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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불 배꼽을 내놔라 일제와 조선인 숨바꼭질 

두 번 살고 두 번 죽은 연산군 시절 정여창의 피눈물고개 넘는 감회도
산 타는 변호사 양승국의 ‘역사산행’_청계산 

청계산 입구인 서울 서초구 원지동 미륵당 앞. 가운데 큰 나무 아래가 미륵당이다.

매달 첫 번째 토요일이면 내가 몸담은 법무법인 로고스의 산악회 산행이 있다. 4월 산행은 서울 시민이 즐겨 찾는 청계산으로 가기로 했다. 아침 9시, 약속 장소인 서울 서초구 원지동 미륵당 앞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바로 뒤에 서 있는 미륵당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3호인 원지동 미륵불은 원터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예부터 영험한 능력이 있어 동네 사람들이 지금도 매년 이곳에서 동제(洞祭)를 지낸다고 한다. 미륵불을 보고 싶었지만, 미륵불은 미륵당 안에 갇혀 있고 문은 커다란 자물쇠로 굳게 채워져 있다.

미륵불은 미래에 중생을 구제하러 오신다는 부처다. 그렇기에 현세에서 고통받고 신음하던 민중에게 미륵사상이 많이 퍼져 산행하다 보면 여기저기에서 미륵불을 많이 만난다. 궁예도 이런 민중의 심리를 이용해 자신을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이렇듯 민중과 가까이 있어야 의미가 있는 미륵불인데 왜 이렇게 미륵당 안에 꽁꽁 감추어 두었을까?

그런데, 설명을 보니 동네 사람들이 미륵불을 감추어 두려는 마음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이곳 미륵불 앞에서 치성을 드리면 불상의 배꼽에서 휘파람 같은 소리가 나와 기도하는 사람에게 길흉화복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마차를 동원해 이 미륵불을 일본으로 밀반출하려다 실패했다는 것이다.

가져갈 수는 없고, 불상이 영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자 일본 경찰은 1926년께 불상의 배꼽을 쪼아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로서는 또다시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미륵불을 미륵당 안에 보호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산행을 다니다 보면 곳곳에서 일본과 관련해 안 좋은 추억이 남아있는 곳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시기도 멀게는 고려시대 왜구부터,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의 만행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있다. 미륵당 앞에는 조금 투박스럽게 보이는 키 작은 3층석탑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여말선초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이렇게 석탑이 있다는 것은 예전에 이곳에 절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일 터다.

그러나 설명에는 이곳이 절터라고 추정만 할 뿐 자세한 이야기는 없다. 이곳의 이름은 원지동(院趾洞)인데, 미륵불 설명에는 원터마을이라고 돼있다. 원터마을을 한자로 옮겨 원지동이라고 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원지동(院址洞)’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조선시대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교통 요충지에 역(驛)과 원(院)을 설치했는데, 이곳에도 예전에 원이 있어 ‘원터’이고, ‘원터’가 있는 마을이니 원터마을이라고 한 것이리라. 그런데 퇴계원·장호원·인덕원·사리원 등은 지금까지 구체적인 지명으로 남아있는데, 이곳의 원은 진작 사라졌는지 단순히 ‘원터’라는 이름으로만 남아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청계산으로 접어든다. 등산로 입구 한편에서는 벌써 산행을 마치고 내려온 등산객이 그곳에 설치돼 있는 ‘에어건(air gun)’으로 등산화와 바지 등에 묻은 흙과 먼지를 털어내고 있다. 골프장에서나 볼 수 있던 시설을 이렇게 산에서도 볼 수 있게 돼 반갑다.

등산인구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그만큼 해당 지자체에서 많이 신경을 쓰는 덕분이리라. 등산로 옆으로는 진달래·개나리·생강나무꽃 등이 산비탈 여기저기서 겨우내 감춰두었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을 피우지 않은 다른 관목에도 물이 올라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4월 초.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이미 녹음이 짙게 드리울 것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생명의 기운이 다시 움터 오르며 아름다운 색깔로 산을 치장하기에 산을 오르는 발걸음도 더욱 경쾌하다. 봄꽃에 취해 걷다 보니 어느새 돌문바위다.


