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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모가 들려주는 예술가의 안목과 통찰(2)] 사진 실험가 황규태 

“나는 확대하고, 발견하고, 선택한다” 

정형모 전문기자&중앙 컬쳐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 hyung@joongang.co.kr / 사진 권혁재 중앙일보 사진전문기자
사진가 황규태(81)는 젊다. 늘 야구 모자에 흰색 티셔츠, 청바지 차림으로 수동 기어 ‘차’를 몰고 다니는 스타일 때문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호기심이 많다. 게다가 예쁜 것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즉각 반응하는 찬미주의자다. 그의 사진도 기존의 형식적 굴레를 벗어난 지 오래다. 디지털 화면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인간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감춰진 아름다움을 길어 올려 우리 눈앞에 불쑥 꺼내 놓는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지금까지 이런 사진은 없었다. 이것은 사진인가 그래픽인가”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그가 새 전시를 시작했다.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삼청점에서 3월 7일부터 4월 21일까지 열리는 ‘픽셀(PIXEL)’이다.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삼청점에서 ‘픽셀(PIXEL)’ 전을 시작한 황규태 작가가 초대형 작품 ‘픽셀: bit의 제전’ 앞에서 셀카를 찍고 있다.
픽셀은 ‘픽처(picture)’와 ‘엘리멘트(element)’의 합성어다. 미국 NASA 제트추진연구소의 프레드릭 빌링슬리가 1965년 달과 화성에 보낸 탐사선에서 찍은 비디오 이미지를 ‘픽처 엘리멘트’라고 부르면서 줄임말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디지털 영상을 구성하는 기초 단위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황 작가의 픽셀 작업은 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우연히 TV 화면을 루페(Lupe·확대경)로 들여다본 일이 시작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미지들이 그 속에 있었어요. 그걸 촬영해 확대했더니 더 많은 색과 무늬가 나오더라고요. 그걸 다시 확대하고, 촬영하고, 다시 확대하고 촬영하고…. 이 작업을 계속 반복하면서 내 마음에 드는 색과 모양을 골라내죠. 그러니까 저는 확대하고, 발견하고, 선택할 따름입니다.”

“사진은 사진이어야만 되는 것일까”


▎황규태 작가의 ‘pixel’(2018), pigment print, 222×150㎝ / 사진:아라리오 갤러리
1938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그는 동국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63년 경향신문사 사진기자가 됐다. 독자적으로 사진을 연구해오던 그는 65년 미국으로 건너가 할리우드의 슬라이드 현상소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장난’을 시작했다. 흑백 스트레이트 사진을 넘어서, 사진가들이 신성시하던 필름을 불에 태워도 보고(버노그래피 burnography), 다른 시공간에 있던 두 피사체를 한 장의 사진으로 합성(몽타주 montage)하는가 하면, 두 장 이상의 필름을 겹쳐 인화하고(이중인화, 다중노출), 다른 사진을 갖다 붙이며(콜라주 collage), 형태를 왜곡하고, 한도 끝도 없이 확대하는 등 실험적인 방법을 여럿 시도한 것이다.

“재미있어서 했지. 필름 태우는 작업만 하더라도 뭐가 어떻게 나올지 전혀 알 수가 없잖아요. 그런 의외성이 작업하는 재미를 배가시킨 것 같애. 내가 또 궁금증 환자거든.”

박상우 서울대 미학과 교수는 그에게서 과거의 인습과 현재의 안주를 넘어서려는 ‘아방가르드(avant-garde)’ 정신을 본다. 기존 전통예술의 극복, 전위적 예술 추구, 과학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관심,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 허물기, 예술과 삶의 일치를 구현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 황규태에게 예술은 실재의 복제가 아닌 변형”이라는 박 교수의 말에 황 작가는 이렇게 대답할 듯하다.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어느 범위를 넘으면 사진이 아니라고 할까. 사진은 사진이어야만 되는 것일까. 그 시절의 의문들은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는 DNA 분자들이다.” (『황규태』중, 열화당, 2005)

그의 초기 사진은 감성이 뚝뚝 묻어나는 흑백 스트레이트 사진이었다. 그런데 2016년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블로우업 아메리카(bLowUP aMeriKa)’전에 나온 60~70년대 흑백사진에서는 그의 ‘확대 본능’이 살포시 감지됐다. 바짝 붙어서서 마주 보는 젊은 남녀의 모습을 무릎 아래만 보여주는 사진의 경우, 멀리서 찍은 뒷 다리 부분만 확대한 덕분에 입자가 굵어져 연인들의 아스라한 느낌을 더욱 강조하는 식이다.


