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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종 | MB정부 남북정상회담 ‘타이거 프로젝트’ 좌절 顚末 

이명박 전 대통령 - “버스 두 대에 태울 국군포로와 납북자 송환 요청하라”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정상회담 시간·장소는 2009년 11월 초 평양, 이듬해 김정일 서울답방도 명기…북측 설득해 한반도 비핵화 어젠다도 테이블에 올려

▎이명박 대통령과 임태희 대통령실장. 임 실장은 2008년 여당 정책위의장 시절부터 이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정상회담 추진을 위한 물밑작업을 벌였다.



MB 정부는 세 차례 다른 루트와 계기를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다. 그중 싱가포르회담을 조율한 임태희 당시 고용노동부 장관팀의 정상회담 기획이 완성도가 높아 실현 가능성에 가장 근접했다. 최고의 대북전문가 3인이 임태희 장관을 도왔다. 아직 익명을 요구하는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타이거 프로젝트’의 전개과정을 취재했다.

임태희 전 노동부 장관의 남북정상회담 프로젝트(일명 ‘타이거 프로젝트’)는 2008년 10월 말부터 가동됐다. 숭례문 복구공사가 한창일 때 언론에서 금강송이 부족하다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그때 임 전 장관에게 “북한에는 금강송이 많으니 그것을 들여오면서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던 사람이 있었다.

북한을 수시로 드나드는 한 중국 국적의 인사다. 임 전 장관은 지난 2월 <월간중앙>과의 인터뷰를 통해 “북한의 금강송을 쓰면 남북화해·교류의 상징이 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 대통령에게 보고한 뒤 관계 부처의 의견을 들어 본격적으로 접촉하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임 전 장관이 당시 한나라당의 정책위의장을 했던 때다. 이 ‘금강송 라인’이 임 전 장관과 북한 인맥을 연결하는 매개가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금강송 공수작전’은 그러나 끝내 무산됐다. 이 사업가가 특정 부처와 일을 추진할 경우 나머지 부처와는 등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사업가는 “관련 부처들이 저마다 자신을 창구삼아 일하자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사업상 불이익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며 압박한다”는 불만을 털어놨다고 한다.

“여러 라인 중 가장 잘하는 라인을 쓰겠다”

정책위의장 시절 임 전 장관은 일 욕심이 많았다. 비교적 이념적 색채가 적고, 당선인 시절 비서실장을 지내는 등 대통령과의 관계도 돈독했다. 그런 이유로 다양한 아이디어와 제안이 많이 들어왔다. 북측과 연계된 사업, 특히 역대 정권이 극비리에 추진했던 남북정상회담은 집권당 정책위의장으로서 관심을 가져볼 만한 사업이었다. 3명으로 이뤄진 실무진이 꾸려졌다. 처음부터 정상회담을 목표로 가동됐던 것은 아니다. 기업인도 있었고 관련 분야 연구자도 포함됐다. 민간인 신분이었던 만큼 북측 인사를 접촉하는 일은 늘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접촉 횟수가 늘어날수록 북측의 관심은 정상회담 쪽으로 기울었다. ‘임태희 라인’이 가장 믿을 만하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명박 정부의 대북라인은 이재오 라인 등 모두 6개가 가동되고 있었다. 북측과 접촉하면서 저마다 자신의 라인이 대통령과 가장 근접한 유일한 루트임을 자임했다. 호가호위, 자가발전의 측면이 강했다. 북측은 북측대로 과연 어떤 비선이 가장 믿을 만한가를 둘러싸고 의심하기와 검증하기를 거듭했다.

이명박 정부 초기 대북 라인의 혼선은 MB의 스타일과 관련이 깊다. 그는 “여러 라인 중 가장 잘하는 라인을 쓰겠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측근 중 “해보겠다”고 하는 사람을 말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어느 한 사람에게 전권을 줘서 단일한 라인을 만들지도 않았다. 당시 관련자들은 “MB는 대북사업도 비즈니스 스타일로 했다. 마치 공사 주체를 공개입찰을 통해 결정하듯 여러 라인을 서로 경쟁을 시켰다”고 회고하고 있다.

