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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제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 

동서독 경험 집대성한 예술혼으로 남북한 예술 포용을 꿈꾸다 

유주현 기자
올해 오페라계 최고 화제는 국내 최초로 제작되는 바그너의 대표작 [니벨룽의 반지]다. 한국 오페라 70주년을 맞은 올해까지 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대작을 독일에서 활약해온 소프라노 에스더 리가 창단한 월드아트오페라가 120억원을 들여 2020년까지 3년간 4편을 순차적으로 제작할 예정이다. 그중 1편 ‘라인의 황금’이 11월 14일부터 18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다. 독일 거장 아힘 프라이어(84)가 연출을 맡아 더욱 이목이 쏠리고 있다.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가 고대 북유럽 전설과 중세 독일의 영웅 서사시에 기초해 창작한 악극 [니벨룽의 반지]는 오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848년부터 1874년까지 26년 동안 제1부(전야)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 제2부(제1야) ‘발퀴레(Die Walkure)’, 제3부(제2야) ‘지크프리트(Siegfried)’, 제4부(제3야) ‘신들의 황혼(Gotterdammerung)’ 전 4악장을 바그너 혼자 대본을 쓰고 작곡했다. 탐욕으로 저주받은 반지가 저주에서 풀려나기까지의 여정과 그 반지를 둘러싼 다양한 인물의 이야기로, 영화로 유명한 톨킨의 [반지의 제왕]과 신화적 뿌리는 같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다.

[니벨룽의 반지]는 ‘악극을 통한 사회 개혁’이라는 바그너의 이상을 투영하고 있지만, 권력의 허망함, 인생의 덧없음 등 인간 삶의 보편적인 주제를 지향한다. 신들의 세계와 난쟁이족 니벨룽의 세계, 인간의 세계를 종횡무진 오가는 방대한 세계관을 ‘오페라계의 피카소’ 아힘 프라이어 연출로 마치 『이솝우화』처럼 어린이도 즐길 만한 쉬운 연출로 풀어낼 예정이다.

아힘 프라이어는 세계를 돌며 오페라를 연출하는 거장이지만 한국과의 인연도 남다르다. 2011년에는 외국인 최초로 창극 [수궁가]를 연출했고, 이번에 프레야 역을 맡은 에스더 리 단장이 그의 부인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도 특별히 한국인을 위해 작품을 재해석해 제작한 버전으로, 한국 공연 후 독일 본(Bonn) 극장 등에 수출해 한국의 오페라 제작 역량을 과시할 예정이다. 현재 슈만의 오페라 [괴테 파우스트의 풍경] 제작을 위해 독일 함부르크극장에 머물고 있는 그와 e메일로 만났다.

[니벨룽의 반지]는 제작하기 어려운 대작이다. 꼭 한국에서 공연되어야 할까?

바그너의 예술은 세계적이고, 그의 주제들은 세계 공통의 토론거리다. 전쟁, 환경, 자연과 우주 파괴 등이 [니벨룽의 반지]에 깔려 있는 테마다. 이 작품은 굉장한 오페라적 업적이며 바그너의 종합예술은 현대에도 계속 요구된다. 바그너의 예술이 음악, 텍스트, 이미지, 공간 및 시간의 독립성을 각각 실현하고, 관객을 능동적인 주체로서 공연에 참여시킨다는 의미다. 또 그는 시인이기도 한데, 영감을 극장으로 가져와 구현하면서 정치적 이슈까지 포함시켰다. ‘라인의 황금’에서 사랑을 부정하는 자만이 황금을 차지한다는 설정은 모든 사회질서에 보내는 경고다. 세계가 직면한 빈부문제, 난민문제 등이 다 포함되어있다.

나흘 연속 16시간 동안 보는 시리즈를 3년에 걸쳐 보게 됐다.

물론 네 작품을 연달아 진행하는 것이 공연제작자들의 꿈이다. 그러나 극장 사정상 그럴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네 작품 각각에 매우 많은 암시가 담겨 있기에 다음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일으켜 관객들을 기다리게 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제작이 완성된 이후 네 작품을 모두 연속해서 공연할 예정이고, 이 ‘한국식 프라이어극’이 다른 나라에도 초대될 예정이다.

