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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화제 - “추신수 앞에서 류현진 얘기 절대 하지마!” 

한국인 메이저리거 비교 연구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
베테랑 추신수와 루키 류현진, 정상에서 만났지만 현지 유명세는 천지차이… 한국 내 류현진 인기는 팬들의 ‘친근감’과 ‘팀 지명도’ 덕분

▎<왼쪽> 고교 졸업 후 곧바로 메이저리그에 도전한 추신수는 루키리그에서 시작해 정상급 메이저리거로 성장했다. 미국 현지에서의 유명세는 루키 류현진과는 큰 차이가 난다. <오른쪽> 중·고교 시절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류현진은 김인식 감독이 발굴해 키웠다. 국내 프로야구에서 최고 좌완 투수로 군림하던 그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첫해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스피드와 제구를 모두 갖춘 특급 중학투수였다”며 “지금처럼만 자라면 ‘좌완 최동원’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고 말했다. 부산지역 ‘넘버 원’ 투수로 꼽힌 추신수는 부산고에 진학했다. 그리고 곧바로 전국구 투수가 됐다. 그는 외삼촌인 박정태(전 롯데 2군 감독)의 뒤를 이어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길 원했다. 롯데에서도 경남고 투수 이대호보다는 추신수가 낫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천재 투수’ 추신수에게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2000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가 그 무대였다. 이 대회에서 추신수는 한국 대표팀의 주축 투수로 활약했다. 성적도 좋았다. 7경기에 등판해 18이닝을 던져 탈삼진 32개, 12피안타, 5실점의 호투를 펼쳤다. 이대호도 3경기에서 인상적인 투구를 펼쳤지만, 추신수만큼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추신수의 호투에 힘입어 한국은 우승컵을 안았고, 추신수는 대회 최우수선수(MVP)와 베스트나인에 뽑혔다. 눈 온 밭의 까마귀처럼 유독 돋보이던 추신수를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가만둘 리 없었다. 복수의 메이저리그 팀이 추신수 영입에 뛰어들었다.

김인식 감독,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다

치열한 쟁탈전 끝에 승리를 거둔 건 계약금 135만 달러를 제시한 시애틀 매리너스였다. 당시 135만 달러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한국 고졸 선수 가운데 최고액이었다. 2001년 입단 당시 시애틀은 “추신수를 제2의 박찬호로 키우겠다”며 “지금 실력이면 2∼3년 안에 매리너스 선발진에 가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야구계 역시 추신수가 박찬호의 뒤를 잇길 바랐다. 하지만, 입단 후 추신수는 마운드 대신 타석에 들어서야 했다. 9월 중순 신시내티에서 만난 추신수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그때부터 고생길이 열렸다”며 “속구처럼 쭉 뻗어 가던 야구 인생이 커브처럼 굴곡진 인생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류현진은 인천 동산고 시절까지 초특급 투수는 아니었다. 초교 때부터 인상적인 투구를 펼쳤지만, 그를 ‘넘버 원’ 투수로 생각하는 야구인은 거의 없었다. 되레 나승현(롯데), 한기주(KIA) 등 동기나 후배 투수들이 더 주목받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무엇보다 그가 다닌 학교마다 전력이 약했다. 인천 창영초교부터 동산중·동산고까지 전국대회 우승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보니 대학과 프로팀 스카우트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둘째는 부상 전력이었다. 동산고 1학년이던 2004년 미추홀기 고교야구대회에서 류현진은 등판했다 하면 완투였다. 어찌나 혹사가 심했는지 다른 고교 감독들이 “쟤 저러다 팔 나가겠다”며 우려할 정도였다. 결국 그 대회를 마치고 탈이 났다. 팔꿈치가 아파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팔꿈치 인대가 물에 젖은 종이처럼 너덜너덜한 상태다. 이 팔로 공을 던졌다는 게 신기하다”며 혀를 찼다.

당시만 해도 투수의 팔에 칼을 댄다는 건 최대 감점 요소였다. 프로 스카우트들은 “팔꿈치 부상이 언제 재발할지 모른다”며 류현진을 신인 스카우트 대상에서 제외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평판이 좋지 않았다.

