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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의 ‘세계의 컬렉터’ 

데생의 힘 

해마다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국제 아트 페어 피악(FIAC)은 철근골조와 유리, 석조건물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자랑하는 그랑팔레(Grand Palais)에서 열린다. 2020년, 피악은 어느새 47회를 맞는다. 그랑팔레 바로 건너편에는 프티팔레(Petit Palais)가 자리한다. 센강과 샹젤리제 거리 사이에 있는 두 건물은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알렉산드르 3세 다리를 측면에 두고 있다.

▎Petit Palais Credit : Benoit Fougeirol Copyright Petit Palais
‘작은 궁전’이라는 뜻을 지닌 프티팔레는 작은 건축물로 예상할 수도 있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규모를 자랑하며, 역사 면에서도 파리지엥들의 자랑거리가 될 정도로 훌륭한 박물관이다. 물론 파리에는 루브르박물관, 오르세미술관, 퐁피두센터, 파리 시립현대미술관, 로댕미술관, 케브랑리 등 관광객들에게 더 잘 알려진 곳이 무수하다. 그러나 변치 않고 꾸준히 프랑스인들의 발길을 모으는 프티팔레는 외면과 내부가 매우 충실한 박물관이다. 2016년부터 준비가 시작된 피악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대형 조각과 설치작품들을 프티팔레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은 수집가들에게 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페어가 오픈되기 몇 시간 전, 페어장에서는 만날 수 없는 대형 작품들을 프티팔레에서 감상하면서 녹음이 우거진 내부 정원에서 아침 일찍 즐기는 에스프레소와 크루아상의 맛은 그 분위기 때문에 한층 더 달콤하다.

프티팔레 프로젝트로 2017년 김용익 작가의 설치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고, 2018년에는 총 33명의 작품들이 소개되었는데 우리나라 양혜규와 안규철이 우고 론디노네(Ugo Rondinone), 타키스(Takis), 투반 트란(Thu-Van Tran), 필립 마이유(Philippe Mayaux), 올리비에 모세(Olivier Mosset), 크리스천 마클레이(Christian Marclay) 등의 작가들과 함께 소개됐다.

프티팔레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건축가 샤를 지로(Charles Girault)가 건축했다. 프티팔레의 아름다운 황금문에도 건축가의 세심함이 깃들어 있다. 만국박람회 이후 1903년부터 1925년에 이르기까지 프티팔레에는 그림 및 조각 장식이 파리의 영광을 위해 그려지고 새겨졌다. 건물이 점차 그 웅장함을 드러내는 동안, 프랑스 국민의 기증이 시작됐다. 첫 기증 작품은 1902년 뒤투잇(Dutuit) 형제가 소장하고 있던 고화들이었다. 이 기증 이후 미국 수집가 에드워드&줄리아 턱(Edward & Julia Tuck) 부부가 18세기 예술품들을 기증했고, 조각가 카르포 (Carpeaux), 화가 쿠르베(Courbet), 화상 앙부르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에 이어 프랑스 컬렉터 로저 카발(Roger Cabal)이 기증했다. 장식 가구들도 기증 작품들 사이에서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프티팔레에서 전시하고 있는 작품들과 수장고에서 전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모든 작품의 주인은 파리시다. 프티팔레의 원래 이름이 파리 보자르 궁전(Palais des Beaux-Arts de la Ville de Paris)인 이유도 19세기부터 파리시가 예술가들에게 주문했거나 구입했기 때문이다. 파리 시민들은 자부심을 갖고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을 향유하고 있다.


