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모던아트의 아이콘, 세르게이 슈킨 컬렉션 

박은주의 ‘세계의 컬렉터’ 

박은주 전시 기획자
드가, 모로, 피카비아, 스탕달, 에밀졸라와 나란히 파리의 몽마르트르 묘지에 안치된 세르게이 슈킨(1854~1936)은 러시아 컬렉터였다. 그는 이반 모로조프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러시아 수집가로 19~20세기의 프랑스 작가들에게 깊이 매료되었다.

▎Edgar Degas, La Danseuse dans l’atelier du photographe, 1875 Huile sur toile 65×50㎝ Musée d’État des Beaux-Arts Pouchkine, Moscou Photo © Moscou, Musée d’État des Beaux-Arts Pouchkine
[삶은 어디에나](1888)의 화가 니콜라이 야로센코, 러시아의 사계절을 가식 없이 표현한 이삭 레비탄, 1860년대 러시아의 참혹한 사회상을 그린 바실리 페로프 등 동시대의 뛰어난 러시아 작가들을 뒤로하고 세잔을 포함해 프랑스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마티스와 피카소를 선호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눈이 온 뒤의 차가운 바람이 느껴지는 풍경, 날씨만큼이나 혹독했던 삶을 헤쳐나가는 러시아인들의 일상을 그린 그림에는 러시아 작품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유의 낭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게이 슈킨은 미술사에서 곧 다가올 격변의 시대를 예고했던 프랑스 작가들의 아방가르드한 작품들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그 안목을 배양한 첫 씨앗은 온 가족의 예술에 대한 애정과 지원이었다. 예술은 세르게이가 부와 명예를 동시에 누렸던 절정기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망명을 떠나야만 했던 고난의 시기에도 함께했다. 세르게이에게 예술은 파리에서 숨을 거둔 순간까지 삶을 지탱해나갈 수있는 생명수였다.

세르게이 슈킨의 아버지, 이반 바실리에비치 슈킨(Ivan Vassilievich Shchukin)은 섬유 무역회사인 ‘I. V. Chtchoukine & Fils’의 설립자다. 아버지는 차(Tea) 사업에서 성공한 모스크바 사업가의 딸 에카트리나와 결혼해 여섯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이반 바실리에비치 슈킨의 아들들은 예외 없이 아버지의 권유로 독일과 프랑스의 섬유산업을 연수해야만 했다. 어린 시절 세르게이는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아버지는 예외적으로 아들이 독일에서 치료를 받아가며 Ecole de commerce(Business School)에서 수학하게 했다. 인생은 마치 영화에서 본 것처럼 반전이 있다. 말더듬이였던 세르게이는 놀랍게도 모스크바에 돌아왔을 때 다른 형제들보다 뛰어난 실력으로 아버지에게 인정받았다. 결국 세르게이는 1890년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업을 이어받았다.

세르게이는 1884년 모스크바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중 한 명이었던 리디아와 결혼했다. 리디아는 우크라이나 돈바스 광산의 운영위원회 위원장 딸이었다. 1886년 사랑의 결실인 첫아들이 태어나자 손주를 본 기쁨으로 할아버지 이반 바실리에비치는 아들 부부에게 트루베츠코이 궁전(Palais de Troubetzkoï)을 선물한다. 리디아는 그 뒤에도 두 아들 그리고리와 세르게이, 1890년에 막내딸 에카트리나를 세르게이 품에 안겨주었다.

