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이상표 화백 

은퇴 경영자의 인생 2막 

여경미 기자
한국화 화가 이상표 화백의 이력은 독특하다. 미술을 전공하고 평생 그림을 업으로 삼아온 여타 화가들과 달리, 그의 본업은 예술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전문경영인이었다. 2019년 신한다이아몬드 사장을 끝으로 기업인의 삶을 마무리한 뒤 취미로 갈고닦았던 창작 활동에 전념, 전업 화가로서 새로운 인생 여정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전업 화가가 되기까지 30여 년간 경영 현장을 누빈 이상표 화백이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상표 화백은 삼성전기 인사·홍보팀장(상무)과 중국·미주총괄(전무)을 거쳐 에스원 보안솔루션 사업부장, 신한다이아몬드 사장을 역임하기까지 30여년간 경영 현장을 누볐다. 정년퇴임 후 이듬해(2020년) 제39회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 입선하며 화가로 데뷔했다. 이어 40회, 41회 국전 특선과 목우공모미술대전에서 우수작가상(2021년), 특선(2023년)을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한국미술협회(한국미협)와 목우회 정회원으로 가입해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이 화백은 어릴 적부터 노트에 빈 곳만 있으면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장남으로서 집안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과 가정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가장의 짐이 꿈을 억눌렀다. 삼 형제의 장남이란 이유로, 집안을 이끌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꿈과 상관없이 공대에 진학했다. 어쩔 수 없이 꿈을 접었지만, 틈틈이 그린 그의 그림 실력은 주변에서도 감탄할 정도였다. 대학 시절 한국화 풍의 크리스마스카드를 그려 길거리에서 팔아 용돈을 벌기도 했을 정도였다. 당시 카드를 함께 팔았던 친구들은 “그림을 그리는 속도가 옆에서 풀 붙이는 속도보다 빨라서 놀랐다”고 기억한다. 그의 꿈은 동생에게 투영됐다. 미대에 진학해 서양화가가 된 동생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꼈다. 하지만 ‘기회가 되면 제대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막연한 꿈은 35년간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늘 가슴에 담고 있었다.

전업 화가가 되겠노라 첫발을 떼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

퇴직 후 그림을 시작해보겠노라 생각했지만, 어떻게 그림을 시작할지 막연한 망설임에 주저하기만 했다. 아내가 나와 사전 협의 없이 예술의전당에서 내가 평소 좋아하던 오용길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의 아카데미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등록을 해줬다. 시작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 ‘제대로 한번 배워보라’는 아내의 적극적인 응원과 따뜻한 격려는 큰 힘이 됐다. 그렇게 어렵사리 첫발을 내디뎠다.

전업 화가가 돼야만 했던 이유가 궁금하다.

가족의 생일이나 주요 기념일, 혹은 친구들의 개업식이나 중요 이벤트가 있을 때 부채나 한지 등에 그림을 그려서 선물했다. 그때마다 아내와 가족들은 감탄했고, 몇몇 친구는 그림을 표구해서 집이나 사무실에 걸어놓을 정도로 기뻐했다.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그림이 사회에서 인정받는다면, 누군가가 평생 내 그림을 귀하게 간직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한 가정의 가장이다 보니 가족들에게 무작정 ‘화가로서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년이 없는 전업 화가가 돼 고정수익을 창출하며 인생 2막을 열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작가가 현장에서 느낀 감동은 작품으로 재탄생해


▎이 화백은 제40회, 제41회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과 목우공모미술대전에서 우수작가상(2021년), 특선(2023년)을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여러 분야 중 유독 동양화의 매력에 빠진 이유는 고등학교 때 만난 은사 덕분이다. 동양화가인 야송 이원좌 선생을 미술 교사로 만나면서 동양화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야송은 큰 화폭에 전국 각지의 명소나 동물, 나무 등에 혼을 불어넣은 듯한 진경산수화로 유명하다. 경북 청송군에 자리한 군립청송야송미술관에서 야송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이 화백은 야송을 “평소 취미 삼아 만화를 즐겨 그리던 나에게 동양화란 무엇인지 알려준 분”이라고 했다. 선생의 조언에 따라 실제로 만화를 그리듯 붓으로 외곽선을 그려 넣고 수채화물감을 입히니 제법 동양화 같은 분위기가 연출됐다.

