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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화제 - “우리 정성으로 녹두장군 동상이 일어섭니다” 

녹두꽃술에 역사를 담는 전복래·이병천 모자(母子) 

글·윤석진 월간중앙 선임기자 사진·전민규 기자
녹두꽃술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녹두를 넣어 빚는 막걸리다. 아들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팔순 노모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전주 한옥마을에 녹두장군 동상을 반드시 세우겠다는 모자의 일념이 낳은 동화 같은 이야기다.

▎술 맛을 좌우하는 고두밥의 상태를 전복래 여사가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두 모자(母子)가 찹쌀에 녹두를 섞어 쪄낸 고두밥을 식히기 위해 돗자리 위에 널고 있다.
아들이 이것저것 조금씩 거들기는 하지만 술 빚기는 온전히 어머니의 몫이다. 쌀 씻기부터 술 거르기까지 어머니 손을 거치지 않은 과정이 없다. 미리 씻어놓은 찹쌀 8되에 불에 불린 녹두 2홉 가량을 익숙한 솜씨로 뒤섞는다. 마당 한켠에 댓돌을 괴어 만든 임시 아궁이가 있었다. 그 위에 놓인 한말들이 양은 시루에 이를 쏟아붓고 장작불을 지핀다. 술 빚을 고두밥을 짓는 중이다. 아궁이에 연신 부채질을 하면서 불 세기를 조절하는 어머니의 모시 적삼에 금세 땀이 밴다.

용수로 뜬 ‘모리미’의 술 맛

어머니는 불 세기가 됐다 싶었던지 불쑥 일어나 집 아래채에 딸린 조그만 방으로 들어선다. 항아리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 방안에선 술 익는 냄새가 진동한다. 어머니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용수부터 찾는다.

대오리로 듬성듬성 엮은 용수는 술이나 장을 거르는 데 쓰는 긴 통바구니 같은 기구다. 어머니가 술독에 용수를 박자 말간 술이 천천히 차오른다. 이 지역에서는 이를 맑은 술이라는 의미에서 청주(淸酒)라 부른다.

술 빛깔이 아주 맑고 곱다. 일단 겉보기는 좋은데 어머니는 술이 제대로 익었는지 못내 궁금한 표정이다. “오늘 술 맛도 마셔보기 전에는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막 떠낸 청주를 방 안팎에서 서성거리는 아들과 이웃 사람들에게 한 잔씩 돌린다. 술 맛을 보는 일종의 시음(試飮)이다. 맑은 술답게 목넘김이 부드럽다.

동행한 한 막걸리 전문가는 “원래 품질이 좋은 전통 누룩을 쓰는데다 발효를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인공 감미료를 첨가하지 않아서”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모리미’라고 부르는 막걸리 원액이어서인지 얼굴이 조금 달아오를 만큼 ‘좀 독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머니는 시험 성적을 기다리는 학생처럼 조용히 품평을 기다린다. 이웃 주민들은 “오늘 술이 잘됐다”고 입을 모았다. 이때까지도 어머니의 시선은 줄곧 아들의 입에 꽂혀 있다. 술을 한입 들이킨 아들의 얼굴은 좀 아쉬운 듯한 표정이다. “술에서 사이다 맛 같은 톡 쏘는 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들은 또 어머니 면전에서 감히 술에 점수를 매긴다. “100점 만점에 85점 정도”란다. 좀 야박하게 느껴지는 평가다. 그런데 술 한 모금을 맛본 어머니도 웃음을 머금은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성에 꼭 차지는 않지만 기왕 담근 술, 어머니는 청주를 가을하늘 색깔을 입고 있는 막걸리 병에 담는다. 딱 열 병이다. 술병 겉면에는 ‘녹두꽃술’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녹두를 넣어 만든 전복래 어머니표 술이다. 이어 어머니는 막걸리를 만들었다.

