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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 대기자의 ‘CEO의 서재를 위한 비즈니스 고전’(2) 

월터 아이작슨 『벤저민 프랭클린』 

김환영 대기자 kim.whanyung@joongang.co.kr
프랭클린은 ‘최초의 미국인’, ‘미국 최초의 기업가’라 불린다. ‘프랭클린은 미국 대통령이 되지 못한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그는 영원히 미국인의 ‘마음의 대통령’인 것이다.

▎사진:국립초상화갤러리
많은 기업인이 자서전과 전기를 애독하는 마니아(mania)다. 기업인은 자서전·전기에서 비즈니스에 필요한 영감을 얻고 위로를 얻고 자신감을 얻는다. 또 성공한 기업인 상당수가 자서전을 쓴다. 후세 사람들이 참고할 만한 기록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서다. 또 본인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전기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다.

기업인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로는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이 빠질 수 없다. 프랭클린은 미국 독립혁명의 4대 문서인 미국독립선언서(1776), 프랑스와의 동맹 조약(1778), 미국의 독립을 승인한 파리조약(1783), 미국연방헌법(1789)의 초안 작성에 모두 참여하고 서명한 유일한 인물이다.

프랭클린은 ‘최초의 미국인’, ‘미국 최초의 기업가’라 불린다. 1847년에 나온 최초의 미국 우표를 장식하고 있는 것도 그의 얼굴이다. 1785~88년에는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도 지냈다. 미국 대통령은 되지 못했다. 초대 대통령은 당연히 조지 워싱턴이라는 분위기였고 프랭클린이 2대 대통령이 되기엔 너무 고령이었다. 조지 워싱턴(1732~99)은 1789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프랭클린은 이듬해인 1790년 사망했다. ‘프랭클린은 미국 대통령이 되지 못한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그는 영원히 미국인의 ‘마음의 대통령’인 것이다.

미국 독립선언 기초 위원 등을 지낸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의 영문판 표지
우리 표준국어대사전은 그를 이렇게 소개한다. “미국의 정치가·과학자(1706~1790). 피뢰침의 발명과 번개의 방전(放電) 현상 증명 등 과학 분야를 비롯하여 고등교육 기관 설립 따위의 문화 사업에도 공헌하였다. 미국 독립 선언 기초 위원·헌법 제정 위원 등을 지냈으며 문학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자서전』을 남겼다. ”

어쩌면 프랭클린 최고의 업적은 『자서전』(1791)을 남긴 것이다. 『자서전』의 어린이용 축약본은 한국이나 미국의 어린이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모든 자서전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솔직하게 쓴 자서전도 일정 부분 주관적이다. 그래서 전기가 필요하다.

눈에 띄는 프랭클린 전기로는 단연 월터 아이작슨의 『벤저민 프랭클린: 어느 미국인의 인생(Benjamin Franklin: An American Life)』(2003)이 있다. 우리말로는 『인생의 발견: 벤저민 프랭클린』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국문판 797페이지, 영문판 624페이지 분량이다. 이 전기는 프랭클린의 『자서전』이 프랭클린의 솜씨 있는 발명품이라고 주장한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니다. 프랭클린은 『자서전』에서 신생 미국의 보통 사람들에게 롤 모델을 제시하고자 했다.

CNN 회장, 타임 주필로 일한 월터 아이작슨은 『헨리 키신저』(1992), 『아인스타인』(2007), 『스티브 잡스』(2011), 『레오나르도 다빈치』(2017)의 전기로 유명하다. 그의 프랭클린 전기는 특히 일론 머스크의 공개적인 지지(endorsement)를 받아 화제가 됐다.

프랭클린은 자서전과 전기를 모두 읽을 가치가 충분히 있는 인물이다. 비누·양초 제조업자인 아버지의 17명 자녀 중 10번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떻게 미국을 대표하는 자수성가 위인이 될 수 있었을까. CEO의 서재에 프랭클린의 자서전과 전기가 나란히 꽂혀 있다면 완벽하다.

프랭클린의 자서전과 전기에서 어떤 법칙이나 원칙, 교훈을 뽑아낸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우리가 인생을 열심히 산다면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다.

프랭클린은 언론인·정치인·혁명가·과학자·외교관·신문발행인·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5명 왕을 알현했으며 하버드·예일·옥스퍼드 등 6개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았다. 기타·바이올린·첼로·하프를 연주할 수 있었으며 프랑스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에 능통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저자인 월터 아이작슨. / 사진:데이비드 생크본
스스로를 발전적으로 재창조한다.