또 다른 스승으로는 아내의 격려 덕분에 인연이 닿은 오용길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가 있다. 오 교수는 이 화백이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해결책을 제시해 작가의 길을 온전히 걸을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줬다. “스승이 그림을 대신 그려줄 수는 없으나 붓 잡는 법은 알려줄 수 있다”는 이 화백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취미가 아닌 전업 화가가 되기 위해 남들보다 배 이상의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만의 표현 기법을 찾기까지 여정이라면.

하룻낮 10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10시간도 모자라, 꿈속에서 아내 등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차를 몰다가도 그리고 싶은 풍경이 나타나면 차를 세워놓고 손으로 허공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다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벽에 부딪히면 잠을 못 이룰 때가 많았다. [걷고 싶은 길]은 집 근처에 있는 우면산을 걷다가 우연히 본 풍경을 그린 것이다. 나뭇잎이 부서져 내리는 햇살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해 몇 날 며칠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 2시에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 화실에 들어가 아침까지 작업해서 완성하기도 했다. 화선지에 그릴 때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어떤 작품을 그리든지 철저한 사유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 사유와 고뇌가 거듭돼야 비로소 창작의 아픔이 나만의 묘사 방법으로 탄생한다. 이런 경험이 누적돼 화풍으로 자리 잡는 축대가 됐다.

“가장 자신 있는 선을 중심에 두고 드로잉을 기반으로 치밀한 묘사가 특징”이라고 소개하는 이 화백은 5년여 작가 생활 동안 스스로 마음에 드는 작품도, 흡족하지 않은 작품도 있지만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며 자신만의 표현 기법을 완성해나갔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그리기보다는, 자신이 본 풍경에 상상을 더해 새로운 풍경을 만들기를 선호한다. 치밀하게 계산해 색을 덧칠하거나 여백으로 남기는 등 자신만의 표현 기법을 최대한 살려 입체감을 표현한다.

2023년 목우공모미술대전 특선 작품인 [봄바람-결 그리고 소리]는 유채꽃 위에 부는 바람이 언덕 위 능선을 타고 흘러나가는 결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들꽃들이 흩날리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상상되는 것 같다. 그는 “정경이 품은 비가시적인 정보까지도 어떻고 거르고 축약할지, 자연이라는 본질을 화폭에 오롯이 전달할지 묘사 방법이 가장 큰 숙제”라고 덧붙였다.

그의 화풍이 잘 드러나, 작가도 선호하는 작품은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소통]과 2021년 국전 특선 수상작인 [어우러짐]이다. [소통]은 선운사를 내려오며 단계적으로 깨끗하게 걸러지는 물을 ‘소통’이란 언어로 규정했고, [어우러짐]은 직접 부산에 가서 온종일 감천 문화마을을 거닐고 현장 스케치를 하며 다가온 감동을 100호짜리 작품으로 담았다. 이 화백은 “현장에서 느낀 감동이 내 작품 안에서 오롯이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날 때 보람을 느낀다”며 “치밀한 작업 속에서 그 당시의 감동과 추억이 재연하며 느끼는 설렘”이라고 강조했다. 끊임없는 고뇌와 노력이 보상받는 듯 그의 작품을 좋아하고 전시회를 찾는 관람객 수도 점차 늘고 있다. 그의 작품 80여 점은 삼성인력개발원, 삼성전기, THE PR, 두신전자,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실, 진도여귀산미술관, 뉴패러다임미래연구소 등과 개인 컬렉터들이 소장 중이다.

남들과 시작이 다른 전업 화가의 길


▎[봄바람-결 그리고 소리], 2023년, 수묵담채, 125×84cm. 이 작품은 2023년 목우공모미술대전에서 특선 작품으로 선정됐다. / 사진:이상표
대개 미술 전공자는 전시회 등을 열어 전업 화가로 데뷔한다. 이와 달리 비전공자가 전업 화가가 되려면 한국미협, 목우회, 국전작가협회 등이 주최하는 제도권 공모전에서 입선해야 한다. 국전을 주관하는 한국미협은 국내에서 가장 역사가 길고 수만 명의 회원이 등록돼 가장 권위 있는 단체다. 한국미협의 정회원이 되려면 개인전을 개최하거나 공모전에서 수상해 일정 점수에 도달해야만 심사위원회에 상정할 수 있다.

