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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역사소설 ‘대왕, 떠나시다’ 월간중앙에 연재하는 작가 이문열 

“통일의 원형에서 통합의 DNA 찾아낼 터” 

인터뷰 이재학 편집인, 정리 박성현 기자 , 사진 전민규 기자
평민으로 왕에 추존된 유일한 인물 김유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첫 소설될 것 남북 분단 이어 한반도가 삼국통일의 역순으로 분열되는 현실을 보고 집필 결심

분열의 시대에 통합을 말하는 건 지식인의 책무이자 양심이다. 그런데 어떤 통합 주장은 불편과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도 있다. 통일신라의 경우가 그렇다. 이를 원형으로 삼아 나라와 민족의 통합을 이루자면 손가락질 받기 일쑤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신라의 삼국통일은 하지 말았어야 할, 반민족적인 사대주의적 통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이민족과 손잡고 동족을 멸한 사건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신라의 삼국통일은 역사의 퇴행과도 같다. ‘남북국시대’, ‘후기신라’라는 용어의 등장도 통일신라의 적통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식의 발로다.

작가 이문열이 <월간중앙> 5월호(2012년 4월 17일 발행 예정)부터 역사소설 ‘대왕, 떠나시다’의 연재를 시작한다.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김유신이 주인공이다. 김유신의 입을 통해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을 회고하고, 통일 이후를 점검하며, 궁극적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이 갖는 긍정성과 자주성을 고찰하게 된다. 그저 읽는 재미를 주는 역사소설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한반도가 남북으로, 남남으로 갈라지는 현실을 들추고, 고발하려는 목적도 없지 않다. 한반도 통일의 원형에서 분열의 해법을 찾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는 한동안 정치적 논란에서 벗어나고자 애썼다. 그의 책들은 문학적 내용과 무관하게 정치적 해석을 낳았고, 진보진영 공격의 표적이 됐다. 그래서 아예 의도적으로 정치적 발언을 삼갔다. 이제 그는 그런 시비가 주는 번거로움을 일정 부분 감수하려는 듯하다.

이런 노력은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 법이다. 진보논객으로 불리는 박노자 씨도 지난 2010년 펴낸 <거꾸로 보는 고대사>에서 고대사를 보는 시각에 오늘의 민족, 국가의식을 투영시키지 말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 작가도 고대사, 나아가 역사에서 민족을 소거하면 진실이 더 또렷해진다고 믿는다.

이 작가를 지난 연초 경기도 이천의 자택 부악문원(負岳文院)을 시작으로 본지 사옥 등에서 3차례 만나 새 역사소설 집필 구상과 최근 시국을 보는 소회를 들어보았다.

 

이번 작품을 구상한 계기는 뭔가?

“삼국지를 써서 많이 팔자 부채의식 같은 게 생겼다. 남의 나라 역사 가지고 이래야 하나 싶었다. 우리 나라의 역사적 인물을 그려 제대로 된 책 하나를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이순신과 김유신을 생각했는데 이순신을 다룬 소설은 지금까지 <칼의 노래> <불멸> 등 10여 권이나 된다. 그 다음으로 을지문덕 전기도 있는데 김유신은 거의 없었다. 해방 후에 쓴 게 하나 있고 참 드물다. 가장 최근에는 정순태라는 분이 썼는데 전기 형식이었다. 교보문고 가서 서가를 뒤져봤는데 별로 없었다. 뜻밖이었다. 1960~70년대에 애들을 상대로 한 만화소설은 있었는데 성인용 소설은 없었다.

나이 60을 넘기면서 자칫 내가 한 약속을 못 지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김유신 관련 책들을 모아서 보다가 갑자기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우리나라 역사가 20년 만에 상전벽해를 느낄 만큼 달라졌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예컨대 요즘 교과서에는 통일신라시대가 없어지고 남북국시대로 구분돼 있다. 우리 때는 유득공의 발해사에서 그런 게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교과서가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고 남쪽 일부를 통합했다는 정도로 지나가면서 통일 과업은 정작 고려로 넘어간다. 발해의 유민을 받아서 비로소 우리의 통일이 완성된다는 논리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많은 논쟁 요소가 있다.

예컨대 북한은 통일신라를 후기신라라고 부르고 최초의 민족통일은 고려가 했다고 본다. 신라는 백제만 복속시켰다는 주장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신라가 통일할 때에 진흥왕이 차지한 땅까지 포함하면 고구려에서 빼앗은 땅이 신라 본토의 배가 넘는다. 결국 통일은 신라가 시도하고 나중에 보완되고 완성되는 형태다. 현재의 영토는 세종 때 압록강 이하로 한반도 영역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면서 민족국가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고려 때 북진정책이 확실히 드러나긴 했지만 그 통일의 원형은 분명히 신라가 만들었다.”