청주를 뜬 다음 남아 있는 재료에 일정량의 물을 섞어 거른 술이 막걸리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막걸리는 원액량에 보통 6~7배가량의 물을 붓는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독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만” 물을 섞는다고 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진짜 막걸리’인 셈이다. 이 막걸리는 술독과 비슷한 크기의 항아리에 담았다.

이 녹두꽃술과 술 항아리는 같은 날 오후 3시쯤 전주 시내에서 최고 관광명소로 꼽히는 한옥마을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한옥마을 중심가를 동서로 관통하는 태조로(太祖路) 동쪽 입구에서 50여m 아래쯤 길거리에서였다. 이곳은 “거리극–녹두장군 한양 압송 차(次)(이하 녹두장군)”거리극 공연 무대였다.

그동안 한옥마을 부채문화관 앞마당에서 공연하다 거리극이란 이름에 걸맞게 처음으로 거리로 나선 것이다. ‘120년 만에 부활한 녹두장군과 함께 떠나는 재미와 감동의 역사 여행’이란 부제가 이 공연의 성격을 설명해준다. 마침 내년이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이 되는 해여서 이 거리극은 더 주목을 끌었다.

태조로라는 명칭은 이 도로 서쪽 끝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 곧 ‘어진(御眞)’을 모신 경기전(慶基殿)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주는 조선 왕조 발상지로서 시조묘인 조경단, 태조 이성계의 선조인 목조의 세거지인 이목대, 왜구 토벌 후 종친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오목대 등 조선왕조와 관련 유적이 산재해 있는 도시다. 조선 왕조 발상지 한복판에서 이 체제를 가장 크게 뒤흔든 혁명을 소재로 한 공연이 펼쳐지는 것도 흥미롭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 짐작되듯 동학농민혁명이 배경이고, 주인공은 전봉준 장군이란 역사적 실존 인물이다. 우리 근대사의 대서사에 현대적 놀이문화를 접목하고, 사실과 상상력을 결합한 팩션 극이다.

순창에서 관군에 붙잡힌 전봉준 장군이 일본군에 의해 2인교에 실려 한양으로 압송되던 중 전주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벌어지는 상황을 해학적으로 풀어낸다. 관련 사실은 기록이 없어 확인할 길이 없지만 전주성 입성이 동학농민혁명의 정점이었던 까닭에 “전봉준 장군이 풍남문을 통해 압송됐을 것”이라고 설정하고 만든 작품이다.

총 7개 장면으로 구성돼 있는데 큰 줄거리는 세 가지다.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했던 장군 중 한 명인 손화중(孫化中)의 역할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두 개의 사건이 얼개를 이룬다. 손화중이 선무사(宣撫使·조선시대에 전쟁이나 난리 등 큰 사건이 났을 때 민심을 다독이는 임시 벼슬)로 위장해 전주에서 전봉준 장군 구출에 나서는 것이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전봉준 장군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던 김구(金九)가 도중에 일본군에 붙잡히자 손화중이 다시 구출 작전에 돌입한다는 내용이다. 백범은 당시 열여덟 살의 열혈 청년으로 황해도에서 동학의 ‘애기 접주’를 맡고 있었다는 사실에 바탕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리고 전봉준 장군이 압송 중에 때로는 끼니도 걸렀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애통해하는 전주 백성들이 비빔밥 한 그릇을 대접하는 장면이 세 번째 줄거리에 해당한다. 동학농민혁명이 주창한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함께 어울려 사는 ‘대동세상’의 꿈을 전주 특산 음식 중 하나인 비빔밥으로 상징한 것이다. 당시 전봉준 장군을 향한 전주 백성들의 한결같은 심정을 극중에서는 엿장수와 뻥튀기 장수 그리고 전주 남부시장 주모 등이 나서 비빔밥을 대접하는 모습을 해학적으로 극화해 관객들의 재미를 더한다.

