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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의 ‘음악과 삶’]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 ‘미완’의 보물 

 

김진호 안동대 음악과 교수
죽음으로 인해 완성되지 못한 곡들이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다. 교향곡(symphony)은 관현악(orchestra)이 연주하는 소나타(sonata)로 보통 3~4개의 서로 다른 곡들로 구성된다. 서로 다른 각각의 곡들을 악장이라 한다. 슈베르트의 여덟 번째 교향곡은 2개 악장으로 끝나는 바람에 [미완성 교향곡]으로 불린다.

▎죽음으로 인해 완성되지 못했던 곡들도 연주가들에 의해 재창조되기도 한다. April 2009, Musikverein Vienna. / 사진:photo by Li Sun
[미완성 교향곡]은 아름답고 서정적이며 슬픈 느낌을 자아내는 초기 낭만주의 시대의 작품으로, 자주 연주된다. 사실 교향곡이나 소나타가 반드시 3~4개 악장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미완성 교향곡] 말고도 2개 악장으로 된 곡이 꽤 있고, 1개 악장만 있는 교향곡과 소나타도 있다. 5개 악장, 6개 악장, 심지어 12개 악장으로 구성된 교향곡도 있다. 폴란드의 현대 작곡가 크시스토프 펜데레츠키의 [8번 교향곡]이 12개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베토벤에게도 마치지 못한 교향곡이 있었다. 일명 [10번 교향곡]이다. 엄밀히 말하면 마치지 못한 수준이 아니라 스케치만 있는 수준이다. 따라서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처럼 연주될 수 없다. 그럼에도 [10번 교향곡]의 일부가 베토벤에 의해 쓰였고, 그 악보가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음모론 같은 이야기가 회자되곤 했다. 이런 이야기를 믿었던 영국의 음악학자 베리 쿠퍼가 20세기 후반에 드디어 성과를 냈다. 베를린의 국립 프러시아 문화재단 도서관에서 [10번 교향곡]의 초고로 보이는 악보의 일부 및 이 악보와 관련 있어 보이는 스케치 수십 장을 발견한 것이다. 쿠퍼는 이에 기초해 250여 마디에 이르는 [10번 교향곡]의 1악장을 베토벤풍으로 작곡한다. 5년여의 노력 끝에 이룬 결실이었다. 이 교향곡은 1988년 런던에서 초연된 이래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 연주됐다. 베토벤의 관조적이며 명상적인 후기 스타일의 특징들이 잘 드러난 곡이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가치가 없다는 평가도 있다. 분명한 것은 복원이 아니라 쿠퍼의 창작이라는 사실이다. (인터넷에서 이 교향곡을 들을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의 [9번 교향곡]도 미완성 상태로 남았다. 이 곡은 4악장에서 멈춰 있다. 오늘날엔 3악장까지의 연주가 가장 일반적이다. 4악장의 경우 브루크너가 쓰다 만 몇 마디를 토대로 여러 음악가의 이른바 ‘연주용 판본’이 만들어졌다. 한 세대 늦은 또 다른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 역시 [10번 교향곡]을 미완성 상태로 남겨두고 타계했다. 전부 5개 악장으로 구상되었고, 모든 악장의 스케치가 남아 있으나, 어느 한 악장도 완성되지 못했다. 그나마 1악장이 꽤 완성된 편이어서 오늘날엔 1악장만 주로 연주된다. 죽음 직전의 곡으로 극히 어둡고 불안하면서도 관조적이며 사색적 느낌을 주는 곡이다. 나머지 악장을 말러의 스케치에 기초해 완성한 여러 판본이 있고, 각 판본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다.

오스트리아와 연관이 있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3악장의 일부.
우연의 일치였으리라. 이들 작곡가가 모두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거나 활동했다는 사실 말이다. 베토벤은 오늘날의 독일 본에서 태어나 비엔나에서 활동하다 죽었고, 슈베르트와 브루크너, 말러는 모두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베토벤과 슈베르트는 중세 이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명목상 연방이었던 신성로마제국이 나폴레옹에 의해 망하는 것을 지켜봤고, 브루크너와 말러는 신성로마제국의 폐허 위에 세워진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에 활동하다 사망했다. 또 하나의 희한한 우연의 일치가 있다. 이 작곡가들이 9번 혹은 10번에서 멈췄다는 점이다.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도 9번이다.) 오늘날 체코 작곡가로 알려져 있는 안토닌 드보르자크도 1904년 타계하기 전까지 오스트리아 제국의 도시 프라하에서 태어나 활동했는데, 그 역시 아홉 번째 [신세계 교향곡]을 마지막으로 교향곡을 더 쓰지 못했다. ‘9번 교향곡의 저주’라는 말이 나돈 것은 이런 사실들 때문이었다. 20세기에 와서는 영국의 랠프 본 윌리엄스가 85세 되던 1957년에 9번 교향곡까지 쓰고 이듬해에 사망했다. 베토벤을 존경했으나 그를 넘어서지 못한 작곡가들이 이 저주를 의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베토벤부터 말러와 본 윌리엄스까지, 교향곡이 많지 않게 쓰였던 여러 이유가 있었다. 한 가지만 지적하면, 이들이 예술가 의식을 가졌을 거라는 점이다. 하이든은 궁정음악가로, 그가 모시는 왕의 신하였다. 매주 혹은 매달 하나씩 곡을 써서 주군의 심기를 좋게 해드려야 하며, 주군이 개최하는 국제적·국내적 회의나 축제 때 사용될 음악을 써야 했다. 베토벤은 왕과 귀족의 정규적 지원을 거부하고 프리랜서로 독립해 성공한 첫 도전자였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처럼 독립된 예술가로 성공하고 싶어 했지만 실패했고, 하이든처럼 안정적인 궁정음악가로 살고 싶어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던, 비운의 회색인이었다. 서유럽에 시민사회가 정착하면서 베토벤 이래로 프리랜서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19세기 작곡가들이 생겨났고, 본 윌리엄스 같은 20세기 초중반의 작곡가들도 비슷한 사회적 위치를 점했다. 20세기의 흔치 않은 다작가였던 쇼스타코비치는 예술가들의 사회적 생존을 보장해주는 사회주의 국가 체계에서 살아 활동했다. 소비에트 인민의 혁명적 영혼을 반영하는 데 성공하면 살아남아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지만, 실패하면 ‘인민의 적’이 되는 작곡가로서 말이다.

