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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의 3세 경영… 3·1운동 100주년 특별전 시작한 전인건 관장 

“할아버지의 문화보국 정신, 재미있는 전시로 되살릴 터” 

정형모 전문기자
일제 강점기, 기와집 열 채 값을 아낌없이 내주고 고려청자와 맞바꾼 사내가 있었다. 그 사내 덕분에 훈민정음 해례본도, 신윤복의 미인도도 지금 우리 곁에 온전히 남아 있다. 이제 그의 손자가 나서 할아버지가 지켜낸 보물과 ‘문화보국(文化保國)’ 정신을 수호하겠다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전인건 간송미술관 관장이 이번 전시에 나온 ‘백자청화철채동채 초충난국문병’(국보 제294호)을 전사한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간송이 1936년 경성미술구락부에서 치열한 경합 끝에 거머쥔 진귀한 보물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해,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1월 4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디자인박물관에서 시작된 ‘삼일운동 100주년 간송특별전, 대한콜랙숀’(3월 31일까지)은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전시다. 일제의 문화재 수탈에 맞서 만석꾼 재산을 오롯이 우리 문화유산 수집에 바친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예리한 안목, 결연한 의지와 두둑한 배짱을 한눈에 느껴볼 수 있는 자리다. 특히 이번 전시는 지난해부터 간송미술관을 맡게 된 간송의 손자 전인건(48) 관장이 기획에 참가한 첫 전시로, 3세 경영인으로서의 조심스러운, 하지만 굳은 각오가 배어 있다.

중책을 맡았다.

지난해 4월 아버님(전성우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 1934~2018)이 돌아가시고 긴급 이사회가 열려 숙부님이 이사장에, 저는 관장에 선임됐다. 간송이라는 브랜드를 활용해 어떻게 우리 사회에 문화적으로 공헌할 것인가. 이것이 제가 할 일이라 생각한다.

간송은 어떤 분이셨나?


▎왼쪽부터 간송이 1935년 일본인 골동상에게 당시 기와집 열 채 값을 주고 산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제68호), 간송이 영국 변호사 존 개스비에게서 1937년 인수한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국보 제270호)과 ‘청자오리형연적’(국보 제74호)
할아버님은 제가 태어나기 전인 1962년에 돌아가셨기에 직접 뵐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단순한 컬렉터는 아니셨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남의 나라로 넘어가는 것을 막는 게 할아버님의 최대 목표였다. 해방 이후에는 새로 구입한 컬렉션이 거의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제 광복이 되었으니 누가 사든 조선인의 손에 남는다. 나는 좀 게을러져도 될 것 같다’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한다.

간송 소장품의 특징은 무엇인가?

일제에 의해 사라지는 우리 문화재를 지켜내고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그냥 컬렉터가 예를 들어 김홍도의 그림만 모은다면, 간송은 단원뿐 아니라 그의 스승과 제자에 이르기까지 계통을 파악해 모두 수집했다. 후대가 미술사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책은 같은 책이라도 2권 이상 사들였다. 상태가 좋은 것은 보관용이고, 나머지는 연구용으로 쓰기 위해서다.

소장품의 양은 어느 정도인가?

한적(옛날 한자 서적), 그림, 도자기 등이 있는데 ‘건’으로 계산한다. 예를 들어 혜원 전시첩에는 그림이 30점 들어 있지만 1건이다. 그렇게 따져 1900건가량이 있다.

전쟁 때는 어떻게 했나?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이 철수하며 간송에게 열차 1량을 배부했다. 턱없이 부족했다. 미처 싣지 못한 물건들은 여러 곳에 꽁꽁 숨겨놓고 갔는데, 기차로 열흘 걸려 부산에 도착해보니, 거기서 이미 팔리고 있었다고 하더라.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에 나가 보니 거기서도 고서적들을 발견했다. 그때 다시 구입한 게 전부다.

어떻게 돌아가셨나?