프랭클린의 자기 재창조에 대해 『벤저민 프랭클린』의 작가 아이작슨은 이렇게 말한다. “프랭클린이 발명한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끊임없이 재창조된 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미국 최초의 위대한 평론가인 그는 인생과 저술 속에서 새로운 미국의 원형을 창조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자신만의 얼굴을 대중에게 보여주었으며 후세를 위해 이를 꾸준히 연마했다.”

아이작슨은 프랭클린이 자기 재창조를 통해 미국 국민성(national character)의 정의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프랭클린은 중산층에 기반한 민주주의, 다원주의, 종교적인 관용 등 미국의 핵심 가치를 상징하며,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을 결합한 인물로 기억된다는 것이다.

프랭클린이 가장 좋아한 책 중 하나는 존 버니언(1628~1688)이 쓴 『천로역정(天路歷程·The Pilgrim’s Progress·순례자의 전진(前進)』이다. 선교지에 도착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성경 번역이다. 그들은 문자가 없는 수많은 부족 언어를 역사상 처음으로 표기했다. 성경 다음에는 『천로역정』이 번역 1순위였다.

좋은 취미에서 위대한 업적이 나온다.

프랭클린의 취미는 과학이었다. 프랭클린은 ‘이론 과학자’는 아니지만, ‘실험 과학자’로서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프랭클린은 번개가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전기 현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전기 실험으로 프랭클린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유명해졌다.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는 그를 ‘새로운 프로메테우스’라고 불렀다. 프랭클린은 농업·무역·전략·황열병·암·수면과 같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연구했다. 그의 인구학 연구는 토머스 맬서스(1766~1834)의 『인구론』(1798)에 결정적인 바탕이 됐다.

어느 정도 돈을 번 다음에는 돈벌이는 잊어버린다.

1748년 42세에 돈 버는 문제에서 벗어났다.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1732~57)은 매년 1만 부를 찍었다. 인구나 출판 시장 규모를 고려하면 오늘날의 300만 부에 해당하는 부수다.

프랭클린은 온 인류를 위해 특허를 내지 않은 발명가이기도 했다. 인쇄·출판업으로 상당한 재력가가 된 그는 특허로 더 큰 돈을 벌 생각이 없었다.

서가의 높은 데 있는 책을 꺼내는 장치, 복초점 안경, ‘프랭클린 난로(Franklin Stove)’도 만들었다. 1749년 피뢰침을 발명했으며, 1761년에는 아모니카(armonica)라는 악기도 만들었다.

스스로 정한 몇 가지 인생 지침을 실천하는 집요한 인간이 된다.

벤저민 프랭클린(1706~90)은 작심삼일(作心三日)을 극복하고 ‘작심평생(作心平生)’을 실천했다.

1726년 영국에서 미국으로 귀국하던 20세 청년 프랭클린은 대서양을 바라보며 몇 가지를 다짐했다. (1) 앞으로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검소하게 살겠다. (2) 진실된 언행으로 열심히 일하겠다. (3) 남에 대한 험담을 하지 않겠다.

프랭클린은 완벽한 인간이 되려고 했다. 22세 때 ‘종교의 신앙·행위 조항’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 13가지 덕목 리스트를 뽑은 것이다. 절제·침묵·정돈·결심·검소·근면·진실·정의·중용·청결·평온·금욕·겸손이었다.

독학의 힘을 믿고 부지런히 많이 읽고 많이 쓴다.

프랭클린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준 것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 건강하고 부유하고 현명한 사람이 된다”는 그의 소신과 뛰어난 글재주였다. 감쪽같이 『킹제임스바이블』의 문체와 일치하는 가짜 성경구절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학교를 10살에 중퇴했지만, 읽기·쓰기를 좋아했다.

순전히 독학으로 짧고, 명료하고, 간단한 글을 연마했다. 이미 16세 때 장안에 화제가 된 글 14편을 이복형이 발행하는 신문에 가명으로 기고했다. “독자의 덕성이나 지식을 향상시키지 않는 글은 좋은 글이라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한 프랭클린은 글에 대한 안목과 성실성 덕분에 인쇄업자로 성공했다.

