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이지윤의 art TALK (13)] 컬렉터이자 큐레이터 주세페 판자 

'빌라 판자' Giuseppe Panza 

이지윤 미술사가 ‘숨’ 프로젝트 대표
바레세(Varese)라는 도시가 나온다. 그곳에 아주 특별한 미술관이 하나 있다. 2000년에 개관한 20세기 미국 최고 작가들의 컬렉션 미술관이다. 사람들은 댄 플래빈의 최고 작품들을 보려면, 뉴욕이 아닌 바레세에 가야 한다고도 한다. 더군다나 요즘은 수백억원이 된 마크 로스코, 프란츠 클라인, 솔 르윗, 브루스 나우먼 등 뉴욕 MoMA에 있을 법한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 컬렉션이 이탈리아 북쪽 지방 공립 미술관에 있는 것이다. 이 특별한 컬렉션을 만든, 주세페 판자 컬렉터의 정신과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브루스 나우먼(Bruce Nauman)의 스튜디오에 있는 주세페 판자(Giuseppe Panza)(이 이미지는 주세페 판자와 그의 아들 알레산드로 판자가 1975년 미국 전역을 여행할 때 동반했던 젊은 사진 작가 필립포 포멘티(Filippo Formenti)가 기록한 사진 중 일부다.) ⓒ Filippo Formenti, Milan.
주세페 판자는 1950년대 전후 미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컬렉터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그는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미국의 20세기 중반 추상표현주의, 미니멀리즘, 팝아트, 개념미술 등 최고의 미국 미술을 컬렉션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유럽에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던 미국 미술을 유럽 미술계에 처음 소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숫자는 2500여 점에 이른다. 개인 컬렉터가 이 정도 컬렉션을 거의 마스터 작품들로만 만들었다는 것은 매우 놀랄 만한 일이다.

그는 부동산업과 와인 유통업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어니스트(Ernest Panza)는 백작 지위를 수여했다. 주세페 판자는 1943년 2차 세계대전 중 파시스트 정권을 피해 스위스로 갔고, 거기서 당시 최고 철학자들에 대해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철학자 칸트, 헤겔, 니체, 크로체의 사상에 심취했다. 그뿐만 아니라 오페라, 바그너, 프랑스 문학, 러시아 문학, 인상주의 미술, 모던 프랑스 미술인 브라크와 피카소 등을 접하며 당대 최고의 문화적 기반을 쌓았다.

판자가 미술품 수집을 시작했던 1950년대 말 밀라노 예술계는 추상미술에 매우 비판적 입장이었다. 그는 당시 비주류 미술에 관심을 가진 구이도 르 노치 딜러에게 정보도 얻고, 1957년 미국을 방문하면서 본격적으로 컬렉션을 시작했다.

그의 첫 작가는 프란츠 클라인이었다. 인간의 본성에서 뿜어 나오는 강렬한 힘과 호흡으로 그린, 수묵화와도 같은 작품이다. 특히 아프리카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는 미술이 합리적인 이성의 표현이라기보다 인간의 직감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이며 삶과 시각적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어야했다. 프란츠 클라인은 그의 철학적 태도가 반영된 컬렉션의 시작이었다. 추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필요한 것을 지속적으로 없애는 투쟁으로 단순함을 만들어가는 것인지. 그러한 극도의 이상적 미학을 추구했다.

미술로 진리 탐구


▎빌라 메나포글리오 리타 판자, 바레세(Varese)가든, 메인 분수 정면 ⓒAlessandro Zambianchi, Milan.
“나는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감정은 진리를 발견하는 지식이라고 믿는다. 진리 탐구는 인간의 주된 목표다. 이러한 미술은 단순한 형태로 진리에 대한 탐구를 드러낸다.”

판자는 추상표현주의부터 개념미술에 이르기까지 삶을 사색하는 일관된 미적 취향을 기반으로 컬렉션을 만들어갔다. 하지만 동시에 흥미로운 점은 그가 철학적 사고에 집중된 컬렉터이자 사업가적인 감각이 매우 뛰어났던 사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1958년 봄 밀라노에 있는 아리에테 갤러리에서 프리 컬럼비안(Pre Columbian)과 아프리카 조각(Africa sculpture)을 소개한 [원시 미술(Primitive Art] 전시회가 있었다. 같은 해 바젤 쿤스트할레에서 [새로운 아메리카 미술(New American Art)]이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렸다. MoMA가 기획한 이 전시는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프란츠 클라인, 바넷 뉴먼, 클리포드 스틸과 빌렘 데 쿠닝 등 전후 작가들을 선보였으며 이후 밀라노의 갤러리아 시비카 다르떼 모데르나에서 개최되었고 유럽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예술관을 반영하는 이 새로운 미술에 대한 관심은 그가 마크 로스코 작품 8점을 구입하는 등 본격적인 미국 추상미술 컬렉션에 몰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1960년 그는 두 번째 뉴욕 여행에서 만난 화상 레오 카스텔리를 통해 마크 로스코, 이브 클라인,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 전후 미술의 대표적인 작가들을 만나고,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처음 반응은 안 좋았다. 집안에서도 밀라노 미술계에서도 매우 이상한 미술을 구입하는 괴짜로만 불렸다. 하지만 196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최초로 미국 작가인 로버트 라우센버그가 대상을 받자 판자 컬렉션을 바라보는 이탈리아인들의 인식도 달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컬렉션한 작가들의 중요성이 미술시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이 이탈리안 컬렉터의 미국 작가 컬렉션은 상당히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특히 과거의 대가들을 구입하는 것이 아닌 당시에 새롭게 등단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했다는 점에서 영국의 사치 컬렉터는 자신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컬렉터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컬렉션 구입과 디스플레이