김유신을 등장시켜 하시고 싶은 말씀은?

“통합에 관한 이야기다. 이순신이 방어라면, 김유신은 통합을 확산해간 인물이다. 우리나라라고 부를 만한 민족국가의 원형을 처음 만든 사람이다. 그 원형이 깨지면 다시 통일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김유신에 관심이 있었다. 소설 <연의삼국지>에는 주인공이 유비, 관우, 장비, 조조로 나오지만 정사 <삼국지>에는 주인공이 두 사람이다. 하나는 조조고 다른 하나는 제갈량이다. 조조에게 정통성을 부여했으므로 조조를 다룬 부분이 가장 길고 잘 돼있다. 그 다음이 양으로 치면 신하인 제갈량인데 6권까지인가 상당히 길다. 조조와 거의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삼국사기>는 김유신이 주인공이다. 삼국시대 전체의 인물을 다룬 ‘전(傳)’이 12개쯤인데 그중에 세 개를 김유신에게 할애했다. 그렇지만 양으로는 김유신을 다룬 부분이 나머지 모두를 합한 것보다 많다. 어떤 제왕보다 더 자세하다. 김춘추나 문무왕이나 이런 사람 다 해봐야 몇 쪽 안 된다. 김유신 사후 약 500년 뒤 김부식이 책을 쓰면서 김유신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그는 개인적으로 김유신을 그렇게 높여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름대로는 꽤 자주적인 역사관을 가지려 애쓴 흔적이 많은 사람이다. 이런저런 사정이 김유신에게 관심을 갖게 했다.”

 

신라의 통일에서 찾는 분열의 해답

왜 지금 통합인가?

“6·25 한국전쟁, 혹은 민족해방을 자력으로 못한 탓에 남북으로 분열됐다. 분단은 우리 역사의 그늘로서 외세가 우리에게 짊어지게 했다. 이 분단체제가 우리의 선택에 의해 또다시 내부적으로 분열하는 느낌이다. 좋게 말해서 남북통일 하려고 남남 분열하는 형국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왜 남북통일을 해야 하나? 왜 남남은 분열하는가? 처음 이 통합의 원형을 만든 신라의 통일을 보면 무언가 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제목을 왜 ‘대왕, 떠나시다’로 했는가?

“김유신은 평민으로서 왕으로 추존된 역사상 유일한 인물이다. 김유신 사후 162년이 지난 835년에 흥덕왕이 흥무대왕으로 추존했다. 그 얘기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공통으로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원래 그런 얘기를 잘 싣지 않는다. 김유신 사후 100년쯤인 신라 혜공왕 때 한밤중에 김유신의 묘에서 괴성이 울려퍼졌다. ‘내가 삼국을 통일하고 신라에 온갖 충성을 다 바쳤는데 신라 왕가는 나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다’며 그는 떠나려고 한다. 이에 놀란 신라 왕실이 제를 올려 김유신을 위로하고 김유신 묘역을 관리하는데 쓰이는 토지를 열 배 가까이 늘렸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김유신이 신라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김유신이 정말 떠나야 할지 모르겠다.”

무슨 뜻인가?

“지금은 신라가 3국을 만들던 역순으로 나라와 민족이 분열되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 먼저 남북한은 오랜 세월이 흘러 벌써 이질적인 나라가 됐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남남분열도 심화됐다. 어찌 보면 신라가 3국을 통일하던 역 수순으로 한반도가 갈라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김유신은 왜 삼국을 통합하려 했을까?

“그 이유를 작품에서 제시해야 한다. 김유신의 조상은 가야사람이었다. 가야는 대단히 고단한 나라로 주인 행세를 하려 달려드는 나라가 넷이나 됐다. 백제, 신라, 일본, 고구려다. 가야는 연맹국가로 중앙집권이 아니었다. 우선 살아남으려고 항복이라는 형태로 투항을 시도했는데 당시 삼국에서 세력이 제일 못한 신라였다. 나중에 힘을 모아 삼한을 통일했는데 외로운 독립보다는 어떤 형태든 통합을 이뤄서 힘을 키워 살아가려 했다고 보인다.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발전하고 번영하려는 통합의 추구였다.”


김유신과 신라는 의도적으로 삼국통일을 추구했는가? 아니면 생존의 몸부림이었을 뿐인가?