세르게이는 러시아에서 안주하지 않고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및 인도를 여행하며 러시아에서 제조할 직물의 모델을 찾아다녔다. 그는 중산층에게 제공할 장식 직물을 제작하기 위해서 향수를 감별하는 전문가가 후각을 단련하고, 와인의 소믈리에가 뛰어난 미각을 훈련하듯이 훌륭한 장식 직물을 찾는 안목을 꾸준히 익혔다. 늘 한계에 도전하는 세르게이의 뛰어난 사업 능력으로 I. V. Chtchoukine & Fils는 번창했고 생산공장, 은행 및 보험회사의 대주주가 됐다. 러시아 사람들은 그가 상업과 무역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것을 인정하며 ‘모스크바의 상공부 장관’이라 불렀다. 모스크바에서 부와 명성의 상징이 된 세르게이는 아름다운 트루베츠코이 궁전에서 콘서트와 연회를 열며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


▎1900년경의 세르게이 슈킨 © Musée d’Etat des Beaux Arts Pouchkine
아버지의 섬유 무역회사는 어린 시절부터 자녀들에게 미적 섬세함을 자연스럽게 심어주었다. 알록달록 염색된 천과 각 섬유의 질감과 촉감, 기하학적이고 아라베스크한 디자인을 일상으로 접했던 가족의 공통 관심사는 자연스럽게 예술로 모아졌다. 세르게이의 형 피요트르는 러시아 고대 미술과 유물, 오리엔탈 미술품을 수집했다. 피요트르는 프랑스 딜러, 폴 뒤랑 뤼엘의 조언으로 세잔과 인상파 작품들을 수집했다. 피요트르의 소장품들은 10월 혁명 이후 국유화되어 현재 모스크바의 푸시킨 미술관의 기초가 되었다. 세르게이의 동생 디미트리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산으로 네덜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했다. 디미트리는 특히 헨드릭 아베르캄프, 브뤼겔 드 벨루어, 테니르스 등 플랑드르 작품들에 애정을 가졌다. 그의 작품들은 모스크바의 보자르 박물관과 푸시킨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슈킨 초기 컬렉션은 모네, 드가, 세잔, 고갱


▎슈킨의 컬렉션을 전시했던 모스크바의 트루베츠코이 궁전 © Musée d’Etat des Beaux Arts Pouchkine Credit Photo :Atelier de photographie Pavel Orlov, Moscou
다른 형제들보다는 현저하게 늦은 시기였지만 세르게이도 결국 수집가의 길에 들어섰다. 세르게이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또 다른 동생 이반이다. 이반은 독서광으로 프랑스 문화와 사랑에 빠져 몽소 공원 근처에 있는 와그람 거리에 정착했다. 이반의 집은 로댕을 포함한 프랑스 예술가들, 스페인 고전 예술 수집의 문을 열어준 스페인 화가 쥬로아가, 아나톨리 루나차스키와 같은 러시아 정치 망명자들과 교류하는 장소였다.

세르게이에게 또 다른 영향을 끼친 인물은 사촌 페도르 보츠킨이다. 페도르는 화가였고 예술에 접근하는 사고의 문을 열어주었다. 세르게이는 이반과 함께 예술의 수도 파리의 갤러리를 방문했다. 1898년 11월 인상파 작가 중 모네의 [Les rochers de Belle-Île]를 구입하면서 수집의 역사가 시작됐다.

슈킨의 초기 컬렉션은 모네와 더불어 드가의 파스텔 작품 2점이었고, 1908년까지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포함해 모네 작품 13점, 세잔 작품 8점, 고갱 작품 16점을 수집했다. 그 후에 고흐(4점), 르누아르(3점), 드가(5점), 모리스 드니(4점), 퓌비 드 샤반(2점) 작품을 추가했다. 텍스타일을 선별하면서 단련된 그의 안목은 각 작가들의 최고 작품을 선택하는 능력을 키워주었다. 후에 피요트르의 인상파 작품들도 구입하여 수집품 리스트에 포함시켰다.


