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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혁신을 일군 아시아의 기업인(19) 

필리핀 SM인베스트먼츠 시치청 명예회장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필리핀 최대 그룹인 SM인베스트먼츠의 시치청 명예회장은 130만 중국계 필리핀인을 대표하는 경영인이다. 영어권에서는 헨리 시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졌다. 슈마트 백화점과 슈퍼마켓을 핵심으로 하는 유통기업 SM몰스의 창업자다. 그는 지주회사인 SM프라임홀딩스를 설립해 거대 기업 제국을 관리한다.

시치청(施至成·94) 회장이 창업한 SM인베스트먼츠는 필리핀 최대 기업 집단이다. 2016년 기준 67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시 회장의 재산은 올해 3월 200억 달러로 평가되면서 2018년 포브스 세계부호 명단 52위에 올랐다. 포브스에 따르면 8월 그의 재산은 196억 달러로 평가된다. 필리핀에선 최고 부자로 자리매김하며 지난 10년간 매년 포브스의 필리핀 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왔다. 그의 사업은 유통산업을 기반으로 부동산·호텔·금융·광산·교육·보건의료 산업 등 광범위하다.

시 회장은 작게 시작해 크게 이룬 기업인이다. 부친이 가족기업으로 운영하던 작은 구멍가게에서 장사의 기초를 배웠다. 스스로 저축해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신발 가게로 창업한 그는 이 작은 가게를 필리핀 최대의 유통업체로 키워놓았다.

신발 가게 창업, 필리필 최대 유통기업으로 키워

그는 중국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친과 함께 필리핀으로 이주한 이민 1.5세대다. 그의 고향에 대해선 두 가지 설이 있다. 대만해협에 접한 중국 푸젠(福建)성 샤먼(廈門) 출신이라는 설이 그중 하나다. 샤먼은 중국의 오래된 무역항으로 청나라 때 교역으로 특히 번성했다. 샤먼은 대만이 차지하고 있는 진먼다오(金門島)를 바라보는 지역이기도 하다. 푸젠성 특산물인 우롱차(烏龍茶) 교역항으로 예로부터 이름 높았다. 우롱차는 중국 남부 지방 특산으로 반발효차다. 차를 완전히 발효하면 홍차가 되는데 반쯤 발효해 특유의 향과 맛을 내는 것이 우롱차다. 일본과 대만을 중심으로 인기가 높다.

또 다른 주장은 푸젠성 취안저우(泉州)의 진장(晉江)시 출신이라는 설이다. 취안저우는 지금도 중국 남부 농산물의 주요 수출항이며 도자기와 석재 가공 공예품의 주요 생산지다. 취안저우는 일찍이 송나라와 원나라 때 동남아와 인도, 중동 등지로 이어지는 바닷길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마르코 폴로(1254~1324)의 『동방견문록』(1300년경 출간)에 기록돼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무역항이다.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점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진장은 취안저우의 항구 지역이다. 원나라 시절 지금의 인도네시아 중심지인 자바섬까지 두 달, 인도 서남부 아라비아해 연안의 케랄라주 말라바르까지 넉 달, 걸프 지역 입구인 호르무즈 해협까지 200일이 걸렸다고 한다. 이렇게 열린 물길 덕분인지 현재 동남아시아 등에 거주하는 화교들 중에는 이곳 출신이 유난히 많다. 동남아 화교들의 고향인 셈이다.

푸젠성 주민은 지역 방언인 민난어(閩南語)를 사용한다. 민난어는 푸젠성과 서쪽으로 접한 광둥성 동부의 차오저우(潮州)에서 쓰는 차우저우어와 같은 갈래다. 취안저우와 차우저우는 중국에서도 술수 좋은 상인의 고장으로 이름 높으며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으로 퍼진 동남아 화교 상당수의 고향이다. 같은 고향 사람끼리 서로 돕는 공동체 정신으로도 잘 알려졌다. 취안저우시 안시(安溪)현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고산지대인 안시현은 중국 명차인 철관음(鐵觀音)의 산지로 유명하다. 철관음은 우롱차의 유명 브랜드로 한국에서도 이름 높다.

시 회장이 중국 푸젠성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만은 확실하다. 그의 부친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필리핀 마닐라로 이주해 노점상을 시작했다. 노점상은 곧 필리핀의 생활 구멍가게인 ‘사리사리(타갈로그어로 다양하다는 말에서 기원한 전통 잡화가게)’로 발전했다. 담배와 사탕, 주전부리를 파는 가게였다.