2005년 6월, 김인식 당시 한화 감독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경기를 앞두고 TV를 보고 있었어. 지금은 사라진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청룡기 고교야구대회가 하고 있더라고. 처음엔 별 생각 없이 봤는데 동산고 짝빼기 투수(좌완)가 제법 던지더라고. 우리 스카우트들한테 그랬지. ‘쟤 물건이다. 이번 신인지명회의에서 우리가 쟬 잡으면 좋을 것 같다’고. 아, 그랬더니 스카우트들 표정이 시큰둥해. 이유를 물어보니까 ‘쟤는 담배를 피워서 안 됩니다. 아버지도 너무 설쳐서 소문이 좋지 않습니다’ 뭐 그런 식으로 부정적인 답변만 하더라고. 속으로 ‘그래?’ 했지.”

결국 이게 계기가 돼 류현진이 태어났다. 김 감독이 류현진의 구제에 나선 까닭이다. 어느 날, 김 감독은 ‘인천 아마추어 야구계의 대부’라 불리던 한 야구인을 만났다.

“우연히 인천 야구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을 만났어. 그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현진이가 화제로 떠올랐어. 그 사람한테 ‘얘가 담배도 피우고, 걔 아버지가 너무 열성적으로 아들 뒷바라지를 해서 말들이 많다며?’ 하고 물었지. 그 친구가 ‘아닐 걸요’ 하지 뭐야. 그러더니 ‘담배야 끊으면 되는 거고, 아버지 소문이 좋지 않으면 제가 그 양반을 잘 아니까 주의를 주겠습니다’ 하더라고. 고민 하나가 사라졌어. 그때 생각했지. ‘SK, 롯데가 쟬 잡지 않으면 꼭 우리 팀에서 데려 와야겠다’고 말이야.”

몇 달 후, ‘2006 신인지명회의’가 열렸다. 김 전 감독은 내심 류현진을 뽑고 싶었다. 그러나 한화까지 차례가 올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류현진의 연고지역 프로팀 SK가 류현진을 그냥 놔둘 리 없다고 봤다. 그러나 SK는 류현진 대신 인천고 포수 이재원을 1차 지명했다. 롯데 역시 류현진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2차 전체 1순위 지명권을 쥐었던 롯데는 광주일고 사이드암 투수 나승현을 호명했다. 한화는 기다렸다는 듯 류현진을 지명했고, 김 감독은 주변의 우려에 이렇게 답했다.

“소문은 소문이야. 믿을 게 못 된다고. 현진이가 고교 때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지만, 몸 관리 못하면 멀쩡한 선수도 망가지게 마련이야. 수술했다고 다시 재발하란 법이 어디 있나. 현진이 아버지도 그래. 현진이 입단하고 내가 직접 보니까 사람이 참 좋아. 야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법도 없고, 아들 경기 ‘딱’ 보고 바로 집에 가더라고. 담배? 선동열도 술 진탕 마시고 완봉승 거두고 했는데, 그게 무슨 대수야. 걔도 성인인데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내가 어떻게든 쟬 만들 테니까 그냥 지켜나 보라고.”

김 감독은 스프링캠프에서 가능성을 확인하자마자 류현진을 1군 선발요원으로 확정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류현진을 선발투수로 키우겠다고 마음먹었고, 류현진은 김 감독의 기대에 충실히 부응했다. 2006년 류현진은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신인왕과 정규 시즌 MVP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류현진은 “신인지명회의에서 크게 낙담했던 걸 제외하곤 그 이후 나 자신에게 실망한 적이 한 번도 없다”며 “한화에 입단하지 않았다면 난 평범한 투수가 됐을지 모른다”고 고백했다.


▎<왼쪽> 2003년 5월 9일 시애틀 매리너스 추신수가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에 초대돼 소속팀 신인들과 함께 훈련하고 있다. 당시 마이너리거였던 추신수는 훈련장을 옮겨 다닐 때 뛰어다녀야 했다. <오른쪽> 류현진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미국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첫 사례로, 첫해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함으로써 한국 야구의 위상을 크게 높여주었다. 2009년 4월 4일 인천 문학구장에 열린 2009프로야구 SK와이번스와 한화 이글스의 개막전에서 선발 류현진이 공을 던지고 있다.



추신수, 5년 만에 찾은 절호의 찬스

추신수의 미국 생활은 고달팠다. 몇 번이고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를 괴롭힌 가장 큰 적은 외로움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어떻게 미국에서 버텼는지 모르겠어요. 가족이 있나, 친구가 있나. 그렇다고 의사소통이 되나. 그나마 훈련할 땐 편했어요. 잡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숙소로 돌아가면 매일같이 ‘내가 왜 여기에 있지’ 하는 생각으로 우울했습니다.”