남북관계 정상화나 남북정상회담 성사가 갖는 의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측근들을 필사적으로 매달려 경쟁했다. 원래 남측의 대북사업이란 성공하면 대박이고, 실패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리스크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북측은 달랐다. 북측의 대남사업은 실패는 재난이었다. 심지어 죽음을 부를 수도 있는 사업이다.

훨씬 신중해야 했고, 결단코 자신이 위임받은 권한 이상을 행사하지 않으려 했다. 특히 김정일만이 결정할 수 있는 소위 ‘김정일 어젠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손댈 수 없었다. 그래서 남한식의 ‘호가호위’란 있을 수 없다. 김정일의 지시나 생각을 사칭하는 일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김정일 어젠다’에 대한 인식이 없는 당시의 많은 관료가 회담 성사에 악영향을 미쳤다.

MB의 비즈니스 스타일도 마찬가지로 회담 성사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 측 라인을 경쟁시키는 것까지는 좋다 쳐도, 북측을 ‘입찰 참여자’로 대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었다. 이런 식이다. 우리 측의 어떤 특정 요구에 대하여 북측이 힘들게 동의해 합의에 이르렀다. 그런데 최종 서명 단계에서 또 다른 요구를 하나 얹는다. 공사 하청을 줄 때 마지막 계약 단계에서 하청업자에게 무리한 추가 부담을 요구하는 식의 행위다. 이것이 관철되면 물론 단기적으로는 이익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상대의 신뢰를 잃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위험한 도박이다.

임태희 라인이 대통령의 확실한 신임을 받게 된 것은 2009년 2월 말께다. 대통령의 OK 사인이 떨어진 것이다. 임태희 라인의 최 목적지는 물론 정상회담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 목표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 목표를 향해 뛰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난 뒤부터는 감당할 수 없는 견제와 질시가 들어온다. 그때 임태희는 여당 정책위의장이었다. 내각에는 주무부서인 통일부가 있고, 청와대, 외교부, 국정원 등이 있다. 이들이 도와주지는 못해도 훼방을 놓기란 너무도 간단한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9년 8월 23일 오전 청와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차 서울에 온 김기남 노동당 비서(가운데)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일행을 접견하고 있다.
MB가 임태희 라인을 승인했다고 해서 다른 팀의 활동을 다 정지시킨 것은 물론 아니다. 다른 팀들도 여전히 활동을 했다. 이런 대목에서 MB 특유의 더듬수가 작용했다. 하라고 하지도 않지만, 하지 말라고 하지도 않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흡족한 성과를 내는 일이다. 누구를 발탁하여 흡족한 성과를 내도록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흡족한 성과를 내는 자를 발탁하는 스타일이다.


▎2009년 8월 22일 김기남 북한 노동당 비서가 김대중 전 대통령 빈소에서 조문하고 있다.
이론에 밝고 논리정연한 대남통 원동연

임태희 라인이 대북 접촉을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한 것은 2009년 4월께부터다. 노무현-김정일의 10·4 선언의 이행이 이명박 정부 들어서 좌절되자 당시 북한의 대남정책 주무기관인 통일전선부(이하 ‘통전부’)는 큰 질책을 받았다. 노무현 정부 당시 통일전선부 부부장을 맡았던 최승철이 ‘철직(撤職)’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는 것이다.

통일전선부가 주춤하는 사이 국가보위부가 대남사업 분야에 치고 들어왔지만 2009년 5, 6월께부터는 다시 통전부가 주도권을 잡았다. 통일전선부장 김양건, 새로 임명된 부부장 원동연 라인이 임태희 팀의 접촉 면으로 확정됐다. 단, 원동연이 어느 시점에서 부부장이 되었는지는 지금도 확실하지 않다.

