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남의 TRAVEL & CULTURE] 폴란드 바르샤바(Warszawa) 

쇼팽의 후예 피아니스트 수상 파데레프스키, 이곳에 잠들다 

글·사진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폴란드가 낳은 가장 위대한 인물 쇼팽은 폴란드 그 자체이기도 하다. 폴란드 출신으로 또 한 명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파데레프스키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조국의 파란만장한 운명을 지켜보면서 정치와 예술로 애국심을 불태운 위대하고도 고귀한 삶을 살았다. 폴란드는 올해 11월에 독립 100주년을 맞이하는데, 파데레프스키는 독립 폴란드 공화국의 초대 수상을 역임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복구된 바르샤바 구도심. 성 요한 대성당 지붕이 구도심의 지붕선 위로 솟아 있다. / 사진:정태남
내가 탄 비행기가 바르샤바의 쇼팽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공항을 나와 바르샤바 시내 중심으로 향하는데 쇼팽과 파데레프스키의 이름이 자꾸만 번갈아 가며 머리에 떠오른다. 바르샤바 시내 중심가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쇼팽의 성역’을 둘러보기 위해 우야즈두프(Ujazdow) 대로변에 있는 와지엔키(Łazienki) 공원으로 향한다. 이 공원은 워낙 방대하여 다 둘러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천천히 산책하고, 풀밭에 누워서 흘러가는 구름을 보거나, 야외 음악회가 있으면 귀를 기울이며 느긋한 삶을 즐긴다. 공원 한가운데에 있는 호수의 섬에는 과거 한때 폴란드의 화려한 시대를 증언하는 듯한 바로크 양식의 우아한 수상궁전과 수상극장이 있어 눈길을 끈다.


바르샤바의 아이콘, 쇼팽 기념상


▎음악적 영감에 젖어 있는 모습의 쇼팽. 그의 표정은 곧 폭발할 듯 격정적으로 보인다. / 사진:정태남
이 공원 초입에 연못, 관목과 꽃으로 단장된 ‘쇼팽의 성역’에 있는 바르샤바의 아이콘인 쇼팽 기념상이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쇼팽은 바람에 휘날리는 버드나무 가지 아래에 앉아 음악적 영감에 젖어 있는 모습인데, 버드나무 가지는 그의 손가락을 상징한다. 낭만주의 음악의 꽃을 피웠던 그의 표정은 곧 폭발할 듯 매우 격정적으로 보인다. 그 모습을 보며 그의 삶을 한번 뒤돌아본다.

18세기 후반 이후 폴란드의 역사는 그야말로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되어 있다.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3국에 의한 폴란드의 분할통치가 시작된 1795년부터 폴란드는 나라를 잃었고 폴란드 사람들의 독립운동은 계속 실패로 끝났다. ‘폴란드’라는 나라가 해체된 상황에서 쇼팽은 1810년 3월 1일 바르샤바에서 서쪽으로 54킬로미터 떨어진 젤라조바 볼라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그해 10월 바르샤바 고등학교의 프랑스어 교사로 임용되어 가족을 데리고 바르샤바로 이주했다. 음악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던 어린 쇼팽은 7세 때 대중 앞에서 연주회를 열었고 심지어 폴로네즈 G단조와 B플랫 장조 두 곡을 작곡했다. 1818년 [바르샤바의 잡지]라는 매체는 신이 내린 그의 재능을 칭송하면서 만약 프랑스 파리였다면 그는 즉시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당시 폴란드를 지배하던 러시아 총독 콘스탄틴 대공은 그를 총독궁으로 초대하여 연주하도록 했다.

쇼팽은 20세 때 청운의 꿈을 안고 더 넓은 세계를 향해 오스트리아로 갔고 11월 22일에 제국의 수도 빈에 도착했다. 그런데 11월 30일에 바르샤바에서 반러시아 민중봉기가 발발했다. 오스트리아가 폴란드 분할에 관여했던 터라 빈 사람들은 예전과 달리 폴란드인이란 이유로 그를 차갑게 대했다. 쇼팽은 빈에서 고뇌와 절망 속에서 8개월을 보낸 후 파리로 가다가 폴란드의 민중봉기가 러시아군에 의해 진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국을 잃은 슬픔과 울분을 가슴에 품고 1831년 9월 파리에 도착한 그는 파리를 중심으로 19년 동안 활동했다. 그는 1849년 10월 17일 39년의 짧은 삶을 마감할 때까지 마음은 항상 조국을 향해 있었으나 조국 땅은 다시 밟지 못했다.