시 회장은 12살 때인 1936년 필리핀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부친의 초청으로 마닐라로 건너갔다. 하지만 불과 5년 뒤인 1941년 전쟁을 겪어야 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은 미국의 진주만과 영국령 말라야를 공격한 바로 그날 미국의 극동지역 근거지였던 필리핀을 침공했다. 이듬해 5월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미군을 물리치고 승리한 일본군은 마닐라를 점령해 1943년까지 주둔했다.

필리핀 최초 현대식 단독 백화점 ‘SM치아포’ 개점

전쟁으로 물자 부족에 시달리며 가게 운영에 어려움을 겼던 부친은 가게에 불까지 나자 실의에 빠져 일시 중국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시 회장은 마닐라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마닐라에 있는 필리핀 장제스학원(菲律濱中正學院)에서 중등학교 과정까지 다녔다. 이 학교는 중국계 필리핀인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오늘날 유치원부터 대학 과정까지 운영한다.

전쟁이 끝나고 이 학교를 마친 시 회장은 마닐라시의 웨스트삼팔로크 지역에 있는 파이스턴대학(FEU)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1928년 개교한 사립대학으로 행정학과 경영학이 유명하다. 11대 대통령 코라손 아키노(1933~2009)가 이 대학 출신이다. 필리핀 최대 식료품 제조업체인 산미겔의 최대 주주인 라몬 앙(64), 필리핀 2위 부호로 필리핀항공 최고 경영자인 루시오탄(중국어로 천용자이(陳永栽), 84) 등 중국계 필리핀인 기업인이 이 대학 출신이다. 루시오 탄은 시 회장과 동향이다. 필리핀 유청초 그룹을 창업하고 리살 상업은행을 운영했던 중국계 필리핀인 금융인 겸 기업인 알폰소 유청초(중국어로 양인린(楊應琳), 1923~2017)도 동문이다.

1950년 이 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시 회장은 아버지의 가게를 도우면서 받은 돈을 저축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장사 수완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닐라에서 반품되거나 계절이 지난 신발을 구해 다른 가게에 싼값에 넘기고 이윤을 얻었다. 먹고살기에 충분한 돈을 벌 수 있었지만 그의 야망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1955년부터는 당시 비행시간이 40시간이 넘는 미국 뉴욕에 물건을 주문해 필리핀의 가게에 넘겼다. 대담한 발상이었다. 돈이 제법 모이자 시 회장은 1956년 마닐라에 슈마트(Shoe Mart)라는 상호로 작은 신발 가게를 내고 드디어 자신의 장사를 시작했다. 슈마트의 약자가 SM으로 현재 그가 보유한 기업은 이 이름을 쓰고 있다.

그는 특유의 수완으로 신발가게에 손님을 끌어모았다. 가격이 싸고 구색이 다양한 것이 주무기였다. 게다가 세계 최첨단의 유행을 자랑하던 미국 뉴욕 멋쟁이들의 최신 트렌드를 그대로 반영한 뉴욕 제품까지 갖췄으니 경쟁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슈마트’ 약자 SM 기업 이름으로 사용


▎필리핀 수도 메트로 마닐라 도시인 케손 특별시에 있는 미리암대학에 자리 잡은 헨리 시 이노베이션 센터. / 사진:위키미디어
하지만 필리핀에서 중국계 필리핀인으로 사는 일은 쉽지 않았다. 특히 기업을 키우기에는 불리한 점이 많았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필리핀은 국내총생산(GDP)의 76%를 장악한 ‘코후앙코’ 가문들이 정치·경제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정치 왕조’ 또는 ‘정치 가문’으로 번역되는 ‘코후앙코’는 필리핀만의 독특한 정치 구조다. 유력 집안사람들이 특정 지역에서 지방자치 단체를 좌지우지하다가 중앙 정계에 진출해 상·하원 의원은 물론 심지어 대통령직에 도전하며 족벌 정치를 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이들은 자신의 지역에 튼튼한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정계에서 지속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공적이어야 할 정치가 사유화되고 ‘패밀리 비즈니스’로 변질된 것이다.