이 공연은 4월 27일부터 9월 7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4시에 전주 한옥마을에서 총 20회에 걸쳐 성공리에 펼쳐졌다. 8월 31일 18번째 공연이 펼쳐진 전주 한옥마을 태조로 쉼터 앞에는 공연 시각인 오후 4시가 가까워지면서 하나둘씩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 쉼터는 임시 공연 무대로 변신한 도로 맞은편에 지은 4동의 크고 작은 정자로 자연스럽게 관람석 역할을 했다. 공연 시작 20여 분 전부터는 극중 엿장수와 뻥튀기 장수가 차례로 등장해 현란한 입담으로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분위기를 돋웠다.

공연 시작 10분 전쯤에는 남녀 학생 30여 명이 연신 울려퍼지는 주제곡 음악에 맞춰 생활체조를 선보여 200여 명의 관객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 공연의 주제가는 ‘전주아리랑’이다. 이 공연을 위해 새로 만든 창작 노래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본조(서울)·정선·진도·밀양·문경 등 많은 고장에 지역 특색을 지닌 고유의 아리랑이 요즘도 자주 불린다. 고도(古都)로 꼽히는 전주에도 전래의 아리랑이 있을 것으로 짐작하기 십상이지만 실제로 지금껏 없었다.

중독성 있는 주제가 ‘전주아리랑’

시인 안도현이 가사를 지었고, 공연의 음악을 담당한 허귀행이 작곡했다. 경북 예천 출신인 안 시인은 원광대를 졸업하고 전북 완주군 우석대 교수(문예창작학과)로 재직 중이어서 사실상 전주 사람이라고 해야 옳다. 공교롭게도 안도현 시인은 데뷔작이 ‘서울로 가는 전봉준’(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당선작)이라는 인연도 있어 작사를 맡았다고 한다. 작품 내용을 관통하는 주제가답게 가사 중엔 “쟁기 놓고 죽창 들고 집 나가는 우리 낭군”처럼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대목도 있다.

그러나 곡조는 우리가 흔히 듣는 여러 전래 아리랑 노래와 많이 닮았다. 그래서인지 처음 듣는 가락이었지만 그리 낯설지 않고 금세 귀에 익숙하게 다가온다. 공연 전에 극중 엿장수가 등장해 전주 아리랑을 가르치면서 선창하자 쉽게 따라 부르는 관객도 적지 않았다. 앞서 말한 학생들이 공연 시작 전 펼친 생활체조는 한 전문가가 ‘전주아리랑’ 곡조에 맞춰 새로 개발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녹두장군>이란 거리극 한 편이 아리랑을 낳고, 아리랑이 신체조를 낳는 등 1, 2차 문화 파생상품을 탄생시켜 전주의 문화를 풍성하게 하는 데도 한몫하고 있다. 관객 중 한 중년 남성은 “전주아리랑은 한 번 들으면 귀에 꽂힐 만큼 자꾸 듣다 보면 중독성이 느껴진다”면서 “미래에 전주 시민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노래가 될 것”이란 기대를 내보였다.

<녹두장군> 공연이 열릴 때마다 녹두꽃술이 담긴 병과 항아리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 옆에는 하얀색 종이로 만든 모금함이 늘 함께 놓인다. 그 옆에 서 있는 입간판에는 ‘녹두장군 동상 건립 후원’이란 제목 아래 “만원 이상 기부자에게는 성함을 동상에 남기고 녹두꽃술을 드립니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러니까 병술은 후원자 기증용이고, 항아리술은 관객들이 목을 축이는 용도였던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이 공연은 한옥마을에 녹두장군 동상 건립을 모금 사업을 겸하고 있었다. 모금 참가자에게 최소한의 답례 차원에서 특별히 녹두를 넣어 빚은 술이 녹두꽃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힘만 들고 돈도 안 되는’ 이 술을 만드는 짐을 왜 굳이 전복래 할머니 혼자서 져야 했을까? 이 공연의 총감독이 바로 아들 이병천 씨이기 때문이다.

