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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청주직지코리아국제페스티벌 

1377년 만들어진 인쇄문화 

박지현 기자
인쇄문화는 지식을 대량 생산했다. 교육 보급화와 문예 부흥에 기여했다. 고려의 선승이 후세에 남기고자 글자를 하나씩 본을 떠 만든 금속활자는 640년이 흘러서야 빛을 봤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금속활자본은 청주흥덕사에서 찍어낸 책 ‘직지’다. 복원된 금속활자판. / 사진:직지코리아 제공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문자를 쓴다. 언어로 귀속된 국가와 글자에 담긴 의미만으로 우리의 정체성도 확립됐다. 활자의 힘이다. 디지털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문자를 사용하지 않은 기술은 아직 상상하기 어렵다.

인류 역사는 4차에 걸친 정보혁명을 거쳤다. 처음엔 몸짓이나 소리로, 그다음엔 문자나 부호로, 금속활자로 인한 서적 발명으로, 그리고 컴퓨터 발명으로 인한 초고속 대량 검색에까지 이르게 됐다. 전문가들은 이 중 가장 위대한 정보혁명으로 금속활자의 발명을 꼽는다. 인쇄술은 책을 대중에 보급해 정보를 대량 전달하며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 됐기 때문이다. 유럽 지적 운동인 ‘르네상스’는 폭발적인 서적 출판문화를 불러일으켰다. 인쇄술이 문자의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뜻이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금속활자인쇄는 독일 구텐베르크의 발명품이 아니라 청주의 직지임이 밝혀졌다. 당시 한국사에서도 매우 고무적인 발견인 데다, 20세기 후반에야 알려져 전 세계가 떠들썩했다.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였던 고(故) 박병선 박사가 한국에 직지의 존재를 알렸다. 파장은 컸다. 직지의 등장은 인류 역사상 세계 최초로 알려져 있던 구텐베르크 『42행 성서』의 역사를 뒤집는 주장이다. “1377년 청주목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배포했다.” 직지 하권 마지막 장에 적힌 내용으로 구텐베르크보다 78년이나 앞섰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아쉽게도 지금 직지 원본은 국내에 없다.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하권 1권만 남아 있다. 그마저 다행스러운 건, 한국으로 파견됐던 프랑스 공사가 조선 상인에게서 수집하지 않았다면 보관은커녕, 과거 어느 집 벽지로 쓰여 역사 뒤안길로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직지가 간행된 ‘청주목 흥덕사’의 정확한 위치도 한동안 확인되지 않았다. 1985년 금구가 출토되며 절터가 밝혀졌다. 정부는 흥덕사 터를 보존하고 사적 제315호로 지정했다.

마음 수양법 담은 책의 가치


▎1. 직지가 탄생한 흥덕사지 옆에 세워진 청주고인쇄박물관. / 2. ‘2016 청주직지코리아 국제페스티벌’에서 금속활자판을 보는 시민들. / 3. ‘달항아리’로 알려져 있는 강익중 작가의 전시도 펼쳐진다. [Things I know] 아르코미술관, 2017. / 4. 직지코리아페스티벌을 기념해 청주 예술의전당에 세워진 조형물 파빌리온.
직지가 최고의 금속활자인쇄본으로 공식 인정되며 청주는 세계인쇄문화의 요람으로 떠올랐다. 직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2004년엔 유네스코에서 유네스코직지상을 제정했다. 인류 기록유산의 보전·연구에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에 유네스코가 2년에 한 번씩 주는 상이다. 직지상은 유네스코의 4대 ‘유산상’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난해엔 유네스코 산하 ‘국제기록유산센터(ICDH)’를 한국 청주에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ICDH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의 효과적인 이행을 지원하고, 인류 기록유산의 안전한 보존과 보편적 접근에 대한 국제 역량을 높이기 위해 설립할 예정이다.

직지가 금속활자본 이상의 정신적 가치를 갖는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9월 12일 특별 강연을 한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는 “단순히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오래됐다는 사실을 자랑하기보다 직지의 높은 정신과 문화 수준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방향이 바람직하다”며 직지의 가치를 되새겼다. 이어 “메시지가 현대인인 우리에게도 ‘무심’, 즉 모든 유혹과 분열, 화쟁을 넘어선 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쉽게 말해 직지의 내용을 깊게 들여다보자는 얘기다. 직지는 마음 수양법을 적은 책이다. 단어 그대로 직지란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키면 그곳에 깨달음이 있다’는 뜻이다. 백운 화상이 과거 7불(佛)과 인도 28조사(祖師), 중국 110선사 등 145가(家)의 법어를 가려 뽑아 307편에 이르는 게·송·찬·가·명·서·법어·문답 등을 수록한 책이다.

