싱가포르에 블록체인 펀드를 세워 관련 한국 스타트업도 적극적으로 도와줄 채비 중이다.

요즈마그룹의 행보에 주목하는 건 블록체인 때문만은 아니다. 이 그룹은 이스라엘을 세계 최고 수준의 ‘창업국가(Startup-Nation)’ 반열에 올려놓기도 했다. 1993년 이스라엘 정부와 민간 기업이 벤처 창업 지원을 위해 4:6 비율로 공동 설립한 모태펀드. 정부가 1억 달러, 해외 벤처캐피털(이하 VC)이 1억6500만 달러를 투입해 지난해 6월 기준으로 자산 규모 40억 달러로 성장했다. 1990년대 중동 분쟁에 바람 잘 날 없던 이스라엘은 요즈마그룹 덕분에 미국 나스닥 시장을 뒤흔드는 큰손이 됐다.

그런 이들의 발걸음이 유독 빨라진 곳이 한국이다. 왜일까. 불록체인 때문일까. 7월 12일 서울시 강남구에 있는 공유 오피스 ‘현대카드 스튜디오 블랙’에서 이원재 요즈마그룹 한국지사 대표를 만났다. 히브리어를 완벽하게 구사해 이갈 에를리히 회장의 생각을 가장 잘 안다는 해외 지사장으로 꼽히는 그에게 물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요즈마그룹이 한국에 주목하는 이유가 뭔가?

한국은 연구개발(R&D) 투자가 세계적인 수준에 이른 나라다. 하지만 아웃풋은 신기하게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이갈 회장은 기술 사업화, 해외 진출 역량이 떨어져서라고 판단했다. 크게 이 두 역량을 갖추면 한국 스타트업은 언제든 글로벌 기업이 될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이스라엘은 스타트업 투자 성공 사례 덕분에 전 세계 VC가 몰려들었고 격전지가 됐다. 인수합병(M&A) 매물이 나올라치면 그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반면 한국 스타트업은 여전히 놀라운 역량을 보여주고 있으며 저평가돼 있다.

한국 스타트업이 그렇게 뛰어난가?

페이스북은 ‘싸이월드’, 유튜브는 ‘판도라 TV’, 스카이프는 ‘다이얼패드’, 아이팟은 ‘아이리버’. 현재 미국 기업이 세계를 주름잡는 이들 서비스와 제품은 모두 한국에서 먼저 나왔다. 검색을 무기로 한 네이버도 구글보다 1년 먼저 나왔다. 요즈마그룹 업무로 처음 한국땅을 밟았을 때 시장 조사부터 했다. 한국에는 어떤 기업이 있는지 조사하고 목록화해 본사에 보고했다. 목록을 본 이갈 회장은 깜짝 놀라며 대체 한국은 어떤 나라냐며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스라엘 산업통상노동부 수석과학관을 역임한 이갈 회장은 기술 이해도가 뛰어나다. 기업 목록과 서비스 내용만 봐도 단방에 어떤 기술이 있을 것이란 얘기부터 꺼내는 분이다. 한번은 내부에서 기술평가를 한 적이 있었는데 카카오에 600억원에 팔린 모바일 내비게이션 서비스 ‘김기사’가 구글에 1조원에 넘어간 같은 서비스 업체 이스라엘 ‘웨이즈’보다 뛰어났다. 한국은 다이아몬드 원석이 가득한 나라인 셈이다.

한국 벤처기업, 왜 글로벌 VC들이 몰라주나?


한국 스타트업의 기술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런데 왜 투자를 못 받았을까. 시작점이 한국이었고, 사업을 펼칠 시장도 한국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해외에서 출발했으면 기업가치를 두고 글로벌 VC들이 앞다퉈 1조원 이상을 불렀을지도 모른다. 이갈 회장은 한국 상황을 두고 『이솝 이야기』에 나오는 ‘미운오리새끼’ 이야기를 자주 꺼낸다. 다른 오리에게 미움을 받지만, 결국 태생이 백조였던 ‘무늬만 오리’ 이야기다. 한국 스타트업이나 중견 벤처기업이 자신이 ‘백조’인 줄 모른다는 얘기다. 글로벌 시장에 나갈 생각보단 한국 시장에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운다. 앞서 말한 한국 기업은 모두 한국 시장만 바라봤다. 게다가 자본력 있는 대기업조차 인수합병에 인색하다. 돈을 주고 기업을 산다는 게 마치 직무유기를 한다는 듯한 걱정이 만연해 있다. 결국 답은 글로벌화인데도 말이다.