이씨가 이 책임을 맡은 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다. 우선 그는 전북 문화예술인 중에서 활발한 활동력으로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전주고 재학 시절에 이미 시인 하재봉 등과 함께 ‘글내’라는 문학동인을 결성해 활동했다. ‘글내’라는 동인명 자체가 자신의 고향 마을인 시천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전북대 국문과 재학 중 1학년 때인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무예 시부분(‘우리의 숲에 놓인 몇 개의 덫에 대한 확인’)에, 2학년 때는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문(‘더듬이의 혼’)에 연거푸 당선해 출중한 문재(文才)를 뽐냈다. 그리고 전주문화방송 현직 PD로 편성국장을 맡고 있기도 했다.

그는 무엇보다 동학농민혁명과 뗄 수 있는 여러 인연이 있다. 그는 이미 1994년에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를 펴냈다. 이 소설은 동학농민혁명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줄거리는 조선 검과 검술의 달인인 은명기라는 검객이 동학군 손화중 장군의 특명으로 체포된 김개남 장군을 구출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는 이 작품을 애초 대하소설로 구상했으나 두 권짜리로 끝내 ‘미완의 작품’으로 여긴다.

중독성 있는 주제가 ‘전주아리랑’

시인 안도현이 가사를 지었고, 공연의 음악을 담당한 허귀행이 작곡했다. 경북 예천 출신인 안 시인은 원광대를 졸업하고 전북 완주군 우석대 교수(문예창작학과)로 재직 중이어서 사실상 전주 사람이라고 해야 옳다. 공교롭게도 안도현 시인은 데뷔작이 ‘서울로 가는 전봉준’(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당선작)이라는 인연도 있어 작사를 맡았다고 한다. 작품 내용을 관통하는 주제가답게 가사 중엔 “쟁기 놓고 죽창 들고 집 나가는 우리 낭군”처럼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대목도 있다.

그러나 곡조는 우리가 흔히 듣는 여러 전래 아리랑 노래와 많이 닮았다. 그래서인지 처음 듣는 가락이었지만 그리 낯설지 않고 금세 귀에 익숙하게 다가온다. 공연 전에 극중 엿장수가 등장해 전주 아리랑을 가르치면서 선창하자 쉽게 따라 부르는 관객도 적지 않았다. 앞서 말한 학생들이 공연 시작 전 펼친 생활체조는 한 전문가가 ‘전주아리랑’ 곡조에 맞춰 새로 개발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녹두장군>이란 거리극 한 편이 아리랑을 낳고, 아리랑이 신체조를 낳는 등 1, 2차 문화 파생상품을 탄생시켜 전주의 문화를 풍성하게 하는 데도 한몫하고 있다. 관객 중 한 중년 남성은 “전주아리랑은 한 번 들으면 귀에 꽂힐 만큼 자꾸 듣다 보면 중독성이 느껴진다”면서 “미래에 전주 시민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노래가 될 것”이란 기대를 내보였다.

<녹두장군> 공연이 열릴 때마다 녹두꽃술이 담긴 병과 항아리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 옆에는 하얀색 종이로 만든 모금함이 늘 함께 놓인다. 그 옆에 서 있는 입간판에는 ‘녹두장군 동상 건립 후원’이란 제목 아래 “만원 이상 기부자에게는 성함을 동상에 남기고 녹두꽃술을 드립니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러니까 병술은 후원자 기증용이고, 항아리술은 관객들이 목을 축이는 용도였던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이 공연은 한옥마을에 녹두장군 동상 건립을 모금 사업을 겸하고 있었다. 모금 참가자에게 최소한의 답례 차원에서 특별히 녹두를 넣어 빚은 술이 녹두꽃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힘만 들고 돈도 안 되는’ 이 술을 만드는 짐을 왜 굳이 전복래 할머니 혼자서 져야 했을까? 이 공연의 총감독이 바로 아들 이병천 씨이기 때문이다.