직지의 가치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은 흥덕사 옆에 세워진 청주 고인쇄박물관이다. 호젓한 산책로를 낀 고즈넉한 풍경이 마치 시대를 거슬러 오른 듯하다. 직지 탄생을 배경 삼아 1992년 개관했다. 이 지역 일대는 모두 청주직지문화특구로 지정됐다.

청주고인쇄박물관은 일반적인 전시관이 아니다. 디지털 변화에 걸맞은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면적은 4만990㎡로 지하를 포함해 3층 규모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거대하게 전면에 자리한 금속활자가 가로막는다. 원형으로 돌아가며 고서, 흥덕사지 발굴유물까지 자료 3000여 점을 둘러보기에 심심하지 않은 전시로 이뤄진다. 직접 손을 뻗어 글자를 몸으로 모으거나 튕겨낼 수 있는 동작 스케치도 흥미로워 보인다. 흥덕사 터의 발견 역사, 금속활자 인쇄과정을 9단계로 나눠 애니메이션으로도 연출했다. 활자 주조법이 상세하게 복원돼 있고 한지 공예, 붓 만들기, 책, 목판 제작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금속 활자전수교육관도 운영 중이다.

청주시는 직지 알리기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2018 청주직지코리아 국제페스티벌’은 10월 1일부터 21일까지 청주직지문화특구에서 개최된다. 약 15년 전 지역 축제에 머물렀던 행사는 국제행사로 승격한 지난 2016년부터 세계인의 축제로 변모했다. 올해가 두 번째다. 한국에서 열리는 2000여 개 행사 중 국제행사로 인증받은 축제는 7개뿐이다. (2018년 기준)

국제행사로 승격한 2018 청주직지코리아 페스티벌

관람 위주였던 2년 전 행사와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다. 올해 체험행사만 100여 개를 신설했다. 예컨대 조선시대 금속활자의 조판 임무를 담당하던 균자장의 역할을 놀이로 만들었다. 금속활자를 3D프린팅 한 글자들로 조판을 완성하는 게임이다. ‘직지심체요절’의 주조법을 빵과 과자에 꿀을 발라 찍어 먹는 형식으로 만든 체험도 있다. 머그컵에 직접 사진·그림·글씨를 넣어 인쇄하는 체험도 함께 선보인다.

지난 페스티벌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끌었던 ‘1377 고려 저잣거리’도 확대 운영한다. 고증을 거쳐 재현된 고려시대 거리에서 당시의 고려인을 만날 수 있는 문화체험이다. 고려인들이 파는 음식, 전통 술과 차, 풍습 등을 그대로 재현해 고려문화의 장을 펼친다. 폐막식엔 고려시대 의상을 재현해 웅장한 피날레를 장식할 예정이다.

유명 작가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작가 다수가 직지를 내면, 정신적 가치 측면에서 바라보자는 전시회 취지에 공감했기에 가능했다. 숲처럼 조성된 입구를 지나 직지의 내용과 식물 이미지가 인쇄된 천 사이를 거니는 몽환적인 경험을 제공할 예정이다. 청주예술의전당 광장엔 한석현 작가의 ‘직지의 숲’을 조성한다. 매일 밤 직지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영상, 레이저, 프로젝션 매핑으로 풀어낸다. 눈에 띄는 건 1994년에 백남준과 공동전시를 했던 강익중 작가의 전시다. 강 작가는 북한이 고향인 실향민이 그린 ‘그리운 내 고향’ 그림들을 모아 직지의 성격에 빗대 이산가족의 기억과 기록의 문화유산을 조명한다.

한층 풍성한 볼거리로 확대 운영하는 이번 페스티벌에 청주뿐 아니라 전 세계 각계 인쇄문화 관계자들이 발걸음을 하려는 이유다.