추신수는 외로움을 달래려고 더 야구에 빠져들었다. “덕분에 지금의 명성은 얻었습니다. 하지만, 부산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는 모두 단절됐어요. 20대 청년이 흔히 겪었을 젊은 시절의 추억도 저한테는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추신수는 최정(SK)·김현수(두산) 등 젊고 실력 있는 타자들이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는 건 무리일 것이라고 내다본다. 왜냐? 포기해야 할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타자 전향도 쉽지 않았다. “입단 첫해(2001년) 교육리그를 갔죠. 글러브를 챙겨 마운드에 오르려고 했어요. 그런데 코치님이 막 화를 내는 거예요. ‘왜 타자가 마운드에 오르느냐’고요. 그때 알았죠. ‘아, 날 타자로 스카우트했구나’ 하는 걸요.”

2∼3년이면 빅리그로 승격할 것이라는 장밋빛 예상 역시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프로 4년 차가 되도록 마이너리그를 전전했다. “제가 마이너리그에서 뛸 때 동갑내기 김태균은 한화 주전으로 뛰고, (이)대호도 롯데에서 자릴 잡고 있었어요. 저만 뒤처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밤에 잠이 오지 않더군요.”

오랜 기다림 끝에 기회가 왔다. 2005년 4월 추신수는 빅리그 승격을 통보 받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추신수는 ‘컵 오브 커피(cup of coffee)’ 신세였다. 메이저리그에서 컵 오브 커피는 아주 짧은 시간만 빅리그에 있다가 다시 마이너리그로 내려가는 선수로, 빨리 식는 커피를 빗댄 말이었다.

추신수는 대주자와 대타로 10경기에만 출전하고, 다시 마이너리그로 내려갔다. 정작 기회는 2006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트레이드되면서 찾아왔다. 추신수는 트레이드 이틀만에 친정팀 시애틀전에 출전해 상대팀 에이스 펠릭스 에르난데스의 공을 받아쳐 결승 홈런을 터트렸다.

클리블랜드는 타격 정확성과 파워, 수비능력까지 갖춘 추신수를 ‘주전 외야수’로 쓰겠다고 공표했다. 2007년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을 받으며 잠시 주춤했지만, 2008년 추신수는 94경기에 출전해 타율 3할9리, 14홈런, 66타점을 기록하며 일약 주전으로 발돋움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전성기가 시작됐다.

류현진, 괴물은 메이저리그서도 통했다

2009년 처음으로 풀타임 주전으로 뛴 추신수는 타율 3할, 20홈런, 86타점, 21도루를 기록했다. 아시아인 메이저리거로는 ‘천재 타자’ 스즈키 이치로도 해내지 못한 사상 첫 ‘20(홈런)-20(도루) 클럽’ 가입이었다. 2010년은 더욱 화려했다. 타율 3할과 22홈런, 22도루로 2년 연속 3할대 타격과 ‘20-20 클럽’ 가입에 성공했다. 타점도 90개로 4개를 늘렸다.

추신수는 2011·2012년 부상과 음주운전 사건 여파로 다소 주춤했지만, 올 시즌 타율 2할8푼5리, 21홈런, 20도루, 52타점으로 메이저리그 정상급 타자로 돌아왔다. 올 시즌을 끝으로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취득한 추신수는 빅리그 구단들이 가장 군침을 흘리는 슈퍼스타로 우뚝 섰다. 추신수의 인생이 커브처럼 굴곡이 심했다면 류현진은 일사천리였다. 2006년 한화 유니폼을 입자마자 그해 신인왕과 정규 시즌 MVP에 동시에 올랐다. 프로야구 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 뒤로도 류현진은 한국 제일의 에이스로 성장했고, 각종 국제대회마다 맹위를 떨쳤다. 2012시즌이 끝나고 국외 FA 자격이 쥐어지자 류현진은 미국행을 선언했다. 애초 야구계는 류현진의 미국 무대 도전을 환영하면서도 ‘과연 한국 투수를 거액을 주고 영입할 메이저리그 구단이 있겠느냐’고 반신반의했다.