이씨가 이 책임을 맡은 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다. 우선 그는 전북 문화예술인 중에서 활발한 활동력으로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전주고 재학 시절에 이미 시인 하재봉 등과 함께 ‘글내’라는 문학동인을 결성해 활동했다. ‘글내’라는 동인명 자체가 자신의 고향 마을인 시천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전북대 국문과 재학 중 1학년 때인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무예 시부분(‘우리의 숲에 놓인 몇 개의 덫에 대한 확인’)에, 2학년 때는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문(‘더듬이의 혼’)에 연거푸 당선해 출중한 문재(文才)를 뽐냈다. 그리고 전주문화방송 현직 PD로 편성국장을 맡고 있기도 했다.

그는 무엇보다 동학농민혁명과 뗄 수 있는 여러 인연이 있다. 그는 이미 1994년에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를 펴냈다. 이 소설은 동학농민혁명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줄거리는 조선 검과 검술의 달인인 은명기라는 검객이 동학군 손화중 장군의 특명으로 체포된 김개남 장군을 구출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는 이 작품을 애초 대하소설로 구상했으나 두 권짜리로 끝내 ‘미완의 작품’으로 여긴다.


▎1 거리극 <녹두장군>에서 김구 역의 배우가 참수당한 전봉준 장군의 머리 앞에서 추모의 예를 올리고 있다. 뒤에 서 있는 배우는 전봉준 장군의 영혼이 이를 지켜보는 모습을 연기한 것이다. 2 <녹두장군> 공연은 전주 한옥마을에서 전봉준 장군의 동상 건립을 위한 성금 모금을 겸해 4월부터 9월까지 총 20회 열렸다.



<녹두장군>에 대한 부채의식에서 거리극 구상

그의 처가는 동학농민혁명과 더 깊은 인연이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대포대장을 맡았던 김응칠 접주가 있는데 바로 장인의 조부다. ‘기포(起包)’라고 불리는 봉기가 일어날 때 사발통문에도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의협심이 넘치는 분’이었다. “투옥 중 부친 사망으로 잠시 풀려나온 그분을 일가친척들이 탈출시키려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동지들은 고생하고 있는데 혼자만 살 수 없다며 감옥으로 돌아가 사형을 당한다.”

이씨는 “이 얘기를 언젠가는 소설로 꼭 쓸 생각”이라고 다짐한다. ‘미완의 숙제’인 셈이다. “내 가슴속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부채의식이 지금도 있다. 또 전주에는 상징물이 없는데 무엇이 좋을까 늘 고민했다. 전봉준 장군 동상이 전주에 있다면 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겠다 싶었다. 다리를 다쳐 2인교에 앉아 있는 한 장 남은 사진 속의 모습 그대로 동상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2011년 겨울에 그 즈음 출간된 이씨의 소설<90000리> 출판기념회가 인사들의 열렸다. 그는 출판기념회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 그 이전까지 한 번도 열지 않았다. 이씨는 마지못해 승낙한 이 자리에 아무도 모르는 ‘폭탄’ 하나를 가슴에 품고 나갔다. 폭탄이란 다름아닌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 제안’이었다.

“인사말을 할 때 그 발기인 모임으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참석자들이 모두 동의했다. 그 자리에서 동상 건립추진에 따른 시민들 사이의 공감대도 넓히고, 또 불씨가 될 만한 자금을 성금으로 모아보자는 논의도 이뤄졌다. 그 일환으로 구상한 것이 거리극 <녹두장군>이다.”

이를 어떻게 구체화시킬 것인지 고민에 빠져 있던 이씨에게 해결사로 나서준 것이 ‘스토리텔링 문화그룹 얘기보따리(이하 얘기보따리)’였다. ‘얘기보따리’는 약 5년 전쯤에 만들어진 전주권 글쟁이들의 모임이다. 이씨를 비롯해 극작가 곽병창·최기우씨, 시인 문신 씨, 영화평론가 신귀백 씨 등이 식구들이다. 이들은 ‘얘기보따리의 소리로 엮는 전주 이야기’란 이름 아래 ‘전주 사투리 타령’ 등 전주의 역사·문화·인물에 대한 짧은 창작 판소리집을 내기도 했다.