▎‘pixel’(2018), pigment print, 50×50㎝ / 사진:아라리오 갤러리
박 교수는 황규태 사진 미학을 시기적으로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앞서 언급한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흑백사진 시기다. “그의 60년대 흑백사진은 당시 한국 사진의 대립하는 두 경향, 즉 리얼리즘 사진과 조형 추상주의 사진을 모두 받아들였으며 이 시기에 이미 이중노출이나 몽타주 기법을 과감하게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두 번째는 미국으로 건너간 뒤 컬러필름을 활용해 스트레이트 대신 실험적인 사진을 본격적으로 시도하는 시기다. 앞서 말 한 1920년대 아방가르드 스타일의 다양한 테크닉 외에 현미경 사진이나 천체·항공 사진, 엑스레이 사진까지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76년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그림으로 만 가능했던 환상의 세계를 사진으로 표현할 수는 없을까 하고 연구했던 것”이라며 “도저히 한 장의 사진으로는 내가 표현하고 싶은 세계를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이 같은 그의 혁신적인 작품 세계는 미국 예술계에서도 관심을 끌었다. 미국의 세계적인 사진 잡지 ‘파퓰러 포토그래피(Popular Photography)’에서 특집으로 소개한 것을 비롯해, 다양한 현지 매체에 소개됐다.

마지막으로 2000년대 이후 본격화된 ‘확대’ 사진의 세계가 있다. TV 화면의 입자나 컴퓨터 모니터의 픽셀, 심지어 문방구에서 파는 작고 동그란 스티커를 크게 확대해 소격 효과를 추구했다. 디지털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그가 포토숍을 자유자재로 이용해 만들어내는 세상은 존재하지만 볼 수 없었던, 미지의 영역에 첫 발을 디디는 설렘을 준다.

잘 놀아야 멋진 예술이 나온다


▎‘pixel’(2018), pigment print, 175×120㎝ / 사진:아라리오 갤러리
기계비평가 이영준은 “본격적으로 디지털 이미지를 다루기 전인 1990년대에 이미 대형 카메라로 사물을 바짝 접사해 찍는가 하면 물의 표면에 비친 빛이나 먼지를 찍는 작업으로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에 대한 관심을 보여왔다”며 “한 알의 모래알에 서 우주를 본다는 것은 바로 황규태의 얘기”라고 설명했다.

삼청동 초입에 있는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2층은 봄날의 정취로 가득했다. 노랑·분홍·하늘색 빛 고운 사진들이 개나리처럼, 진달래처럼 갤러리 벽면을 오종종히 메우고 있었다. 픽셀을 수백 배 수천 배 확대하다 보면 나오는 의외의 색깔과 모양에 작가는 적잖이 흥분한 눈치다. 아직 안경도 안 쓰고 혼자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매번 신기해하고 기뻐한다는 그다. “나도 어떤 색이, 어떤 무늬가 나올지 예상하지 못해요. 인위적으로 색이나 형태를 조정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보이는 대로 즐기시면 돼요. 의미는 없어요.”

이번 전시에는 2년간 작업한 ‘픽셀’ 시리즈 30점을 내놨다. 특히 지하 전시장에 설치된 두 점의 대형 사진은 시선을 압도한다. 우선 ‘픽셀: bit의 제전’은 가로 6m50㎝, 세로가 2m80㎝에 달하는 대작이다. 사각 베갯모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 듯한 무늬가 오방색으로 정사각형 단청을 정교하게 칠한 듯한 느낌을 주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면 그 기하학적 섬세함에 새삼 놀라게 된다. ‘신의 솜씨’를 느끼게 된다.


▎황규태 작가는 “돈 벌겠다며 잠시 작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계속 했더라면 좋은 작품을 더 많이 했을 텐데”라고 아쉬워했다. / 사진:권혁재 기자
‘픽셀: 우주 밖에서 온 편지’ 역시 가로 4m, 세로 2m70㎝에 이르는 대작인데, 온통 새카만 바탕에 기기묘묘한 부호들이 형형색색 촘촘하게 박혀 있다. 황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걸 뽑아 놓고 보니 디지털 시대 상형문자 같더라고요. 우주에서 온, 미래에서 온 편지 같지 않나요. 앞으로 우리 인간들이 쓰고 있는 문자들이 다 없어지고 기계가 사용하는 문자를 쓰게 된다면 이런 느낌 아닐까 싶어요.”

이 평론가는 이 대목에서 황 작가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상상력 혹은 유희력에 주목한다. “나는 알몸의 행성에 예술이라는 옷을 입혀놓고 그와 은밀히 음모 결탁하면서 환희의 맨발로 춤을 춘다”고 한 작가의 말을 상기시키며 그는 “잘 놀려면 체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냥 유희가 아니라 ‘힘 력(力)’ 자를 붙여 유희력이라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잘 노는 데서 멋진 예술이 나온다. 놀기 좋아하는 팔순 노장 황규태가 여전히 젊은 이유이기도 하다.

※ 정형모는… 정형모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

201904호 (2019.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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