“김유신은 통합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그때 그에겐 나름대로 당위성도 있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그는 통합의 개념을 추구했다. 자기가 속한 일차집단의 어떤 자유나 번영을 위한 추구였지만 결과적으론 통합이라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물론 지금도 논쟁거리다. 과연 당시 신라인에게 통합이라는 가치가 마음속에 있었을까? 사실 부인하는 사람이 더 많다. 김유신이 동굴에 가서 기도한 것은 사실 통합이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다는 것이었다. 통합이나 일통삼한이 처음 나온 때는 <삼국사기>에서도 문무왕 때 이후다. ‘답설인귀서’라고 당나라와 편지가 왔다갔다하면서 처음 나온다. 그것이 왜 나오는가 하면 태종 김춘추가 죽은 후 신라에서 무열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원래 중국에는 시법(시호법)이 있다. 어떨 때 태종이라고 부르고, 어떤 때 문무를 붙이고, 그 다음에 열자는 어떤 때 붙인다는 법도가 적혀 있다. 쓰이는 한자마다 격이 있고 법이 있다. 태종은 부하를 잘 쓰고, 나라를 통일하거나 영토를 확대 통합해 국가를 크게 부흥시킨 왕에게 붙여준다. 그런데 당나라에서 태종이라는 시호를 쓴 지 얼마 안 돼서 신라가 김춘추에게 태종을 붙이자 당은 신라에 ‘너희가 어찌 감히 태종을 쓸 수 있느냐?’며 나무랐다. 신라에서는 김춘추도 삼한을 통합하고 김유신이라는 유능한 장수를 써서 과업을 완수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당시 당나라가 이를 시비로 전쟁을 일으킬 형편이 안되기 때문에 그대로 봐주었다고 볼 수 있다.”

 

1천년 전의 민족 개념

신라의 삼국통일은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에 제기하는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느냐는 우려가 없지 않은데.

“단재 신채호는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고구려를 친 것은 ‘이족을 끌어들여 동족을 멸한 사건’이라고 했다. 나라를 잃고 만주를 전전하던 독립운동가이자 재야의 사학자로서 절절한 심정은 이해되지만 역사와 가정 혹은 이상은 구분해야 한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서구에서도 17, 18세기에나 정립된다. 그보다 1천 년도 더 된 그 시절에 살아남으려는 합종연횡을 민족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어쨌든 동북공정과의 시비도 있을 수 있고 북한사관과의 충돌도 있을 수 있다. 알게 모르게 깊이 남한에 그들의 사관이 침투해있는데 그 충돌도 문제가 된다. 내 생각대로 쓸 생각이다. 너무 의식하면 움츠러드니까. 그러나 자료 조사 중에 뜻밖에도 북한의 고구려 정통사관이 많이 침투해 있어서 놀랐다.”

어떤 형식의 소설인가?

“유사회고록 형태다. 그런 형식이 아직까지 우리나라 역사소설에서는 없었다. 특히 역사 장편소설로서는 거의 본 적 없다. 김유신이 자기 입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형식이다. 좋은 점은 정서 설명이 전방위로 가능한데 다만 역사가 지나치게 주관화될 위험이 있다. 가뜩이나 소설을 사적인 의식의 토로로 쓴다는 이미지가 강해서, 또 역사를 빌미로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구나 그런 식으로 치부될까 염려스러워 차라리 군담소설로 써볼까 생각했다가도 그렇다면 굳이 내가 쓸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어서 유사회고록이라는 형태를 빌리기로 했다. 김유신이란 인물 자체에 이야기가 많아 객관성을 유지하는 데 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김유신이 사후 어느 정도까지의 사정을 안다는 전제하에 진술하게 되나?

“어쨌든 김유신 사후 삼국통일이 거의 매듭지어질 무렵까지는 이미 알고 회고하는 형태다. 단순하게 나당전쟁이 끝난 정도가 아니라, 통일 신라가 하나의 나라로 취급받는 시점이라고 해야 하나? 조금 더 가서 당나라도 어려워져서 싫어도 그런 체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안록산의 난’ 등으로 당이 가라앉는 게 신라통일 후 70~80년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포함하고 싶은 것은 나당전쟁이 신라의 외교전략과 겹치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신라는 당나라군 실컷 죽여놓고 그때마다 당나라에 편지를 보내서 사죄한다. 나당전쟁은 그래 한번 죽기살기로 싸워보자는 식이 아니라 우리는 잘하려고 하는데 너희 당나라 군이 먼저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대응했다는 식이다. 그런 심경이 ‘답설인귀서’에 잘 나타난다.