10대 프랭클린은 글을 잘 쓰지는 못했다고 한다. 자신만의 글쓰기 훈련법을 개발했다. (1) 잡지에 실린 글에 대한 메모를 만들었다. (2) 며칠 동안 글이나 메모를 잊어버린다. (3) 메모를 바탕으로 자신의 방식으로 글을 썼다. (4) 원문과 자신의 글을 비교했다.

프랭클린의 아버지는 시인이 되면 가난하다고 아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프랭클린은 계속 시에 관심이 많았다. 이런 훈련을 했다. (1) 자신이 쓴 산문을 시로 바꾼다. (2) 며칠 동안 잊어버린다. (3) 시를 다시 산문으로 바꾼다.

산문을 시로 바꾸고, 시를 산문으로 바꾸는 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뭘까. 사람은 이성적이자 감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하는 시어(詩語)가 사람의 마음을 점령하는 경우가 많다. 프랭클린은 산문과 시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재주로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하는 협상을 타결할 수 있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는다.

프랭클린은 출세한 다음에도 ‘B. 프랭클린, 인쇄업자’라고 서명할 정도로 인쇄업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자신이 잘못한 일은 인정하고 고백하고 반성한다.

프랭클린은 자신이 완벽한 인간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했다. 하지만 “노력을 통해 더 훌륭하고 더 행복한 인간이 됐다”고 자평했다. 두 가지가 문제였다. 술을 외면하고 물만 마시는 젊은 프랭클린을 영국인들은 ‘물 미국인(Water American)’이라고 불렀다. 젊었을 때 그는 채식주의자였다. 고기 살 돈으로 책을 샀다. 비스킷과 건포도로 끼니를 때우고 확보한 시간으로 공부했다.

프랭클린은 절제 분야에서는 완벽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부자가 된 다음에는 음식 절제에 실패해 성찬(盛饌)과 와인을 즐겼다. 중년 이후는 비만으로 고생했다. 금욕 분야에서도 탈이 났다. 주 프랑스 미국 전권공사(1776~85)였을 때는 백작 부인 최소 3명 등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렸다. 프랑스에서 ‘얼굴이 월면(月面) 만큼 잘 알려진’ 명사였기에 유혹을 뿌리치기도 힘들었으리라. 그런데 『프랭클린』의 저자 아이작슨은 프랭클린과 여성들의 관계가 ‘에로틱’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정신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절대 사과를 변명으로 망치지 말라(Never ruin an apology with an excuse.)”고 말했다. 그의 고백은 진실했기에 과오를 용서받았다.

시대를 앞서간다.

프랭클린도 집에 가사를 돌보는 노예가 1~2명 있었다. 그가 발행하는 신문은 노예 판매에 대한 광고를 싣기도 했다. 하지만 프랭클린은 1787년 노예제폐지론자가 된다. 1790년 노예제 폐지 탄원서를 미 의회에 제출했다. 그는 노예제가 미국의 가치와 충돌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효율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성경이 노예제를 허락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프랭클린의 탄원을 거부했다.

가정적인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도 그의 한계였다. 프랭클린은 아들과 딸의 결혼식에도 가지 않았으며 아내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완벽한 인물은 없다는 것을 벤저민 프랭클린의 전기 『프랭클린』이 알려준다.

1790년 프랭클린이 사망했을 때 무려 2만 명이 그의 장례 행진에 참가했다고 한다. 필라델피아가 생긴 후 최대 인파였다. 그만큼 프랭클린은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상식(Common Sense)』(1776)의 저자가 토머스 페인(1737~1809)이 아니라 프랭클린이라는 풍문이 있었다. 미국혁명 당시에는 그가 영국 전함을 멀리서 불태울 수 있는 거울 무기를 발명했다는 가짜 뉴스도 나왔다.

프랭클린은 “읽은 만한 글을 쓰거나 글로 쓸 만한 행동을 하라(Either write something worth reading or do something worth writing.)”고 말했다.

※ 김환영은… 중앙일보플러스 대기자. 지은 책으로 『따뜻한 종교 이야기』 『CEO를 위한 인문학』 『대한민국을 말하다: 세계적 석학들과의 인터뷰 33선』 『마음고전』 『아포리즘 행복 수업』 『하루 10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말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가 있다. 서울대 외교학과와 스탠퍼드대(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에서 공부했다.

201904호 (2019.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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