LA 다저스가 포스팅 시스템(비공개 경쟁 입찰)을 통해 한화에 2573만 달러를 주고, 류현진에게 6년에 3600만 달러를 안겼을 때도 한국 야구계는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의 높은 벽을 넘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부정적인 전망 일색이었다. 그러나 류현진은 미국에서도 ‘괴물’이었다. 올 시즌 류현진은 막강 다저스 선발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며 192이닝을 던져 14승 8패 154탈삼진 평균자책 3.00의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다저스 신인 투수로는 2002년 이시이 가즈히사의 14승 10패 이후 최다승이었고, 올 시즌 빅리그 신인 투수 가운데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무엇보다 류현진의 호투로 다저스는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1위에 올라 디비전 시리즈까지 오를 수 있었다. 현재 류현진은 강력한 내셔널리그 신인왕 후보로 꼽힌다.

류현진의 호투는 미국 야구팬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최근 미국 현지 다저스 팬 사이트엔 재미난 글이 올랐다. “2012년 한국에서 9승밖에 거두지 못한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서 14승을 거둘 수 있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글이었다. 하지만 그 글이 정작 화제가 된 것 동영상 댓글 때문이었다. 그 동영상은 지난 시즌 류현진 투구 시 한화 수비진의 플레이 모음이었다. 동영상을 본 미국 야구팬들은 그제야 “류현진이 왜 한국에서 9승밖에 못 거뒀는지 이해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는 후문이다.

“추신수 앞에서 절대 류현진을 이야기하면 안 돼. 추신수가 삐칠지 모르거든.” 9월 중순 모 언론사 기자는 뒤늦게 신시내티에 도착한 후배 기자에게 그런 조언을 해줬다. 당시 다저스는 신시내티와의 원정 3연전이 예정돼 있었다. LA에서 류현진을 전담 취재하던 기자들은 ‘추신수-류현진 맞대결’이라는 빅뉴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대거 신시내티를 찾을 기세였다.

신시내티 홍보팀도 “많은 한국 기자가 프레스 신청을 했다”며 최소 15명 이상의 한국 취재진이 몰릴 것을 대비해 기자실을 정비했다. 하지만, 컨디션 난조로 류현진의 신시내티 등판이 무산되자 한국 기자들도 자취를 감췄다. 신시내티 홍보팀 관계자는 예상이라도 한 듯 “올 시즌 내내 추신수를 동반 취재하는 한국 기자는 1명밖에 없었다”며 “추신수 같은 슈퍼스타가 왜 한국에서 찬밥 신세인지 영문을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했다.


▎올 시즌을 끝으로 FA자격을 얻는 추신수는 조만간 초대형 계약 소식을 국내에 알릴 예정이다. 추신수가 5월 8일 애틀랜타와의 경기에서 9회 말 끝내기 홈런을 친 뒤 동료들의 축하세례를 받고 있다.



미국 내 지명도는 추신수가 월등히 앞서

한국 기자들 사이에서 ‘추신수 앞에서 류현진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다. 추신수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지 몰랐기 때문이다. 실제론 그렇지 않았지만, 정황상 그럴 만도 했다.

한국에서야 류현진의 인기와 지명도가 하늘을 찌르지만, 정작 메이저리그에서 류현진은 ‘루키’에 불과하다. 반면 추신수는 메이저리그에서 톱클래스 야수로 꼽힌다. 두 선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미국 전역을 취재했을 때도 현지 기자들은 “역대 한국인 메이저리거 가운데 투수는 박찬호와 김병현, 야수는 추신수 정도만 생각난다”며 “빅리그에서 활약하는 일본인 야수를 모두 합쳐도 추신수를 능가할 아시아 출신 선수는 스즈키 이치로 정도밖에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류현진의 인기와 지명도가 추신수보다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세 가지 이유다. 먼저 친근함이다. 류현진은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7년 동안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었다. 고국 야구팬들은 류현진의 성장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봤다. 거기다 류현진은 2번의 아시아경기대회, 1번의 올림픽과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뛰며 국민적 스타가 됐다.

반면 추신수는 2001년 미국으로 떠나고서 고국 야구팬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2006년 이후 빅리그에서 뛰었으나, 당시까진 국내 메이저리그 인기가 높지 않아 추신수마저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지금도 추신수를 낯설어하는 야구팬이 많다.

