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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 대기자의 『큰 생각을 위한 작은 책들』(15)(최종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김환영 대기자
우리가 접하는 『바이블』은 한 권이지만 『바이블』은 가톨릭 기준으로 73권(books), 개신교 기준으로 66권 책의 ‘연합체’다. 『바이블』을 작은 도서관이나 백과사전으로 볼 수 있다. 딱 한 권을 읽는다면 무엇을 읽어야 할까. 복음서의 원조로 꼽히는 『마르코의 복음서』도 유력 후보다.

▎사진:요크 프로젝트 제공
유교를 믿지 않는 미국 사람들도 『논어』와 『맹자』를 읽고 유교의 지혜를 자신의 삶과 비즈니스에 적극 응용한다. 교양이나 자기계발 차원에서 읽는다.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거나 심지어는 그리스도교에 부정적·적대적인 우리나라 사람도 ‘성경’이나 ‘성서’로 번역되는 『바이블(Bible)』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바이블』은 외면할 수 없는 인류의 톱 3 경전이자 문학 고전이다. 미국 대학은 『논어』·『맹자』를 가르친다. 우리 대학들도 『바이블』 관련 강좌를 더 많이 개설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스도교 신자는 물론이고 그리스도교와 맞서려는 사람에게도 『바이블』이 필독서다. 실제로 무신론자들이 유신론자보다 『바이블』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한다. (아이러니다. 이는 무신론자에 대한 유신론자들의 적개심보다는, 유신론자들에 대한 무신론자들의 적개심이 더 강렬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신약의 네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집필

정작 그리스도교 본산에서 『바이블』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공맹지도(孔孟之道)에 회의가 있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미국은 구미 선진국 중에서 가장 열심히 예수를 믿는 나라다. 하지만 1891년에 창립한 라이프웨이(LifeWay)의 2017년 조사에 따르면 『바이블』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이상 읽은 미국인은 20%에 불과하다. 즉 미국인 80%가 평생 『바이블』을 통독하지 않는다. 대다수 미국인은 『바이블』의 일부만 읽는다. 일부라도 읽는다면 『바이블』의 어느 부분을 읽어야 할까.

이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바이블』에 관한 서지학적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우리가 접하는 『바이블』은 한 권이지만 『바이블』은 가톨릭 기준으로 73권(books), 개신교 기준으로 66권 책의 ‘연합체’다. 『바이블』을 작은 도서관이나 백과사전으로 볼 수 있다. 딱 한 권을 읽는다면 무엇을 읽어야 할까. 『창세기』를 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요한 복음서』나 『로마서』를 ‘강추’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르코(마가) 복음서』도 유력 후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첫 번째의 힘’이 있다. 『마르코 복음서』는 복음서의 원조다. 『마태오 복음서』, 『루가 복음서』, 『요한 복음서』의 집필 방향을 제시했다.

『마르코 복음서』가 『신약』의 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집필됐다는 것이 다수 현대 신학자·종교학자·종교사회학자의 중론이다. (18, 19세기까지는 『마태오(마태) 복음서』가 최초 복음서로 인식됐다. 그래서 『신약』에서 『마태오 복음』이 제일 먼저 나온다. 『마르코 복음서』는 『마태오 복음』의 요약판 정도로 취급됐다.)

『마르코 복음서』가 최초 복음서라는 것은 그만큼 예수의 언행을 원형에 가장 가깝게 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론 제기가 가능하다. 집필 연도를 최우선시한다면, 『마르코 복음서』를 비롯한 복음서보다는, 시기적으로 앞서는 『로마서』를 비롯한 바울(바울로·바오로)의 편지들을 먼저 읽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근거를 확보한다. 또 다른 각도에서 반론이 가능하다. 최후의 복음서인 『요한 복음서』를 가장 완성도 높은 복음서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요한 복음서』가 ‘예수 전기(biography of Jesus)’의 ‘최종 완결본’이다. 『마르코 복음서』는 ‘최초 미완성본’이다. 『마르코 복음서』를 비롯한 복음서의 ‘문학’ 장르는 고대 그리스 전기(傳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5대 세계종교(world religions), 즉 그리스도교·이슬람교·유대교·힌두교·불교 또한 ‘정통·비정통’을 따지는 경향이 있다. (비정통을 ‘이단’이나 ‘사이비’로 지칭하기도 한다. 종교다원주의 입장에서는 ‘이단’이나 ‘사이비’는 없다. 모든 종교가 동등하다.) 대체적으로 정통파는 경전을 종합적으로 중시하고 검토하는 경향성이 있다. 반면 일부 비정통파는 특정 경전 혹은 특정 경전의 특정 부분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경향이 있다.

