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정신과 전문의와 신소재공학 박사가 의기투합해 전자약을 세상에 내놨다. 시제품이 아니라 국내 식약처에서 시판 허가를 받은 제품이다. 올해 미국 CES에서 전자약 최초로 혁신상을 받기도 했다. 실제 전자약은 ‘우울의 시대’를 풀어가는 대안으로 뜨고 있다.
▎세계 최초로 허가받은 우울증 전자약 ‘마인드스팀’은 이기원 와이브레인 대표(오른쪽)가 개발을 총괄하고, 채정호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임상시험을 주도한 덕에 탄생했다. 이후 스트레스 전자약 ‘폴라’도 미국 CES 혁신상을 받는 등 정신의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
|
“2002년 즈음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의대 뇌자극클리닉에서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려고 공항에 들어섰어요. 갑자기 군인들이 날 붙잡더니 벙커 같은 곳으로 끌고 가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민 가방에 넣어 가져온 ‘경두개자기자극술’ 장비를 폭탄으로 오인한 것이죠. 제가 갖고 있던 각종 연구 자료와 논문을 꺼내 몇 시간 동안 설명한 끝에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지난 2월 서울성모병원에서 만난 채정호(61)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과거 기억 한 토막을 꺼내 들려줬다. 실제 그는 2002년 국내 최초로 같은 과 이창욱 교수와 함께 ‘경두개자기자극술(TMS)’을 도입한 사람이다. 우울증·강박증 진료에 말로 하는 정신요법이나 약물치료 외에 뾰족한 치료법이 없던 시절에 도입한 일종의 자기 치료술이었다. TMS는 머리 가까이에 전도 전자기 코일을 놓고 전류파를 흘려서 생긴 자기장을 두개골에 통과시켜 신경세포를 활성화하는 두뇌 자극법이다. 지난 1985년 미국에서 처음 고안된 이후 특히 우울증 치료 효과가 큰 것으로 밝혀져 유럽, 캐나다, 이스라엘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정식 치료법으로 자리매김했다.당시 채 교수는 TMS를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 2000년 초 세계 최고 수준의 TMS 치료 기관인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의대로 직접 달려가 마크 조지 교수와 공동연구를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우울증·강박증·운동장애 등 다양한 질환을 대상으로 공동연구를 실시한 결과 우울증처럼 TMS 효과가 잘 알려진 질환에서는 물론이고, 기존의 치료 방법이 효과가 없던 강박장애 환자에게도 의미 있는 효과가 있다는 걸 밝혀냈다. 확신에 찬 채 교수는 우여곡절 끝에 관련 장비를 한국에 들여왔다.그로부터 20년 후, 한국 스타트업이 미국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기(IT) 전시회 ‘CES 2022’에서 전자약으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혁신상을 거머쥐었다. 와이브레인이 개발한 스트레스 전자약 폴라(Pola)가 그 주인공이다. 폴라는 신경전기자극(Transcutaneous Electrical Nerve Stimulation, TENS) 기술을 이용해 심신 안정, 근육 완화, 통증 개선에 도움을 주는 스트레스 전자약이다. 500원짜리 동전만 한 폴라는 이마 외에도 어깨, 팔, 다리, 허리 등에 부착해 쓸 수 있다. 채 교수 옆에 앉아 있던 이기원 와이브레인(40) 대표는 “기존에 미국 FDA 허가를 받은 TMS 장비는 대형인 데다 병원에 가야만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며 “폴라는 기존 TMS 장비보다 훨씬 더 미세한 2㎃(밀리암페어) 정도의 전류를 써 안전하고, 초소형화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고 인정받았다”고 설명했다. 와이브레인의 우울증 전자약 ‘마인드스팀’은 이미 지난해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시판 허가를 받아 처방약으로 쓰이고 있다.그간 이곳의 임상시험을 주도했던 채 교수의 덕이 컸다. 둘의 인연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대표는 우울증 환자에게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겠다며 와이브레인을 차렸다. 계기가 있었다. 이 대표는 “삼성에서 일할 때 우연히 나간 모임에서 전기자극 기술 얘기를 들었다”며 “전기자극 기술을 어디에 쓸 수 있을까 고민하다 정신질환을 겪는 가족을 위해 우울증과 치매 치료를 선택했다”고 했다. 이 분야 최고 권위자인 채 교수부터 찾아갔던 이 대표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무작정 연락하고 찾아갔습니다. 카이스트에서 신소재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삼성전기에서 모바일 메모리 개발 분야에서 일했으니 관련 분야 인맥도 없었죠. 채 교수님도 처음에는 저를 의료기기 영업사원쯤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만나 뵙고 우리가 가진 기술과 미세 전류자극으로도 치료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걸 열심히 설명했어요. 돌이켜보니 제 젊음과 패기만 보고 도와주신 것 같습니다. 덕분에 시판 허가를 받기까지 40여 차례나 임상을 진행했어요. 하지만 오히려 저에게 밥을 사주셨지 저는 드린 것이 없네요.”두 사람은 그렇게 인연을 이어갔고, 시제품이었던 전자약 상용화에도 속도가 붙었다. 그렇게 해서 개발된 게 국내 첫 시판에 성공한 의사 처방 우울증 전자약인 ‘마인드스팀’이다. 작용기전은 미세한 전기자극을 활용한 ‘경두개직류전기자극법(tDCS)’으로, 우울증의 원인이 되는 저하된 전두엽의 기능을 정상화하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임상 결과도 좋았다. 와이브레인은 경증 및 중 등증 우울증 환자 65명에게 마인드스팀의 ‘tDCS’를 6주간 적용했는데,임상 참여자의 57.4%에서 우울 증상이 정상 범주로 돌아왔다. 국제신경정신약물학회 산하 국제 저널에서 발간한 ‘2020년 tDCS 국제 가이드라인’은 마인드 근거 레벨을 ‘A(확실한 효능)’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렇게 2020년 국내 최초로 우울증 치료에 단독 요법으로서 식약처 허가를 받아냈다. 채 교수가 와이브레인의 임상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첫 케이스였다.
