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iser

Home>포브스>Adviser

176년 기술 명가, 독일 기업 자이스 

 

자이스는 1846년 창립자 칼 자이스가 차린 독일의 정밀기계·광학 공방에서 출발했다. 이제 자이스 그룹은 반도체 업계에서 사고 싶어도 못 사는 ASML EUV 노광기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한 특수 렌즈까지 공급하고 있다. 자이스가 170년 넘게 기술개발을 거듭하며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을 살펴본다.

▎자이스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에 들어가는 광학장치. / 사진:자이스 SMT 홈페이지
독일 자이스(ZEISS) 그룹은 1846년 구 동독 지역인 예나(Jena)에서 칼자이스(Carl Zeiss, 1816~1888)가 설립한 ‘정밀기계 및 광학기기 제작소’에서 시작해서 176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자이스의 2021년 기준 매출액은 75억2900만 유로(약 10조2000억원)이며, 순이익은 10억4700만 유로, 종업원은 3만5375명이다. 현미경 제작에서 출발한 자이스는 카메라, 망원경 렌즈 등 광학렌즈가 들어가는 고가의 과학·의료 장비(안과 및 신경외과 정밀수술장비) 등 광학계의 첨단기술을 선도하고 있다. 자이스는 최고급 카메라 렌즈로 유명하지만, 그룹 매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문이 반도체라는 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삼성전자, TSMC, 인텔 등 세계 최첨단 반도체 기업들이 반도체 초소형화 선단공정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것이 ‘EUV(Extreme Ultraviolet: 극자외선) 노광장비’인데, 현재 이를 전 세계에 독점 공급하는 기업은 네덜란드 ASML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EUV 노광장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올해 ASML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세계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ASML은 ‘을’이 아니라 ‘슈퍼 갑’인 셈이다. 그런데 이 ‘슈퍼 갑’ ASML 위에 또 하나의 ‘슈퍼 갑’이 있는데 바로 자이스이다. ASML이 독점 공급하는 EUV 노광장비의 핵심인 광학계 장비를 자이스가 독점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이스의 광학계 기술이 없으면 EUV 노광장비도 없다. EUV 노광장비는 ASML이 자이스의 도움을 받아 개발했다. ASML은 1997년부터 자이스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고 30년 가까이 협력해 오고 있다.

ASML의 전략적 파트너 자이스는 1968년 자사 광학기로 반도체 회로 프린팅에 성공했다. 1977년에는 세계 최초로 웨이퍼 스테퍼(stepper: 초기 노광장비)도 제작했다. 자이스는 1994년 반도체사업을 총괄하는 ‘자이스 SMT(ZEISS Semiconductor Manufacturing Technology)’ 사업부(2001년 자회사로 분사)를 설치했다. 1998년에는 반도체산업 차세대 발전의 결정적 계기라 할 수 있는 193나노미터 반도체 생산을 위한 광학 기술을 최초로 구현했고, 2002년 ASML과 자이스 SMT는 세계 반도체 제조 장비 1위에 함께 올라섰다.

2016년에 ASML은 반도체 회로 선폭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EUV 노광장비를 개발하기 위해서 자이스에 막대한 투자를 단행했다. 자이스 SMT의 지분 24.9%를 10억 유로에 인수하고, 자이스 SMT의 연구개발 등을 위해 추가로 현금 7억6000만 유로를 투자했다. 모두 17억6000만 유로를 제공해 자이스 SMT와 협력관계를 더욱 강화한 것이다. 2019년 EUV 노광기술을 활용한 칩이 탑재된 스마트폰이 출시되었으며, 2020년 자이스의 EUV 노광기술은 ‘독일미래상(German Future Prize)’을 받았다. 현재 자이스는 EUV 노광기술 관련 특허 2000여 개를 보유하고 있다.