▎Christian Cornelius(Xan) Krohn, Portrait de Sergueï Chtchoukine, 1916, Huile sur toile 191×88㎝, Musée d’État de l’Ermitage, Saint-Pétersbourg © Adagp, Paris 2016 Photo © Saint-Pétersbourg, Musée d’État de l’Ermitage, 2016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시기에 뜻하지 않은 재앙이 닥쳤다. 1905년 11월 어느 날, 17세였던 그의 막내아들 세르게이가 한밤중에 갑자기 사라졌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아들을 찾으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1906년 3월, 눈이 녹을 즈음 죽은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고 절망에 빠진 리디아는 1년 후 암으로 죽음을 맞아 가슴에 묻었던 아들 곁으로 떠났다.

세르게이는 아들과 부인을 갑자기 떠나보내고 절망의 벼랑에 서게 됐다. 러시아 사람다운 로맨틱한 감성을 따라 낙타를 타고 1907년 10월 카이로의 시나이 사막에 있는, 4세기에 세워진 Saint Catherine 정교회 수도원으로 떠났다. 그 여행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수도원에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원망하며, 떠난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나날을 보낼 줄 알았는데 수도사들이 절망한 세르게이를 양팔 벌려 반겨주며 그와 함께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끝없이 나눴다. 결국 세르게이는 삶의 의미를 되찾았고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수도원을 떠날 수 있었다.

12월 세르게이는 파리를 찾았다. ‘살롱 도톤느(Salon d’automne)’도, 세잔의 회고전도 이미 끝나버렸지만 화상 볼라르는 그를 레오와 거트루드 스타인 집을 방문하게 해준다. 젊은 미국 컬렉터, 거트루드의 작은 아파트 벽에는 젊고 가난한 무명작가들의 아방가르드한 작품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마티스와 피카소를 다시 발견했다.

1906년 생 미셀의 마티스 아틀리에를 방문했을 때 그는 정물화 한 점을 구입하려 했는데 결국은 [La chambre rouge, les Natures mortes espagnoles], [La nymphe et le satyre], [le Nu en noir et or], [Le Café marocain], [Le Portrait de madame Matisse]를 포함해 총 38점의 마티스 작품을 구입하기에 이른다. 이 작품들은 마티스의 작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보물들이었다. 마티스가 붓을 놓고 물감이 마르자마자 작품들은 바로 모스크바로 보내졌다. 세르게이와 마티스는 서신으로 깊은 우정을 나눴다. 마티스의 대작, [La Danse]와 [La Musique]는 세르게이가 주문해서 제작했지만 너무나 앞서가는 작품이었기에 당시에는 깊은 고민이 필요했던 작품들이었다. 마티스는 이 두 작품을 주문받고 받은 선금으로 이시레몰리노에 집을 렌트했다. 마티스는 이사한 후에 정원에 큰 아틀리에를 지어 390×260㎝ 크기의 두 대작을 완성할 수 있었다.

마티스를 구입하고 몇 달 뒤 사고(Sagot) 갤러리에서 피카소의 작품을 구입하기 시작하여 1914년에는 이미 초기 데생과 청색 시대 작품, 입체파 작품 등 총 50점을 소장하게 된다.

세르게이가 파리에서 구입한 작품들은 모스크바에 있는 궁전 벽을 하나씩 메워나갔고, 1908년 들어 자신의 궁전을 일요일마다 대중에게 공개했다. 모스크바에서 세르게이의 컬렉션을 보는 것은 예술 애호가, 러시아 작가, 수집가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같은 해 비극의 사이클이 다시 시작됐다. 동생 이반이 사치스러운 삶으로 쌓인 부채 때문에 파리의 아파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게다가 세르게이의 둘째 아들 그리고리가 1910년 1월 2일 어머니 리디아의 죽음을 추모하던 날에 권총으로 자살했다.