이스라엘이 창업 강국이 된 비결이 뭔가?

물론 글로벌화다. 하지만 글로벌로 진출할 수 있었던 토대가 탄탄했다. 이스라엘엔 300여 개가 넘는 글로벌 기업의 연구개발센터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생겼을 리 없다. 이스라엘엔 히브리대학, 텔아비브대학, 하이파대학, 와이즈만(바이츠만) 연구소, 바일란대학 등 유수의 대학이 세계적인 연구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세계적인 군사기술도 막강한 연구 인력을 갖춘 대학에서 나온다. 이렇게 파생된 기술이 벤처로 흘러든 게 각종 첨단 보안기술이다. 세계 최초로 온라인 방화벽인 ‘파이어월’ 개념도 이스라엘 벤처에서 나왔다. 인수합병도 쉽다. 수많은 벤처가 동네 상점처럼 즐비하고 지분, 기술, 인력 모든 걸 사고팔 수 있다. 투자 회수 기간이 평균 3.98년에 불과한 것도 이런 환경 덕분이다.

이스라엘에 연구소가 많은 이유도 비슷한가?

글로벌 기업이 이스라엘 벤처기업의 기술을 보고 인수합병 협상을 하러 왔다. 와서 보니 관심 있던 기술뿐만 아니라 그 인력이 해낼 수 있는 잠재력이 대단해 보인 거다. 그 회사를 인수해 고스란히 실리콘밸리로 가져가는 것보다 그냥 연구개발센터라는 명목으로 그 회사를 이스라엘에 두고 연구개발을 시키는 거다. 실제로 미국 글로벌 기업의 상당수 신기술이 이스라엘 연구개발센터에서 무수히 쏟아져 나온다.

투자 회수 기간이 평균 3.98년에 불과


▎세계적인 이스라엘 벤처캐피털인 요즈마그룹을 이끄는 이갈 에를리히 회장.
요즈마그룹이 투자에 나설 때 따져보는 기준이 있나?

총 네 가지다. 첫째 기술, 둘째 국제특허(PCT), 셋째 사람(CEO), 마지막은 ‘글로벌 기술 트렌드와의 조합’이다. 요즈마만의 노하우는 네 번째 요소에 담겨 있다. 돈이 있다고 무작정 투자하는 게 아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사줄 곳이나 써줄 사람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1990년 대부터 30년 가까이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오라클, 인텔 등과 인수합병 협상을 하면서 이들에게 필요한 기술이나 인력, 회사가 뭔지 알 수 있게 됐다. 수십 년간 쌓은 경험과 노하우가 투자 적중도를 높이는 셈이다. 니즈를 제대로 알고 요즈마가 가진 인프라를 투입해 경쟁력 있게 다듬으면 1~2년도 안 돼 시장에 팔려 나간다.

그럼 한국에서 본격적인 기업 투자에 나서나?

요즈마는 한번 들어오면 투자 시계열을 길게 잡는다. 주위에선 자본력으로 벤처기업 주식을 사서 척척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처럼 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실상 기업을 운영하는 것부터 글로벌 시장에서 어떤 니즈에 걸맞게 사업을 꾸려가야 할지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야 한다. 그래서 떠들썩한 인수합병 발표보다 요즈마 캠퍼스부터 세웠다. 벤처사관학교 같은 곳이다. 투자제안서를 쓰는 방법부터 IR(기업설명), 마케팅, 인사, 법무 등 사업화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원한다. 이렇게 몇 년 갈고닦으니 해외 VC들이 관심을 둔다. 그래서 요즈마는 ‘VC는 성장을 지원하는 액셀러레이션이 거의 전부’라고 본다. 사고팔아 얻는 차익만 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 블록체인 업계 투자·지원 소식을 들었다. 한국에선 우려가 더 많다.

