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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나간 왕의 몰락 

 

최근 옛 전자상거래 거물이었던 오버스톡닷컴의 설립자이자 CEO인 패트릭 번이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자신이 러시아 스파이 혐의로 기소된 마리아 부티나의 수사에서 정부를 위한 정보원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더는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사임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5월 초였다. 패트릭 번(56)은 힙합 아티스트 에이콘과의 통화를 끊고 맨발로 제퍼슨 호텔 최상층에 있는, 우아한 3룸 스위트를 돌아다녔다. 워싱턴DC의 외교 공관 밀집 지역이 지척에 있는 곳이었다.

번은 미니 바에서 다이어트 콜라와 젤리, 초콜릿을 집어 들고 푹신한 크림색 소파에 앉아 자신이 찾아낸 세네갈계 미국인 유명 인사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다. “음악인이라고 하더군요. 우리 둘은 아프리카에 대한 야심을 함께 나눴죠.” 번은 젤리를 입안에 넣으며 말했다.

1999년 오버스톡닷컴을 인수해 20년 동안 운영한 번은 늘 야심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번의 야심 가운데서도 높은 순위에 있는 것이 아프리카와 그 대륙의 13억 인구를 블록체인 기술로 바꿔놓는 것이었다.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의 기저에 있는, 이제 막 탄생한 이 탈중앙화 분산 장부 기술에 대해 번은 부패가 종식되고, 사람들이 빈곤에서 벗어나고, 개발도상국이 투표·재산 기록·중앙은행 같은 정부 기능을 블록체인으로 전환함으로써 도약을 이룰 수 있는 미래에 대해 마치 정보성 광고처럼 열심히 설명했다. 번의 우선순위 목록에서 눈에 띄게 낮은 것이 하나 있었다. 상장돼 있는 자신의 인터넷 소매 대기업 주주 수천 명의 경제적 이익이었다.

지난 수년간 번은 오버스톡의 막대한 자산 손실에도 불구하고 1년 중 최소 220일은 밖을 돌아다니며 블록체인 찬양에 나섰다. 번은 “앞으로 5년 동안 전 세계 50억 인구를 바꿔놓을 수 있다”며 “최소한 10억이고, 아마 50억까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번은 자신이 왜 미국 수도에 와 있는지, 왜 블록체인과 관련하여 아프리카 측 인사와 가진 회의를 언급하는지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나중에 번이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법무부와의 회의 때문에 워싱턴DC를 방문한 것이었다. 번은 자신이 2015년부터 정부 정보원으로 활동하면서 그의 표현에 따르면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에게 자신과 연인 관계였던 러시아의 발랄한 대학원생 마리아 부티나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부티나는 외국 첩보원으로서 2016년 미국 대선 전후로 보수적인 정치 집단에 침투하기 위해 공모한 혐의를 인정하고 현재 18개월형을 살고 있다.

번의 사직서

번은 사직서에서 자신이 연루된 ‘특정 정부 사안’이 복잡한 ‘사업 관계, 우리 소매 사업에 대한 보험 문제부터 전략적 협의에 이르는 온갖 문제’라고 밝혔다. 번은 자신의 행동이 “미국과 회사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고 주장했지만 구체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번은 사직서를 다음과 같이 알쏭달쏭하게 마무리했다.

“제가 연루된 다른 사안들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은 원하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3년 동안 저는 제가 답은 아는 문제 때문에 나라가 분열되는 모습을 보아왔고, 시민의 폭력 행위가 벌어지는 순간 더는 참지 않겠다고 스스로 약속했습니다. 저의 랍비는 ‘나서는 것’이 단지 정부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임을 제게 깨우쳐주었습니다. 저는 이제 사안을 존경하는 법무부에 맡기고 잠시 사라지고자 합니다. 법무부는 제가 공개적으로 나선 데 대해 이미 분노하고 있을 것이 확실합니다.”

깜짝 놀란 직원들에게 고별사를 마친 뒤 번은 차 안에서 전화로 자신이 짐을 이미 다 싸놓았다고 말했다. 번은 “이제 곧 남미의 한 해변가에 앉아 있을 것이다. 지금은 오직 그 생각뿐”이라며 “요가를 하고 채식주의자가 되어서 몸매를 가꾸는 데 집중하고 싶다”고 말했다.

