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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준범 필더세임 대표 

가상현실을 만지다 

정하은 인턴기자
올 초 죽은 아내를 가상 세계에서 다시 만나는 내용을 다룬 MBC 특집 VR 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 2] 방영 후 가상현실 장갑 ‘몰리센 핸드’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몰리센 핸드 제작자로 유명해진 필더세임의 배준범 대표가 최근 버추얼 유튜브 플랫폼 ‘메타애즈(metAds)’를 출시하며 다시 한번 업계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배준범 유니스트 교수 겸 필더세임 대표가 연구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가상현실이 일상에 들어왔다. 기업들은 메타버스 플랫폼 게더타운에서 기업설명회, 전사 회의 등을 개최한다. 제페토는 10대들의 자기표현 무대가 됐다. 경제·문화·사회 전 분야가 가상현실로 옮겨가고 있지만 ‘개업 효과’가 끝나고도 사용자를 유치하려면 현실과 견줄 수 있을 정도의 현실감이 필요하다.

2017년 기술 스타트업 ‘필더세임(Feel the Same)’을 창업한 배준범 유니스트(UNIST) 기계공학과 교수는 가상현실과의 상호작용을 위한 새로운 차원의 인터페이스를 개발해왔다. 배 대표는 소프트웨어러블 로봇, 가상현실이나 원격 조종을 위한 인간-로봇 상호작용 시스템 전문가다. 그는 2018년 말 소프트센서 기술을 이용하여 손가락 움직임을 측정하는 가상현실 장갑 ‘몰리센 핸드(Mollisen HAND)’ 상용화에 성공했다.

몰리센 핸드가 착용만으로 각 손가락 관절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측정하고 이를 가상현실에 전달하는 장치로, 현재 상용화된 VR 컨트롤러의 한계를 극복했다. 기존 VR 컨트롤러를 이용하면 현실과 가상의 손 움직임이 일치되지 않는다. 가상 세계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물체를 잡거나 만지는 동작을 하려면 현실에서는 버튼을 누르거나 레버를 움직이는 동작을 하게 되는데, 실제와 가상의 동작이 달라 몰입감이 떨어진다. 하지만 몰리센 핸드를 이용하면 사용자의 실제 행위와 가상 세계 속 행위가 완전히 동기화된다.

몰리센 핸드는 사용자 몰입감을 개선할 뿐 아니라, 가상과 현실 간 괴리로 인해 생기는 문제도 막을 수 있다. 배 대표는 “최근 VR이 군사훈련이나 재활치료에도 쓰이고 있다. 그런데 실제 움직임을 반영하지 못하는 VR 컨트롤러를 쓰면 인터페이스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훈련 효과도 떨어질 수 있다”며 “몰리센 핸드를 끼면 사용자 착오를 줄일 수 있다”고 전했다. 그뿐만 아니라, 기존의 컨트롤러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동작도 할 수 있게 된다. 단순히 가상의 물체를 집고 던지는 정도가 아니라, 손가락 하나만으로 물체를 섬세하게 조작할 수 있게 된다.

몰리센 핸드는 사용자의 손가락 움직임을 측정하는 동시에 가상 세계 속 행동을 현실로 피드백하는 기능도 갖췄다. 엄지, 검지, 중지 끝에 부착된 진동자가 다양한 터치감을 전달한다. 최근에는 장갑 손바닥에 히터 세 개를 달아 열감 전달 기능까지 추가했다. 이로써 몰리센 핸드를 착용하면 가상현실에서 만진 물체의 촉감 및 열감을 모두 느낄 수 있게 됐다. 예를 들어, 장갑을 착용하고 가상 세계 속 뜨거운 물에 손을 담갔다 꺼내면 사용자는 실제로도 온도 변화를 느끼게 된다. 센서와 감각 전달을 통합한 인터페이스는 필더세임만의 경쟁력이다.

장갑의 핵심은 액체 금속을 실리콘에 프린팅해 제작한 소프트센서 ‘하이플렉스(HiFLEX)’다. 소프트센서는 말 그대로 부드럽고 유연하며 늘어날 수 있는 센서를 뜻하는데, 이러한 성질 때문에 인체의 복잡하고 연속적인 움직임을 측정해야 하는 웨어러블 장비에 적합하다. 관절 위에 소프트센서를 부착하면 손가락이 펴지고 접히는 것을 센서가 실시간으로 잡아내고 정확히 측정한다.

배 대표는 센서를 외부에 부착하는 방식이 아니라, 장갑에 입히는 방법을 개발했다. 센서가 부드러운 재질로 이루어진 덕분에 이러한 시도가 가능했다. 센서가 장갑에 일체화되면 제품 부피가 크게 줄어든다. 기존 센서를 사용하면 측정 메커니즘을 아무리 간소화하더라도 센서 자체가 돌출돼 부피가 커지고, 부목을 댄 듯한 이물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몰리센 핸드는 크기나 부피 면에서 일반 장갑과 큰 차이가 없다. 웨어러블 장치에서 착용감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기기의 무게가 늘고 부피가 커지면 가상현실에 몰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프트센서가 가진 여러 강점에도 불구하고, 균일한 성능을 보장하는 신뢰도 높은 제작 방식이 없었던 탓에 상용화까지는 시간이 더 걸렸다. 연구 끝에 배 대표는 갈륨(Galium)과 인듐(Indium)을 결합한 액체금속을 원하는 궤적으로 프린팅하는 ‘다이렉트 잉크 라이팅(Direct Ink Writing, DIW)’ 방식을 개발했다. DIW를 통해 배 대표는 복잡하고 큰 센서 궤적을 단번에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게 됐다. 손가락 관절 움직임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센서가 필요한데, DIW 방식을 통해 배 대표는 복잡한 구조의 손가락 센서를 한 번에 만들 수 있었다.