비전공자가 전업 화가가 되고자 넘어야 할 장벽이라면.

한국미협 정회원은 개인전 개최가 연 1회만 1점으로 인정돼 짧은 시간 내에 일정 점수에 도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꾸준히 개인전을 개최했고 국전에 2020년도 입선, 2021~2022년 두 번 연속 특선을 하며 빨리 2022년 한국미협 정회원이 될 수 있었다. 목우회는 미술 전공자에게도 기본 가산점이 없어 정회원이 되기 까다롭다고 알려져 있다. 목우회가 주관하는 미술대전에서도 특선으로 당선하고 우수작가상을 받으며 2023년에 정회원이 됐다. 미술 비전공자였던 나는 국전 특선 이상의 당선 경력자만 회원 자격이 주어지는 국전작가협회에 2022년 부회장으로 선임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이 화백은 현재 한국미협, 목우회, 국전작가협회, 서초미협 회원, 아이프칠드런(Aif children) 엔젤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미술 전공자들은 대학이나 학과 등으로 선후배 간 단단한 결속력을 다지고 그들만의 리그를 굳건히 활성화한다. 반면 비전공자들은 사실 맨땅에 헤딩하듯 홀로 작가 생활을 해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이 화백은 “영향력 있는 작가협회의 회원이 되면 작품 활동에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객관적으로 작가 역량을 가늠하는 지표로 활용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작가협회 회원이 되는 것이 쉬운 길은 아니지만 제도권 안에 들어갈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전문경영인으로서의 경험이 전업 화가가 된 지금, 도움됐는지 궁금하다. 두 직업의 공통점과 다른 점이라면.

전문경영인은 회사의 경영을 책임지고 인력 관리, 매출과 손익 달성을 통해 회사를 성장시키는 리더이자 사령탑이다. 기업은 조직 구성원들이 시스템화돼 움직인다. 한 3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니, 문득문득 연간계획을 수립하던 당시가 떠오른다. 모든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는 측면에서 전업 화가는 전문경영인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그림이 완성된 후 오른쪽에 자신의 낙관을 찍고 이름을 써서 ‘내가 그렸음’을 알리며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한다. 전업 화가는 기업처럼 조직적인 운용이 아닌, 작품을 그리는 과정부터 작품의 책임 등을 도맡는다.

전업 화가가 돼 한 가지 좋은 점은 있다. 전문경영인은 2~3년이란 임기가 있지만 전업 화가는 체력이 닿는 한 지속해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주변에 CEO로 퇴직한 대다수의 지인은 평균 60대 중반에 정년을 맞이한다. 전문경영인으로 정년 퇴임을 해, 아무래도 다른 직업군보다 삶의 여유가 있다 보니 퇴직 후 1~2년은 해외여행을 다니거나 골프 여행을 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2~3년이 지나면 그 마음도 시들해진다. 이후에는 취미 생활로 서예, 사진을 배우거나 방송통신대 어학 과정 등을 다니며 소일거리를 찾는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다가 갑자기 주어진 많은 시간은 이들을 허망하게 만든다. 정년 후 취미 활동으로 알차게 시간을 보내고 부가 수익도 창출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인생 2막이 펼쳐지리라 생각한다.

앞으로 화가로서의 계획이라면.

지난 2월에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24 월드아트엑스포(WORLD ART EXPO 2024) 전시 외에도 올해 두 번의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4월 일본 후쿠오카에서 한일 문화예술 작품전(후쿠오카)에 참여할 계획이고 11월 한전아트센터 기획전시실에서 목우 우수작가 5인전 ‘울림 그리고 어울림전’을 준비하고 있다.

어떤 선배 작가가 “자기가 그렸던 과거의 그림을 보고 잘 그렸다는 생각이 들면 퇴보하고 있는 것”이란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작품을 애정해주시는 이들에게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내게 주어진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익숙한 그림보다는 늘 새로운 시도로 지평을 열어나가는 자세를 견지하겠다.

- 여경미 기자 yeo.kyeongmi@joongang.co.kr _ 사진 최영재 기자

202403호 (202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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