형식적으로 보면 나당 연합군이라기보다는 신라왕은 당나라의 계림도독부 도독이다. 그러나 명칭만 그렇게 주었을 뿐이다. 백제를 멸망시킬 때 소정방을 만나기로 한 날에 신라군이 하루 늦었다 해서 소정방이 신라의 장군을 처벌하려 하자 김유신은 한판 붙자고 달려들면서 징계론은 유야무야 된다. 당나라와의 전면전은 나중에 고구려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뤄진다. 고구려 부흥군을 신라가 받아들여서 당나라 군사를 들이친다. 화가 난 당나라가 황제에 거역했다고 죄를 묻는다. 그에 답한 게 ‘답설인귀서’다. 약속은 너희가 먼저 어겼다. 그 때 대동강이남 땅은 당태종이 우리에게 주기로 했는데 왜 안 지키느냐? 우리가 너희한테 반항하려는 게 아니라 약속을 안 지키니까 우리가 쳤다는 얘기였다. 그 뒤에도 당나라 군을 수천 명씩 죽여 놓고 편지를 보낸다. 또 사신을 거의 1년에 한 번씩 보내 조공을 바친다. 그것은 당나라도 마찬가지다. 군대를 보내서 신라를 친다. 하지만 다른 변방국 때문에 당나라 군대가 약해지면 못 이긴 척 신라를 놔둔다. 그런데 마침 그때 신라 사신이 오면 잘됐다 하고 그러지마 그러면서 용서해준다. 이런 식으로 30~40년 지나며 당나라도 힘이 빠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신라가 보여준 통일국가의 원형은 결국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졌다.”


옛 고구려 땅에 심은 가야국 재건의 꿈

최근엔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정치적 논란을 빚어왔다. 그런 점에서 신라 중심의 삼국통일을 얘기하겠다 했을 때 부담스럽지 않았나?

“정치적 논란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잘 안 됐다. <리투아니아 여인> 같은 경우는 현실 내용 1천 매 중에 약 2~3 매가 그랬는데도 어떤 신문은 그걸 꼬집어 이문열이 소설을 통해 정치적 한풀이를 한다고 쓰기도 했다. 인간과 사회 이야기를 하는데 정치가 빠질 수는 없다.

그 밖에 민족이라는 문제도 걸린다. 어디에선가 민족이라는 개념은 이미 용도 폐기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민족이 그 어느 곳보다 청청하게 살아있다. 그런데 그 시비의 한복판으로 이제 들어가야 한다. 또 하나는 자주성의 문제다. 신라통일의 외형이 당나라 강국의 비호 정도가 아니라 편제 상으로도 신라왕은 원정군의 일부인데 어떻게 신라의 자주와 독립을 추출해 내느냐의 문제다. 다행히 <삼국사기>만 봐도 신라군에게 당나라 군사가 몇 만이나 죽고 8년이나 전쟁을 했는데 신라를 당나라의 속국이고 당나라에 기대서만 삼국을 통일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삼국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달랐다고 보나?

“당시 중국에선 신라·백제·고구려를 다 같은 족속으로 생각했다. ‘동이열전’을 쓸 때는 신라와 다른 나라를 한 덩어리로 썼다. 합쳐서 삼한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공통성이 있기는 했지만 그게 바로 우리 한민족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거 같다. 그리고 예전에는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는 통역이 필요할 정도로 말이 달랐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김춘추가 고구려에 가서 왕을 만나도 통역을 썼다는 기록은 없다. 반대로 통역이 없었다는 기록도 없다. 사실 역사서는 대개 그렇다. 당서나 수서나 이런 데 보면 김춘추가 당나라에 가서 당 태종하고 직접 말하지 중간에 통역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정말 없었는지 기록의 편의상 뺀 건지 모르겠다. 어느 나라도 외국 사신을 만났을 때 통역이 있었다는 말을 역사서에 기록하지 않았다. 따라서 통역이 기록에 안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말이 같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고구려 말로는 닮았다는 말을 ‘위’라고 쓴다는 기록이 있다. 산상왕인가 그 사람이 태조왕을 몹시 닮았다. 태조왕의 이름인 궁에 위를 붙여 위궁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런 해설은 고구려가 어떤 면에서 다른 나라와 말이 달랐다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다르긴 달랐지만 어느 정도냐, 제주도와 본토의 사투리 정도의 차이냐, 아니면 통역이 필요할 정도였다는 거냐. 그건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같은 어계 어족인데 어족과 민족을 같은 걸로 치면 한도 없다. 그래서 그건 잘 모르겠다.

백제어와 고구려어는 닮은 데가 많은데 신라는 좀 다르다. 그리고 1천300년 전이면 아득한데 중국의 고전지식이 신라 사람들한테 숙지돼 있는 것 같다. 김유신은 손자병법에 매우 밝았다. 당시 신라의 한문 실력이 상당했다. 진흥왕순수비 같은 신라 한문은 중국 한문과 어순이 좀 다르다. 한문을 제대로 못 배워서 그런 게 아니라 한문을 충분히 익힌 후에 우리한테 맞게 고친 거다. 우리 식 한문이 있었다. 주술관계가 밥을 먹었다면 ‘식반’이 정통한문인데 우리는 ‘반식’이라고 하는 식이다. 신라 한문에는 이런 게 많이 나온다. 그리고 이두처럼 음까지 차용하기도 했을 정도다. 그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이번에 쓸 작품에서 하나씩 대답할 숙제일지도 모른다.”