원 부부장은 ‘이론에 밝고 논리가 정연하며 필체가 아주 유려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말수가 적어 조용하고 술도 거의 안 마시는 스타일이다. 이후 남북 협상이나 회담에 많이 참여했지만 좀처럼 행사장이나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뒤에서 조용히 상황을 관리하고 전략을 짜는 역할을 자임한다.

원 부부장은 2009년 8월 김대중 대통령 서거 당시에 북한 조문단의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한 적도 있다. 그때에도 동행한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을 조용히 수행했다. 조문단이 8월 23일 청와대를 방문해 이명박 대통령을 면담했을 때 원 부부장이 뒷자리에 앉아 대화 내용을 수첩에 깨알같이 기록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원 부부장의 성격은 전임자인 최승철 전 부부장과 정반대다. 최 전 부부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대남사업의 실무 책임을 맡았다. 그는 성격이 화통하고 말이 많으며 술을 좋아하는 두주불사(斗酒不辭) 형이었다. 남북 간 행사의 전면에 나서 좌중의 시선을 끌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남북관계가 활성화된 데는 그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최 전 부부장은 서울 방문 때 과음을 하거나 언행에 실수가 있었고 이것이 결국 지난해 철직의 명분이 된 것이란 설도 있다.

통전부는 2009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도 임태희 라인을 통해 ‘조전’을 보내도 되겠느냐는 문의를 했다. 당시 대북 라인의 가장 믿을 수 있는 루트가 ‘임태희 라인’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다. 그해 8월 22일 김대중 대통령의 장례기간 중 북측 조문단이 내려왔다. 김기남 노동당 비서, 김양건 통전부장, 원동연 부부장 일행이다. 이들이 서울에 오기 전 이날 새벽에 임태희 팀에 긴급한 연락이 왔다. 꼭 만나자는 것이다. 임태희 팀은 이들 조문단이 2박3일 간 머물렀던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 맨 꼭대기층에 방을 잡았다.

얼굴이 노출되지 않은 팀원들은 상관없었지만 임태희 의장은 달랐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변장을 시키고 호텔에 들어갔다. 그들이 서울에서의 첫 날 일정을 모두 마친 시간이 밤 11시. 북한 측 일행과 임태희 팀은 호텔 방에서 만나 두 시간 이상 그때까지 진행된 협의사항을 점검하고 속 깊은 대화를 나눴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테이블에 나란히 않은 김정일 위원장과 김양건 통전부장.



황강댐 수문 사건 사과를 유도하다

둘째 날 그들은 의외의 부탁을 했다. 그들이 긴급하게 만나자고 한 용건은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즉 자신들은 조문단원이면서 동시에 김정일의 특사 자격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처음 청와대 참모들의 견해는 부정적이었다. 조문은 조문으로 끝나야지 특사로 ‘VIP(대통령)’를 만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 대통령 면담이 이뤄졌고, 북측 대표는 셋째 날 서울을 떠나기 앞서 이 대통령을 만나 김정일 위원장의 메시지를 낭독했다.

김양건 부장은 올해 공개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억측이 나돌았다. 지난해 12월 처형된 장성택과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져 그의 처형으로 숙청될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다. 그런데 올 3월 발표된 제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서 대남정책에 관여하는 고위간부들의 면면이 나타났다. 통일전선부의 ‘투톱’인 김양건 부장과 원동연 부부장이었다. 두 사람 모두 두 달여 만에 등장해 건재를 과시했다.

