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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16) 칭기즈칸과 티무르의 유산 

 

몽골시대 대규모 인적·물적 교류로 고려양(高麗樣)이라는 고려 풍습이 원나라, 명나라 초기까지 유행했다. 고려에서 80여 년간 끌려간 20만 명 넘는 공녀, 환관, 장인이 몽골제국에 정착하면서 전파됐다.

▎『몽어노걸대』, 『첩해몽어』, 『몽어유해』는 조선시대의 몽골어 학습서이며, 흔히 셋을 합쳐 몽학삼서라 부른다. 국립중앙박물관, 칸의 제국, 몽골 전시회, 2018
몽골제국 관료들 사이에서는 집 안을 고려청자와 나전칠기로 장식하고 고려산 먹과 종이를 쓰며, 고려 화문석을 깔고 사는 게 유행이었다. 또 진시황이 찾아다녔던 불로초가 고려인삼이라 믿고 개성인삼을 열심히 사갔다고 한다. 지금도 몽골에서는 고려만두, 고려병(약과), 고려아청 같은 용어가 사용되고 있고, 상추쌈과 시루떡을 해먹는 것도 전파됐으며, 비파 등 악기도 전파됐다고 한다. 1221년에는 몽골 관리들이 고려 특산품인 종이 10만 장을 바치라고 요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얼마 전 고려 금속활자가 몽골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된 것이 쿠텐베르겐의 금속활자라는 내용의 프랑스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기도 했다. 이처럼 고려는 몽골제국을 통해 서역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문물을 받아들였을 것이고, 또 고려 문물이 중국 건너편 중앙아시아, 중동, 유럽으로 전파됐을 것이다. TV 드라마로 방영되어 널리 알려진 기황후는 원나라 말기 30년 가까이 권세를 장악했으며, 원나라가 명나라에 멸망되기 전해인 1366년에는 기황후의 지시로 제주도를 망명정부의 근거지로 삼아 피난 궁궐을 짓다가 중지한 사건도 있었다.

몽골 국립역사박물관에 있는 13~14세기 몽골 귀족상은 몽골제국 이후에 70개만 발견되어 몽골 역사 탐구에 중요한 자료로 쓰인다. 몽골 지역에는 500여 기에 이르는 석인상들이 분포돼 있으며 동몽골 다리강가(동북아 최대의 천혜 목장인 이곳의 자연환경은 제주도와 흡사함)에는 석인상 70여 기가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다리강가의 석인상은 13~14세기에 건립된 몽골 석인상이라고 한다. 1990년 한몽수교 이후 다리강가 석인상과 제주도 돌하르방의 연관성이 주목받고 있다. 필자 눈에도 다리강가 석인상과 제주도 돌하르방이 비슷해 보인다. 다만, 돌하르방의 기원에 대해서는 남태평양 발리섬의 석상 문화가 제주까지 전파됐다는 남방기원설, 한반도 남부의 석장승이 제주도로 가서 돌하르방이 됐다는 한반도 유래설, 제주도 고대인들이 외부 영향 없이 독자적으로 제작했다는 자체생성설이 있다.

제주도와 동몽골 다리강가에는 당시 두 지역의 교류 흔적을 보여주는 많은 구전설화와 유물들이 존재한다. 다리강가의 목동과 말들이 통째로 탐라에 갔다는 구전설화도 전해지며, 몽골과 제주 양쪽에 각기 전해지는 몽골 주둔 군인과 제주 여자의 사랑 이야기, 다리강가 석인상과 제주 돌하르방의 유사성 등도 눈에 띄는 교류 흔적들이다.