주요 등장인물은?

“김유신과 그 주위 사람들이다. 원효는 한때 김유신 밑에서 싸웠던 군인이었다. 화랑도 했지 싶다. 어떤 화랑 밑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화랑 아니면 적어도 낭도였다고 본다. 원효는 언급될지 모르지만 그 아들 설총까지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 문화적인 얘기, 이두문을 통한 문자통일 이야기도 할 수 있는데 넣을지 안 넣을지는 모르겠다. 외연이 너무 넓어지면 안 되니까. 주된 이야기는 역시 김유신과 김춘추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가야계 장군들이 있다. 김유신을 늘 따라다니는 장군이 있다. 한 부류는 가야계이고 다른 부류는 김유신이 화랑일 때 낭도 출신이다. 그래서 김유신은 설화 속에 나올 때 혼자 안 나오고 늘 철갑을 두른 장수들 몇 십 명과 함께 나온다.”

 

중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김유신 3대

김유신은 어떤 인물인가?

“김유신은 당나라에서 신라왕실에 버금가는 예우를 했다. 예를 들면 망한 고구려 땅에 세운 안동도호부에 설인귀와 김유신을 나란히 세웠다. 신라왕실에서는 이를 아주 불쾌하게 여겨 과민하게 반응했다. 당나라가 고구려 옛 땅에서 김유신을 앞세워 신라왕실과 김유신을 이간시키는 술책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김유신의 아들 원술랑 얘기도 의미심장하다. 김유신은 고구려 영토에는 자신의 아들 셋을 보내 다스렸다. 그때 김유신의 아들이 당나라와의 전쟁에 져 옛 고구려 영토를 모두 빼앗겼다. 노발대발한 김유신이 원술랑을 참하려는데 신라왕이 말린다. ‘비록 영토는 빼앗겼지만 적의 수급을 수천씩이나 자르고 귀환했는데 이런 식으로 장수를 다 죽이면 전쟁에 나가는 장수의 씨가 마른다. 국가에 충성을 다했으므로 국가에 도를 다했다.’ 김유신은 국가에는 도를 다했는지 모르지만 가문의 법을 다하지 못했으므로 참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유신이 역모를 꿈꿨다는 얘기는 아니나. 옛 고구려 땅에 조상의 나라 가야국을 재건하고 싶었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나 아닌지 짐작하게 한다.

김유신은 심리전, 첩보전 이런 것에 능한 사람이다. 옛날 사람들은 예를 들어 유성이 떨어지면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유성이 김유신 진영으로 떨어졌다. 병사들이 겁을 먹자 그는 연에 불을 달아서 밤중에 하늘로 올린다. 그런 다음 김유신은 저 유성을 따라 액운도 떠나갔다고 군사들을 격려한다.

때로 김유신은 비정하다. 위기일 때 부하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분발시켜 죽음 속에 내던진다. 김유신 일생에 그런 비장한 장면이 네 번 나온다. 그중에서 한번은 바로 자신이 나선다. 젊어서 낭비성 싸움을 할 때 고구려에 밀렸다. 그러자 김유신이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적장 목을 여럿 베어온다. 이렇게 자신까지도 죽음을 각오한 특공대를 써서 전세를 뒤집었다.

간첩을 잘 쓴다. 백제를 무너뜨릴 때도 신채호는 거꾸로 내통했다고 하지만 ‘임좌’라는 백제의 좌평을 포섭해 쓴다. 겉으로는 양국 어느 쪽이 망하면 망하지 않은 나라 쪽에서 서로를 봐주자고 한다. 하지만 그 사람을 통해 백제 내정을 환하게 꿴다. 사실 임좌는 간첩으로 활용된다. 좌평이라면 장관급이다. 김유신은 다양한 형태의 간첩을 활용한 선전전과 회유에도 능했다. 평양에 갔던 김춘추가 고구려에 억류됐다가 풀려나는 과정도 간첩을 활용한 선전전과 고구려 관리를 뇌물로 포섭했기에 가능했다. 김유신은 당시 삼국뿐 아니라 중국에서까지 유명했다. 어찌된 연유인지 김유신의 이름은 물론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중국의 역사서에 등장한다.”

이번 소설의 자료를 수집하며 놀라셨던 게 있나?