지루하기로 유명한데, 어린이도 즐길 만한 공연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똑똑하다. 물론 ‘반지’가 아이들만을 위한 공연은 아니다. 어른의 동심도 극장에서만 깨울 수 있고, 그것이 우리 의무다. 이 세계가 안타깝다는 사실이 이 작품에 녹아 있는데, 자라나는 아이들도 그걸 배우게 될 것이다. 바그너 팬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이번 공연으로 그 시간이 단축됐으면 좋겠다. 바그너를 잘 연출하면 지루한 게 아니라 3시간이 쏜살같이 흐를 것이다. 빠르게 진행되는 음악 안에서 적절한가사들이 관객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120억 들여 2020년까지 4편 제작


▎1. [니벨룽의 반지] 드레스 리허설 장면. 난쟁이족을 표현하기 위해 커다란 마스크를 제작했다. / 2, 3. 의상에는 추상표현주의 화가이기도 한 프라이어 연출의 붓 터치가 선명하다. / 4. 프라이어 연출이 직접 그린 의상 스케치들 5 드레스 리허설에 함께한 에스더 리 단장과 프라이어 연출 부부. / 사진:월드아트오페라 제공
[니벨룽의 반지]는 사실 기획 초기 제작발표회에서 “한국 공연은 남북 분단 상황과 핵전쟁 위협 등을 담아낼 것”이라고 공언했었다. 하지만 몇 달 새 남북 화해무드가 급진전되는 등 정치적 변화에 발맞춰 남북 교류 콘텐트를 목표로 하고 있다. 독일 외무성을 통해 북한과 접촉해 서울 무대에 오를 북한 성악가까지 물색했다. 당장 이번에는 캐스팅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내년 제2부 공연 때도 계속 추진할 계획이다. “이 공연은 전통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현재의 영향 또한 받고 있다. 아직 북한 측으로부터 답변을 받지 못했지만, 언제든지 북한 가수들을 전 세계의 가수들처럼 환영한다”는 게 그의 말이다.

사실 아힘 프라이어는 1972년 동독에서 서독으로 망명한 만큼 통일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 베를린 미술대학을 졸업한 화가이도 한 그는 통제된 삶을 살고 있는 동독 사람들을 그린 그림들을 전시한 것을 계기로 동독을 탈출해 서독으로 갔다. 동독 시절 독일 현대연극의 상징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마지막 제자로서 배운 이론과 실기를 바탕으로 서독에서 세계적인 연출가로 거듭났다. 에스더 리 월드아트오페라 단장은 “아힘 프라이어 연출이 동서독을 다 경험한 분이기에 남북한 가수가 이 무대에서 어울리면 정말 좋은 그림이 될 것”이라며 “북한 공연도 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동서독의 예술을 섭렵한 셈인데, 외적인 환경 변화가 작품세계에 어떻게 작용했나?

탈출에 대한 보복도 있었지만 동서독 모두를 경험한 것이 결국 좋은 영향을 주었다. 모든 예술가는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도 동독의 억압을 받았던 예술가들이 서독 예술에 강한 영향을 주었고 그 결과 독일의 예술 자체가 풍성해졌다고 생각한다.

한국도 남북한 예술이 벽을 허물게 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미래에 대해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양쪽의 과거와 현재의 경험이 새로운 예술세계를 촉발할 것이다.

외국 연출가로선 최초로 창극을 연출했는데, 외국의 전통예술을 연출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나?

국립창극단과 [수궁가] 제작은 내게 인상적인 작업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수십 년 동안 한국의 전통 궁중음악과 민속음악에도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판소리는 물론 전통춤과 연극, 타악 등 국악기 연주를 평소에 감상해왔기에 창극 연출에 도움이 됐다. 어려움이라면 예술적인 방면에서 당시 극장 측과 의견 충돌이 있었다. 그들이 내게 미국식 음악극을 원했기 때문이다. 극장 측에서 “요즘 한국인들은 한국의 전통예술에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러기에 전통 작품이 대성공을 거둬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전통예술에 관심이 없다’는 주장을 작품 결과물로 뒤집어 보여주고자 했다.