정치 왕조의 활동은 정계에 국한하지 않고 정치를 기반으로 필리핀의 다양한 사회·경제적 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경제 부문에서 대토지 또는 산업체, 지역 상권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독점적인 경제적 지위를 유지한다. 이런 경제적 기반은 정치적 기반의 바탕이 되고, 정치적 배경은 경제적 독점지위를 유지하는 힘이 되는 독특한 순환구조다. 이 때문에 이들은 정경유착을 넘어 정경 결합체의 성격을 지닌다. 이런 구조는 필연적으로 경제적 비효율과 부정부패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필리핀의 시민단체는 이를 두고 망국적인 고질병이라고 비난한다. 극심한 빈부격차는 물론 폭력적인 사회 분위기도 이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선거에서 승리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부정선거, 상대후보 매수에 심지어 살인극까지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비판론자들은 정치 왕조가 부정부패와 경제적 독점 등으로 필리핀의 경제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필리핀이 선거에서 선출한 대통령과 의회를 지닌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다수 국민이 아닌 소수 정치 가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올리가르히(러시아의 과두 재벌)’ 체제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많다. 민주주의 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민의는 전혀 반영되지 못하는 모순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에서 민주주의는 물론 공정경쟁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에 불과한 중국계 기업인은 어떤 사업을 하더라도 정경유착에 오랜 기득권을 가진 코후앙코와 경쟁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코후앙코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필리핀인들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부르짖으며 투쟁에 나섰던 ‘필리핀 혁명(독립투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필리핀에서는 ‘타갈로그 전쟁’으로 부르는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의 역사다. 필리핀인들은 1896년 무장 독립투쟁을 시작했지만 실패했다. 스페인 마드리드대학에 유학한 의사이자 작가인 호세 리살(1861~1896) 박사는 식민지 당국에 잡혀 1896년 마닐라에서 공개 총살됐다. 그가 처형당한 곳이 마닐라의 심장부인 리살 공원이다. 리살 박사는 사실 중국계다. 중국에서 이민 온 부친과 필리핀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필리핀에선 외국인과 필리핀인이 결혼해서 태어난 사람을 필리핀 메스티조라고 부른다. 리살은 메스티조에 해당한다. 그의 부친은 시 회장처럼 중국 푸젠성 진장 출신 상인의 후예다. 용기 있는 지식인 리살의 총살은 필리핀인들의 자각을 이끌었으며 더욱 거센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필리핀인들은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 상황에서 다시 봉기해 의회를 설립하고 헌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해 필리핀의 지배권을 얻은 미국이 독립에 반대해 필리핀인들은 게릴라전으로 들어갔다.

끈질긴 투쟁으로 1916년 자치를 인정받고, 1934년에는 ‘10년 뒤 독립’을 약속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점령으로 미뤄지기는 했지만 필리핀은 1946년 결국 독립을 쟁취했다.

이 과정에서 반스페인, 반미, 항일 독립운동에 참가한 인물이나 지도자를 돕던 부하, 또는 뒤를 이은 인물들이 정치 가문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힘으로 독립 국가가 되면서 투표권을 확보한 유권자들은 나라를 위해 일한 사람들이 독립된 나라에서 대통령과 의원, 주지사를 맡도록 투표했다. 문제는 이렇게 당선한 정치인들이 권력의 맛을 본 뒤 돌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자행하는 것은 물론 권력을 가족들에게 맡기면서 사유화하기 시작했다. 정치 가문은 결국 독립운동가 출신 기득권자들의 욕심이 만든 욕망의 정치체제인 셈이다.

“나는 아무런 배경도, 후원자도 없다”며 “당선하면 썩은 정치인과 공무원, 군을 모두 쓸어버리겠다”고 외친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대통령에 당선한 것도 이러한 코후앙코에 대한 국민의 반발에서 비롯한 것으로 분석된다.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필리핀의 빈곤층은 민주주의 가치보다 범죄로부터의 보호나 빈곤 탈출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SM재단 설립해 청년들 돕고 있어


▎필리핀 리살주에 SM프라임홀딩스가 처음으로 만든 SM 시티몰. / 사진:위키미디어
이런 상황에서 기업인으로 활동한 시 회장은 새로운 아이디어로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길 외에 별다른 수완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의 가장 큰 자산은 여전히 목이 말랐다는 점이다. 코후앙코가 지배하는 필리핀에서 스스로 기업을 키워보겠다는 그의 야망은 그칠 줄 몰랐다. 그는 유통업에 미래가 있다고 보고 새로운 시도를 했다. 1972년 11월 마닐라시 구시가지 중심지인 치아포에 ‘SM치아포’라는 이름의 할인 양판점을 열었다. 필리핀 최초로 모든 매장을 본사가 직영하는 현대식 단독 백화점이기도 하다.