두 사람은 이 제품을 이렇게 설명했다. 채 교수는 “마인드스팀은 집에서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비약물 우울증 치료법”이라며 “우울증 환자의 80%가 6개월 이내 항우울제 치료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데 마인드스팀은 정신과 의사가 원격으로 환자를 모니터링해 꾸준히 자가 치료를 할 수 있게 돕는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2017년 국립트라우마센터도 시범사업과 연구 목적으로 마인드스팀을 도입했다”며 “현재 국내 정신병원 110곳에서 처방 전자약으로 마인드스팀을 사용 중”이라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전자약 자체보다 이 약이 주는 더 큰 힘에 주목했다.
전자약이 나왔으니 이제 약을 먹지 않아도 되겠다.채정호 교수(이하 채): 물론 먹는 약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한 가지 약물로 치료한 후에 효과가 좋지 않으면 처방해 전자약으로 자가 치료를 유도한다. 분명 먹는 약에 견줄 만큼 효과가 있고, 장점도 많다. 스마트폰처럼 충전하며 집에서 쓸 수 있기에 장기 처방할 수 있고, 치료 과정을 계속 모니터링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잠재적인 환자를 치료 과정으로 끌어내는 힘이라고 믿는다. 국내 우울증 환자는 약 1000만 명이 넘지만 실제 병원에 가는 환자는 이 중 10%도 안 된다. 사회적으로 우울증, 인지장애 등 정신질환에 대한 고정관념과 거부감이 크기 때문이다.
전기자극이 위험하지는 않나.채: 임상시험 당시를 돌아보면, 일단 전기자극이 워낙 미세해 크게 불편해하는 임상 대상자가 없었다. 다소 피부가 민감한 경우를 포함해 전제 임상 대상자 중 약 26%가 피부가 약간 타는 듯한 느낌을 받거나 빨개졌을 뿐이다. 하지만 사용시간이 30분에 불과해 환자가 집에서 착용하고 사용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마인드스팀이 시판 허가를 받았고, 스트레스 전자약 폴라가 CES 혁신상을 받았다.이기원 대표(이하 이): 일대 사건이라 할 정도로 큰 의미가 있다. 먹지 않아도 되는 ‘마음 치료약’의 대중성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은 전자약 수요가 높은 곳이란 점에서 미국 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는 기대도 한층 높아졌다. 실제 폴라보다 앞서 개발된 마인드스팀은 지난해 미국 FDA에 신청을 넣어 허가를 기다리고 있다.
전자약이 환자를 어떻게 치료하는지 궁금해하는 이가 많다.채: 쉽게 설명하면 전기로 뇌세포를 활성화하는 원리다. 우리의 뇌는 수많은 세포로 연결돼 있고, 각 세포는 활동 전위(action potential)로 연결돼 있다. 하지만 기능이 저하된 뇌는 이런 활동 신호를 내지 못하고 사람을 축 처지게 한다. 이런 뇌에 미세한 전기자극을 주면 그 자극으로 조직의 전위가 변한다. 자극을 주는 위치와 정도에 따라 세포 활동을 강화하거나 억제하는 식으로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다.