패트릭 번의 세계는 기묘하다. 번은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자신의 회사에서 전자상거래 개척으로 인상적인 이력을 보이다가 느닷없이 회사를 존폐 위기로 내몰았다. 20년 전 번은 ‘전자상거래의 르네상스적 인물’로 칭송받았다. 1999년 번은 단돈 700만 달러로 재고 처리 매장을 인수하여 전자상거래 열풍에 올라탔고, 결과적으로 시가총액 22억 달러를 보유한 거물이 됐다. 그러나 경쟁이 극심한 디지털 시대에 파괴적 사업 모델은 오래가지 못했고, 한때 혁신 업체였던 오버스톡은 오늘날 한물간 기업이 됐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번은 사임할 때쯤 아마존이나 웨이페어 같은 기업과의 경쟁을 거의 포기했고, 마지막 2년 동안 오버스톡의 소매 사업을 내려놓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번이 21세기를 맞이할 때 전자상거래에 매료됐던 것처럼, 블록체인은 번의 찬란한 다음 목표가 됐다. 그래서 번은 오버스톡의 떨어져가는 자원을 블록체인에 쏟아부었다. 2014년 이후로 2억 달러가 넘는 액수다. 그중 30%는 번이 정부에 팔고 싶어 했던 블록체인 기술 제품을 개발 중이던 초기 단계 기업 18개에 들어갔다. 나머지는 사적인 복수에 쓴 것으로 보인다. 오버스톡은 나스닥의 블록체인 버전을 만들고자 했다. 번은 이 기술로 지난 15년 동안 무차입공매도로 자신의 기업에 해를 가했다고 보는 월스트리트의 악당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번은 자신이 ‘신의 일’이라고 불렀던 사업으로 에이콘부터 세계은행, 악명 높은 공매도 거래자 마크 코호데스, 덴버시 등 묘한 조합의 아군들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번의 돈키호테 같은 모험은 큰 벽에 부딪혔다. 대대적으로 공매도가 된 오버스톡의 주가는 2018년 초 87달러에서 오늘날 17달러로 곤두박질쳤고, 시가총액 16억 달러가 증발했다. 한때 수익이 안정적이었던 오버스톡은 2018년 2억600만 달러를 잃었고, 2017년에는 1억1000만 달러를 잃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번은 약 400명을 해고했다.

더 좋지 않은 사실은 오버스톡의 새 전략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버스톡의 주요 암호화폐 상품인 체로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의 수사 대상이 됐고, 기대를 모았던 사모펀드 투자도 물거품이 됐다. 오버스톡의 블록체인 투자 부문인 메디치 벤처스는 아직 의미 있는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으며 2018년에만 6100만 달러 손실을 기록했다. 지금은 페이스북을 비롯한 많은 대기업이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하고 있지만, 번의 블록체인 전략은 오버스톡의 온라인 소매 사업만큼이나 위태로워 보였다.

결국 번에게 충성을 보내던 주주들조차도 반기를 들었다. 그중에는 블록체인 신봉자들도 있었다. 번은 5월에 자사 주식 90만 주를 처분하고 투자자들로부터 전화와 이메일로 항의 폭탄을 받자 씩씩대며 말했다. “솔직히 내가 내 노동과 내 자산으로 얻은 내 돈을 내 삶의 목적을 위해 쓰겠다는데 주주들이 왜 설명을 요구하는지 도대체 모르겠어요.”

번은 고인이 된 존 잭 번의 아들이다. 미시건대를 나온 잭은 수학자이자 저명한 보험 전문가로, 1970년 중반 게이코를 되살리고 워런 버핏을 설득해 게이코에 투자하게 만들었다. 게이코는 결국 버크셔 해서웨이의 가장 큰 수입원이 됐다. 버핏은 한때 번의 아버지를 ‘보험계의 베이브 루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번은 중학교 때 아버지의 친구들에게 이끌렸다.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나스닥 회장을 지내고 이후 샌프란시스코 투자은행 햄브레히트앤드퀴스트(H&Q)의 회장을 지낸 이웃집의 고든 맥클린은 번을 매일 차에 태워서 학교까지 데려다줬다. 버핏은 종종 집으로 초대됐다. 번의 부모는 번이 학교에 가지 않고 이 투자의 귀재들과 어울리도록 허락했다.