둘째는 팀이다. 류현진의 소속팀 다저스는 1990년대 박찬호가 뛰며 한국 야구팬들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당시 스포츠계에서 “국가대표 축구팀보다 다저스 인기가 더 좋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거기다 다저스는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팀이자 한국 교민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LA가 연고지다. 한동안 미국 야구와 담을 쌓았던 올드 야구팬들이 류현진이 다저스에서 뛰자 다시 채널을 메이저리그로 돌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추신수의 소속팀들은 하나같이 한국 야구팬들로서는 낯선 팀들이었다. 시애틀·클리블랜드·신시내티가 그랬다. 이들 세 팀은 한국인 메이저리거라곤 추신수밖에 없던 팀들이었다. 교민도 별로 없다. 게다가 미국 내에서도 다저스보다 전국적 지명도가 떨어지는 스몰 마켓팀들이다.

KBS N SPORTS 이병훈 해설위원은 “한국 야구팬들은 선수 실력도 중요하지만, 간판을 따져본다”며 그 예로 요미우리 시절 이승엽(삼성)과 오릭스에서 뛰는 이대호를 비교했다. “이승엽과 이대호의 일본 기록을 비교하면 이대호가 훨씬 뛰어나다. 지난해 이대호는 한국 프로야구 출신으론 처음으로 개인타이틀(타점왕)을 차지했고, 올 시즌에도 타율 3할3리, 24홈런, 91타점이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승엽은 2006년 반짝했을 뿐 나머지 해는 모두 부진했다. 그런데도 우리 야구팬들은 이대호에 대한 관심이 덜하다. 오히려 이승엽이 요미우리에서 부진했던 2007년의 관심도가 더 컸다. 두 선수 모두 한국 프로야구에서 10년 이상 뛰었는데 왜 이런 관심 차가 날까. 바로 간판이다.

한국 야구팬들은 요미우리가 일본 최고 명문팀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 팀에서 이승엽이 뛴다는 것만으로 열광했다. 하지만, 오릭스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비인기 팀이다. 그 바람에 이대호의 활약마저 평가절하되고 있다. 한국 특유의 엘리트 문화, 후광효과가 객관적 성적보다 우선하는 셈이다.”

셋째 이유는 포지션이다. 류현진은 투수, 추신수는 타자라는데 있다. 한국과 일본은 전통적으로 투수를 우대하는 분위기다. 미국은 반대다. 타자가 우선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풍토가 자리 잡은 것일까? 문화 차이 때문이다. 미국인 저널리스트 로버트 화이팅은 일본 프로야구를 취재하며 1977년 <국화와 배트>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화이팅은 미국과 일본 야구 문화의 차이를 ‘회사’와 ‘가족’,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로 표현했다.

“메이저리그 팀은 하나의 회사다. 선수들은 사원이다. 사원(선수)들은 최대한 개인 성과(성적)를 올리는 게 1차 목표고, 회사(구단)의 목표(우승)와 수익(흥행) 달성은 1차 목표가 이뤄지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믿는다. 야구로 따지면 개인성과를 올리기에 가장 적합한 건 타자다.

하지만, 일본 프로팀들은 회사라기보다는 가족 관계다. 감독은 아버지고, 아들은 선수다. 그들은 아버지가 설정한 목표(우승)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걸 미덕으로 여긴다. 따라서 개인을 버리고 가족을 살려야 한다는 집단주의적 사고로 가득하다. 그런 희생정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게 바로 투수다.”


▎미국은 투수보다 타자가 더 대우받지만 한국은 반대로 투수에게 열광한다. 5월 29일 대구시 북구 종합유통단지 전자관에서 시민들이 LA 다저스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데뷔 후 첫 완봉승을 지켜보고 있다.
타자보다 투수가 더 각광받는 한국야구

덧붙여 화이팅은 “미국과 일본 아이들에게 배트와 글러브를 주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 아이들은 배트를 쥔 채 맘껏 스윙하며 만족감을 느낀다”며 “그러나 일본 아이들은 글러브를 끼고 캐치볼을 하려 한다”고 지적했다. 바로 집단주의 성향을 뜻하는 말이었다. 일본 야구에 큰 영향을 받은 한국 야구 역시 일본과 큰 차이가 없다.

각국 리그에서 가장 추앙받는 전설적인 슈퍼스타가 누구냐에 따라서도 투수와 타자의 명암이 갈린다. 미국은 누가 뭐래도 최고의 선수는 홈런왕 베이브 루스다. 1920년대 대공황으로 시름에 잠겼던 미국인들은 루스의 홈런을 보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베이스볼이 곧 베이브 루스다”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루스의 인기는 대단했고, 루스 때문에 메이저리그는 국민 스포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고(故) 최동원, 선동열, 박찬호 등 투수들이 역대 최고 스타로 꼽힌다. 특히나 박찬호는 야구 꿈나무들이 죄다 투수로 변신하는데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은 류현진이다.

