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소울의 삶과 미술심리(8) 

비난에 굴복하지 않고 성장해가는 힘 

사회는 도전하는 사람들에 의해 변화해왔으며, 그 시도는 모두에게 환영받지는 못했다. 미술사의 큰 흐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이즘(-ism)의 시작을 위해서는 도전하는 사람이 필요했고, 그 새로운 흐름을 응원하는 사람보다는 불편해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3.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들

기존의 사회가 가치 있다고 지정했던 것이 아닌, 다른 분야를 개척하고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행동과 목표에 대한 동기가 높다. 동기가 높은 사람들은 과업 지향적이다. 또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감이 높고, 혁신적이다. 수행 결과에 대한 자기책임감도 높고 미래지향적이며, 도전적이다. 도전적이지 않은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안정적으로 전문 분야나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도 분명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는 도전하는 사람들에 의해 변화해왔으며, 그 시도는 모두에게 환영받지는 못했다.

미술사의 큰 흐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이즘의 시작을 위해서는 도전하는 사람이 필요했고, 그 새로운 흐름을 응원하는 사람보다는 불편해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1863년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발표되던 날, 세상은 그의 그림에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다. 정장을 잘 차려입은 신사와 함께 벌거벗은 여인이 풀밭 위에 덩그러니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비평가들이 놀란 것은 단순히 나체의 여성과 남성이 함께 그려져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나체 여성은 그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심지어 마네는 과거의 명작에서 이 그림의 소재를 얻었기 때문이다.

마네는 명작인 티치아노의 [전원음악회]에서 등장인물을, 라이몬디의 [파리스의 심판]에서 구도를 오마주했다. 그러나 마네가 그린 주인공들은 과거 명화 속의 신화나 성서, 역사의 인물들이 아니라 1890년대를 살아가는 당시 현대인들이었다. 풀밭 위에 앉아 있는 두 남성은 마네의 동생과 매제가 될 남자였고, 여성은 모델이자 미술학도인 빅토린 뫼랑이었다.

부드러운 곡선의 아름다움을 가진 여성이 아니라 튀어나온 현실적인 뱃살, 관람객을 빤히 쳐다보는 눈빛은 보는 이들을 불편하게 했다. 살아 숨 쉬는 주변의 사람이 그림에 등장하고, 돈만 꺼내면 바로 접할 수 있는 신비하지 않은 벗은 몸의 여성을 그린 그림은 살롱전에서 그림을 보고 있는 이들의 치부를 드러낸 듯한 위화감을 조성했다.

살롱은 그에게 품위 손상, 지나치게 사실적인 묘사, 거친 붓질에 대해 비난했다. 이에 대해 마네는 동시대 화가들이 아직도 신화와 역사를 그리고 있으며 주체성이 없다는 점을 이야기하며 새로운 시도를 전혀 하지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다른 사람과 비슷한 길을 가는 것은 굉장히 안전하다. 루브르 박물관의 고전적인 그림을 모작한 그림은 잘 팔리고 있었고, 고전적인 화풍으로 신화나 역사화를 그린 그림은 대중적으로 사랑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안전한 길을 버리고 고군분투하기를 택했다.

그러나 당시 모든 화가가 전통만 추구하지는 않았다. 젊은 화가들은 마네의 행보를 응원했고, 그를 새로운 시대의 전설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난의 목소리가 더 높았다. 그의 작품은 [낙선전]에 걸려야 했고, 언론은 그의 작품을 옹호하는 소리가 커질수록 더욱 그를 깎아내렸다.

마네는 티치아노의 명작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재해석하여 빅토린 뫼랑을 모델로 그린 [올랭피아]를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같은 해에 발표했는데, 프랑스 주간 화보 릴뤼스트라시옹의 1865년 6월 3일 자 만평에는 그의 작품을 비판하는 글이 실렸다. 만평에서는 ‘고양이의 꼬리 혹은 비티뇰의 석탄장수’라고 적었으며 ‘추악한 그림’이라 명명했다.

에두아르 마네, 추악한 그림으로 낙인찍히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
만평에서는 고양이 꼬리를 가운데에 눈에 띄게 넣어 성적 이미지를 강조했고, 뫼랑은 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졌다. 모델 뫼랑은 매춘부라며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으나, 그녀는 이러한 조롱을 오히려 담대하게 받아들였다. 현실에 존재하는 매춘부처럼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마네와 뫼랑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스스로 떳떳했고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인기 있는 모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멘토이자 뮤즈 역할을 충분히 잘 소화해내고 있다는 것이 젊은 화가들의 평이었다.

빅토린 뫼랑은 마네와 함께 살아 있는 역사를 함께 이끌어가는 그림을 창조해내고 있었다. “자신감이 없으면 그림의 힘이 떨어져요. 뚫어지게 정면을 쳐다보는 모습이 불쾌감을 주었다면 그 그림은 성공한 거죠. 빨간 벨벳 목줄, 빨간 난초, 금색 팔찌… 소위 ‘매춘부의 소품’들도 거리낌 없이 착용하려 애썼어요.”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에밀 졸라((Emile Zola)는 마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주었다.

“그림에서 철학적 함의를 찾아내려는 사람들도 있고, 좀 더 음탕한 작자들은 외설적인 의도를 운운하면서 흠집을 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마네 당신은 그런 대중에게 큰 소리로 말해주어야 한다. ‘그것은 당신들 생각이지 내 생각이 아니다’ 라고.”