멀리 바라보이는 망경대 정상. 망경대는 청계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다.

큰 바위 옆에 거북이처럼 생긴 작은 바위가 큰 바위를 올라타듯 걸치고 있고, 그 사이로 돌문이 형성돼 있다. 청계산의 정기를 듬뿍 받아가라는 바위 옆 안내판 때문인지 사람들은 몇 바퀴씩 돌문을 빙빙 돈다. 정기뿐만 아니다. 이 돌문바위를 돌면서 소원을 빌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 이야기에 기대 스님 한 분이 시주함을 앞에 놓고 열심히 목탁을 두드리고 있다. 소원을 빈 사람들은 더욱 확실히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인지 공손히 시주함에 시주를 한다. 다시 매봉 정상으로 향하는데 충혼비 안내판이 보인다. 1982년 6월1일 특전부대 병사들을 태운 공군 C-123 수송기가 짙은 안개에 방향을 잃고 청계산에 추락해 탑승했던 53명 전원이 순직했단다.

충혼비는 등산로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다. 충혼비 앞에는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는 꽃이 꽂혀 있고, 그 옆 비석 위에는 베레모를 쓴 공수부대원의 흉상이 올려져 있다.

산행을 시작한 지 두 시간이 채 안 돼 해발 583m의 매봉 꼭대기에 섰다. 역시 매봉 정상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서둘러 ‘등정 증명사진’을 찍고 혈읍재로 향한다. 내려가는 길은 더욱 빨라서 20여 분 만에 혈읍재에 도착했다. ‘혈읍(血泣)’이라면 피울음 또는 피눈물이라는 말인데, 고개 이름이 왜 이렇게 무시무시할까?

初心 지키기 어려워라, 望京臺의 잘못된 이름 조선 전기의 사림파 학자 정여창(鄭汝昌·1450∼1504)이 유교적 왕도정치가 연산군에 의해 짓밟히면서 무오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청계산으로 은거했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서 자기들의 이상이 무너질 것을 생각하고 또 무오사화의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것을 바람결에 들으면서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고 한다.

결국 정여창은 무오사화 때 종성으로 유배되어 1504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혈읍재에서 능선을 타고 그대로 오르면 망경대(望京臺)다. 그러나 망경대에는 군 시설이 들어서 있어 어느 정도 오르다 오른쪽으로 우회해야 한다.

원래 눈 아래 모든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해서 만경대(萬景臺)라고 했으나, 고려의 유신(遺臣)인 조윤이 이곳에서 송도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그 이후부터 망경대로 고쳤단다. 올 3월 관악산 연주대(戀主臺)에 올랐을 때는 강득룡·서견·남을진 등이 연주대에 올라 개성을 바라보며 고려 왕조를 그리워했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또 청계산에서 고려의 절개를 만난다. 조윤은 고려가 망하자 이름도 윤(胤)에서 절의를 지켜 뜻을 굽히지 아니한다고 견(킗)으로, 자(字)도 종견(從犬)으로 고쳤다. 끝까지 충직하게 고려를 따르는 개라고 하여 종견이라고 했을까? 조윤이 이렇게 이름까지 바꿔가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킬 때 조윤의 형 조준은 이성계에 협력하여 조선의 개국공신이 됐다.

이성계가 조윤의 인물됨을 아깝게 여겨 형 조준을 대동하고 이곳 청계산까지 찾아와 간절히 도와줄 것을 청했지만 조윤은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이야기와 반대로 조윤이 형과 함께 조선 개국(開國)에 참여해 개국공신 2등으로 평양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과연 진실은 어느 쪽일까?