번의 아버지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파이어맨 펀드를 되살리고 마침내 화이트마운틴 인슈어런스라는 자신의 보험회사를 설립했다.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아버지의 지분은 그가 은퇴한 2007년 가족 자산의 토대가 됐다.

패트릭 번은 잭의 세 아들 중에 가장 어리고 조숙한 아이였다. 1981년 번은 다트머스로 가서 철학과 아시아 지역학을 공부했다. 졸업 직후 고환암 판정을 받았지만 치료를 받고 두 형과 함께 크로스컨트리 자전거 경주를 즐겼다. 암은 연달아서 두 번 재발해 번이 20대 대부분을 병원에서 지내게 만들었다.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번은 스탠퍼드에서 석사 학위를 밟았다. 1988년 케임브리지대학에 마셜 장학금을 받고 진학했고 마침내 스탠퍼드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번은 중국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를 할 줄 알았고, 노자의 『도덕경』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번은 “나는 실제로 철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번의 졸업 논문은 작은 정부의 미덕을 탐구한 글로, 자유주의자 로버트 노직의 『무정부,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에서 영감을 받았다.

학업에 쏟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번은 1980년 후반에 열심히 부를 추구했다. 번은 “나는 아주 사업 중심적인 집안에서 자라났고… 대학에 남을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1987년 번은 형과 함께 인앳잭슨홀 이라는 파산한 호텔을 100만 달러에 인수하여 몇 년 뒤 400만 달러에 매각했다. 1989년에는 S&L 위기 때 부실채권을 5센트에 매수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 번은 콜로라도에 있는 레드돌리 카지노 개발에 100만 달러 투자를 주도하고 나중에 500만 달러에 매각했다. 번은 미국 곳곳에 있는 버려진 상가지구, 사무소 공간, 아파트 건물에도 투자했다. 번의 아버지는 종종 아들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말년에는 메자닌캐피털에서 15% 수익과 절반의 자본을 챙겼다.

번의 주의를 오랫동안 사로잡은 것은 없었다. 1994년 번은 뉴햄프셔에 있는 공업용 손전등 부품 업체 센트리컷에 투자를 주도하고 현 경영진이 병에 걸린 동안 잠시 CEO를 지냈다. 1997년 번은 이 회사를 떠나 경찰, 소방관, 군인용 제복을 제조하는 버크셔 해서웨이 소유업체 페크하이머 브라더스를 경영했다. 1999년에는 남은 재고를 온라인에서 처리할 기회를 포착하고 자신의 투자지주회사 하이플레인스 인베스트먼트를 통해 D2-디스카운드 다이렉트의 다수 지분을 700만 달러에 인수했다. 번은 이 회사 이름을 오버스톡으로 바꿨다. 55곳의 벤처투자사에서 자금 조달을 거부당한 번은 가족과 친구, 자신의 수표책에 의존해 자금을 모았다. 타이밍은 완벽했다. 오버스톡은 가전, 보석, 스포츠 용품 등 여러 업종의 파산한 닷컴기업들로부터 재고를 사들여서 헐값에 팔았다. 2002년 오버스톡 매출은 9200만 달러에 달했고 번은 은행가들이 아니라 투자자들이 공모가를 정하는 역경매 형식으로 기업을 공개했다. 구글이 한 것과 같은 방식이다.

2005년 IPO 이후 급등한 오버스톡 주식은 손실이 커지면서 점차 내려앉기 시작했다. 번은 그것이 무차입공매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무차입공매도는 투자자들이 실제로 주식을 대여하지 않고 레버리지를 활용해 매도하는 불법적 관행이다. 악명 높은 2005년 컨퍼런스콜에서 번은 헤지펀드, 기자, 규제 당국이 합심하여 회사 주식을 마치 ‘시스 로드’처럼 보이지 않는 위협으로 끌어내리고 있다고 역설했다. 오버스톡은 무차입공매도를 일삼던 헤지펀드 로커 파트너스와 회사에 비판적이던 조사 업체 그래디언트 애널리틱스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 다음 2007년에는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크레딧스위스 등 월스트리트의 11개 대형 은행에 35억 달러 규모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이 “불법적 대규모 주식 시장 조작 음모”를 꾸며서 무차입공매도로 회사 주가를 왜곡했다는 것이었다.

