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소울의 삶과 미술심리(22) 

실존-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생이 허무해진 사람들에게 실존주의 철학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실존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책임, 주관성을 강조하는 접근으로서, 보편성을 추구하는 본질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인간은 한 명 한 명이 개성을 가진 개별자로서 존재하며, 그렇기에 인간을 규격화된 틀에 끼워 맞추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기본으로 한다.

▎귀스타브 쿠르베 [잠] 1866
태어나고 싶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다. 우리는 그냥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 즉 ‘피투(被投)’된 존재이다. ‘왜 태어났니’라는 질문에 우리는 ‘부모님이 낳았으니까’라고밖에 대답할 길이 없다. 그러나 태어난 이상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갈지는 우리가 정해야 할 몫이다. 피투된 존재에서 ‘기획투사’하는 존재, 즉 ‘기투(企投)’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선택할 자유가 있고, 인생을 설계하며 삶의 각본을 써나간다. 그 선택에 따르는 책임이 우리의 몫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삶의 주체가 된 개인이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왜’로 관철된다. 왜 사는지, 왜 이것이 가치 있는지, 왜 이렇게 살고 싶은지…. 삶을 살아가는 목적을, 방향을, 이유를 묻게 되는 것이다.

보편적 가치의 모순


▎데이미언 허스트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 1991
세상은 사람들에게 많은 잣대를 제시한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일이고 이렇게 사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많은 사회와 구성원들은 이를 따르며 살아가고 있다. 이집트 시대에 그려진 벽화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천편일률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림은 이렇게 그리는 것이다’라는 절대적인 규율이 있었고, 그림을 그리는 모든 예술가가 이 규칙을 따랐다. 머리의 방향, 어깨, 허리, 무릎의 비율은 모두 모눈종이에 그려놓은 듯 규칙이 있어서 누가 그리든 똑같은 결과물이 나오도록 했다. 그래서 이집트 미술은 모두 같은 값이 나오는 미술, 즉 ‘상수(常數)의 미술’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이후의 미술은 달라졌다. 그리스 작가들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남기기 시작했고, 어떤 작가가 그리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왔다.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고 작가에 따라 작품의 가치도 달라졌다. 이처럼 모두 다른 값이 나오는 미술을 ‘변수(變數)의 미술’이라 한다.

모두가 함께 잘 살기 위한 보편성, 모두가 따르면 좋은 규칙은 편리함을 제공해준다. 이집트 작가들은 고민 없이 사람을 그릴 수 있었고, 더 나은 그림을 그리려고 창조적 고민에 빠지지 않아도 되었다. 답이 정해져 있기에 그것을 따르기만 하면 사회에서 요구하는 작품이 탄생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림 속의 인물들은 구분하기 어려워졌고,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양산된 인물화만 남아 있을 뿐이다.

독일어에서 ist는 영어 be 동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This is a book을 독일어로 표현하면 Das ist ein Buch가 된다. ‘실존하다’의 영어 표현인 ‘exist’는 본질을 의미하는 ‘ ist’ 앞에 탈출을 의미하는 ‘ex’가 합쳐진 단어이다. 즉, 실존이라는 것은 ‘본질로부터 탈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질로부터 탈출하여 개인의 고유성을 찾는 것, 이것이 우리가 ‘실존한다’고 말하는 것의 궁극적 의미이다.

타인은 지옥이다


▎피터르 클라스 [해골이 있는 정물] 1630
우리가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의 욕구를 잘 알고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집트 화가들이 상수의 미술을 그렸듯,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이 타인의 욕구를 욕구한다. 즉, 다른 사람이 나에게 기대하는 바, 사회가 나에게 들이미는 잣대에 충실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결국 삶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사람은 어느 순간 인생이 허무하고 공허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남긴 유명한 문구 ‘타인은 지옥이다’는 희극 <닫힌 방>에 나오는 대사이다. 이 문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그 자체에 대한 부정적 접근이 아니라 타인이라는 존재가 내가 나다워지는 것을 방해한다는 의미이다. 타인은 늘 자신들의 판단과 자신들의 기호에 나를 가둔다. 내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거나 정의하기 어렵게 만들며, 내 존재가 타인에 의해 부정당할 때 타인은 지옥이 된다.