어쩌면 조윤은 이름까지 고쳐가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고자 했지만 종래에는 형제가 같은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닐까? 정오를 조금 넘겨 해발 545m의 이수봉에 도착했다. 이수봉 정상석(頂上石)에도 정여창의 일화가 소개돼 있다. 정여창이 스승 김종직과 벗 김굉필이 연루된 무오사화의 변고를 예견하고 이 산에 은거해 생명의 위기를 두 번이나 넘겼다 하여 후학인 정구 선생이 이 봉우리를 이수봉(二壽峰)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쓰여 있다.

무오사화는 성종 때 본격적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림파와 그 동안 정권을 잡고 있던 훈구파가 갈등을 빚으면서 연산군 4년(1498) 훈구파의 모함으로 사림파가 화를 입은 사건이다. 조선시대에는 평소 왕이 재위 중에 조정에서 일어난 일을 사초로 매일매일 기록해두었다 선왕이 죽고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이 사초를 기초로 본격적인 실록을 작성하게 된다.

그런데 성종실록 작업의 당상관으로 임명된 훈구파 이극돈이 사림파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발견했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진나라 항우가 초나라 의제를 폐위한 것에 대해 의제를 조의하며 쓴 것인데, 이극돈이 이 조의제문이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한 것을 은유적으로 비판한 것이라고 여기고 훈구파 대신들과 모의해 연산군을 충동질했다.

興淸亡淸 뒤에 어린 피비린내 그리하여 김일손·권오복 등의 사림파가 참형되고, 이미 무덤에 들어간 김종직마저 부관참시했으며, 정여창의 벗 김굉필도 곤장을 맞고 귀양을 갔다. 정여창은 그 전에 이 청계산으로 들어왔기에 무오사화의 첫 피바람은 피할 수 있었나 보다.

그러나 그도 결국 곤장을 맞고 멀리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가 1504년 귀양지에서 죽고 말았다. 그러나 연산군이 성종 때 자기 어머니 윤씨를 폐비하는 것에 찬동한 신하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이른바 갑자사화 때 정여창도 무덤에서 들추어져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러므로 이수봉의 설명처럼 정여창이 생명의 위기를 두 번이나 넘겼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처음 무오사화의 피바람을 피할 수 있었기에 두 번 살았다고 하면 말이 될까…. 조선의 4대 사화 중 두 번의 사화를 일으켰던 연산군은 채홍사를 시켜 전국에서 반반한 여자들을 끌어 모아 그 중에서도 뛰어난 미인들을 흥청이라 하여 옆에 끼고 학문의 도장인 성균관이나 신성한 참선도량인 원각사마저 자신의 놀이터로 만들고 주지육림 속에서 흥청대다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

여기서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이 생겨난다. 조선의 문물제도를 완비했다고 하여 ‘이룰 성(成)’ 자를 써서 성종이라는 시호까지 받았던 임금의 바로 다음에 이런 망나니 임금이 즉위하였으니….

연산군의 이런 패륜정치는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태중(胎中)에 있을 때 성종의 바람기에 속을 썩이던 폐비 윤씨로부터 제대로 태교를 받지 못한 데다 생모가 폐비되고 끝내 사약을 먹고 죽는 불우한 가정사와 폐비의 아들이라고 사랑도 받지 못하고 엄격한 교육만 받았던 것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것은 아닐까?

어쨌든 연산군으로 인해 관객 1,000만 명을 동원한 <왕의 남자>라는 영화까지 나오게 되었으니, 연산군에게도 예술가들에게 창작욕을 불러일으킨 공은 있다고 해야 할까? 정여창과 연산군, 조견 등 오늘 청계산을 등산하면서 만난 역사의 인물들에 대한 이 생각 저 생각이 청계산 아래 옛골에 이르도록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언뜻 정여창이 혈읍재를 넘으면서 통곡하던 피울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양승국 1957년 서울 출생.

법무법인 로고스 파트너 변호사. 서울대 법대 졸업. 사시 23회.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 등 역임.

등산 마니아로서 산에 얽힌 역사 등 흥미로운 산 이야기를 아기자기하게 풀어낸 <양승국 변호사의 산 이야기>라는 저서가 있다.


200906호 (2009.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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