오버스톡의 내리막길

이 성전에서 번은 이사 2명을 잃고 아버지의 신임도 잃었다. 번의 아버지는 아들이 오버스톡의 핵심 사업에서 멀어졌다고 믿고 이사회에서 물러나겠다고 위협했다. 이 소송은 10년 넘게 계속됐고 2016년 메릴 린치로부터의 2000만 달러 지불을 비롯한 소액의 합의금으로 끝을 맺었다. 해당 주식을 담당했던 애널리스트인 톰 포르테는 “내 생각에 번은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전쟁에서는 패배했다”고 말했다. 번이 공매도를 뒤쫓느라 세월을 허비하는 동안 오버스톡 주가는 폭락했고 매출은 천천히 상승했다. 2008년에는 8억300만 달러, 2013년에는 13억 달러, 2018년에는 18억 달러였다. 번이 즐겨 주장하듯이 오버스톡은 아마존이나 웨이페어 같은 큰 손실을 입지는 않았지만 수익 역시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오버스톡은 2009년 흑자를 냈고, 이후 8년 중 7년 동안 조금씩 이익을 내며 근근이 버텼다.

2017년과 2018년에 번은 자신의 관심을 암호화폐와 블록체인으로 돌렸고, 회사는 적자를 보기 시작했다. 2년 만에 3억1600만 달러나 잃었다. 지난 수익의 두 배가 넘는 액수였다. 번은 회사의 주가 하락을 현금이 풍부한 경쟁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번은 “내가 인내심 있는 사람들이 5000만 달러, 10억 달러, 아니면 30억 달러를 잃는 업계에 종사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현금이 무한한 듯한 모방 기업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웨이페어를 향한 질투심과 경멸이 여실히 드러난 발언이다.

그러나 과거 직원들은 번이 공매도 성전에 너무 매몰되어 경쟁사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회사 내부에서는 열정적으로 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가 이내 관심을 잃고 마는 번의 ADD 경영 스타일을 농담 삼아 오버스톡 ‘오볼루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2004년 오버스톡은 수백만 달러를 들여서 이베이와 유사한 온라인 경매 플랫폼을 개발했으나 수익을 내지 못했고 2011년에 문을 닫았다. 번은 나중에 이 서비스를 유지했어야 했다고 돌이켰다. 2014년 오버스톡은 40만 달러를 들여 반려동물 보호소와 함께 동물 입양 서비스를 개시했다. 이 서비스는 지금도 운영되며 ‘공공서비스’로 묘사된다. 또 오버스톡은 2014년 집, 자동차, 중소기업 보험까지도 판매했다. 번은 ‘장기적인 수’라고 설명했지만 불과 3개월 뒤에 실적이 “딱히 좋지 않다”는 이유로 모두 중단했다.

오버스톡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을 맡았던 채드 허프는 “번은 뭔가에 매우 집중하지만 재정적으로 효과를 보지 못하면 해고를 강요한다”며 “사업이 시작됐다가 금세 중단된다. 아니면 아직 반 정도밖에 진전되지 않아서 별로 좋은 상태가 아닌데도 출시된다”고 말했다.

번이 사임하기 몇 달 전 오버스톡의 새 본사(위에서 보면 ‘V’사인처럼 보이도록 설계됐다)가 있는 유타주 워새치산에 호우가 쏟아졌다. 번은 예정된 사업상의 점심 식사를 마치고는 사라졌다. 몇 분 뒤 비서가 번을 찾아내자 번은 펄프 픽션과 밥 말리 포스터가 붙어 있어 기숙사 느낌이 나는 사무실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번은 자리에 앉아 오버스톡에서 보낸 지난 20년을 반추하며 “마치 상상 속의 나라 같다”고 말했다. 검은 긴소매 티셔츠에 청바지와 테니스화 차림이었다.