[박스기사] 모에즈 착촉 유네스코 사무총장보(Moez Chakchouk UNESCO’s Assistant Director-General)


2001년 직지의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이어, 2004년 유네스코 직지상 제정, 지난해 유네스코 산하 국제기록유산센터(ICDH)의 청주 유치가 확정되며 유네스코와 긴밀한 협력이 이뤄지고 있다. ‘2018 청주직지코리아 국제페스티벌’에 참석하는 모에즈 착촉 유네스코 사무총장보와 인터뷰를 했다.

IT 발달로 새로운 미디어가 번성하는 현대에서 기록유산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서화된 기록유산은 사람들을 문화적인 정체성으로 묶어준다. 스마트폰, 태블릿은 더 많은 사람이 기록유산에 접근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한다. 소셜미디어에서 사람들이 역사와 문화에 대해 끊임없이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미디어는 전통과 역사를 대중화하고 문화 간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보는 디지털 시대의 역할이다.

유네스코 직지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를 기념하면서, 인류유산의 보존과 접근성에 기여한 노력을 보상하기 위해 제정했다. 유네스코를 넘어 말리, 이라크, 시리아 등에서 테러나 전쟁 등 역경으로부터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데 혁신, 용기, 끈기를 보여준 단체와 개인들을 기린다.

지난해 청주시는 유네스코 산하 국제기록유산센터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앞으로 어떤 역할을 기대하나?

청주에 세워질 국제기록유산센터로 교육기관 간 문서유산의 대중화를 위한 전략적인 파트너십을 구축하고자 한다. 국제기록유산센터가 보존과학 분야 연구개발의 최첨단에 설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의 발전된 기술이 아날로그와 디지털 기록 보관물을 보존하는 기술을 융합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박스기사] 국가무형문화재 제101호 임인호 금속활자장 | “인류 지혜의 창고는 활자에 있다”


▎금속활자 주조 과정을 시연 중인 임인호 금속활자장. / 사진:박상문 객원기자
아쉽게도 직지의 금속활자본은 남아 있지 않다. 이에 국가무형문화재 임인호 금속활자장이 복원에 나섰다. 2011년부터 5년간 3만여 자에 달하는 금속활자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직지심체요절』의 금속활자본을 부활시킨 임 금속활자장을 만나 주조기술에 담긴 조상의 지혜를 엿봤다.

“처음 15자를 만들 때는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대량 주조를 시도했을 때는 주조과정이 다르고 비율도 달라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임인호 금속활자장은 직지 복원 당시를 떠올렸다. 밀랍주조법은 벌집 찌꺼기를 가열해 얻은 밀랍에 글자본을 붙여 글자를 새긴 뒤 흙으로 감싸 구워 밀랍을 녹여낸 공간에 쇳물을 부어 활자를 만든다. 임인호 금속활자장은 금속활자를 복원하기 위해 전통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토종벌을 기르고, 글씨를 새기는 작업부터 주형틀을 만들고 활자를 다듬기까지 1년에 6000~7000자씩 밀랍주조법으로 복원하는 작업을 거쳤다.

고인쇄박물관 맞은편에 2014년 문을 연 금속활자전수관에서는 매주 금요일 임인호 금속활자장의 주조과정 시연을 관람할 수 있다. 그가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주조 시연시간은 1시간에서 1시간 반. 수십 개 글자가 탄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그는 “주물을 하는 시간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며 “잡념이 없는 소중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 전국 각지뿐 아니라 세계를 돌아다니며 금속활자 주조법을 시연한다. 임인호 장인은 “해외에 있는 사람들은 금속활자 주조 시연을 처음 보고 인상 깊다고 느낀다”며 “유럽인들은 몇 번이나 참여해 금속활자 인쇄술을 높이 평가했다”고 말했다.

임인호 금속활자장은 1984년 나무 판에 글자를 새기는 서각의 매력에 푹 빠지며 장인의 길에 입문했다. 그는 국내 2호 금속활자장이다. 1대 금속활자장 오국진 선생 밑에서 문하생을 자처했다. 과정은 험난했다. 처음엔 잠자는 시간 외에는 주물만 했다. 그렇게 문하생이 된 지 12년 만인 1999년 금속활자장이 됐다.

“인류 지혜의 창고는 활자에 있다”고 말한 그는 후학 양성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직지 복원으로 금속활자의 우수성을 알린 만큼 한글 활자도 복원해 알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이젠 후학 양성과 계승을 위해 최선을 다할 예정입니다.”

- 박지현 기자 centepark@joongang.co.kr

201810호 (2018.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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