오페라의 경우에는 푸치니의 [투란도트]가 미완성 상태다. 중국의 가상적 황제와 그 공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곡된 이 오페라의 3막에서 이탈리아의 작곡가는 펜을 멈추고 타계했다. 오늘날 푸치니가 멈춘 부분까지만 공연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오페라다 보니 이야기보따리를 끝맺어야 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작곡가의 작업으로 완성된 판본에 따라 공연하는 경우가 많다. 상술했던 교향곡들의 연주용 판본이 잘 연주되지 않는 것에 비해 이 오페라는 어쩔 수 없이 끝까지 공연되는데, 아무래도 음악의 일관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오늘날 작곡가를 비롯해 저작자가 사망한 지 70년이 지나면 그의 저작물은 인류의 공동 재산이 된다.(사망한 후 70년이 지나기 전까지는 작곡가의 직계 후손 등이 저작권을 소유할 수 있다) [10번 교향곡] 악보의 발견자는 저작권자는 아니지만, 베토벤의 친필이 적힌 오래된 악보의 소유권자가 될 수는 있다. 소설 속의 악보 발견자와 그에게서 악보를 빼앗으려는 이들은 소유권을 취하려고 쫓고 쫓긴다. 악보를 경매에 넘겨 큰돈을 벌고자 했던 것이다. 주의할 점은, 기억력이 좋은 누군가가 그 악보를 힐끗 보고서 내용을 완전히 외운 후 공연하거나 출판할 경우, 그 누군가에 대해 악보 소유권자는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장의 그림을 찾는 일만큼은 아니겠지만, 악보를 찾는 일도 돈이 된다.

거장의 악보를 발견했고 그것으로써 저작권상의 이익은 아니지만 다른 방식으로 이익을 얻은 이가 있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6개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악보를 처음으로 찾아내 그것을 연주했던 파블로 카잘스다. 카잘스는 20세기의 전설적 첼리스트인데, 놀랍게도(그에 말에 의하면) 13세 때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헌책방에서 이 악보를 발견했다. 이 악보의 존재 여부를 두고 학자들의 이견이 있었는데, 13살 소년이 그걸 발견한 것이다. 카잘스는 1925년 그의 나이 48세가 되어서야 이 모음곡의 공연을 한다. 그 후 이 모음곡은 그윽한 첼로의 풍요로운 음색을 잘 살리는 명곡으로 평가받고 여기저기서 연주되고 있다.

원곡 흉내 내는 사기도 적지 않아


▎베토벤의 [10번 교향곡] 음반. / 사진:J. R. von Herbeck’s biography, music webs
1933년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마리우스 카사드쥐는 10살의 어린 모차르트가 작곡해 루이 15세의 공주였던 아델라이데 부인에게 헌정했다는, 그러나 그 이후 사라져버렸다는 악보를 자신이 우연히 발견했다며 그 악보 위 협주곡 하나를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출판했다. 이와 관련해 카사드쥐는 편집자(editor)로 이름을 올렸다. 이 협주곡이 죽은 지 200년이 넘은 모차르트의 작품이라면, 저작권자는 없고 편집자가 그것을 편집하면 편집저작물이 된다. 편집저작물은 독자적 저작물로서 보호된다. 바이올린을 위한 [아델라이데 협주곡](Adelaide Concerto)은 그 후 모차르트의 작품이라고 믿어졌고, 전문가들에 의해 정식 작품 번호를 할당 받았으며,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에후디 메뉴인은 이 작품을 녹음하기도 했다. 나는 2012년 부산의 한 연주회장에서 전문가에 의해 이 곡이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연주된 기록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차르트 스타일로 카사드쥐가 작곡했던 작품이었다. 카사드쥐는 한마디로 사기꾼이었다. 사기를 쳐서 적지 않은 돈을 벌어들였던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진 지 꽤 되었음에도, 여전히 이 곡을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인식해 연주하는 동영상이 2017년에만도 여러 건이 있었다.

이러한 류의 사기가 더 있었다. 20세기 초의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사랑의 기쁨]과 [사랑의 슬픔] 같은 감미롭고 대중적인 바이올린 소품들을 쓴 작곡가이기도 했는데, [악마의 트릴]이라는 어려운 바이올린 곡의 작곡자로 알려진 타르티니(Giuseppe Tartini, 1692~1770), [사계 협주곡]으로 유명한 빨간 머리의 사제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 같은 이탈리아 바로크 거장들의 스타일에 따른 음악들을 작곡한 후 그들의 작품이라 속여 연주하곤 했다. 평범한 연주회에 비해 이런 연주회에 사람들이 더 많이 왔을 것이다. 음악의 세계에도 보물선 탐방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는 걸까.

※ 김진호는…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의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201809호 (2018.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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