다행스럽게도 세르게이의 인생에 또 다른 반전이 있었다. 아름다운 40대 피아노 교사인 나디아를 만난 것이다. 새로운 사랑에 힘을 얻어 세르게이는 1913년 겨울 그의 첫 컬렉션 카탈로그를 제작했다. 1914년 봄, 럭셔리 잡지인 아폴론에 야콥 투겐홀드의 평론과 더불어 컬렉션 이야기를 담았다. 야콥은 당시 설립 중인 슈킨 박물관의 디렉터로 임명됐다. 세르게이와 야콥은 첫 전시로 피카소의 전시를 고려 중이었고 막 드랑의 [Chevalier X]가 모스크바에 도착하며 그의 소장품 일련번호 256번을 달게 되었다. 이 소장품들과 더불어 아프리카 조각들과 스케치, 고대 오리엔탈 작품들이 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했고 프랑스와 러시아를 오가는 우편물은 더는 전달되지 않았다. 60세를 맞은 1914년 세르게이는 조국의 상황이 더 좋아질 거라는 희망을 더는 가질 수 없었다. 나디아는 결혼하자마자 임신했고 1915년 딸 이렌트를 낳았다.

러시아 정부 공공재산이 된 슈킨의 소장품들


▎Claude Monet, Le Déjeuner sur l’herbe, 1866, Huile sur toile 130×181㎝ Musée d’État des Beaux-Arts Pouchkine, Moscou Photo © Moscou, Musée d’État des Beaux-Arts Pouchkine
늘 인생의 바닥에서 최선의 결정을 한 뒤 다시 태어났던 슈킨은 자신과 가족을 위한 새로운 삶에 도전했다. 아내와 딸을 먼저 모스크바에서 떠나보내고 1918년 8월, 자신도 아들 이반을 데리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 순간 슈킨과 그의 궁전, 궁전에 남겨진 컬렉션은 서로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기로에 섰다. 1918년 11월 8일 레인이 서명한 인민위원회 조약에 따라 ‘대중 교육에서 국가 이익을 위한 매우 중요한 예술적 가치’라는 목적으로 슈킨의 소장품들은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공공 재산이 됐다.

슈킨의 딸 에카타리나가 왜 모스크바에 남았는지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아직 어린아이들을 포함해 여섯 자녀를 데리고 긴 기차 여행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거라는 예측이 다. 에카타리나의 남편 미셀 드 켈러 공작은 슈킨의 컬렉션을 연구자료로 정리한 주인공이다.

1919년 6월 궁전은 서구 모던 회화 박물관(MNZj1)으로 새롭게 명명된다. 1923년에는 서구의 모던아트 컬렉션들과 함께 GMNZI(Musée d’Etat d’art occidental moderne: State Museum of Modern Western Art)로 다시 한번 변화를 맞았다. 컬렉션 800여 점을 소장하게 된 GMNZI는 세계 최초의 모던아트 박물관이다.


▎1920년대 초 세르게이 슈킨의 트루베츠코이 궁전에 있던 ‘마티스의 방’ © Moscou, Musée d’Etat des Beaux-Arts Pouchkine Photo © Musée d'Art Moderne Occidental, Moscou
1922년 에카타리나가 온 가족과 함께 러시아를 떠나면서 슈킨의 마지막 자녀가 고국을 떠났다. 파리에서 자리 잡은 슈킨의 도움으로 프랑스 라방두에 있는 생클레어의 집에서 에카타리나는 1977년 죽음을 맞을 때까지 살았다. 세르게이의 큰아들 이반은 동방학자로 베이루트에서 교사가 되었다. 그는 1975년 베이루트의 테러 희생자로 89세에 세상을 떠났다.

파리에서 죽음을 맞은 1936년까지 세르게이의 삶은 평화로웠다. 오퇴유에 구입한 그의 집에는 라울 뒤피, 앙리 르 포코니에르, 페드로 프뤼나 등 새로운 수집품들이 있었다. 예술가를 만나고 작품을 수집하기 위해 방문했었던 도시 파리는 슈킨 가족들에게 평안을 안겨주었다.