▎Petit Palais, Credit : Benoit Fougeirol, Copyright Petit Palais
1906년부터 1909년까지 쿠르베의 여동생, 줄리엣 쿠르베가 [센강 변의 아가씨들](Les Demoiselles des bords de Seine)을 포함해 여러 작품을 파리시에 기증한 것은 파리시로서는 황금알을 거저 얻은 것과 같았다. 쿠르베는 오르세미술관에서 가장 인기를 많이 얻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파리시는 거의 반세기가 지난 후 1953년 쿠르베의 [잠](Le Sommeil)을 구입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볼라르는 1911년 폴 세잔과 다른 작가들이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포함해 총 4점을 파리시에 기증했고 후에 1930년 들어 다른 작품들도 기증했다. 시간을 두고 꾸준히 작품을 기증하는 수집가들을 보면서 ‘마치 중독과 같은 기분일까’ 아니면 ‘강박일까’라는 호기심이 발생한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이 작품들이 모두 안전하게 피신해 있다가 전쟁 후 고스란히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마티스는 30년 넘게 소중히 보관했던 세잔의 [목욕하는 세 여인](Les Trois Baigneuses)을 1936년 파리시에 기증했다. 마티스에게 이 작품은 평생 그가 헌신한 예술적 도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연구 자료였다. 1938년 조각가 장 밥티스트 카르포의 아들, 루이클레망 카르포는 아버지의 조각, 데생, 회화 작품 150점을 프티팔레에 기증했다.


▎Prud’hon, La Fortune, XIXe siècle. Pierre noire, réhauts de blanc sur papier bleu, 35×22㎝, don Louis-Antoine et Véronique Prat sous réserve d’usufruit au musée du Louvre en 1995, Copyright Petit Palais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프티팔레의 소장품들은 역시 프랑스 남쪽으로 피신했지만 건물은 상당히 훼손됐다. 전쟁 이후 그 모습을 회복한 프티팔레에서 가장 성공했던 전시는 1967년 [투탕카몬] 전시로, 드골 장군을 포함해 총 120만 명이 관람했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프티팔레는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리노베이션을 마친 모습이다. 공간의 활용을 시도한 이 공사 이후 프티팔레 관람객은 두 배로 늘었으며 관람객들은 앵그르(Ingres), 제리코(Gericault), 들라크루아(Delacroix), 모리스드니(Maurice Denis), 세잔(Cezanne), 보나르(Bonnard), 마욜(Maillol) 등 우수한 작품들을 칭송하고 있다.

2020년 6월부터 10월까지 프티팔레에서는 루이 앙투안과 베로니크 프라트(Louis-Antoine & Veronique Prat) 부부의 데생 수집품들을 전시 중이다.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광범위한 수집 기간을 자랑하는 이 부부의 소장품들은 오로지 프랑스 작가들의 드로잉에 국한했다. 1995년, 루브르박물관이 최초로 개인 소장자의 수집품 전시로 초대한 부부였다. 루브르 전시 이후 25년이 지난 2020년, 프티팔레에서 열리는 [드로잉의 힘](La Force du dessin) 전시는 프랑스 작가들의 실력을 다시 한번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1580년부터 1900년까지 대가들의 중요한 드로잉들을 바라보는 동안 프랑스 예술사를 전체적으로 감상하는 느낌이 들었다. 3세기에 걸친 수집품들 중 프티팔레에 소개된 작품은 총 184점에 달했다.


▎Ingres, Songe d’Ossian, XIXe siècle. Plume et encre brune, aquarelle, mis au carreau à la pierre noire, 30,5×30,2㎝, Collection Prat. Copyright Petit Palais