이들 중 극작가 최기우 씨가 극본을 맡아 완성했다.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돼 등단한 최씨는 희곡집 <상봉> 등을 펴낸 중견 극작가로 꼽힌다. 그리고 ‘얘기 보따리’는 이번 <녹두장군> 공연에서 아예 주최·주관자로 이름을 걸고 나섰다,

최기우 씨 말고도 거리극 <녹두장군>은 취지에 공감한 많은 전주의 문화예술인이 봉사의 마음으로 힘을 보탠 합작품이다. 연출을 맡은 정진권 씨가 대표적이고, 홍보 담당을 자처한 방송인 손우기 씨도 마찬가지다. 정씨는 1987년부터 극단 황토에서 배우로 시작해 연극판에서 잔뼈가 긁은 정씨는 “지역사회 역사인식 제고와 문화발전이란 대의를 위해 사명감을 갖고 뜨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연출자로 합류했다.

전주시도 직접 후원에 나선 <녹두장군> 공연에 시민과 관광객들의 호응이 점점 높아지자 만족스러워 하는 분위기다. 송하진 전주시장은 이렇게 말했다. “정통 무대극으로 풀어내기 어려운 역사 콘텐트에 기반한 새로운 개념의 마당극이다. 관광객들에게 참여형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한편으로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담긴 의미도 전달해주는 참신한 공연이다.” 송 시장은 “더욱 풍성한 내용으로 관객들이 계속 구경할 수 있도록 시 차원에서도 관심을 기울이겠다”고 덧붙인다.


▎전복래 여사가 용수로 띄운 녹두꽃술을 술병에 담고 있다. 녹두꽃술 빚기의 마지막 단계다.
술 빚어서 아들 돕는 어머니의 정성

<녹두장군> 공연 성공의 빼놓을 수 없는 조력자는 아무래도 이병천 씨의 어머니다. 녹두꽃술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은 술 원료로 녹두를 넣는 것 때문이다. 녹두는 한방에서 한약과 같이 못 먹게 할 정도로 해독작용이 뛰어난 곡물로 알려져 있다. 이씨는 “녹두는 술을 물로 만드는 성질이 있어 어디에서도 술에 녹두를 넣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런데도 이씨는 <녹두장군> 상징물인 녹두를 반드시 넣어서 술을 빚어 달라고 어머니에게 한사코 졸랐다.

이씨의 어머니는 “한번 해보자“며 지난해 가을부터 1주일에 한 번꼴로 녹두술 실험을 시작했다. 생녹두를 갈아서 술에 타보기도 하고, 술이 익어갈 때 찐 녹두를 넣어보기도 했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다. 생녹두를 생쌀과 섞어 같이 쪄내는 것이 가장 무난한 방법이라는 표준 ‘레시피’를 10여 차례 실험 끝에 겨우 마련했다. 그런데 외부 온도나 날씨에 따라 술 맛이 달라 늘 걱정이다.

녹두꽃술은 이씨와 어머니가 함께 개발한 창작품에 가깝다. 1년 가까이 경험을 쌓았지만 이씨 어머니는 녹두꽃술을 담글 때마다 여전히 노심초사를 거듭한다. 그래도 술 빚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은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이라는 아들의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서다.

이씨의 어머니가 더욱 속상할 때는 공연장으로 가져간 술이 남았다는 얘기를 들을 때다. 성금 모금이 시원치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씨의 말을 빌리면 지금까지 20회 공연을 하는 동안 모인 성금은 ‘300만원 안팎’에 불과하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녹두꽃술이 동이 나도록 더욱 정성을 다하겠다”고 다짐을 한다.

201310호 (201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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