슈킨이 파리에 있는 동안 모스크바에서는 그의 소장품을 GMNZI에 포함시켰다가 1931년 33점의 슈킨 소장품을 포함해 70점의 GMNZI 작품이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옮긴다. 1941년 전쟁 시 모스크바의 모든 박물관은 폐관되었고 작품들은 포장되어 노보시비르스크로 보내졌다. 독일에 승리한 이후 작품들은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그러나 1948년 GMNZI 재개관에 반대했던 스탈린에 의해 스탈린 법령은 15일 내 GMNZI의 해산을 선포했다. 그러나 ‘예술사 연구 자료’로 의미를 부가한 끝에 가까스로 전 작품이 뿔뿔이 흩어지는 운명을 피하게 된다. 전시는 허용되지 않은 채 마티스, 피카소의 작품들과 다른 작가들의 대형 작품들, 아방가르드한 작품들은 레닌그라드로 보내지고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작품, 모네, 고흐, 세잔, 드가 등의 작품은 모스크바에 남았다. 1950년대 들어서면서 먼저 푸시킨 박물관과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이어 점차 GMNZI의 진열장에 서서히 슈킨의 컬렉션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러시아에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이 대중에게 체계적으로 소개되는 기회를 마련해준 것이다.

2016년 10월 루이비통 재단에서 전시된 슈킨의 소장품들은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푸시킨 미술관에 나누어 소장돼 있던 작품들을 러시아 정부의 허락을 받아 어렵게 공수해온 것이었다.

시리아를 놓고 러시아와 프랑스의 살얼음 걷기 같은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예정되었던 러시아 대통령의 참석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한 점 한 점 보물과 같은 예술품들은 작가들의 조국, 프랑스로 돌아와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온 프랑스 예술 애호가들은 탁월한 안목을 지닌 러시아 컬렉터의 진정한 용기에 뜨거운 찬사를 보냈다. 피카소 박물관 전 디렉터, 안 발다사리에게 전시 기획을 맡긴 베르나 아르노 회장은 자신이 설립한 루이비통 재단에서 슈킨의 컬렉션을 바라보며 “평생 이루고 싶었던 꿈을 이루었다!”며 감동으로 눈시울을 적셨다. 베르나아르노 회장 역시 ‘예술은 정치를 넘어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 앞서가는 수집가다. 프랑스 작가들과 함께 세르게이 슈킨의 전시를 보면서 그들이 얼마나 슈킨의 수집품에 혀를 내두르는지 목격했다.

1901년 대중은 살롱 도톤느에 전시된, 슈킨이 주문했던 [La Danse]와 [La Musique]를 지독히 혹평했다. 슈킨조차도 원시적인 색의 누드 인물들 앞에서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주문을 취소하고 원래 설치하려던 장소에 퓌비 드 샤반의 작품을 걸려 했다. 그러나 늘 자신의 선택을 믿었던 그는 본래의 의지로 다시 돌아왔다. 모스크바에 돌아오자마자 슈킨은 바로 마티스에게 전보를 보냈다. “저의 나약함과 부족한 용기에 수치스럽습니다. 두 작품을 하루빨리 모스크바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세대를 미리 보는 컬렉터에게는 안목과 용기라는 두 가지 힘이 있었다.

※ 박은주는…박은주는 1997년부터 파리에서 거주, 활동하고 있다. 파리의 예술사 국립 에콜(GRETA)에서 예술사를, IESA(LA GRANDE ECOLE DES METIERS DE LA CULTURE ET DU MARCHE DE L’ART)에서 미술시장과 컨템퍼러리 아트를 전공했다. 파리 드루오 경매장(Drouot)과 여러 갤러리에서 현장 경험을 쌓으며 유럽의 저명한 컨설턴트들의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2008년부터 서울과 파리에서 전시 기획자로 활동하는 한편 유럽 예술가들의 에이전트도 겸하고 있다. 2010년부터 아트 프라이스 등 예술 잡지의 저널리스트로서 예술가와 전시 평론을 이어오고 있다. 박은주는 한국과 유럽 컬렉터들의 기호를 살펴 작품을 선별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201810호 (2018.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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