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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대기자의 ‘역설의 리더십’(1) 

술 취한 완적의 세상 바로잡기 

이훈범 대기자 lee.hoonbeom@joongang.co.kr
흔히 쓰이는 말이지만 개념이 모호한 경우가 있다. ‘리더십’이 그렇다. 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생각하는데 ‘꼰대’ 소리를 듣는 게 그래서다. 리더십이 요구하는 덕목이 여럿인 탓도 있지만, 흔히 리더십의 진면목을 놓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리더십의 역설을 찾아보는 첫 발걸음을 죽림칠현의 대표격인 완적에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다.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문자 그대로 ‘대나무 숲속의 현인들’이라는 의미다. 주지하다시피 중국 위진(魏晋) 교체기 때 혼란스러운 현실 정치를 뒤로하고 자연에 묻혀 청담(淸談)이나 주고받으며 세월을 보낸 지식인 무리를 일컫는다. 이들에게서 리더십을 배운다면 웃을 사람이 많을 터다. 기존 질서를 거부하고 위정자들을 경멸하며 거문고나 뜯고 술잔이나 돌리던 사람들에게서? 그들이 나누던 청담이란 게 당시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교 도덕을 넘어서 무위(無爲)를 추구하는 노장(老莊)사상이 깊게 밴 사유철학이었는데? 한마디로 세상을 등진 사람들한테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지혜를 배운다는 게 가당키나 하냐는 말이다.

하나나 그렇게 얘기하면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소리가 된다. 흔히 하는 오해가 죽림칠현이라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은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서 번거로운 세속을 거부하고 자연에 안거했다고 믿는 것이다. 요즘 말로 잘나간다는 강남 아파트도 싫고 산속에 전원주택을 짓고 텃밭이나 가꾸면서 ‘나는 자연인이다’라고 외치는 사람들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그들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그들이 왜 현실 참여를 거부하고 자연에 파묻혔을까를 알아야 한다. 그들이 자연을 선택한 것은 자의가 아닌 타의였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현실 정치에 개입하고자 했던 인물들이다. 그런데 현실 정치가 자신의 뜻대로 바뀔 수 없는 구조임을 내다본 것이다. 그것을 억지로 바꾸려 하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안 것이다. 지혜를 가졌으되 펼칠 수 없어 그저 주머니에 숨겨두고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그들이 세상에 알려져 ‘죽림칠현’이라는 우아한 이름을 오늘날까지 남기게 됐을까. 그저 안빈낙도의 삶에 만족한 이름 없는 필부로서 잊히지 않았을까 말이다.

죽림칠현의 대표자 격인 완적(阮籍, 210~263)만 해도 그렇다. 그는 결코 은둔자가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완적은 나무수레에 술통을 싣고 목적지 없는 길을 떠나던 사람이다. 그러다 막다른 길을 만나면 대성통곡을 했다. 한참을 울고 막혔던 속이 좀 뚫리면 수레를 돌려 다른 길을 찾았다. 그가 은둔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다면 왜 그리 다른 길을 찾아야 했고, 뭐 그리 목놓아 울 일이 많았을까.

그는 그렇게 말이 끄는 수레를 몰아 길을 가다 어느 날 하남 형양의 광무산에 이르게 된다. 서초 패왕 항우와 한고조 유방이 가장 치열하게 맞붙었던 곳이다. 동쪽 봉우리에 쌓은 성에는 항우가, 서쪽 봉우리에 똬리를 튼 성에는 유방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입씨름을 벌이며 10개월 동안 대치했다. 두 성은 200보 거리에 불과했고 그 사이를 오늘날에는 말라버렸지만 광무간이라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영웅 없으니 허명 날리는구나.”

도도히 흐르는 강물 앞에 서서 당시만 해도 이미 폐허에 가까웠을 양쪽 봉우리의 성터를 올려보며 완적은 탄식했다.