전시는 1580년대 후반 프랑수아 스텔라(Francois Stella)를 포함한 프랑스 예술가들에게 이탈리아가 막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17세기의 일련의 그림으로 시작된다. 르 로랭(Le Lorrain), 자크 칼로(Jacques Callot), 푸생(Poussin), 부에(Vouet) 등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떠났던 작가들의 여정은 그들의 그림 속에 그대로 자취를 드러내고 있었다. 프라트 부부가 구입한 대작가들의 기초 데생들을 보면서 예술사에 통달한 지식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Eugène Delacroix, Cheval ruant, XIXe siècle. Aquarelle, gouache, 15,1×13㎝, Collection Prat. Copyright Petit Palais
전시는 바토(Watteau)와 부셰(Boucher)의 정중하고 사랑스러운 장면을 표현한 로코코 스타일로 이어졌다. 18세기의 켕탱 드 라투르(Quentin de La Tour), 샤르댕(Chardin), 나투아르(Natoire), 그뢰즈(Greuze)의 그림은 어느새 현실주의의 개벽을 알리기 시작했고 초상화에서도 심리적인 솔직함을 찾고 있었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동시에 팽배했던 19세기, 그로(Gros), 제리코(Gericault)의 드로잉과 앵그르, 들라크루아 및 샤세리오(Chasseriau)로 구분되는 세 가지 아름다운 앙상블로 인해 극도로 풍요로우면서도 긴장감마저 돈다. 1850년 이후 코로(Corot), 쿠르베, 밀레(Millet), 도미에(Daumier), 카르포(Carpeaux),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e) 및 퓌비 드샤반(Puvis de Chavanne)의 작품에서는 아카데미즘과 사실주의가 동시에 검토되고 있는 듯하다. 뜻밖에도 이 화려한 작가들의 드로잉 중 갑자기 잉크로 그려진 선이 자극하는, 빅토르 위고와 보들레르의 드로잉이 눈에 들어온다. 문학가들의 드로잉에서 문학적 영감을 받은 르동(Redon)과 구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의 상징주의 작품으로 전시가 뜨겁게 절정에 이르는 듯하다. 전시는 마네(Manet), 드가(Degas), 로댕(Rodin)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현대성으로의 전환으로 마감하면서 쇠라(Seurat)와 세잔(Cezanne)의 실험적인 작업과 함께 경이로운 결론에 이르게 했다. 단지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수집이라기보다는 심층적인 미술사 연구를 바탕으로 뛰어난 안목을 보여준 프라트 부부의 컬렉션이었다.


▎Victor Hugo, La Tour des rats, XIXe siècle. Plume et encre brune, lavis brun, 17×30㎝, Collection Prat. Crédit : Westimage Art Digital Studio, Copyright Petit Palais
프라트 부부의 드로잉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은 훌륭한 맥락을 가진 수집품이라 감탄이 절로 난다. 겸손한 예산이건 엄청난 예산이건 간에 모든 수집가는 이런 맥락에 도달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다. 전시를 보고 나면 프라트 부부가 어떤 배경을 지닌 수집가들인지 한층 더 호기심이 솟는다.

루이 앙투안 프라트는 니스 출생(1944~)으로 니스의 프롬나드 데 장글레(Promenade des Anglais)에 있는 고급 빌라와 샤토 데리시(Chateau d’ Hericy), 파리 생루이섬의 아파트를 오가며 호화로운 삶을 살았던 부유한 기업가 조오즈 프라트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미술품 수집가로서 그림뿐 아니라 조각, 골동품 가구를 모았다. 루이 앙투안은 여섯 살에 아버지를 잃고, 소르본대학과 프랑스 최고 인재들만 영입하는 그랑제콜(Grandes École)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예술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사랑은 그를 루브르에콜(Ecole du Louvre)에서 예술사를 수학하게 이끌었다. 예술사를 공부하면서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그토록 애정을 가졌던 예술품 수집을 이해하고자 했을까 의문이 든다. 아버지가 남긴 수집품들을 보관하면서 절대 판매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 결심하면서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 예술사를 공부하면서 영구히 소장하고 싶은 작품들과 판매해도 무관한 작품들을 선별할 안목이 생겼다. 그는 아버지가 사용하던 서재에 있던 장 앙리 리스너(Jean-Henri Riesener) 책상, 오브제 몇 점, 루카델라로비아(Luca della Robia)의 조각들과 단 두 점의 데생만 남기고 모두 판매했다. 예술사 학업은 아버지와 다른 그만의 취향을 심어주었다.