한반도에 불어온 몽골풍


▎몽골 국립역사박물관에 있는 13·14세기 몽골 귀족상
몽골에서 고려에 들어온 풍습은 몽골풍(蒙古風)이라 부르는데, 몽골제국의 황실에서 자란 고려 왕자들과 시집온 몽골 공주들을 통해 민간에 퍼졌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시절에 농부들로부터 시작된 소주는 몽골제국이 서아시아를 점령했을 때 양조법을 배웠다고 한다. 당시 몽골군의 주둔지, 개경 등에 양조장을 만들었고, 소주가 21세기 한반도 사람들에게 가장 대중적인 술 중의 하나가 됐다. 설렁탕, 순대 같은 음식도 이 시기에 고려로 전파됐다는 주장이 있다. 고려가 불교 국가라서 고기를 많이 먹지 않았는데 몽골제국 시대부터 고려 사람들의 고기 섭취가 크게 늘었다고 한다. 고깃국에 밥이나 면을 말아 먹는 것도 초원의 음식 문화이다. 한반도에 탕 요리가 많은 것은 유목민과 접점이 많았던 때문인지, 원래 한반도 문화였는지, 몽골제국 시대부터 한반도에 전래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확실한 것은 탕과 같은 음식은 농경문화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유목문화에서 유래한 음식이라는 것이다. 여자들의 족두리, 연지, 곤지도 몽골풍에서 유래했다.

몽골제국 시대에 준지배계층이었던 상당수의 위구르인은 사신, 통역관, 몽골 귀족의 시종, 상인 등으로 고려에 와서 정착했다. 고려로 시집오는 몽골 공주들이 데려온 시종들 중에는 위구르인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들은 몽골 공주의 위세를 등에 업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충령왕의 왕비인 쿠빌라이 막내딸 제국대장공주를 따라와 귀화한 장순룡은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됐다. 2017년에 공개된 1833년 필사본 『흥보만보록』에는 주인공인 흥부가 무과에 급제해 덕수 장(張)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필사본에 따르면 흥부의 실제 모델이 위구르 귀화인 장순룡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설장수라는 위구르인은 정몽주와 한편이 되어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조선 초에는 최고위층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위구르인들은 당시 몽골 왕족들과 손잡고 오르톡이라는 조합을 만들어 몽골제국의 전매제, 금융대출 등으로 상권을 독점했는데, 고려에서도 오르톡을 활용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을 것이다. 개경에 위구르인들이 모여 사는 회회인 타운이 있었고, 고려가요 ‘쌍화점’에 등장하는 회회아비도 이들을 일컫는다. 회교라는 단어도 위구르인의 종교라는 뜻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집안도 몽골 군벌 출신이라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실록 총서』에 따르면 이성계의 고조부가 동해안을 타고 올라가 동북면 일대를 근거지로 구축하고, 몽골제국에서 천호장 겸 다루가지 직위를 받았다는데, 비몽골인이 다루가치가 될 수 없으니 이성계의 조상이 몽골인이었을 것이고 그 조상들의 신화는 만들어진 전설이라는 주장까지 제기된다. 분명한 것은 태조 이성계는 성인이 될 때까지 몽골제국 소속의 다루가치 가문 출신이며, 성인이 되어서 아버지와 함께 조선으로 귀순했다는 사실이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도 몽골의 파스파 문자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7~8세기 이후 북방 초원 민족들은 새 국가를 세우면 새 문자를 제정하는 전통이 있었다. 한글은 초성(자음) 32자와 중성(모음) 11자를 합해 43자로 만들었는데, 이는 파스파 문자의 43자모와 일치한다. ㄱ, ㄴ, ㄹ, ㅂ, ㅍ 등 글자 형태도 같다. 집현전 학자들 중에 신숙주 등 몇 명은 최고 수준의 위구르어를 구사했다.

당대 최고의 과학기술 보유한 이슬람


▎우주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울루그백 천문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울루그벡 천문대에 있는 천문표는 조선 세종 때 회회력(이슬람 역법)으로 알려져 이순지, 장영실 등에 의해 『칠정산내외편』 등을 만드는 기초가 되어 조선의 역법을 발전시켰다. 우리의 명절, 설날과 추석은 올르그벡 천문대가 만든 것을 개량한 것이다. 명절 연휴를 즐길 때 600년 전 티무르제국의 네 번째 왕, 울르그벡에게 감사하자. 울그르벡은 티무르제국 울베그벡 천문대에서 관측한 것을 바탕으로 항성시 1년간을 365일 6시간 10분 8초로 추측했다. 이는 오늘날의 정밀기기로 계산된 365일 6시간 9분9.6초에서 오차는 1분도 채 되지 않는다. 망원경도 없는 당시의 기술로 놀라울만큼 정확하게 계산해냈다. 울르그벡은 ‘신천문표’에 1018개 별자리의 위치를 작성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히파르코스 이후 가장 정확하게 별자리를 측정한 기록이었다. 울르그벡은 1년의 시간적 길이를 측정했는데 현대과학의 계산과도 별로 차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정확했다.

