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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빈(AUSTRIA /Wien, Vienna) 

정태남의 TRAVEL & CULTURE 

글·사진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빈(Wien, Vienna) 시가지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벨베데레 궁전은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바로크 양식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궁전에는 세계 최초의 공공박물관 중 하나인 오스트리아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에 소장된 수많은 작품 중에서 사람들의 발걸음을 가장 많이 끌어들이는 대표적인 작품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다.

▎빈 중심가가 내려다보이는 벨베데레 궁전의 정원. 정원 입구에는 스핑크스가 세워져 있다.
빈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2㎞ 부근 지대가 조금 높은 곳에는 벨베데레 궁전이 자리 잡고 있다. 빈 중심부는 대부분 평지라서 시가지 풍경을 가까이서 내려다볼 만한 곳이 없지만 벨베데레 궁전은 다른 곳보다 지대가 약간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전망이 좋다. 그런데 벨베데레(Belvedere)가 무슨 뜻일까? 이것을 영어권에서는 황당하게도 ‘벨버디어’라고 발음하는데, 이건 영어가 아니라 이탈리아어다. 이탈리아어로 벨(Bel-)은 ‘아름다운’, 베데레(vedere)는 ‘보다’, ‘보기’라는 뜻이다. 즉, 좋은 전망을 품을 수 있는 곳에 세워져 있으니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사실 이곳에서는 가슴을 확 열어주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넓은 프랑스식 정원이 완만한 경사를 따라 아래쪽으로 길게 펼쳐지고, 그 너머로는 빈의 핵심인 슈테판 대성당을 중심으로 잘 정돈된 시가지의 모습이 눈 아래에 펼쳐진다.


벨베데레 궁은 하궁과 상궁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두 궁전은 정원으로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일체감을 준다. 정원은 아름다운 꽃들과 분수,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경계부분은 스핑크스 석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스핑크스는 ‘지혜’를 상징한다. ‘지혜’라면 이 궁전을 세운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 1663~1736)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프린츠(Prinz)를 문자 그대로 영어로 옮기면 프린스(prince)인데 여기서는 ‘왕자’가 아니라 직위 높은 귀족을 뜻한다. 그의 이름 오이겐은 독일식이고, 프랑스식으로는 외젠(Eugene), 이탈리아식으로는 에우제니오(Eugenio)라고 한다. 그는 전쟁터에서만큼은 누구도 그의 지혜를 따라갈 수 없던 영웅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이 아니라 알프스산맥 서쪽, 지금의 프랑스 동남부의 막강한 사부아(Savoie) 가문 출신이었다. 사부아는 영어로는 사보이(Savoy), 이탈리아어로는 사보이아(Savoia)로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통일의 구심점이 된 왕가다.

영웅이 세운 전망 좋은 벨베데레 궁전


▎1. 벨베데레 궁전을 세운 영웅 오이겐 공의 초상. / 2. 정원 분수에서 내려다본 벨베데레 하궁. 3 남쪽 주출입구에서
프린츠 오이겐은 원래 성직자의 길을 가려다가 생각을 바꾸어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군대에 들어갔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자 20세가 되던 해인 1683년에 오스트리아로 와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 레오폴트 1세 휘하로 들어갔다. 그는 비록 키도 작고 외모도 볼품없었지만 이미 30대에 합스부르크 군대의 총사령관직까지 올라갔으며, 레오폴트 1세 이후에도 요제프 1세, 카를 6세까지 모두 3대에 걸쳐 ‘무대 뒤의 황제’ 역할을 했다. 그는 수많은 전투에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다. 특히 유럽을 위협하던 오스만 튀르크(터키)군대를 완전히 격파하여 전설적인 인물로 추앙되었다. 그의 혁혁한 무공 덕택에 오스트리아는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번영과 평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남쪽 주출입구에서 바라본 벨베데레 상궁의 남쪽 정면.
프린츠 오이겐이 부동산에도 지혜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1697년 말 빈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개발되지 않은 목초지와 농지를 매입했다. 그는 이곳에 여름 별장을 짓기 위해 건축가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1668~1745)를 불러 하궁을 먼저 짓게 했다. 힐데브란트는 바로크 건축의 본산 이탈리아 로마에 가서 유명한 건축가 카를로 폰타나로부터 배운 적이 있는 유능한 건축가다. 그의 명성은 당시 뛰어난 오스트리아 건축가 피셔 폰 에를라흐와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정원 조경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조경을 맡았던 앙드레 르 노트르의 제자인 도미니크 지라르(Dominique Girard)에게 맡겼다.