이갈 회장이 경험 한 토막을 들려줬다. 초창기 증권거래소 얘기였다. 당시 주식을 매매하려면 거래소 판매대에서 돈을 주면 종이 한 장에 주식 몇 주를 적어 건네주는 게 전부였고, 주변에서 모두 사기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갈 회장은 블록체인을 보면서 “부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점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찾아오지만, 눈앞에 두고도 놓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어떤 분야에서 거대한 자본력이 일어나면 사회 전반에 걸쳐 재투자가 이뤄지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어려운 말 같지만, 지금 우리는 수많은 규제가 탄생하고 다듬어지면서 전 세계인이 주식에 투자해 글로벌 기업의 주주가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특히 한국 블록체인 업계에서 탄생하는 기술과 아이디어에 주목한다. 요즈마는 기술 판단에 밝다.

어떻게 투자할 예정인가?


▎이스라엘에선 매년 1400개의 스타트업이 창업한다. 기술력을 앞세운 이스라엘 스타트업에 전 세계 대기업이 눈독을 들인다.
당장 암호화폐를 사서 차액을 남기려는 게 아니다. 어차피 요즈마가 보기엔 이들도 기술벤처다. 기술이 성장 가능성이 있고, 글로벌 시장에 먹힐 수 있다면 글로벌 네트워크는 물론 전문 인력을 지원해 번듯한 회사 형태로 키우는 데 주력할 것이다. 우선 황환익 요즈마펀드 벤처파트너 이사와 싱가포르에 블록체인 펀드를 조성해 투자에 나설 예정이다. 여기서 요즈마는 자본보다 전문 인력과 노하우를 집중적으로 투하해 ‘기술 사업화’에 주력할 생각이다.

블록체인 분야 외 실제 한국에서 투자한 벤처가 있나?

신약 개발연구 전문기업 ‘비씨켐’이 있다. 요즈마 펀드의 한국 첫 투자회사인 비씨켐은 수년간 신약 개발 및 라이선싱 경험이 있는 경영진과 연구진이 포진해 있다. 세 번째 기준인 사람을 본 것이다. 녹십자를 비롯해 글로벌 제약사에서 길게는 수십 년간 재직한 임원이 다시 뭉쳤다. 그들을 만났기에 투자가 이뤄질 수 있었다. 이들의 열정과 글로벌 바이오 제약사 네트워크, 라이선싱 경험이 만나면 새로운 글로벌 기업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달엔 미래SCI와 손잡고 합작법인 요즈마바이오사이언스홀딩스를 설립했다. 합작법인은 세계 5대 기초과학 연구소인 이스라엘 와이즈만연구소의 기술을 한국에 이전하고, 한국 바이오 스타트업 기업 투자에 나설 예정이다.

이원재 대표는 인터뷰 내내 한국과 이스라엘이 닮은 점이 많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에서 누구보다 이스라엘을 잘 안다고 자부한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히브리대로 비교종교학 박사 공부를 떠난 어머니 밑에서 이스라엘을 보고 자란 덕분이다.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친구를 사귀었고, 이들 중 일부를 잃기도 했다. 분쟁이 끊이지 않는 중동 황무지에서 이스라엘이 세계적인 창업국으로 발돋움하는 과정도 지켜봤다.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이스라엘로 돌아가 에후드 올메르트 전 이스라엘 총리실에서 중동 정세를 크게 그려보기도 했다. 이제 그는 한국에서 VC 업무를 하며 이스라엘에서 겪은 경험 보따리를 풀고자 한다. 인터뷰를 마치며 이원재 요즈마그룹 한국법인 대표는 한국 벤처업계를 향해 한마디 하고 싶다고 했다.

“천하의 요즈마그룹도 혁신적인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진 기업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건 벤처기업을 일으켜보겠다는 그들의 의지죠. 이갈 회장도 그들의 땀과 열정이 곧 다이아몬드 원석이라고 강조합니다. 다이아몬드를 가공하는 기술은 이스라엘이 세계 최고인 거 아시죠? 요즈마가 다듬으면 한국은 이스라엘보다 더 강한 세계적인 창업국으로 올라설 겁니다.”

- 김영문 기자 ymk0806@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

201808호 (2018.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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