“영웅이 없던 시절에 보잘것없는 자들이 이름을 날렸구나(時無英雄, 使竪子成名)!”

이 얼마나 호방한 외침인가. 천하의 항우와 유방을 단숨에 ‘보잘것없는 자들’로 만들어버리다니. 이런 결기의 소유자에게 배울 게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완적의 이런 외침을 누가 세상에 전했을까. 후세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면, 완적에게는 일행이 있었다는 얘기다. 자신처럼 시대를 잘못 만나 뜻을 펼치지 못하는 사람과 동행하며 동병상련의 정을 토로한 것은 아니었을까.

완적은 『대인선생전(大人先生傳)』에서 이렇게 썼다.

“대인에 비하면 규범에 사로잡힌 천하의 군자들이란 얼마나 가소로운 존재들인가. 천지는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군자들은 그저 예법을 고수하느라 여념이 없다. 솔직히 말해 그들은 바짓가랑이에 기생하는 이와 같은 존재들이다. 아무리 기어 다녀도 결국 바짓가랑이 안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스스로 법도를 따른다고 큰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고작 사람의 피를 빨면서 명당을 찾은 양 기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세상일에 무념무상인 사람에게 이런 신랄함이 있을 수 없다. 피비린내 나는 투쟁과 온갖 배신과 배덕, 음모가 판치는 정치 현실이지만 그가 보기엔 어느 편도 옳은 쪽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싸움이었지 옳은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완적의 비판은 그런 위선에 대한 화풀이였다. 그렇다면 그가 바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추구하고자 한 것에 우리가 찾는 리더십의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완적은 관직에 임명되는 것을 벌레 만지듯 기피했다. 하지만 이 말을 뒤집으면 권력자들이 그에게 관직을 주려 했다는 의미다. 실제로 기록에 따르면 당시 실력자 조상(曹爽)은 완적에게 참모인 참군(參軍) 자리를 맡겼고, 뒤이어 사마씨가 권력을 잡은 뒤 위나라 태부가 된 사마의, 대장군 자리에 오른 그의 아들 사마사, 사마사의 동생 사마소까지 권력의 승계자들은 완적을 종사중랑(從事中郞), 산기상시(散騎常侍) 등으로 중용했다. 심지어 사마소는 완적과 사돈관계까지 맺으려고 했다.

싫다는 사람에게 왜 그처럼 벼슬을 못 줘서 안달이었을까. 그만큼 능력을 인정받았고 그로 인해 이미 명성이 높았던 것이다. 완적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예가 하나 있다. 거듭되는 관직 제안을 거절하다 지친 완적은 어느 날 사마소에게 지나가는 말로 얘기했다.

“산동 지방의 동평이란 곳에 가본 적이 있는데, 그곳의 풍습과 인정이 마음에 들더군요.”

사마소는 즉시 그를 동평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동평에 도착한 완적은 먼저 관아를 둘러봤다. 이곳저곳을 두루 살펴본 뒤 취임 일성으로 관아의 담을 모두 철거하라고 지시했다. 요즘도 흔히 그렇지만 관아는 닫힌 공간이었다. 관리들마다 자기만의 공간에서 사무를 봤다. 그래서 관아는 겹겹이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관리들끼리 단절될 수밖에 없었고 일부러 찾지 않으면 대화조차 하기가 어려웠다. 자기 공간 외에는 바로 옆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담을 헐자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동료들 간에 소통이 가능해졌다. 관련된 업무 사이에서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었고 유사한 업무의 중복이 사라졌다. 업무의 효율성과 생산성이 크게 높아진 것이다. 게다가 안팎이 트여 보는 눈이 많아지다 보니 부정이 끼어들 틈이 사라졌다. 부패한 관리들이야 죽을 맛이었겠지만 민원인들의 만족도는 크게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구글이나 페이스북처럼 국제적으로 잘나가는 IT기업들의 사무실은 모두 담장이 없는 열린 공간이다. 심지어 사장실이 따로 없는 회사들도 있다. 그만큼 직원들 간의 대화와 소통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끌어내고 거듭 발전시켜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데 효과적인 까닭이다. 이 같은 현대적인 관리 방식을 완적은 1800년 전에 도입한 것이다.