서술 방식의 원칙은 ‘용건만 간단히’

경전을 읽고자 하는 사람은 두 가지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무엇’의 문제다. 사서삼경이나 불경, 『바이블』 중에서 ‘무엇을’ 읽느냐에 따라 유교·불교·그리스도교에 대한 그 사람의 믿음이나 이해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둘째 문제는 ‘어떤 순서로 읽느냐’다. ‘첫 단추’가 중요하다. ‘첫 단추’가 나머지 단추를 결정한다. ‘첫인상’이 중요하다. 그리스도교 경전 중에서 『마르코 복음서』를 먼저 읽은 사람은 예컨대 『요한 묵시록(계시록)』이나 『로마서』를 먼저 읽은 사람과 관점이 대조적일 가능성이 크다.

『바이블』 중에서 『마르코 복음서』 딱 한 권만 읽거나 제일 먼저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마르코 복음서』에서 복음(good news, gospel)은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다. 한자어로는 희소식(喜消息)이다.

다수 학자가 60년대 말~70년대 초에 완성됐다고 보는 『마르코 복음서』의 책 제목이 확정된 것은 2세기다. 그 전에는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제목이 ‘…에 따른(According to…)’이었다. 원제가 ‘마르코에 따르면(According to Mark)’이었던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의 문체나 서술 방식의 원칙은 ‘용건만 간단히’다. 『마태오 복음서』나 『루가 복음서』와 달리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 탄생에 대한 언급이 없다. 예수의 족보도 나오지 않는다. 『신약』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마르코 복음서』도 그리스어로 쓰여졌는데, 그리스어 원문이 문법적으로 좀 문제가 있다는 평가도 있다.

『마르코 복음서』가 소개하는 예수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해방해 다윗·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재현할 왕이었다.

『신약』 저자들의 주장은 예수가 유대인들이 바란 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제국 당국의 판단은 달랐다. 예수는 십자가형으로 처형됐다. 십자가형은 로마가 국사범(國事犯)을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죄명은 ‘유대의 왕’이었다. 로마제국이 그렇게 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즉시(immediately)’라는 부사가 40번 나온다. 그만큼 뭔가 급했다. 뭐가 급했을까. 곧 도래할 ‘하느님의 나라(Kingdom of God)’에 대비해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게 시급했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가 행한 기적들이 나온다.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 풍랑을 가라앉히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물 위를 걸었다. 어쩌면 이러한 기적들은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데 필요한 수단에 불과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The kingdom of God has come near. Repent and believe the good news.) (공동번역 『마르코 복음서』/신개정표준역 성경(New International Version, NIV) 1:15)” 로마인들이 보기에 ‘하느님의 나라’, 즉 신(神)이 주권을 행사하는 나라는 로마제국과 충돌했다.

예수는 그가 병을 고쳐준 사람들에게 치유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가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떠들어대는 마귀들에게도 함구를 명령했다. 예수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Who do people say I am?”(8:27)고 제자들에게 물었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You are the Messiah.)”(8:29)라고 대답하자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일렀다.

왜일까. 신앙의 눈으로 보면 아직 때가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신앙인의 눈으로 보면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메시아에 대한 예수의 관점과 유대 백성의 관점은 사실 일치했다. 예수는 백성을 결집해 로마인들을 몰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결집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면 그는 잡혀가게 된다. 그래서 그가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해 함구를 명령했다. 예수는 ‘심리학의 천재’였다. 사람의 ‘청개구리 심리’를 역이용한 것이다.