소프트센서를 장갑에 내장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노력이 필요했다.

“장갑은 다 똑같은 장갑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소프트센서 기능과 사용자 편의성을 동시에 최대화할 수 있는 장갑이 필요했습니다. 소프트센서가 부착된 부위가 쉽게 인장될 수 있어 장시간 사용해도 땀이 덜 차고, 쉽게 착용할 수 있는 구조를 개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개발 인력이 직접 제작에 나섰다. 배 대표는 “수없이 많은 형태의 장갑을 회사 내부에서 직접 봉제하며 만들었다. 기술팀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말했다.

2019년 CES 참가를 계기로 시장의 주목을 받게 된 몰리센 핸드는 올해 초 MBC 특집 VR 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 2]로 전파를 탔다. 죽은 아내를 가상현실에서 다시 만난다는 내용의 방송에서 남편은 몰리센 핸드를 낀 손으로 아내를 쓰다듬고, 아내와 함께 돌탑을 쌓았다. 정교한 손가락 움직임을 잡아낼 수 있었기에 가능한 장면들이었다. 해당 방송의 유튜브 클립 조회수는 현재 266만 회를 돌파했다.

[너를 만났다 2]의 성공 후 다른 방송국에서도 몰리센 핸드를 활용한 VR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필더세임은 현재 국내외 굵직한 기업들과 자사 소프트 센서 기술 및 몰리센 핸드를 활용하는 다양한 협력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소프트 센서 기반의 웨어러블 로봇 제작, 센서로 정확한 운동 데이터를 측정하는 홈 트레이닝 시스템 개발, 소프트 센서를 자동차에 적용하기 위한 연구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외에도 한 VR 게임 업체에서는 몰리센 핸드를 활용한 VR 방탈출 게임을 제작해 서비스하였으며, VR 프로그램 업체들은 자동차 및 헬리콥터 수리 기술을 훈련하는 VR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배 대표는 몰리센 핸드를 중심으로 한 ‘메타버스 인터페이스 기업’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종적으로는 메타버스 인터페이스에 적용 가능한 소프트웨어를 함께 구축하고 서비스하는 ‘메타버스 플랫폼 기업’으로 나아가겠다는 복안이다.

“아무리 좋은 인터페이스가 있다고 해도, 이를 구동할 프로그램이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우리 디바이스에 최적화된 프로그램과 사용 목적을 갖출 때 필더세임은 물론 메타버스 시장 자체의 성장과 확장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는 버추얼 유튜버, 디지털 홈트레이닝 시장 진입을 위해 관련 소프트웨어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간편한 사용법, 정확한 데이터 측정, 낮은 단가 등 소프트센서가 가진 강점으로 기존 기술 활용에서 드러난 난점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배 대표의 설명이다. 필더세임은 최근 2D 혹은 3D 캐릭터를 이용한 버추얼 유튜버(Virtual Youtuber, V-tuber) 시장에 주목해 버추얼 유튜브 플랫폼 ‘메타애즈(metAds)’를 출시했다. 2019년에는 버추얼 유튜버 ‘초이’에 몰리센 핸드를 적용, 캐릭터의 세세한 손가락 움직임까지 실시간 화면에 담아냈다.

배 대표는 “사람들은 새로운 인터페이스에 목말라 있다”며 “버추얼 유튜버의 확장성은 폭발적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버추얼 유튜버를 홍보 행사에 활용한 적이 있다. 단순한 캐릭터인 줄 알고 지나치던 사람들이 캐릭터가 화면 속에서 말을 걸고 움직이며 다양한 반응을 보이자 놀라워했다. 가상의 대상과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는 것은 엄청난 홍보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VR 장갑부터 버추얼 유튜버까지, 소프트센서 기술을 기반으로 4년 만에 사업을 급속도로 확장한 배 대표는 “처음부터 창업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라고 밝혔다. 소프트센서 기술이 처음 알려졌을 무렵에는 여러 기업에서 제안한 투자를 거절하기도 했다. 창업을 결심한 것은 기술이 논문에 머물지 않고 널리 쓰이기를 바란다는 소망 때문이었다.

“회사 모토가 ‘Innovative and practical technologies that make you Feel the Same’입니다. 회사 이름 필더세임(Feel the Same)도 같은 뜻에서 만들어졌죠. 사람과 사람, 사람과 기계를 연결해주는 혁신적이고 실용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우리회사의 목표입니다. 소프트 웨어러블 인터페이스로 인간의 물리적 한계뿐 아니라 인지적 한계를 극복하고, 확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정하은 인턴기자 jung.haeun@joongang.co.kr·사진 최재승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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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호 (202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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