일본도 비슷하다.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등 전설적인 타자들이 즐비하지만, 일본인들 마음속에는 태평양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요미우리 에이스 사와무라 에이지가 전설로 자리 잡고 있다. 1940년대 일본 야구계에서 “베이브 루스가 아무리 위대해도 베이스볼보다 위대하지 않다”라는 말이 돈 것도 야구처럼 희생정신을 발휘해 전장에서 죽은 사와무라를 애도하는 말이었다.

여기다 1990년 초반 메이저리그 무대에 도전해 큰 성공을 거둔 우완 노모 히데오가 한동안 아이들의 롤모델이 됐고, 2000년대엔 마쓰자카 다이스케, 지금은 다르빗슈 유 같은 특급투수가 일본인들의 전폭적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다.

마지막으론 시각 차이다.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수익창출이 지상과제다. 그러려면 관중 흡입력이 뛰어난 슈퍼스타가 고객을 불러모아야 한다. 5일에 한 번씩 등판하는 선발투수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매일같이 출전하는 타자가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이 팀의 최고 타자를 4번 타순에 배치하는데 반해 미국은 3번에 두는 것도 같은 이치다. 한 타석이라도 더 많이 고객들이 슈퍼스타를 보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언론도 매일 출전하는 타자들의 노고를 높이 평가한다. 메이저리그 정규 시즌 MVP 가운데 타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걸 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은 성적이 지상과제다. 대부분의 구단이 대기업을 모체로 둔 까닭에 한·일 구단들은 돈벌이엔 별신경을 쓰지 않는다. 성적만 좋으면 만사 OK이다. 따라서 단기간에 성적을 올릴 수 있는 투수력 강화에 집중하고, 몸값 역시 투수쪽을 후하게 쳐준다.

투수 우대는 언론도 마찬가지다. 2006년 한화 류현진은 투수 3관왕(다승·평균자책·승률)을 차지했다. 롯데 이대호도 타격 3관왕(타율·홈런·타점)에 올랐다. 미국이라면 그해 정규 시즌 MVP는 단연 이대호 몫이었다. 그러나 한국 기자들은 류현진에 표를 던졌다. 류현진의 소속팀 한화가 한국시리즈에 올라가고, 롯데는 4강권 밖이었다는 걸 고려한 결과였다. 한마디로 정규 시즌 MVP에 팀 공헌도라는 집단주의적 의식이 개입한 것이었다.

추신수와 류현진은 한국야구의 좌·우 날개

10월 초 만난 MBC SPORTS+의 관계자는 “류현진 덕분에 먹고 삽니다”라며 “방송사 입장에선 류현진보다 신시내티 레즈의 외야수 추신수가 더 가치 있는 선수일지 모릅니다”라는 다소 모순된 말을 했다. 어떤 의미냐고 물어보자 돌아온 그의 답은 이랬다.

“류현진은 5일에 한 번씩 등판하는 선발투수예요. 등판 당일 시청률과 바람몰이는 대단할지 몰라도 4일간은 조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추신수는 매일같이 출전하는 야수에요. 시청률은 류현진보다 떨어지지만, 꾸준하게 시청률을 기록하죠. 다시 말해 순간 시청률은 류현진, 전체 시청률은 추신수가 떠맡고 있는 겁니다.”

두 선수의 관계도 시청률처럼 얽혀 있다. 두 선수 중 한 명이 살아남는다면 남은 한 명에게 관심과 인기가 몰릴 것 같다. 그러나 아니다. 추신수와 류현진은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양쪽 날개이자 국내 메이저리그 인기를 지탱하는 두 다리다. 무엇보다 두 선수의 출현으로 투수와 야수 한쪽으로 유망주가 몰렸던 국내 아마추어의 기형적 흐름이 변했다. 지금은 투수와 야수 공평하게 유망주가 몰리고 있다.

조만간 추신수는 초대형 계약 소식을 국내 야구팬들에게 알릴 예정이다. 그의 몸값은 최소 1억 달러 이상으로 예견된다. 만약 그 정도 몸값을 받는다면 추신수는 명실공히 메이저 리그 톱스타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추신수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때도 저와 현진이를 비교하시겠습니까?”

201311호 (20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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