열린 공간은 복잡하기 짝이 없던 법령의 간소화로 이어졌다. 다양한 경로를 거쳐야 했던 청원과 법 집행이 ‘원 트랙’으로 처리될 수 있었던 것이다. 완적이 원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관아의 공간을 닫힌 채로 놔두고 법령만 정비했다면 실효를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는데 법이 어찌 바뀔 수 있겠나. 하지만 담장을 부수고 문을 열어젖히니 사람이 먼저 바뀌었고 복잡하던 처리 절차가 가능한 한 단순하고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완적이 이 모든 것을 행한 기간은 고작 10여 일에 불과했다. 자신이 추구한 방식이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보이자 완적은 미련 없이 자리를 내던지고 다시 낙양으로 돌아왔다. 그런 완적의 시원시원한 일 처리를 이백 역시 시원시원하게 노래했다.

“완적이 태수가 되어 (阮籍爲太守
나귀 타고 동평을 향했네 乘驢上東平
대나무 쪼개듯 10여 일 判竹十餘日
하루아침에 풍습을 바꿔놓았네 一朝和風情)”


이 일은 당시에도 화제가 됐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완적의 다음 행보를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번엔 어디에 가서 세상을 바꿔놓을까. 그때 완적이 사마소에게 말했다.

“북군의 보병교위(步兵校尉)를 맡고 싶습니다.”

보병교위란 군사 직으로 무관(武官)이 맡는 낮은 직급의 자리였다. 그래도 완적은 보병교위를 원했고, 사마소는 그가 원하는 자리로 보내줬다. 하지만 보병교위가 된 완적이 하는 일이라고는 술 마시는 것뿐이었다. 그가 그 자리에 가고자 한 이유는 분명했다. 북군의 병영에 있는 요리사가 술을 기가 막히게 빚는 데다 병영에 맛있는 술이 3000말이나 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완적이 다른 일은 안 하고 술독에 빠져 산 이유 역시 분명하다. 당시의 시대정신이 또 다른 ‘동평의 개혁’을 허락할 게 아님을 잘 알았던 것이다. 완적이 활동할 시기는 바야흐로 한나라가 망하고 수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기까지 400년 가까운 혼란기, 이른바 위진남북조 시대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잦은 전쟁과 북방 유목민들의 침입, 왕위를 제후가 찬탈하고 그 자리를 또 다른 제후가 빼앗는 혼돈의 연속이었다. 사회의 중심 이데올로기였던 유교가 형식화된 도그마로 전락함으로써 실질적인 윤리는 붕괴돼버린, 무질서가 곧 질서인 암흑의 시기였다.

그런 난세에 지식인들의 행동은 참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지식인이면 목숨을 걸고라도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이런 거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잣대로 과거를 재는 것 말이다. 당시는 지금처럼 민주적인 사회가 아니다. 서슬 퍼런 진시황 앞에서도 간언을 하던 지식인이 스물여덟 명이나 있었지만, 완적의 시대는 그때보다 더 위험한 시기였다. 지식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브레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식인들이 내 편이 아닌 다른 편으로 넘어가는 것을 정치권력이 우려했기 때문이다. 내 편이 아니라면 그저 죽여 없앴던 것이다. 그래서 완적은 이렇게 탄식한 것이다.

“천지가 나뉘고 육합이 열리며 일월성신이 은퇴하는 때에 내가 날아오른들 무슨 포부를 갖겠는가?”