“지난번 경주에 이틀을 갔는데 꼭 봐야겠다는 거 하나 보고 왔다. 현지 자료조사는 잘못 빠져들면 거기에서 헤매다 끝나겠다 싶더라. 그 좁은 땅에 온갖 역사가 다 모여 있으니까. 경주 남산 같은 경우는 바위 하나 온전한 게 없다. 낭산 같은 곳은 경주 가운데에 있는 조그마한 산이다. 그런데 거기에 선덕여왕 등 핵심적인 유적이 다 있다. 금오신화가 나온 금오산도 있고 풍악산도 있고 금강산도 있다. 동악이 토함산이다. 토함산은 석탈해가 넘어온 산이다. 감포에 배를 대고 석탈해가 토함산 넘어서 경주로 왔다. 특히 아랍 사람들에게는 신라가 천국처럼 보였던 듯싶다. 신라를 전부 금으로 되어있고 원숭이 목걸이조차 금이라고 설명했다.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새누리당, ‘눈알이 빠져도 그만하기 다행’

이번 소설이 한국인이 중국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는 숙제에도 실마리를 줄지 모르겠다.

“정말 중국인들의 중화사상이 걱정이다. 중국은 지난 100년 정도 위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난 여름에 신장위구르 지역에 가보고 깜짝 놀랐다. 그곳에 이주 한인이 많다. 예전에는 한국사람 하면 잘 봐준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 중국 대도시에 가면 한국 사람이라면 은근히 깔본다. 바가지도 씌우고 오히려 눈을 부라린다. 저 자신감이 나중에 마구잡이 패권주의로 나오면 대책 없다.”

연재 총 분량은?

“3000매 정도로 예상한다.”

중앙일보에 연재 했던 적이 있나?

“대하사극 <근초고왕> 원작 소설을 중앙일보에 연재했었다. 80년대 초였다. 그때 제목은 근초고왕이 아니었고 <그 찬란한 여명>이었다. 나중에 <요서지>로 책을 냈다. 그 이후에 <황제를 위하여>를 문예중앙에 연재했다. 그 다음이 <레테의 연가>를 여성중앙에 연재했다. 최근에 <리투아니아 여인>을 중앙선데이에 연재했다. 그런데 하나같이 다 매체가 다르네.”(웃음)

최근 언론에 등장이 뜸했다.

“한때 정치적 시비에 간섭한 적이 있는데 그게 아마 강한 인상을 남겼던지 내가 정치꾼으로 몰리고 말았다. 2000년부터 2011년까지 <호모엑세쿠탄스> 3권, <아가>, <초한지> 10권, <불멸> 2권, <리투아니아 여인> 등 발표한 책이 17권이다. 작품 활동을 쉰 적도 없고 쉬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책만 나오면 문학적 내용과 상관없이 정치적인 해석이 붙었다. 속상하고 슬픈 일이었다. 저 사람은 글 안 쓰고 정치적인 말만 한다 이런 식으로 독자들이 생각하게 됐다. 원고지 1만 매 중에 몇 구절 때문에 세파에 휘둘리는 게 싫었다. 섭섭했다. 인터넷 시대의 통신방식에 익숙한 독자들한테는 더욱 그렇다. 몇 구절을 골라 여러 발신처에서 마구 쏟아내면 착각을 하게 된다. 그 한 줄이 책의 전부나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사람 또 그랬나 보다’ 이런 식이다. <호모엑세쿠탄스>는 원고지 3천 정도 되는 소설이다. 34개 장으로 이뤄졌고, 그중 한 장에 약간 골수 우파들이 모여서 시대를 한탄하는 그런 대목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 그 소설 우파 꼴통들이 모여서 하는 이야기?’ 그러면서 악의적인 사람은 말이 다를 뿐이지 안 봐도 알겠다 이런 식으로 치부한다. 그게 마음에 짐이 됐을 뿐 아니라 나이가 60이 넘으니 정치적인 일로 시간을 허비할 여유가 없다. 의도적으로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으려 했다. 강연도 선문답 같은 내용이 아니면 아예 안 나갔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시사적인 이슈를 물어보니까 정치하고 자꾸 얽힌다.”

최근 새누리당 공천 문제로 굉장히 화를 냈다고 보도가 됐다.

“어떤 사람은 화를 낸 나를 나무라며 ‘그게 화낼 자리가 아니라고 그러던데?’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모욕당한 것처럼 화가 났다.”


요즘 새누리당을 어떻게 보나?

“모진 소리를 하면서도 마음에 안 된 건 있었다. 그래도 기사회생하려고 애쓰는 노력은 가상하다. 경상도 말에 ‘눈알이 빠져도 그만하기 다행’이라고 몇 달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자기가 잘해서도 그렇고 상대편이 못해서 나아지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새누리당의 어떤 모습에 점수를 주나?