[수궁가]에서도 용왕이 아픈 이유를 바다 오염으로 표현했다. 이번에도 신화적 인물들에게 정치적 표현을 입히나?

모든 작업은 다음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신화의 뿌리는 항상 맞닿아 있다. 하지만 근원에 존재하는 정치적 의미를 해석하고 끌어내기 위해서는 예술 자체를 파고들어가야만 한다.

한국판 ‘반지’는 가장 모험적인 프로젝트

그가 ‘오페라계 피카소’로 불리는 이유는 그의 무대 자체가 기존 무대세트 개념을 넘어 설치미술 작품처럼 독립적인 완성도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추상표현주의 화가로서 그는 모든 무대와 조명, 영상, 의상 디자인을 특유의 상상력과 창조력으로 직접 완성한다. 특히 무대와 의상 곳곳에서 발견되는 자유로운 붓 터치들은 그의 손길이 직접 닿은 흔적들이다. [수궁가]에서도 도창 역을 맡은 안숙선 명창을 높이 3m의 산 모양 치마 위에 올려 거대한 화폭으로 삼는 파격적 연출을 보여줬고, LA오페라극장과 독일 만하임극장에서 최근 공연한 [니벨룽의 반지]도 ‘무대와 이야기와 음악이 있는 그림’이라는 평을 받았다.

지난 9월 진행된 드레스 리허설에서 공개된 연습 무대에는 벌써부터 그의 예술관이 투영된 동화적인 세트가 거의 완성돼 있었다. 그림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화려한 의상, 인형극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마스크 등 상상력으로 넘쳐났다. “황금 반지를 손에 쥔 난쟁이 알베리히가 자기 능력을 과시할 때 로켓이 발사되는 장면을 연출하고, 라인강에 햇빛이 들어오는 장면에서는 무대 바닥을 거울로 꾸미고 라인강의 세 요정이 반짝반짝 빛나는 치마를 입어 춤을 출 때 모든 것이 빛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신들의 세계에서는 큰 성이 움직이도록 꾸밀 것이다.”

최근 만하임극장과 LA에서도 [니벨룽의 반지]를 공연했는데, 한국판만의 차별점이라면?

나는 러시아, 폴란드, 프랑스, 독일에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6번씩 완전히 다르게 연출했었다. ‘반지’도 각각 전 작품과 완전히 다르다. 장소와 시간, 기술, 사회적인 상황이 새로운 도전을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이 급속도로 서구화된 것에 관심이 있는데, 그런 생각을 작품에 담아 한국인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려 한다.

오케스트라 연주가 매우 어려운 공연이라고 들었다.

한국 오케스트라가 처음 해보는 공연이라지만, 많은 한국 음악가가 유럽에서 활약하고 있지 않은가. 그중에서도 최고인 한국 성악가들과 연주단원들이기에 이들과 최고의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랄프 바이커트와 마티아스 플레츠베르거라는 유명한 지휘자 두 사람과 함께하는데, 리허설 중 흥미로운 예술적 조우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들은 세계의 모든 극장에 어울리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한국인에게 낯선 북유럽 신화를 따라가기 어려울 것 같다.

바그너의 선구적인 업적은 새롭고 더욱 직접적인 방법으로 시대의 혁명적인 분위기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또 브레히트 작품에서 ‘소외’가 중요하듯 바그너 작품에선 ‘영속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인간의 희망과 어려움에 대한 대처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스와 북유럽, 아시아를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신화가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다만 독일인도 알아듣기 어려운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을 고려해서 쉽고 분명하게 표현하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판 ‘반지’가 지금껏 해왔던 가장 어려운 프로젝트라고 했다.

모든 프로젝트는 어렵다. 그중 한국판 ‘반지’가 가장 모험적인 프로젝트다. 한국에서 한 번도 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고, 후원, 홍보 및 조직에 관련된 모든 사람이 함께 참여해야 하기에 어렵다. 하지만 우리가 수행하는 작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속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고, 이것은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모든 극장 관계자와 관객들도 우리와 같은 마음이길 기원한다.

-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사진 전민규기자

201811호 (2018.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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