정신의학계 입장에서도 큰 변화일 수 있겠다.채: 그렇다. 변화의 속도도 점점 가팔라지고 있다. 원론적으로 설명하면 정신의학에서 상담요법을 빼면 ‘화학’과 ‘물리학’이 남는다. 화학은 약물치료를 생각하면 되고, 물리학은 전기신호 같은 자극일 수 있다. 사실 정신과 영역에서 전기자극은 1930년대부터 나온 얘기다. 문제는 그 자극이 너무 강해 치료 효과보다 부작용이 컸다. 제일 좋은 치료 방법은 화학과 물리학을 병행하는 건데, 최근 첨단 기술이 도입돼 두 가지 요법을 병행할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와이브레인은 전두엽에 물리적인 자극을 줘 비수술 방식으로 치료하는 쪽에 서서 최적의 자극 ‘지점’을 찾고 있다.
이 대표를 만나고 나서 임상시험을 주도하기로 결정했다. 어떤 느낌이었나.채: 이 대표는 젊고 패기가 넘쳤다. TMS 도입 시절에는 새 장비는커녕 중고 장비도 그 고초를 겪으며 들여왔던 터라 이 대표의 제안에 귀가 솔깃했다. 실제 당시 국내에서 관련 치료 목적으로 장비를 구하려고 해도 죄다 외국산이었다. 그래서일까.
이: 대표의 전자약 임상계획을 들어보니 ‘이참에 국산화를 해보자’는 뭔지 모를 사명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대표는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뜻이 좋았다.
어떤 뜻을 밝혔나.이: 처음 채 교수님과 약속한 게 있다. “‘시장’보다 ‘환자’를 좀 더 생각하자”였다. 앞서도 말했지만, 국내에 우울증 환자는 약 1000만 명,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거라 확신하다. 우울증을 경험하는 사람은 점점 많아지는데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본 이는 극히 드물다. 항우울제를 먹는 것도 왠지 무섭다. 이들에게 대안 치료법을 제안하고 싶었다. 채 교수님을 비롯해 외부 자문단으로 활동하는 대학병원 교수님들도 이 점을 높이 샀다.
전자약을 처방해도 원격에서 환자는 관리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이: 그렇다. 단순히 전자약이 아니라 전문 의료진이 원격으로 환자의 증상과 행동을 평가 관리해야 한다. 지난 2월 9일 정신건강의학과 전용 척도검사 관리 자동화 솔루션인 마인드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출시한 이유다. 국내 상당수 정신건강의학과 병의원들은 환자의 증상과 행동평가 척도검사를 종이 검사지로 진행해왔다. 와이브레인은 마인드서비스를 전국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에 무료로 제공하기로 했다. 정신질환의 검사, 치료, 모니터링 등 전 과정을 통합해 치료 효율이 높아질 것이다.
채 교수 얘기대로 연구할 게 무궁무진해 보인다.이: 그렇다. 우리가 개발한 재택 전자약은 디지털치료제 중 3세대 치료제로 분류돼 있다. 알약이나 캡슐 형태가 1세대 치료제이고, 항체나 단백질 등 바이오 의약품이 2세대 치료제다. 사실상 국내에서 와이브레인이 3세대 치료제로는 유일한 허가 사례가 됐다. 올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뇌과학 기술 분야에 5년간 6800억원을 지원하는 계획을 발표할 정도로 전자약 시장이 더 커질 것이라 확신한다. 앞으로 우리도 우울증, 불면증, 치매, 강박장애, 각종 스트레스 질환 등을 치료하면서 병원과 환자를 전자약 플랫폼 ‘마인드(MINDD)’로 더 끈끈하게 이을 생각이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채: 2019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마인드스팀의 국내 임상 결과를 발표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이 심포지엄에서 ‘우울증에서 비침습적 두뇌자극 치료’에 관해 발표했다. 그 무렵 강원도 산불을 겪고 악몽으로 불면증을 호소하는 피해주민 심리치료를 위해 국가트라우마센터 안심버스에 비치된 마인드스팀을 사용했다. 그때 기존 항우울제에 거부감 있는 환자들에게 대안 치료법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 2002년 미국 중고장비를 낑낑거리고 끌고 왔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와이브레인이 마인드스팀을 들고 미국 FDA 판매허가를 기다린다니 감회가 새롭다.
이: 마인드스팀이 식약처 허가를 받기까지 40번 넘게 임상을 했다. 업계에서 이렇게 단시간에 임상을 많이 하는 회사가 없는데, 우리 취지에 공감해준 채 교수님과 대학병원 연구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2013년 회사를 차렸을 때만 해도 ‘내가 만든 기술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공대생 마인드로 무턱대고 뛰어들었지만, 많은 분의 도움으로 가치와 방향을 찾은 것 같다. 덕분에 마인드스팀은 세계 최초로 100% 재택 기반 허가 임상을 완료할 수 있었고, 치매 전자약도 ‘세계 최초’ 기록에 도전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한국 의료기관과 함께한다면 전 세계 환자에게 최상의 치료 솔루션을 제공할 날도 머지않았다고 본다.- 김영문 기자 ymk0806@joogngang.co.kr·사진 임익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