“변하려는 몸부림 자체가 가상하다. 방향이나 형식에선 별로 동의 안 하는 대목도 있다. 변혁 주도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 자체가 정말 그럴 만한 사람들인지도 모르겠고, 오히려 변하려는 당의 의지를 퇴색시키는 자들은 없는지 회의가 없진 않다. 그래도 변하려고 애를 쓰고

실제로도 많이 바꾸었고,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또 성과가 있지 않겠나 싶다.”

혁신을 모색하는데도 보수가 국민들에게 매력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이유는 뭔가?

“보수가 이념인지 태도인지 혹은 사고방식인지가 문제다. 아무튼 우리가 보수라고 부르는 행동양식, 태도 혹은 이념 같은 게 있다. 서양 사회에도 같은 양태를 보이지만 우리의 경우 보수에는 혼재가 특히 심하다. 우리가 보수를 너무 폭넓게 수용했다. 잡동사니를 너무 많이 실은 배와 같다. 불필요하고 바다에 버려야 할 것도 다 실려 있는 그게 한국 보수가 가진 한계다. 분단 상황이 아니고 그랬으면 우리 보수도 정비될 기회가 있었을 텐데 힘을 끌어모을 때 힘이 될 만한 건 다 보수 안에 쓸어 담았다. 이게 정리가 안 됐다. 세월이 지나가면 자연도태로 정리되리라 봤는데 이게 생각대로 되지 않더라.

예를 들면 친일파 문제도 그렇다. 친일파를 문제시하는 시각에는 저의가 있다. 1945년에 스무 살도 안된 친일파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따라서 지금 친일파가 남아 있다면 연좌제의 형태와 관념만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도 항일이라는 관념을 앞세워야 득 보는 사람들은 친일을 가지고 100~200년 넘게 우려먹으려 든다. 보수도 달갑지 않은 짐이지만 그렇게 끌려간다. 개발독재 권위주의 시대 역시 분단국가였기 때문에 존재 가능했고 길게 존속했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그런 문제들이 우리 보수의 생래적인 약점이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의 허약성과 취약성 탓에 보수라는 배에는 부담스러운 묵직한 짐이 많이 실려 있다. 전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한테는 잡다하게 실려 있는 보수라는 이 배보다 새것을 실은 배가 정의롭고 선명해 보일 거다.

남북분단 상황에서 야당이나 여당 다 보수의 테두리 안에 묶이지 않는가?

“그렇다. 아마 요즘 나이 많은 분들은 중증의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많이 있을 거다. 그 사람들 생각엔 북한이 진보와 좌파를 다 가져갔다. 그래서 남한은 우파가 차지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며 남한바닥을 보수, 진보로 나누면 우파에겐 한반도가 4분의 1만 남는 셈이다. 보수, 진보가 나눠지던 시대와 그 원리를 아는 사람들은 정말 불안한 거다. 과거에 이미 다 나눴는데 지금 다시 나눠주고 4분의 1만 가지라고? 기본적으로 우울증에 걸릴 수밖에 없다.”

‘백성을 재물로 꾀지 말라’

그렇다면 정당을 가르는 기준은 북한을 어떻게 보느냐로 나눠야 하는가?

“지역성의 문제도 있겠지만 결국 북을 보는 태도가 우리 사회를 가르는 기준의 하나다. 아마 크게 보면 친북과 종북이 갈라지고, 또 이제 친북에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연합가능 정도의 친북이 있을 수 있고 아니면 그건 안 된다는 친북도 있을 수 있다. 종북도 두 가진데 하나가 보험을 드는 듯한 종북이다. 세상이 바뀌었을 때를 대비하는 보험 말이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자세히 보면 그건 분명히 실재하는 세력 중 하나다. 그 다음이 투항파다.(웃음) 친북이야 각자 가치관에 따라서 조금 다를 수 있으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종북이 아니라면, 특히 투항 종북이 아니라면 무방하다. 그런데 이게 우리나라에서는 한 덩어리의 떡이 돼있다. 우파에 잡탕이 섞여있듯이, 좌파도 그런 식이 있다. 이래서 보통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


최근 여야 모두 복지를 강조한다.

“그 얘기도 마찬가지다. 한반도가 좌우로 분단될 때 그때 상황에서라면 요즘 복지 얘기하는 사람을 가리켜 빨갱이라 했을 거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다. 그런데 유가들이 정치원리를 이야기할 때 ‘백성을 재물로 꾀지 말라’고 했다. 중국은 각 왕조마다 토지를 나눠주겠다든가 불평등한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어주겠다든가 했다. 우리가 비상하게 사람들을 동원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재물을 나눠야 하는 시대라면 상관없다. 그러나 평화로운데 다만 어떤 집단과의 정권다툼에서 더 많은 표를 얻으려 포퓰리즘을 선택하느냐의 차원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만약 우리의 적이 앞에 있고 더 이상 우리가 가진 걸 끌어안고 있으면 그들한테 우리가 밀리는 상황일 때는 지금이라도 나눠야 한다. 하지만 포퓰리즘은 우리 사회의 저력을 깎아 먹는 파괴적인 선택이다.”