‘말하지 말라’고 하면 입이 더욱 근질근질하다. 말하고 싶어 미칠 것 같다. 결국 못 참고 지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게 된다. ‘너만 알고 있어, 예수가 메시아래. 죽은 사람도 살려냈다고 하더라.’ ‘너만 알고 있어’라는 단서를 통해 ‘예수=메시아’라는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 소곤소곤 아주 은밀하게 퍼져 나간 것이다.

20, 21세기 대한민국에 친일파와 친일파 청산의 문제가 있는 것처럼 1세기 유대에는 ‘친로마파’가 있었다. 로마 사람들은 도로와 항구를 건설했다. 유대는 고대 무역 네트워크의 일부가 됐다. 많은 사람이 새로이 부자가 됐다. 유대 기득권들은 불만도 있었겠지만, 나름 만족하고 행복했다. 그런데 예수가 나타나 그들의 만족과 행복에 딴지를 걸었다. 예수의 죽음은 ‘친로마파’ 유대인들과 로마의 합작 덕분에 가능했다.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의 수난과 부활을 세 번이나 예고했다. 예수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예수는 그 운명의 쓴잔을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예수는 자신의 운명을 신에게 내맡겼다. 어쩌면 예수의 바람(예컨대 죽거나 순교하지 않고 다윗·솔로몬 같은 왕이 되는 것)과 달리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운명이 됐다. 그래서 예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신에게 항의한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15:34)였다.

나에 대한 지지의 양면성 배울 수 있어


▎14세기 『마르코 복음서』 판본의 첫 페이지 / 사진:사르지스 피착 제공
『마르코 복음서』의 원고(manuscript)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원고는 16장 8절에서 ‘빈 무덤’으로 끝난다. 예수의 부활이나 제자들과의 재회, 승천은 나오지 않는다. 재회와 승천이 나오는 더 긴 끝맺음(longer ending)이라 16장 9~20절이 후에 첨가됐다. 마르코는 예수 부활 이후부터 승천까지의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었다. 대신 그는 ‘빈 무덤’이라는 내러티브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려고 한다.

신앙인이 아닌 비신앙인은 ‘마르코에 의한 예수의 복음’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나에 대한 지지(support)의 양면성을 배울 수 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9:40) 하지만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이렇게 말했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12:30) 어떻게 보면 서로 모순되는 말들 같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이 두 말은 지지에 대한 두 측면을 요약한 것이다.

우리는 또 예수에게서 엄격함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10:43)

21세기는 혁명의 시대다. 제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AI) 혁명의 시대이자 가족의 의미가 해체되고 혁명적으로 바뀌는 시대다. ‘혁명가 예수’는 가족에 대해 이런 입장을 취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어머니와 형제들과 누이들이 찾아왔다고 알리자 예수는 이렇게 반응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4:33)고 묻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4:35)

아마도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는 설도 유포됐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 대해 복음 사가 마르코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다윗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스스로, ‘주 하느님께서 내 주님께 이르신 말씀,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 편에 앉아 있어라.’ 하지 않았더냐? ‘이렇게 다윗 자신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모두 기뻐하였다.”(12:35~37)

학자들에 따르면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가 실제로 마르코인지는 알 수 없다. 교회 구전과 전통에 따르면 마르코는 베드로의 통역 겸 비서였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르코가 바로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다. 그는 초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였다고 한다.

- 김환영 대기자 kim.whanyung@joongang.co.kr

※ 김환영은…중앙일보플러스 대기자. 지은 책으로 『따뜻한 종교 이야기』 『CEO를 위한 인문학』 『대한민국을 말하다: 세계적 석학들과의 인터뷰 33선』 『마음고전』 『아포리즘 행복 수업』 『하루 10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말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가 있다. 서울대 외교학과와 스탠퍼드대(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에서 공부했다.

201902호 (201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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