이상하게도 번의 오버스톡은 행동주의 주주 캠페인이나 이사회의 반대를 겪지 않았다. 무엇이 번을 갑작스럽게 떠나게 했는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마크 코호드 같은 투자자들은 번에게 CEO에서 물러나 회장직으로 옮기라고 요구해왔다. 최근의 주식 매도에도 불구하고 번은 14% 지분을 소유한 회사의 최대주주이며, 자신이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번은 “주주의 압박이 문제가 아니다. 유일하고도 실질적인 문제는 히스테리를 부리는 보험 업체들”이라고 말했다.

번은 2013년 하반기부터 암호화폐에 관심을 보이며 직원들에게 연휴 기간에도 일을 계속해서 비트코인 결제 기능을 빨리 출시하라고 요구했다. 비트코인 가격은 그해 13달러에서 1000달러 이상으로 치솟았고 2014년 1월 오버스톡은 비트코인을 결제 수단으로 인정하는 첫 주요 소매업체가 됐다.

머지않아 번은 오버스톡의 잔고를 더 규모가 큰 블록체인 사업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 절정에는 디지털 주식 거래소 체로가 있었다. 투자자들이 주식, 채권, 부동산, 사모펀드, 예술품 등을 나타내는 소위 증권 토큰을 블록체인상에서 거래할 수 있게 지원하겠다는 거래소였다. 지지자들은 이 거래소가 특정 투자에 대한 접근성과 유동성을 높이고 주식과 채권의 결산 시간을 최대 이틀에서 불과 몇 초로 줄여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게다가 이 시스템은 매수와 매도 주문 사이에 시차가 없기 때문에 무차입공매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긍정적으로 보면 체로는 대안 거래 시스템으로서 라이선스를 취득하는 등 규제 요구 조건을 충족하는 성과를 거뒀다. 문제는 체로 플랫폼상에서 거래 가능한 토큰이 오버스톡과 체로 자체의 주식을 나타내는 두 종류밖에 없어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버스톡은 올해 말까지 5~10종의 토큰을 출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난 5월 오버스톡은 사우디 부동산 대기업 에마르 프로퍼티와 제휴를 발표하면서 20억 달러 규모의 부동산, 증권, 스타트업을 디지털 토큰으로 만들어서 블록체인상에서 거래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오버스톡은 등록 수수료, 거래 수수료, 자산 대출 이자 등으로 수익을 창출하려 하지만, 그에 앞서 우선 믿을 만한 발행인과 투자자를 플랫폼에 유치하여 유동성부터 확보해야 한다.

번은 체로의 일부분으로 증권 대여 플랫폼도 개발하고 있었다. 연금 펀드처럼 자산이 풍부한 기관투자자를 공매도 거래자와 연결하여, 기관투자자는 주식을 빌려주고 돈을 벌고 거래자는 빌린 주식으로 거래를 하게 하는 것이다. 양자는 낮은 수수료로 이득을 보고 블록체인이 지원되는 디지털 위치 영수증으로 주식이 실제로 주인이 바뀌었음을 입증할 수 있다. 골드만삭스나 모건스탠리처럼 이런 거래에서 중개인 역할을 하는 은행을 위협하는 서비스다. 과거에도 시도된 적이 있다. 쿼드리저브라는 회사가 AQS라는 유사한 증권 대여 플랫폼을 2006년에 만들었지만 은행들이 “AQS를 보이콧해서 유동성이 부족하게 만들자”고 작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2016년 AQS는 400만 달러에 매각됐다.

사업이 망가진 이유

번은 “월스트리트의 마지막 대형 사업”이라며 “연금 펀드는 자신들이 연간 수십억 달러를 뜯겨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돈은 햄튼의 마이바흐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번은 지난 5월 열린 연례 주주총회에서 투자자들로부터 질문 세례를 받았다. 비트코인 가격이 지난 5개월 동안 60% 상승한 데 비해 오버스톡 주식은 추락하고 있었다. 몇 개월간 지연 뒤에 오버스톡은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체로가 아시아 투자기업 GSR캐피털로부터 중국 위안화, 미국 달러, 기타 홍콩에서 거래되는 주식 등의 형태로 불과 500만 달러밖에 받지 못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앞서 오버스톡은 이 거래가 4억400만 달러 규모라고 공언해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번은 호언장담을 하지만 그에 걸맞은 실적은 내지 못한다는 평판을 쌓아갔다. 2016년 번은 대담하게도 투자자들에게 오버스톡이 세계 최초의 블록체인 지분 증권을 발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자본시장의 역사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덧붙였다. 번은 개인적으로 200만 달러의 우선주 공모에서 50%를 사들였다.