프랑스 사실주의 작가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는 작품 [잠]에서 여성 연인들이 성관계 이후 잠들어 있는 모습을 그렸다. 이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관객은 이 여성들에게 다양한 감정이 담긴 시선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의 그림에서 작가의 시선은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주의 화가들은 객관적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재현하려는 태도로 미술에 접근했으며,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대한 주관을 배제한 채 그려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에 이러한 주관이 배제되었다 하더라도, 주체자가 그 시선에 대해 주관적 해석을 할 수는 있다. 자신의 욕망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본 사람이라면, 자신이 혼자 밥을 먹을 때도 사람들의 시선에 과도한 감정을 입혀서 해석한다. 정작 주변 사람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더라도 말이다. ‘내’가 있기에 ‘너’도 있고, ‘그들’도 존재하며, 나에 대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좋든 싫든 타자를 거쳐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완전히 정반대가 될 수 있음도 인식해야 한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지옥이 될 수 있다. 내가 있어 타인이 있듯이 타인이 있어 나도 존재한다. 인간관계에서는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타인은 지옥이 되기도 하고 천국이 되기도 한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히로니뮈스 보스 [쾌락의 동산] 1504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애당초 시도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존주의적 접근은 우리 모두가 결국은 죽을 것이라는 참된 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현재에 더 몰두하고 지금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영국 작가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는 상어를 보존액인 포름알데히드에 통째로 넣고 기계적 장치를 통해 지느러미를 움직이도록 만들어 전시했다. 살아 있는 인간들, 존재를 영위하고 있는 현 존재인 우리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기에 움직이고 있는 죽은 상어의 육신에서 관람객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존재하는 낯선 존재를 경험하게 된다.

16~17세기에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에서는 바니타스 정물화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중세 유럽은 흑사병과 30년 전쟁으로 인해 주변 사람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함께 공허함과 헛됨, 가치 없음을 주제로 한 정물화는 종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무가치한 것들이 모여 있는 그림이었다.

바니타스 정물화에는 죽음을 연상하게 하는 두개골, 부패를 연상하게 하는 썩은 과일, 인생의 덧없음을 연상하게 하는 거품과 연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연상하게 하는 시계, 지식의 무용함을 연상하게 하는 책 같은 소재들이 등장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죽음을 기억하라-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직설적인 메시지를 남겼다. 이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현재를 살아가라-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이야기한 것이다.

한때 관에 들어가보고 유서를 남기는 죽음 체험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삶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삶의 소중함에 더 집중하도록 하기 위한 접근이었다. 수의를 맞춰놓으면 더 오래 산다는 이야기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남은 수명이 문자로 발송되면서부터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루었다. 자신이 죽는 날짜를 확인한 사람들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하지 못했던 것에 도전하며, 평생 일했던 직장을 그만두기도 한다.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진짜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기

삶은 유한하며, 그렇기에 지금이 더욱 값지고 소중하다. 과거의 사건들은 여전히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우리가 가진 자유의지는 선택을 통해 우리가 과거에 얽매이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변화해나가는 사람들이며, 주관적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스의 [쾌락의 동산]은 3개 패널로 구성된 그림인데, 왼쪽 첫 번째 패널에는 에덴 동산에 있는 아담과 이브, 가운데 패널에는 7대 죄악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인간, 오른쪽 패널에는 이로 인해 고통 속에 빠진 지옥이 그려져 있다. 엄격한 규율을 제시함으로써 하면 안 되는 것들을 명시한 그림이다.

그런데 ‘죄악’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들, 즉 교만, 탐욕, 시기, 분노, 음욕, 식탐, 나태가 반드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과 태도들일까. 또 7대 주선이라 불리는 겸손, 자선, 친절, 인내, 순결, 절제, 근면이 반드시 따라야 할 덕목들일까. 우리가 이름표를 붙인 ‘Ok’와 ‘No Okay’를 통해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나’라는 주체성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껏 사회와 부모, 주변인이 원하는 많은 것을 추구하며 살아왔다. 이것이 맞는 길이라고 배웠고, 이것이 좋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러한 결정과 믿음이 다른 사람의 의견만 따른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죽음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잘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삶, 나의 죽음을 직면했을 때도 지금과 같이 살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도록 만족스러울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나는 행복한가?’라고 물었을 때 ‘그래’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세상과 누군가의 사용에 의해 쓰이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주체성에 의해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가. 지금이 죽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점이라면 나는 무엇을 하며 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인가. 삶에 변화를 주게 된다면 어떤 이유에서 그 변화를 시도할 것인가. 그리고 그 삶의 형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 김소울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국제임상미술치료학회 회장이며 가천대학교 조소과 객원교수이자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이다. 현재 플로리다마음연구소 대표로, 『치유미술관』 외 12권의 저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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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호 (2021.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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