당시 이슬람 문화권은 세계 최고의 선진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연금술, 항해술, 천문 기상학, 수학, 물리학 등이 고도로 발달했다. 팍스 몽골리카를 통해 고려, 조선에 진출한 위구르인들이 조선 초 천문·기상·의학 분야에서 찬란한 과학 문명을 꽃피우는 데 원동력이 됐다. 우리가 설날, 추석을 셀 때 쓰는 음력의 과학적 원리도 이 시절 이슬람 역법인 『칠정산외편(七政算外編)』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희수 교수는 ‘한-이슬람 교류사’에서 세종대왕 때 만든 측우기, 자격루 등 각종 발명품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이슬람 기기와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이를 보완, 발전시켜 제작된 것으로 보았으며, 몽골제국에 도입됐던 이슬람 천문 과학 기기의 구조와 기능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자격루도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미 8세기 압바스 시대에 소리 나는 물시계를 고안했다고 한다. 이슬람 의학도 팍스 몽골리카를 통해 조선에 전해졌는데 조선 초기에 설치한 전의감은 이슬람 의학을 취급하던 원나라 관청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아라베스크(Arabesque)는 아랍인이 창안한 장식 무늬로, 꽃, 식물의 줄기와 잎을 도안화해 당초(唐草)무늬나 기하학 무늬로 배합한 것이다. 벽의 장식과 서책(書冊)의 장정, 공예품 등에 아랍 문자가 도안화되고, 거기에 식물 무늬를 배치하여 이슬람의 독특한 장식미술을 만들었다. 후에는 조수(鳥獸) 등의 무늬도 배합했고, 르네상스 이후에는 유럽에서도 유행했다. 아라베스크 무늬는 이슬람 예술가들이 자연을 양식화해서 표현한 이슬람 문화의 정수이다. 고려청자의 무늬도 아라베스크 무늬의 영향을 받았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라칸트 틸라카리 사원의 아름다운 아라베스크 문양, 이슬람교는 우상숭배를 금지해서 사람과 동물을 그리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이슬람 예술가들은 꽃과 식물의 문양이 추상적으로 어우러진 아라베스크 디자인으로 사원을 꾸몄다. 예전에 한국 시골집의 벽지에서 봤던 반복적 문양들은 아라베스크 문양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조선 후기 중국에서 들어온 청화(靑花)의 원산지는 이란고원의 카샨(Kashan)이다. 청화는 이슬람 상인들의 배에 실리거나 실크로드 아랍 상인의 낙타 등에 실려 수천 킬로미터를 건너와 경덕진의 자기로 살아나고, 다시 조선의 청화백자로 빛을 보게 된다. 청화백자의 당초문(唐草紋)은 당나라 초화문으로 넝쿨과 잎, 꽃이 어우러져 연속으로 펼쳐진다. 청화백자 무늬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 문양이 아니라 이슬람 아라베스크 문양이 실크로드를 따라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중국으로 건너와 조선에 자리 잡은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발생한 당초무늬는 그리스에서 발전하여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정복 때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산됐다. 중국과 한국, 일본 지역에서는 6~7세기 불교의 유입, 융성으로 크게 성행했다. 한반도에서 당초무늬는 고구려 고분벽화,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제, 은제 용기와 불교 조각에서 장식 무늬로 쓰였다. 당초무늬와 아라베스크는 이집트, 아라비아반도와 유라시아 실크로드를 거쳐 한반도에 전파되기도 했고, 근대 이후에는 유럽을 거쳐 다시 한반도에 전파됐다.

※ 김정웅 대표는…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약 30년간 4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 2000년 기업 간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 수상, 2018년 9월 Forbes Asia 200대 유망 기업에 서플러스글로벌이 선정됐다. 2015년부터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간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와 인류 무역사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들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2104호 (2021.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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