2017년 번은 페루 경제학자 에르난도 데 조토 폴라르와 합자회사를 발표하며 블록체인 기반 글로벌 토지 등록 제도를 만들어 “세계 빈곤과 불평등에 도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세부 조항에서 합의하지 못했고, 번은 개인 자산 700만 달러를 들여 새로 설립한 메디치 랜드 거버넌스의 지분 43%를 취득했다.

오버스톡은 2017년 소매 사업 부문 매각을 추진했으나 지금까지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체로의 골치 아팠던 ICO도 있었다. 본래 2억5000만 달러를 모금할 계획이었으나 암호화폐 가격이 떨어지면서 2018년 8월 모기업 오버스톡이 2150만 달러를 소비한 끝에 1억500만 달러를 모금하는 데 그쳤다. 이 ICO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의 ICO 전반에 대한 수사의 일환으로 조사를 받고 있다.

대다수 투자자는 번의 약속에 질릴 대로 질렸다.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강사로 2017년 이 회사에 투자했다가 지난가을에 주식을 매도한 케빈 막은 “기본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약속하거나 시장에 신호를 보내는 모든 사업을 앞당기고, 3~6개월 만에 해치워버린다”며 “경영진으로부터 받는 정보가 더는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결국 투자를 중단했다”고 말했다.

결국 번은 자신의 꿈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자금을 찾아 막대한 시간을 들여야 했다. 2017년 11월 오버스톡은 번의 어머니(어머니 이름으로 된 신탁이 회사 지분 5%를 보유한다)와 형으로부터 이자율 8%로 4000만 달러를 빌렸다. 이후 몇 개월 동안 암호화폐 열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주식을 담보로 조지 소로스 등 두 명의 투자자로부터 1억5000만 달러를 받았다. 투자자들은 자신들의 주식을 모두 처분했다. 2018년 8월과 9월 이 회사는 ‘시장가’ 공모로 일반주를 새로 발행하여 9500만 달러를 추가로 확보했다.

문제는 주가가 떨어질 때 주식을 환매하는 대다수 기업과 달리 오버스톡은 회사 자본을 희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지불 주식은 지난 2년 사이 2500만 달러에서 3500만 달러로 늘었다. 2019년 1분기 오버스톡은 또한 차례 주식 매매에 나서서 3100만 달러를 모금하고 5100만 달러의 현금 손실을 일부 메웠다.

그러는 동안 오버스톡의 본래 사업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2016년 회사를 떠난 오버스톡의 전 사장 스토미 사이먼은 “소매 사업을 운영하는 건 일종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결코 번의 우선 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이후 소매 사업 부문에서 수차례 정리해고가 있었고, 오버스톡의 1억 달러짜리 새 본사 건물에는 빈 책상이 늘어갔다. 그럼에도 블록체인 직원들에게 번은 대디 워벅스와 같은 존재였다. 체로 CEO 사움 누르살레히는 지난해 480만 달러를 받았고, 번의 형이자 체로의 상무인 나리먼은 100만 달러를 받았다. 체로 최고기술책임자 아미트 고얄은 180만 달러를, 그의 형제인 수미트는 추가로 76만5000달러를 받았다.

오버스톡의 최근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이 회사는 현재의 의무를 향후 12개월까지는 감당할 수 있지만, 그 이후에는 “우리 전략의 일부 또는 전부를 완전히 수행하려면” 추가 자본이 필요하다. 이 불길한 발표는 오버스톡의 주가 하락과 관련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미 투자자 대부분이 회사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번은 월스트리트나 옹졸한 주주들에게 존중을 표한 적이 없다. 그것이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든 원인일지도 모른다. 번은 “우리는 북극의 빙하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러시아 쇄빙선과 같습니다. 한 번에 약 3m씩 전진하고 엄청나게 비쌉니다”라고 말했다. “만약 여러분이 돈의 액수를 우리와 같이 취급하고 수십 조의 자본을 해방시킨다면… 아마 그 안에 엄청나게 많은 돈이 있을 것입니다. 이를 모델링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죠.”