마네는 새로운 미술을 계속해서 그려나갔고, ‘현대미술의 시작’으로 알려진 인상주의의 중심에 서게 됐다. 그의 그림은 한화 4000억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인상이 없는 인상주의


▎폴 세잔 [현대의 올랭피아] 1873.
대부분의 미술 사조는 미술사학자들이 비슷한 장르로 분류되는 예술 장르에 이름을 붙이고 작가들을 분류한다. 그러나 인상주의는 동시대 화가들이 하나의 미술 사조의 이름을 걸고 활동했다는 점에서 특이성을 가진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살롱에서 만났다. 그리고 그의 그림을 보며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림 속 여성은 풀밭 위에서 분명히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배 권력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심사기준을 내세웠지만 그림을 그려서 공개적으로 전시할 수 있는 장소가 살롱밖에 없으니 작가들은 어쩔 수 없이 살롱의 평가에 기대야 했다. 파리의 살롱들은 프랑스 제국을 굳건히 해줄 그림을 원했기에 신화나 천사, 영웅의 그림을 필요로 했다. 그림도 정치의 일부였고, 정치색을 띠고 정교하게 마무리된 역사화들이 정치를 위해 기능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 한가운데에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새로운 그림의 시대가 열림을 느꼈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과거의 화가들이 대부분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렸다면, 모네는 대부분 그림을 야외에서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빛들이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짧으면 10분에서 길어야 30분의 시간을 화폭에 담았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고향인 프랑스 항구도시 르아브르에 있는 집 창문에서 바라본 풍경 [인상, 해돋이]가 완성됐다. 그는 “어느 날 문득 창밖 풍경을 내다보았는데,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어떤 인상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살롱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젊은 화가들은 자신들이 직접 비용을 댄 전시회를 기획했고, 1873년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 드가, 모리조, 피사로 등이 중심이 된 ‘무명 화가 및 조각가, 판화가 협회’ 회원들은 1874년 4월 15일 사진작가 나다르의 작업실에서 한 달간 10시부터 6시까지 전시를 시작했다.

그림이 발표되자 대중과 평론가들은 “붓질조차 서투른 아마추어”, “집 안의 벽지만도 못한 그림”이라고 비난했다. 특히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비난했다. 어둠 속에서 해가 막 떠오르는 풍경을 담은 이 그림에는 검은색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검은색을 사용하지 않고 어둠을 표현한 것은 상당히 혁신적인 일이었다. 비평가 루이 르로이는 모네가 풍경이 아니라 개인적인 인상을 그렸다고 기술했다. 날로 먹는 장인정신의 자유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림은 사진처럼 정교하고 우아한 주제를 다루어야 하는데 고작 지저분한 항구를 붓질 몇 번 만에 그렸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르로이는 “인상이 없는 그림들일 뿐,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 참여 화가들을 ‘인상파’라고 불러야겠다”고 조롱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인상주의라는 현대미술의 큰 사조를 만들어내게 된다.

인상주의의 시작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1872.
모네는 뚜렷한 형상이 그려지지 않은 빛과 그림자를 통해 자신이 느낀 부분을 전하려고 했다. 그림 속에서 하늘과 바다는 형태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 하늘에는 붉은빛이 돌고 바다에는 푸른빛이 돈다. ‘밤은 검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색채는 빛의 차이일 뿐이라는 설득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가장 밝은 것이 태양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바다와 명도 차가 없는 태양의 모습은 생소했다. 그는 이제 풍경화는 야외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담긴 인상과 빛을 옮겨내는 작업이라 믿었다.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폴 세잔(Paul Cézanne)은 마네의 [올랭피아]를 재해석한 [현대의 올랭피아]를 전시회에 출품했다. 재해석된 [올랭피아]는 거친 붓 터치가 더해져 평론가들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린 첫날 175명이 방문했고, 4주 동안 3500명이 전시장을 찾았다. 전시회에 사용된 비용은 9000프랑 이상이었고, 입장료는 1프랑이었다. 유일한 여성 작가였던 베르트 모리조의 어머니에게 화가 기샤르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

“저의 솔직한 인상을 즉시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들어갔을 때 저는 그 유해한 환경 속에 있는 따님의 작품들을 보고서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친구이자 화가로서 소위 미래의 화파라는 이들과 완전히 결별하기를 희망합니다.”

모리조는 자신의 딸을 낳은 1879년 한 해를 제외하고 8번의 인상주의 전시회 중 7번 참가했다. 첫 번째 전시회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들은 ‘인상주의’라는 이름을 걸고 제8회 인상주의 전시회까지 계속 추진했다. 인상주의는 기존의 전통에 대한 독립성과 저항성을 상징했고, 살롱이라는 규격화된 전시가 아닌 ‘인상주의 전시회’라는 새로운 형태의 개인 전시회에 도전해 대중의 지지와 공감을 얻었다.

새로운 도전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다수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 그들의 집념과 열정으로 현대미술의 흐름은 완전히 뒤바뀌게 됐다.

※ 김소울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국제임상미술치료학회 회장이며 가천대학교 조소과 객원교수이자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이다. 현재 플로리다마음연구소 대표로, 『치유미술관』 외 12권의 저역서가 있다.

202010호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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