나꼼수 현상을 비롯해 트위터 등 SNS와 인터넷에서는 보수의 가치를 말씀하거나 옹호하는 분은 판판이 깨진다.

“보수는 완전히 침몰됐다.(웃음) 그러나 지금 나꼼수나 트위터의 번성은 그들 자신의 성취가 아니라 지난 30년 계속된 우파의 패배가 선사한 과일이다. 그람시의 진지전 말이다. 그들 승리의 근저에는 근본 논리가 없다. 그야말로 꼼수만 부린다. 따라서 그들이 길게 이길 수는 없다. 허위 사실 유포도 한두 번이지 여러 번하면 오히려 저들에게 해만 된다. 내가 보기엔 그것이 그들의 화를 자초할 거다. 중요한 사실은 권위주의 군사정권을 무너뜨린 지난 10년은 순전히 선거의 패배에서 왔다. 그 바람에 그 시절 진지전의 환경은 우파에게 불리했고, 경쟁은 공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4년은 공정하거나 우위가 우파와 보수에 있는데도 맥을 못 추니 정말 혀를 깨물고 각성해야 할 일이다.”

오는 4월 총선이 끝나자마자 대선정국으로 넘어갈 텐데.

“점점 더 모르겠다. 커뮤니케이션 제도가 달라져서 이건 뭐 완전 조석으로 확 바뀌는 기분이다. 자기는 수신을 한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의 에코(메아리)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확성기밖에 안 되면서 자기도 참여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꽉 차 있다. 실제로 누군가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가 불쑥 인터넷에서 조작된 다수의 말만 듣고 이게 대세인가보다 맞는가 보다 하고 자신도 다른 곳에 가서 또 그렇게 말한다. 사실 그건 잘해야 에코나 확성기다. 이 멍청한 에코와 확성기가 점점 더 늘어나는 현실이다. 이게 어떻게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쉽게 감염된다는 얘기는 쉽게 해독된다는 거다. 쉽게 자정작용이 일어날 수도 있다. SNS 걱정하는 사람이 많던데 그건 분명히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을 거다. 한두 번은 돼도 오래하면 다를 거다.”

한 달의 절반 이상을 고향에서 집필

건강관리는?

“나이가 나이인 만큼 당뇨와 혈압이 조금 더 나빠졌지만 큰 문제는 없다. 예전에는 예방 차원이었다면 지금은 치료의 차원에서 약을 먹는다는 게 변화라 할까. 수면무호흡증도 심하다. 34 단계 중에서 32단계다. 하룻밤 새 30초 이상 무호흡이 수십 번이다. 의사가 무호흡 때 강제로 호흡을 하게 해주는 설비를 달고 자라 했는데 막상 착용하고 자보면 영 불편하다. 그래서 안 쓴다. 체중도 조금 불긴했다.”

약주는 얼마나 자주하나?

“술이 자꾸 늘어서 걱정이다. 요즘은 밖에 나가서는 잘 안 먹는다. 밖에서 먹다가 과음하는 수가 있어서 그렇다. 집에서 한잔씩 하는데 마시면 과해져서 문제다. 요즘은 거의 혼자 먹는다. 대충 일주일에 2번 정도다.”

지난해 어느 신문과 가진 인터뷰를 보니까 고향으로 가겠다 했던데?

“10년 전 고향(경북 영양)의 고가 터에 한옥을 한 채 지었다. 여기(이천 부악문원)서 한 세 시간 정도 걸린다. 예전에는 늙어서 죽으러 고향 간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꼭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늙으면 고향 가기가 두려워진다. 늙으면 도시로 나가는 경우도 많다. 죽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미국 보스턴에서 보니 시내의 병원에서 10분 이내 거리에 있는 아파트에 노인이 많이 몰려 살더라. 고향을 고향처럼 느끼면서 살려면 오히려 젊어서 가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고향과 부악문원을 오가며 살려고 한다. 이번 작품도 고향에서 대부분 집필할 생각이다. 80까지는 고향을 더 자주 가고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한 달의 절반 이상으로 늘려 가겠다. 경기도 이천에 집필실을 마련한지 28년 만에 고향으로 옮기는 셈이다. 부악문원은 계속해서 창작 레지던스로 사용한다.”

201204호 (201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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