완적은 권력자인 사마소가 총애한 까닭에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사마소가 완적을 총애한 것은 그가 위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사마소의 심복으로 종회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완적을 시기한 나머지 자주 완적의 집을 방문해 그의 사상을 염탐했다. 그러나 갈 때마다 완적이 취해 있었기 때문에 사마소에게 밀고할 구실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릇된 지식인을 백안시


▎중국 난징(南京)의 옛 무덤에서 발견된 위진남북조 시대의 죽림칠현 벽화 모습.
완적은 호불호가 분명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반가운 눈빛을,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에게는 혐오의 눈빛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 유명한 ‘청안백안(靑眼白眼)’이다. 남을 무시하는 눈으로 흘겨본다는 ‘백안시(白眼視)’란 말이 그에게서 나왔다. 완적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관직도 높고 사회적 명성도 있던 혜희가 조문을 왔다. 그때 그는 완적의 백안을 경험했다. 조문을 온 사람한테까지 냉담한 눈빛을 보내다니 심했다 싶지만, 그것이 완적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심리적 보호막이었다. 그릇된 질서에 순응하는 지식인들에 대한 거부감을 그렇게라도 표현하지 않았다면 결코 혼돈의 시대를 살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완적은 백안으로 자신을 지켰지만 혜희는 기분이 좋았을 리 없다. 당연히 불평을 쏟아냈고 그 말을 들은 혜희의 동생은 거문고와 술병을 끼고 완적을 찾아갔다. 상가에 술과 거문고라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완적은 사랑 가득한 청안으로 손님을 맞는다.

“오, 자네 왔는가. 좋은 술과 음악으로 평생 고생만 한 내 어머니에게 작별을 고하려는가.”

그 동생이 바로 혜강(嵆康)이다. 혜강은 완적보다 열세 살이나 어리지만 두 사람은 이후 평생 친구가 됐고, 죽림칠현을 대표하는 두 사람으로 늘 함께 거론된다.

완적은 이처럼 눈빛으로 호오를 숨기지 못했지만, 입으로는 평생 다른 사람을 평하지 않았다. 사마소가 좋아한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신중한 사람이 바로 완적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혜강은 그렇지 못했다.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완적을 염탐했던 종회는 혜강을 흠모했다. 혜강이 평가해주길 기대하며 혜강 앞에 슬쩍 자신의 글을 놓아두기도 했다. 하지만 혜강은 눈조차 돌리지 않았다. 결국 혜강은 종회의 비방으로 사마소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만다.

혜강이 죽은 이듬해 완적은 황제에게 사마소를 진공으로 봉할 것을 간청하는 ‘권진잠(勸進箴)’을 쓰도록 강요당한다. 술에 취해 있음으로써 애써 피했던 일인데 더는 버틸 수 없음을 완적은 깨달은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흔들어 깨우자 일필휘지로 표문을 써준다. 그리고는 더는 존재 이유가 없는 양 몇 달 뒤 삶을 마감하고 만다.

완적은 시대를 잘못 만난 영웅이었다. 하지만 시대와 타협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대와 부딪히지도 않았다. 그저 남들과 다른 행동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수많은 그의 기행(奇行)은 당대의 형식에 치우친 논리와 그릇된 관습을 조롱한 것이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였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완적의 시대에 비하면 오늘날은 자신의 뜻을 펼치기가 얼마나 편안하고 수월한 시기인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다가 목숨을 잃는 것도 아니고, 자칫 권력자의 눈 밖에 나더라도 자리에서 물러나면 그만이다. 이런 시대에 호구지책이 아쉬워 잘못을 고치지 않고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리더로서, 리더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할 일이 아니다. 한순간 망설여질 때마다 완적을 생각해본다면 좀 더 용기를 내는 데 도움이 될 성싶다.

※ 이훈범은…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되었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이고 있다. 역사 속 사건과 인물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1989년 중앙일보에 얽매여 기자로 산 지 30년째, 그중 10년 이상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역사, 경영에 답하다』(2009),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한다』(2010, 공저),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2014), 『품격』(2019)이 있다. 파리10대학 문학박사 과정 수료.

201904호 (2019.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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