급성신우염으로 돌아가셨는데, 당시 미국 유학 중이던 아버님께는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 아버님은 넉 달이 지나 큰고모님의 편지를 받고 돌아가신 사실을 알게 되셨는데, 굉장히 상심이 크셨다. 이미 계약된 전시와 강연 일정을 마치고 1964년 귀국하셨다.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나?

서울대 미대를 다녔고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아트 인스티튜트(학부)·오클랜드 밀즈 컬리지(석사)·오하이오 주립대(박사·미학 전공)를 졸업하셨다. 마르키스 인명사전(Marquis Who’s Who)에 한국 예술가로는 처음으로 이름이 등재됐을 정도로 유명한 추상화가였다. 귀국해 서울대 교수도 3년간 하셨는데, 학생들에게 우리 문화재의 미감을 알려주기 위해 처음으로 답사라는 것을 시작하셨다. 25년간 보성고 교장으로 일하시다 1996년 퇴임하고는 밀린 작품 활동을 하셨다. 제게 이거 해라, 저게 좋다는 말씀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 가훈 같은 것도 없다.

본인은 무슨 공부를 했나?

어릴 적부터 역사를 좋아했다. 미국 오리건주에 있는 루이스앤 클락 대학교 사학과를 나왔다. 150년 된 작은 학교로 인문학에 특화된 학교다. 고려대에서 교육행정학 석사도 수료했다.

미술관 운영에 대해 고민이 많았을 텐데, 어떤 일부터 하고 싶나?

간송미술관은 최초의 사립미술관으로 유네스코협회 회원이지만, 지금까지 등록 미술관은 아니었다. 당시 법규로 일 년에 300일 이상 공개해야 했는데,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근데 최근 법이 바뀌었다. 일 년에 90일 이상 공개하면 된다. 이 정도라면 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계획한 프로젝트에는 어떤 것이 있나?

성북동 간송미술관 앞에 수장고(연구소+보존처리실+강의실)를 새로 짓는 일이 드디어 본격화된다. 문화재청·서울시와 함께한다. 올해 설계를 마치고 2020년 준공 예정이다. 1938년 준공된 최초의 모더니즘 건물인 성북동 보화각(葆華閣)도 등록 문화재로 등록하고 머지않아 복원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게 1단계고, 2단계는 상설 미술관을 제대로 짓는 일이다. 또 미술관 위에 있는, 건축가 김중업 선생이 지은 사택은 원형을 살려 근대박물관으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 중이다. 집 안에 아버님의 회화, 조각, 판화 등 작품을 설치하고, 전체를 문화공원으로 꾸미고 싶다.

올해 수장고 설계 들어가 내년 준공…상설 미술관 제대로 짓고파


▎간송이 영국 변호사 존 개스비에게서 인수한 ‘청자기린유개향로’ (국보 제65호)를 들여다보고 있는 전인건 관장
일 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각각 보름씩만 문을 열었던 간송 미술관은 새로 문을 연 DDP에서 일반 대중과 좀 더 긴 만남을 가져왔다. 2014년 ‘간송문화전 1부,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가 시작이었고, 이번 전시가 DDP에서의 마지막 전시다.

이번 전시에 처음으로 기획부터 참여했다.

제가 실무를 진행하긴 했지만 오랜 기간 많은 분의 연구와 참여가 누적된 전시다. 아버님과 숙부님 그리고 최완수 선생님을 비롯한 연구진들의 노력이 숨어 있다.

보성학교 이야기가 큰 축을 이룬다.

대한제국 시절 탁지부대신을 지낸 석현 이용익 선생이 1906년 설립한 보성중학교를 간송이 1940년 재단법인 동성학원을 설립해 인수했는데,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3·1운동과 보성 그리고 간송과 보성이라는 맥락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3·1운동의 기폭제는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벌인 2·8독립선언인데, 이를 주도했던 보성 출신의 송계백이 2·8독립선언문을 몰래 가지고 들어와 선배 현상윤(고려대 초대 총장)에게 전했고, 이것이 의암 손병희(천도교 3대 교주) 선생에게 이어지면서 종교 지도자 33인이 참가하는 계기가 됐다. 게다가 3·1운동 당시 전국으로 배포된 ‘독립선언서’는 3만5000장 전량이 보성학교 인쇄소에서 프린트됐고 학생들도 대대적으로 참여했다.