▎Louis-Antoine Prat, © Jean-Claude Figenwald, Copyright Musée du Louvre
아버지의 수집품들을 판매한 수익과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으로 그는 수집가의 길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1973년 부인 베로니크와 함께 막스언스트의 데생을 시작으로 1974년 또 다른 데생을 구입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수집가의 길을 걷게 된 동기는 파리의 갤러리스트였던 폴 프루테(Paul Proute)와 베이세르(Bayser)를 만나면서부터였다. 프랑스의 시인 필리프 수포(Philippe Soupault)의 손녀인 부인도 루브르에콜에서 예술사를 수학했으며 그 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저명한 신문사 피가로의 기자로 활동했다. 베로니크와 루이 앙투안은 다행스럽게도 같은 취향을 지녔다. 데생을 수집하면서 어떤 작품이 빠져 있는지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수집품 중에 피에르 푸제의 데생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고 기다림의 시간과 부단히 찾아 나선 열정 덕분에 결국은 수집할 수 있었다. 그때 부부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폴 고갱의 진품 데생은 매우 구하기 어려워 여러 번 노력했지만 늘 헛수고로 끝났었다. 어느 날 고대하던 폴 고갱의 데생을 찾았을 때 그것은 데생과 판화의 중간 과정이었는데 수집가의 행운을 만끽할 수 있었다. 물론 피에르폴 프뤼동(Pierre Paul Prud’hon)의 데생 7점처럼 매우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1995년 그의 첫 수집품 전시가 열렸을 때 부부는 푸생의 데생이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박물관을 제외하고 개인 수집가들이 소장하고 있는 푸생의 데생은 총 35점이었고 그중 어렵게 [페르세포네의 납치](L’Enlevement de Proserpine)를 구할 수 있었다. 루이 앙투안은 아버지처럼 니스의 별장도 가족 샤토도 없을 뿐 아니라 자동차조차 없다. 그는 현재 부인과 살고 있는 파리의 아파트를 제외하고는 모든 자산을 데생 수집에 쏟아붓고 있다. 그들의 이런 용기는 루브르의 첫 개인 수집품 전시라는 영광으로 다가왔고 부부는 나누고자 했던 그들의 꿈을 루브르에서 실현할 수 있었다. 1995년, 꿈을 실현하게 해준 루브르에 감사의 뜻으로 데생 10여 점을 망설임 없이 기증했다.

프라트 부부의 컬렉션은 프랑스 국내 여러 도시를 포함해 뉴욕, 포워스, 피츠버그, 오타와, 옥스퍼드, 에딘버그, 로스앤젤레스, 톨레도, 필라델피아, 찰스턴, 바르셀로나, 시드니, 베니스 등 해외 여러 도시의 박물관에서 순회 전시를 하고 있다.


▎Louis-Antoine & Véronique Prat, Copyright Petit Palais
프라트 부부는 푸생, 바토, 다비드, 앵그르, 샤세리오, 들라크 루아의 데생을 통해 프랑스 데생의 역사를 빛낸 화가들에게 다시 한번 감탄할 기회를 나누고 있다.

※ 박은주는… 박은주는 1997년부터 파리에서 거주, 활동하고 있다. 파리의 예술사 국립 에콜(GRETA)에서 예술사를, IESA(LA GRANDE ECOLE DES METIERS DE LA CULTURE ET DU MARCHE DE L’ART)에서 미술시장과 컨템퍼러리 아트를 전공했다. 파리 드루오 경매장(Drouot)과 여러 갤러리에서 현장 경험을 쌓으며 유럽의 저명한 컨설턴트들의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2008년부터 서울과 파리에서 전시 기획자로 활동하는 한편 유럽 예술가들의 에이전트도 겸하고 있다. 2010년부터 아트 프라이스 등 예술 잡지의 저널리스트로서 예술가와 전시 평론을 이어오고 있다. 박은주는 한국과 유럽 컬렉터들의 기호를 살펴 작품을 선별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202010호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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