[박스기사] 패트릭 번의 파란만장한 생애

1976년 - 번의 아버지 잭이 위기를 맞은 게이코로 가서 회사를 살려놓고 워런 버핏의 투자를 이끌어낸다. 나중에 버핏은 잭을 ‘보험계의 베이브 루스’라고 불렀다.

1976년 - 10대 때부터 번은 가족의 친구인 워런 버핏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1985년 - 다트머스대를 졸업한 직후 고환암 판정을 받았다.

1986년 - 크로스컨트리 자전거 여행에 나섰다. 몇 년 뒤 세 번째로 암을 이겨냈다

1989년 -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마셜 장학생으로 잠시 공부했다.

1994년 - 스탠퍼드대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 - 워런 버핏의 제의를 받아 버크셔 해서웨이가 소유한 제복 제조업체 페크하이머 브라더스의 경영을 맡았다.

1999년 - D2-디스카운트 다이렉트의 다수 지분을 700만 달러에 인수했다. 나중에 이름을 오버스톡으로 바꿨다.

2002년 - 오버스톡을 역경매로 기업공개 했다. 나스닥에서 거래가 시작됐다.

2005년 - 무차입공매도에 집착하며 첫 소송을 시작했다.

2007년 - 월스트리트를 대상으로 두 번째 공매도 소송을 제기했다.

2014년 - 오버스톡이 비트코인을 결제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첫 주요 소매업체가 됐다.

2017년 - 소매 부문을 매물로 내놓았다.

2019년 - 번은 FBI 정보원이었다고 밝히고 한 달 뒤 사임했다.

[박스기사] 웨이페어의 세상

최고의 벤처투자자들의 투자를 받은 웨이페어는 손실을 포함한 모든 방면에서 오버스톡닷컴을 능가한다.

[박스기사] 상상의 나라

번의 지도하에 오버스톡은 번의 상상을 실현하는 배양접시가 됐다. 이 전자상거래 업체의 과감한 행보 일부를 소개한다.

2003년 여행 예약 사이트를 출시했으나 돈을 잃고 2007년 1700만 달러에 매각했다. 2011년 번은 다시 여행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정한다.

2004년 경매 플랫폼 출시에 수백만 달러를 들였다. 2011년 폐쇄했다.

2005년 번은 무차입공매도와의 성전을 개시했다. 소송은 10년 넘게 이어졌다.

2006년부터 자동차를 팔기 시작했다. 2017년에 서비스 재출시를 선언했지만 웹사이트는 현재 접속이 불가능한 상태다.

2008년 차압당한 집과 기타 부동산 판매를 시작했다가 3년 뒤 서비스를 중단했다. 2018년에 다시 부동산에 진출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다.

2011년 자동차 및 주택 보험 판매를 시작했다.

2014년 동물 입양 서비스를 개시했다. 지금도 공공 서비스로 운영을 계속한다.

2014년 메디치 벤처스라는 블록체인 투자 부문을 설립했다. 19개 블록체인 기업을 설립하거나 투자했다. 그 일부는 우측 표와 같다.

2014년 현지 농산물을 온라인에서 판매하기 위해 농부들과 제휴했다.

2018년 번은 위기에 처한 삼륜차 스타트업 엘리오 모터스에 빠져서 250만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체로, 블록체인 버전 나스닥을 구축

마인즈, 플랫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토큰을 사용자에게 보상하는 소셜 네트워크

비트, 중앙은행에 협력하며 디지털 통화 발행

스페라, 프리랜서가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돈을 받도록 지원

보츠, 유권자들이 스마트폰 앱을 통해 투표하도록 지원

그레인체인, 농산물을 공급망을 따라 추적

빈센트, 와인 선물 거래소를 운영

메디치 랜드 거버넌스, 잠비아나 르완다 같은곳에서 블록체인상에 부동산 기록 유지

- LAUREN DEBTER 포브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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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호 (202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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