▎빌라 1층 살롱 설치 전경 ⓒAlessandro Zambianchi, Milan.
또 재미있는 원칙이 있다. 그는 자신의 미적 취향에 부합하면서도 합리적인 가격일 경우에만 작품을 구입했고, 컬렉션을 만들어가면서 어울리지 않는 작품을 매매하거나 교환하기도 했다. 보통 작품 매입 시 기준 금액은 평균 1만 달러였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그리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큰 금액도 아니었다. 값이 저렴하면서도 장래성 있는 작품을 구입한 것이다. 특히 1960년에 로스코 작품 8점을 구입하기 위해 1955년 구입한 알베르토 부리(Alberto Burri)와 에밀리오 베도바(Emilio Vedova)의 작품들을 팔거나 이들의 작품과 로스코의 작품을 교환하기도 했다.

그는 600달러를 주고 구입한 라우센버그 작품 2점과 리히텐 슈타인 작품 3점을 각각 1000달러에 팔면서 이윤을 남기기도 했으며, 미니멀리즘 작품들의 경우, 모리스의 다면체 작품과 플래빈의 형광 튜브 작품을 각각 3000달러, 400달러에 구입하면서 평소의 작품 매매 기준치보다 “매우 싼 가격(very cheap)”으로 구입했다고 밝혔다. 지금 들으면 매우 전설적인 이야기들이다. 이런 전설적인 이야기 중에는 그의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기획서(plan) 구입도 있다. 즉, 설치하는 방법을 써 놓은 솔 르윗이나 한네 다보벤 같은 작품은 유통이 용이할 뿐 아니라 거래 및 상속에서도 소비세나 양도세를 낼 필요가 없다. 작품의 개념을 이해하지 않으면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작품들이기에 그러하다.

판자는 자신의 컬렉션을 직접 디스플레이했다. 또 많은 다큐멘터리로 그가 추구하는 이상적 미학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한 설치가 되었지만, 당시엔 매우 새로울 뿐만 아니라 다양한 도전적 담론을 제기할 만한 갖가지 디스플레이를 보여주었다. 즉, 바로크 궁전들, 고대 유럽의 공공장소들뿐만 아니라 자신이 소유한 18세기 빌라 등 역사적인 공간에서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아프리카 예술품 및 동시대의 예술 작품들을 배열하는 혁신적인 방식을 선보이며, 건축적 문맥 안으로 예술 작품들을 끌어들이며 예상치 못한 새로운 다이얼로그를 창조했다. 그뿐만 아니다. 그는 작품을 배치할 때 전시가 줄 수 있는 현상학적 경험을 중시했고 작품과 관객이 다이얼로그를 형성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건물의 건축, 방의 ‘면적(SPACE)’, ‘빛(LIGHT)’은 그가 작품을 공간에 배치할 때 반드시 고려하는 중요한 원칙들이었다. 더불어 그의 컬렉션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놀라는 또 하나의 사실은, 한 작가의 작품을 대부분 시리즈로 구매하는 것이다. 즉, 갤러리 방 하나하나에는 그가 구매한 한 작가의 작품들을 시리즈로 배치할 수 있었다. 언제나 인공조명보다 자연광을 선호했고, 전시장에 거는 커튼 선정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이 타협되지 않으면 전시를 거절할 정도로 자신이 작품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미적 체험을 위한 원칙들을 엄격하게 고수했다. 정말 큐레이터들이 알고 배워야 할, 느껴야 할 모든 것을 담담히 하나씩 만들어가는 수행자였다.

컬렉션 매니지먼트


▎바레세 전원 1층 D에 설치된 댄 플래빈(Dan Flavin) 작품 ⓒAlessandro Zambianchi, Milan.
판자 컬렉션이 시도한 새로운 흐름은 소위 말하는 컬렉션 매니지먼트라 불릴 만한 새로운 시도였다. 즉, 그의 컬렉션은 그가 큐레이팅으로 보여주는 방법 덕분에 더욱 새로운 명망을 얻게 됐다. 그의 컬렉션은 전후 20세기 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특징과 주세페 판자식의 컬렉션 방법이 더욱 조망을 받게 되면서 다른 나라 미술관들에 대여해주는 전시가 많아졌다.