폴란드 공화국의 초대 수상, 피아니스트 파데레프스키


▎우야즈두프 공원에 세워진 피아니스트 수상 파데레프스키 좌상. / 사진:정태남
‘쇼팽의 성역’을 나와 길 건너편 우야즈두프 공원에 들어선다. 이 공원은 와지엔키 공원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숲과 꽃으로 예쁘게 단장되어 그림같이 아름답다. 쇼팽이 세상을 떠난 지 꼭 11년 1개월 1일 후인 1860년 11월 18일, 마치 그의 정기를 이어받은 듯한 음악가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Ignacy Jan Paderewski). 이 공원에 그의 기념상이 있는데 좌대에있는 그의 이름과 생몰연대가 눈에 확실이 띈다. 그가 누구인지 모르면 이곳을 그냥 스쳐지나가겠지만, 폴란드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또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공부한 그는 20대 후반부터 피아니스트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다음 1913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이듬해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파리에 있는 폴란드 재건위원회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며 대변인 역할을 수행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패전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세력이 약해지고 러시아가 혁명으로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폴란드의 독립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더 커졌다. 이에 그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을 만나 폴란드의 독립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했고, 폴란드 내에 분열되어 있던 여러 지방 도시를 통합하여 통일된 폴란드를 재건하는 데 주된 역할을 했다. 이리하여 1918년 11월에 폴란드 사람들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독립된 나라를 세울 수 있었고 폴란드 공화국의 초대 수상 겸 외무장관으로 음악가 파데레프스키를 선출했다. 그러나 파데레프스키는 조국이 독립국이 된 다음에는 자신의 길이 정치가 아니라 음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수상에 취임한 지 채 1년도 안 되어 최고의 권좌에서 내려와 다시 음악가의 길로 뒤돌아갔다.


▎와지엔키 공원 안 우아한 바로크 양식의 수상극장과 그 너머로 보이는 수상궁전. / 사진:정태남


성 십자가 성당과 성 요한 대성당


▎제2차 세계대전 후 복구된 성 십자가 성당. 쇼팽의 심장이 안치되어 있다. / 사진:정태남
이 공원을 나와 우야즈두프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계속 올라간 다음 바르샤바 구시가지에 들어선다. 바르샤바는 쇼팽 음악을 사랑하는 여행자들에게는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바르샤바 시내에 있는 ‘쇼팽 순례 코스’ 중 그의 자취를 가장 가슴 뜨겁게 느낄 수 있는 곳은 성 십자가 성당이다. 쇼팽은 파리에서 숨을 거두면서 자기 심장만큼은 조국에 묻어달라고 했는데 그의 유언에 따라 이 성당에는 그의 심장이 안치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복구된 성 요한 대성당의 정면. / 사진:정태남
이 성당 앞길에서 좀 더 북쪽으로 걸어가면 예쁘게 단장된 구시가지 중심부가 펼쳐진다. 구시가지의 아기자기한 지붕선을 뚫고 성 요한 대성당의 뾰족한 지붕이 하늘로 우뚝 솟아 있다. 요한 대성당 안에 들어서니 고딕 양식 건축의 장엄함과 숙연함이 느껴진다. 마치 파데레프스키의 교향곡[폴로니아]의 장엄한 음향이 어디선가 울려 퍼져오는 듯하다. 폴로니아(Polonia)는 ‘폴란드’의 라틴어 명칭이다. 이 성당 안에는 파데레프스키를 비롯한 폴란드 위인들의 묘소가 있다.

파데레프스키가 수상을 지냈던 폴란드 공화국은 20년 후인 1939년에 나치 독일의 침공 앞에서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이에 당시 80세의 고령에 들어선 파데레프스키가 다시 한번 나섰다. 제1차 대전 때 그랬던 것처럼,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런던에 있는 폴란드 임시정부의 국회의장을 맡았으며, 미국에서는 폴란드 난민 구제기금 모금을 위한 피아노 연주회를 열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노피아니스트의 숭고한 모습은 미국 청중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하지만 고령으로 쇠잔해진 그의 육체는 그의 정신력을 따르지 못했다. 조국 폴란드의 파란만장한 운명을 지켜보면서 정치와 예술로 애국심을 불태웠던 그는 결국 뉴욕 연주를 끝으로 그곳에서 1941년 6월 29일 향년 81세로 별세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는 안타깝게도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독일군은 마치 폴란드의 민족혼을 완전히 말살하려는 듯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바르샤바를 지도상에서 지우려는 듯 시가지의 90%를 완전히 파괴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르샤바의 아름다운 구시가지는 전쟁이 끝난 다음 원래 모습대로 복구된 것이다. 유서 깊은 성 요한 대성당과 성 십자가 성당도 마찬가지다.


▎엄숙함이 느껴지는 성 요한 대성당의 내부. / 사진:정태남
악몽 그 자체였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폴란드에 또 다른 시련과 고통이 닥쳐왔다. 공산주의 정권이 다시 폴란드의 자유를 짓밟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폴란드가 완전히 민주화된 다음인 1992년에 마침내 파데레프스키의 유해는 미국에서 이곳 성 요한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그러니까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넘어서야 그는 그토록 갈망하고 몸 바쳐 싸워왔던 자유화된 조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 정태남은…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201809호 (2018.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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