▎벨베데레 궁전(상궁)의 핵심인 화려한 대리석 홀.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실내를 장식했다.
하궁이 완성되자 그는 좀 더 멋진 건물을 하나 더 세우고 싶었는지 1717년 정원 위쪽에 화려한 상궁을 짓도록 했고 내부 장식은 이탈리아 예술가들에게 맡겼다. 하궁은 주로 거주를 위한 것이었다면, 상궁은 과시를 위한 것이었고 또 예술품, 서적 등 수많은 수집품을 전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궁은 1723년에 완공되었는데 이름은 ‘정원 궁전’이란 뜻으로 가르텐팔레(Gartenpalais)라고 했다. 이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벨베데레 궁전은 건축과 조경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곳이다.

자식도 없었던 그가 유서도 없이 1736년 4월 21일에 세상을 떠나자 이 방대한 부동산은 이탈리아 토리노에 살던 조카딸이 상속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곳에 거주하는 데 별로 흥미를 못 느껴 이 궁전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에게 매도했다. ‘벨베데레’라는 이름은 바로 이때 체결된 매매계약서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상궁과 하궁을 연결하는 프랑스식 정원에서 바라본 벨베데레 상궁의 북쪽 정면.
오스트리아 미술관과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른 1776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장남 요제프 2세는 합스부르크 황궁에 소장된 미술품들을 이곳에 옮겨 일반인에게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5년 후에 세계 최초의 공공박물관 중 하나가 바로 이곳에서 문을 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오스트리아 미술관’이다. 그 후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패전과 함께 합스부르크 왕조의 역사가 끝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탄생한 다음에는 벨베데레 궁전 안의 모든 방이 전시실로 개조되었다. 이리하여 상궁은 오스트리아의 19~20세기 미술작품을 전시하고 하궁은 중세에서 바로크 시대에 이르는 예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말과 스핑크스 석상으로 장식된 벨베데레 상궁 현관 입구.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벨베데레 상궁 2층에 소장된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등 유명한 오스트리아 화가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 긴 줄을 서는 것을 조금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발걸음을 가장 많이 끌어들이는 것은 단연 구스타프 클림트가 1907~1908년에 그린 작품 [키스]다.


▎벨베데레 궁전(상궁)의 우아한 입구 계단실.
구스타프 클림트 작품들이 전시된 공간 안에는 미술책이나 화보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유명한 그의 작품들이 벽면에 걸려 있는데, [키스]는 한쪽 벽면 한가운데에 단독으로 걸려 있다. 금빛을 찬란하게 반사하는 이 작품은 관람객의 시선을 마치 블랙홀처럼 확 잡아 이끈다. 그림 앞에서 잠시도 생각해볼 만한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이 금빛은 화려함보다는 마치 이탈리아 라벤나에 있는 1500년 전 비잔틴 양식의 산 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에서 보이는 신비스럽고 거룩한 분위기로 인도한다. 시선이 집중되는 곳은 금빛이 반짝이는 꿈속의 세계에서 서로 얼싸안고 막 키스를 하려는 남녀의 얼굴이다. 여자는 얼굴을 뒤로 젖힌 채 눈을 감고 남자의 격렬한 키스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두 사람은 풀밭인지 침대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곳 위에서 일체가 되어 있으면서도 남자 옷은 사각형으로, 여자 옷은 동그라미로 장식되어 서로의 영역이 구분되어 있다. 또 머리 부분은 마치 성인처럼 오라에 싸여있고, 그 경계선 너머는 마치 끝없는 우주공간처럼 느껴진다. 이 몽환의 세계는 가로 세로의 길이가 180㎝인 정사각형의 그림틀 속에 담겨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일까? 딱 부러진 정답은 없다. 정답은 오로지 관람객의 몫일 뿐이다. 사실 클림트 자신은 이 그림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자화상조차 남기지 않았을뿐더러 언론매체와 인터뷰도 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사생활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끝까지 거부했고, “나에 대해 알려면 내 작품을 보라”는 말만 남겼다. 사생활에 관련된 편지와 같은 기록은 그가 죽은 후 모두 불태워졌다.

클림트가 1908년 빈에서 열린 미술전 쿤스트샤우(Kunstschau)에 이 그림을 출품했을 때, 오스트리아 미술관은 이 작품을 즉시 구입했다. 벨베데레 궁전을 찾는 사람 대부분은 바로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있다면, 이곳에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가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가치를 단번에 알아본 당시 오스트리아 미술관 관장은 벨베데레 정원에 있는 스핑크스의 지혜를 물려받았던 것은 아닐까?

※ 정태남은…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201810호 (2018.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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