세계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갑 중의 갑이 된 자이스는 지난 176년 동안 어떻게 끊임없이 발전해올 수 있었을까? 자이스사를 100% 보유한 ‘칼자이스재단(Carl Zeiss Foundation)’에 해답이 있다. 흥미롭게도 칼자이스재단은 칼 자이스가 설립하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3년이 지난 1891년, 당시 예나대학교 물리학 교수였던 에른스트 아베(Ernst Abbe, 1840~1905)가 재단 설립을 주도했다. 24살이나 차이가 나는 칼 자이스와 에른스트 아베는 어떻게 함께 경영할 수 있었을까?

먼저 칼 자이스를 살펴보자. 그의 부친은 절삭용 선반으로 장식품을 만드는 장인이었는데, 당시 귀족들의 총애를 받으며 상당한 명성을 쌓았다. 부친의 뜻에 따라 철학, 역사를 공부한 형들과 달리 칼은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아 일찍부터 기계 기술자에게 도제 수업을 받았다. 그 후 8년 동안 독일 전역에서 과학기술 발전을 체험한 칼은 1846년에 ‘자이스 정밀기계 및 광학기기 제작소’를 설립하고, 1847년부터 현미경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당시 생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어 현미경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이었다. 장인정신에 기반한 기술자 존중 경영에 따른 고품질 제품으로 사업은 번창했다. 그러나 칼은 고배율 현미경을 제작하는 데는 장인의 기술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물리학의 핵심인 광학지식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칼은 1866년에 촉망받는 과학자 아베 박사를 찾아내 현미경 고도화 연구개발을 의뢰했다. 이른바 산학협력을 실행한 것이다. 1872년부터는 자이스의 모든 현미경이 아베 교수의 과학적 계산에 근거해 제작됐다. 아베의 경영 능력도 간파한 칼 자이스는 1875년 아베 교수를 지분 파트너로 초빙하고, 그가 자이스사를 공동소유하며 경영에 참여하게 했다.

자이스의 공동소유 경영자 에른스트 아베의 출신 배경은 평범했다. 방직공장 직공이었던 아베의 아버지는 성실해 고용주에게 신뢰를 받았다. 아버지의 고용주는 아베의 과학적 재능을 알아보고 파격적인 재정지원을 통해 그의 교육을 후원했다. 1861년 21세 나이에 괴팅겐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아베는 1863년부터 예나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3년 후 칼 자이스를 만났다. 아베 교수는 자신의 광학분야 연구 성과로 자이스의 기술 역량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붕규산 유리 개발자이자 화학박사인 오토 쇼트(Otto Schott, 1851~1935)를 칼 자이스에게 소개했다. 이후 세 사람은 특수유리 생산을 위한 쇼트사를 설립했고 이로써 자이스의 광학분야 생산체계가 확립됐다.

아베는 부친이 방직공장에서 하루 14시간 일하던 모습을 기억하며 당시로는 획기적인 8시간 근로제를 도입하는 등 종업원 중심 경영을 더욱 강화했다. 아베는 광학분야 선배 과학자 프라운호퍼의 연구실이 그의 사후 바로 해체된 것을 보며, 자이스사와 쇼트사는 과학기술 발전을 선도하며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영속기업이 되길 바랐다. 아베는 칼의 아들 로더리히(Roderich, 1850~1919)를 설득해 자신과 자이스 가문 후손이 보유한 자이스사 지분 100%와 쇼트사 지분을 출연하여 칼자이스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을 통한 지속가능경영에 동의한 쇼트도 1919년 쇼트사 지분을 재단에 출연함으로써 재단은 쇼트사 지분도 100% 보유하게 됐다. 두 회사는 2차 세계대전과 독일 분단 등 큰 위기를 재단이라는 구심점을 통해 극복했고, 지금까지 R&D 주도형 초우량 기업으로 발전해왔다. 칼 자이스, 에른스트 아베, 오토 쇼트, 이 세 사람과 후손이 만들어 낸 재단과 이를 통한 자이스사와 쇼트사의 독립적 경영은 독일 지속가능경영의 모범이 됐다.

- 이성봉 서울여대 경영학과 교수

202209호 (2022.08.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