사실, 개인 컬렉션을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수집한 컬렉션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가 매우 중요한 논제다. 자신이 미술관을 만들어 입장료를 받고 운영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또 공공 기금을 받아 운영하게 되면 개인 컬렉터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비전이나 컬렉팅의 색깔을 지키기가 어렵다. 그러한 면에서, 판자는 그의 많은 작품을 기증과 판매라는 방법으로 중요한 미술관과 협업을 시작했다. 사실, 이 부분은 사람들에게 다소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운영 방식은 사실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조명할 만한 부분이기도 하다. 우선 그는 미국 1950년대 이후부터의 작품을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MoCA(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에 장기 대여 및 판매를 했다. 어찌 보면, 로스앤젤레스 미술관은 판자 컬렉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게 중요한 제1기에 속하는 미술품들은 대부분 적은 금액으로 미술관에 매각해 LA MoCA의 영구 소장품이 됐다. 그 이후, 같은 방법으로 1960~70년대의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 작품들은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의 영구 컬렉션이 됐다.

미국 워싱턴 D.C.의 허쉬혼 미술관은 온 카와라(On Kawara), 조지프 코수스(Joseph Kosuth), 브루스 나우먼(Bruce Nauman)과 한네 다보벤(Hanne Darboven) 등 판자 컬렉션 중 개념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판자 컬렉션의 독일 출신 작가 토마스 쉬테(Thomas Schutte)의 작품은 베를린의 플릭 컬렉션(Flick Collection)에 있다. 혹자는 그가 미술품에 투자해 큰돈을 벌었기에 그 돈으로 컬렉션을 만들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투자나 투기로 작품을 구입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가장 먼저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했으며, 또 작가들과 만나 인터뷰해 그들의 작품 비평문을 직접 쓰는 대단한 큐레이터이기도 했다. 최근 ‘사치의 작가들’이란 말로 영국 젊은 작가들 ‘YBAs(Young British Artists)’을 만든 것과 같이, 판자는 순회전을 통해 ‘판자 컬렉션’이라는 명성으로 새로운 컬렉션의 가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미술 컬렉팅에 대한 개념과 비전이 시작되고 있는 시점이니 묵묵히 컬렉터의 길을 걸어온 주세페 판자의 태도와 정신을 한 번쯤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우리는 보통 돈이 있어야만 미술작품을 구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술작품도 때로는 그들이 가야 할 운명적 소장자들에게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를 낳으며 다시 태어나는 것 같다.


▎바레세 전원 1층 H에 설치된 댄 플래빈 작품 ⓒAlessandro Zambianchi, Milan.



▎스튜디오를 방문한 주세페 판자(판자의 1975년 미국 여행을 담은 기록사진 자료 중 일부다.) ⓒ Filippo Formenti, Milan.



▎스튜디오 전경 ⓒGian Sinigaglia - Archivio Panza / Giorgio Colombo, Milan.



▎빌라 1층 갤러리에 설치된 작품들. 1970년대 초반. ⓒGian Sinigaglia - Archivio Panza / Giorgio Colombo, Milan.



▎대마구간에 설치된 작품들: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로버트 라이먼(Robert Ryman), 댄 플래빈(Dan Flavin), 1972 ⓒGian Sinigaglia - Archivio Panza / Giorgio Colombo, Milan.



▎스페인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국립 미술관(Reina Sofia Museum)에 설치된 리처드 노나스(Richard Nonas)의 작품 ⓒGiorgio Colombo, Milan.



▎바레세 빌라 2층에 설치된 스튜어트 아렌드(Stuart Arends)와 포드 베크먼(Ford Beckman)의 작품 ⓒGiorgio Colombo, Milan.
[박스기사] 시기와 작품 특색에 따른 컬렉션

1기 컬렉션(1955~62년): 전후 유럽 미술 작가인 안토니 타피(Antoni Tapie)와 장 포트리에(Jean Fautrier)의 작품 및 추상표현주의 작가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과 마크 로스코(Mark Rothko), 팝아트 작가인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클라스 올든버그(Claes Oldenburg)와 제임스 로젠퀴스트(James Rosenquist)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2기 컬렉션(1969~78년): 브라이스 마든(Brice Marden),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로버트 라이먼(Robert Ryman),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로버트 어윈(Robert Irwin), 도널드 저드(Donald Judd)와 댄 플래빈(Dan Flavin) 등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작품들이다.

3기 컬렉션(1987년~2010년): 작가 스튜어트 아렌드(Stuart Arends), 포드 베크만(Ford Beckman), 크리스티아네 뢰어(Christiane Lohr), 데이비드 심슨(David Simpson)과 윈스턴 로즈(Winston Roeth) 등의 작품들을 수집했다.

※ 이지윤은…20년간 런던에서 거주하며 미술사학 박사/미술경영학 석사를 취득하고, 국제 현대미술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큐레이터다. 2014년 귀국하여 DDP 개관전 [자하 하디드 360도]를 기획했고, 3년간 경복궁 옆에 새로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첫 운영부장(Managing Director)을 역임했다. 현재 2003년 런던에서 설립한 현대미술기획사무소 숨 프로젝트 대표로서, 기업 컬렉션 자문 및 아트 엔젤 커미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1901호 (2018.12.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