간송은 왜 보성중학교를 인수했나?

간송의 스승으로 33인 중 한 분이었던 위창 오세창 선생이 보성의 운영이사였는데, 조선총독부로부터 직간접적인 압력에 학교가 어려워졌다는 얘기를 전하며 ‘문 닫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경성미술구락부 컬렉션도 흥미롭다.

지금 명동 프린스호텔 자리에 있던 경성미술구락부는 일제가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약탈했거나 헐값에 매입한 물건들을 팔아넘기기 위해 1922년 경성에 설립했다. 간송의 입장에서는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최전선인 셈이었다. 조선인은 참가가 어려워 간송은 신보 기조(新保喜三)라는 눈썰미 좋고 신의 있는 일본인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각종 문화재를 사 모았다.

가장 중요한 작품은?

나중에 국보 제294호로 지정된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이다. 키가 42㎝에 달하는 이 커다란 유백색 병은 국화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 데다, 청색·갈색·홍색이 동시에 구현된 희귀한 명품이다. 이 세 가지 색을 내기 위해서는 각각 산화코발트·산화철·산화동을 써야 하는데, 세 안료 모두 성질이 다르고 소성 온도와 가마 분위기에 따라 발색이 달라진다. 어떻게 이 색을 동시에 구현해냈는지 지금도 잘 모른다.

이 명품을 간송은 어떻게 손에 넣었나?

이 병 얘기를 듣고 경성을 찾은 일본 최고의 세계적인 골동품회사 야마나카 상회의 주인인 야마나카와 1936년 11월 22일 맞붙게 되었다. 군수 월급이 70원이던 시절, 호가가 8000원을 넘기면서부터 두 사람만의 치열한 랠리로 이어졌다. 결국 1만4580원을 부른 우리에게 낙찰됐고, 이는 경성미술구락부 설립 이래 최고가였다. 당시 신문에 ‘간송의 쾌거’라는 기사가 날 정도로 화제가 됐다.

‘갇스비 콜랙숀’은 또 어떤 것인가?

영국 귀족인 존 개스비(Sir John Gadsby)는 20대에 일본으로 건너온 국제변호사인데, 도자기 특히 고려청자에 빠져 20년간 수집해온 인물이다. 그가 수집품을 팔고 귀국한다는 소식에 충남 공주 일대 만 마지기 땅을 판 돈을 들고 급히 도쿄로 달려간 간송은 다른 경쟁자를 제치고 그의 최고급 수집품 20점을 구할 수 있었다. 더 비싼 가격을 제시한 일본인도 있었지만 ‘조선인 컬렉터에게 아름다운 고려청자를 넘길 수 있어 기쁘다’는 것이 개스비의 답변이었다고 한다. 이 스무 점 중 국보가 4점, 보물이 5점 나왔을 정도로 퀄리티가 높다.

미술관 운영이 재정적으로 쉽지 않다. 후원하겠다는 사람은 없나?

말씀들은 많지만 정작 후원은 쉽지 않다. 그래서 작은 후원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소액 기부도 대환영이다. 홈페이지를 통해 후원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다.

앞으로의 포부는?

좋은 미술관은 전시와 교육, 연구가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간송의 소장품을 더 많은 분이 보고 즐기게 하고 싶다. 하이 아트라고 해서 재미없을 이유는 없지 않나. 사람들은 돈을 내면 흥미로운 경험을 얻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간송미술관의 경쟁자는 다른 전시장이 아니라 영화관이다. 100명 중 20명이라도 간송미술관에 와서 즐거웠다고 하신다면, 간송이 미술품을 수집한 보람을 느끼실 것 같다.

- 정형모 전문기자/중앙 컬쳐앤라이프스타일랩 hyung@joongang.co.kr·사진 신인섭 기자

201902호 (201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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