1985년에는 대형쇼핑몰인 SM슈퍼몰을 세우는 등 그의 전진은 멈추지 않았다. 시 회장은 기본에 충실한 경영을 했다, 싸고 품질 좋은 상품을 목 좋은 곳에서 팔면 고객이 모이게 마련이다. 입지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선 원가를 줄이고 값을 낮출 수밖에 없다. 그는 이런 기본에 철저했다.

그는 인구밀도가 높은 필리핀 수도권에 이런 할인 양판점과 슈퍼마켓을 잇달아 개점하면서 작은 가게인 사리사리를 대신하는 유통혁명을 일궜다. 필리핀의 유통 전문기업 SM리테일의 시작이다. 이 기업의 본사는 현재 필리핀 수도권인 ‘메트로 마닐라’에 포함되는 인구 41만의 작은 도시 파사이시티에 자리 잡고 있다. 메트로 마닐라는 16개 도시로 이뤄진 광역 수도권 지역으로 전체 인구는 1300만 명에 육박한다. 인구 178만 명인 수도 ‘시티 오브 마닐라’와 인구 300만 명으로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옛 수도 케손시티를 포함한다. 시 회장은 필리핀의 경제 중심지인 마닐라 수도권에서 유통혁명으로 부를 일궜다.

유통 부문만 담당하는 SM리테일은 2016년 매출 2765억 페소(약 51억6900만 달러)와 순익 106억 페소(1억9800만 달러를 거뒀다. 유통 부문 지주회사로 1958년 설립한 SM프라임홀딩스는 오늘날 필리핀 최대의 유통업체로 자리 잡고 있다. 올해로 창업 60주년을 맞는 이 회사는 대형 쇼핑몰 70개, 유통 점포 2303개를 내고 있다. 대형 쇼핑몰 가운데 7개는 필리핀이 아닌 중국에 세웠다. 유통 점포는 SM슈퍼마켓 48개, SM하이퍼마켓 44개, 할인점 세이브모어 156개, 월터마트 39개, 알파마트점 210개, 전문점 1749개로 이뤄졌다. 필리핀은 물론 중국과 미국령 괌에도 점포를 열었다.

1999년 그는 마카티 비즈니스클럽에 의해 필리핀에서 가장 부유한 기업인으로 선정됐다. 이어 드라살대학에서 경영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가난하고 젊은 필리핀인을 돕기 위한 SM재단을 설립했다.

그는 노년에 접어든 다음에도 거대기업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서 계속 새로운 비즈니스를 이어갔다. 2005년 8월 그는 필리핀 최대 음식료 기업인 산미겔의 지분 11%를 확보하고 이를 그해 10월 6억8000만 달러를 받고 팔았다.

시 회장은 방코데오로(BDO)와 차이나뱅크를 소유한 금융인이기도 하다. 필리핀은 우리와 달리 금산분리 정책을 펴지 않는다. 시 회장은 2007년 자신이 이미 34%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던 PCI은행의 나머지 지분 66%도 매입했다. 그런 다음 당시 필리핀 서열 3위 은행이던 방코데오로와 합병을 성사시켰다. 이로써 그는 자산 170억 달러의 거대 은행을 탄생시켰다. 현재 방코데오로는 필리핀 제2위의 금융업체다. 80이 넘어 이룬 금융업 ‘빅뱅’이다. 나이는 그에게 숫자일 뿐이었다.

시 회장은 SM리테일을 포함한 부동산·쇼핑몰·소매업 전반을 관리하는 SM프라임홀딩스라는 지주회사를 두고 있다. 이를 포함한 시 회장이 보유한 방대한 자산은 최종 지주회사인 SM인베스트먼츠코퍼레이션(SMIC)이 관리한다. 1956년 시 회장이 차린 작은 가게가 필리핀에 유통혁명을 가져왔다. 2017년 SM인베스트먼츠 회장직에서 내려왔지만 명예회장으로서 계속 경영에 관여하고 있다. 노익장이 따로 없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로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 채인택은…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국제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201809호 (2018.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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