김양건은 평안남도 출신으로 김일성 종합대학 불어과를 졸업했다. 노동당 국제부 부부장, 국제부장, 조선대풍국제투자그룹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90년대 말 당국제부장 시절에는 대중국 외교에도 솜씨를 발휘한 ‘중국통’이기도 하다. 그의 동생이 경제개발위원회 수장인 김양국이다. 김양건은 지난해 8월 “개성공단이 잘되면 비무장지대에 평화공원 조성도 잘 될 수도 있다”고 말해 관심을 끌었다. 평화공원 조성은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 제안한 것이다. 그만큼 그의 입지가 탄탄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2009년 10월 어느 날 김양건 부장과 원동연 부부장이 싱가포르 샹그릴라호텔에 투숙했다. 두 사내가 인도양 해변의 이 호사스런 호텔을 찾은 이유는 임태희 당시 고용노동부 장관과의 정상회담 조율을 위한 마지막 담판을 위해서였다. 싱가포르 고위급 접촉을 담은 비공개 영상자료에 나타난 원동연은 영락없는 관광객이었다. 야외수영장 선탠베드에 누워 열대과일 주스를 즐기던 그는 카메라 렌즈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남북 비밀접촉에 나온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두 사람이 싱가포르를 찾기 1개월여 전인 9월 5일 임진강에서 한국인 6명이 숨졌다. 북한이 황강댐 수문을 갑작스럽게 열어 강물이 임진강 하류로 쏟아져 내려오면서 야영객들이 휩쓸린 것이다. 북한이 무단방류를 사실상 시인했는데도 통일부는 공식사과 요구를 미루다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9월 8일 현인택 당시 통일부 장관이 국무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와서야 “책임 있는 당국의 추가설명 및 공식사과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북측의 해명과 사과 없이는 임기 중 북측과의 대화는 일체 하지 않겠다는 점을 참모들에게 밝혔다고 한다.

임태희 팀에 비상이 걸렸다. 이제 거의 모든 조율이 끝나고 이제 합의문을 최종 손보고 확인하는 단계만 남았다. 미세 조정의 마지막 과정이다. 임태희 팀 못지 않게 북측 통전부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북한의 태도가 돌연 달라졌다. ‘리명박 역도와 그 패당’ 운운하며 막말을 퍼붓던 그들이 10월 14일 “남측에서 뜻하지 않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면서 조의를 표명했다. 사과에 준하는 수준의 표현이었고, 정부 역시 “사과로 인정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베이징을 방문 중이었다. 임태희-김양건 핫라인이 가동돼 북측이 사과문을 건네고 대화의 불씨를 다시 살리기로 했다. 사과문의 문안까지도 조율했다. 임태희 팀은 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는 김성환 외교안보수석에게 연락해 황강댐 사과문이 발표될 것이란 점을 알렸다. 김 수석은 “확실한 것이냐?”고 거듭 물으며 다시 북측에 확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북측 원동연 부부장은 이를 재차 확인했고 1주일 후 결국 사과문을 발표해 정상회담의 불씨를 살렸다.

임태희-김양건 막후 접촉에서 아쉬움이 남는 것은 보안 유지의 문제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밀사(密使) 임태희의 정체성을 100% 보증해주지 못한 측면이 있다. MB의 스타일 상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대북 접촉의 ‘막후적 성격’에 대한 그의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청와대 참모진 일각에서 미국 정부에 비밀접촉 사실을 고지한 것도 문제로 드러났다. 이 미국 관리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공개한 것이 더욱 이상했다.

미국 측이 남북 막후접촉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고, 우리 외교안보 라인 중 일부에서도 임태희 장관이 주도하는 막후접촉을 불쾌하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임태희는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외교안보 라인 책임자의 입장에서 보면 업무의 전문성도, 관할 상의 책임도 갖지 못한 인물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것이 임태희-김양건 비선 라인의 한계라면 한계였다.

2009년 10월 마지막으로 김양건 부장을 만나러 갈 때 MB는 거의 모든 정무 관련 수석을 소집했다. 정정길 대통령실장, 이동관 홍보수석, 박형준 정무수석 등 당시까지 내용을 전혀 모르던 사람까지 다 들어와 회의를 했다. 이제는 공개할 만한 때가 됐다고 여겼던 것 같다.

통일부의 경우는 국장들 상당수가 비밀접촉 사실을 알게 됐고, 나중에는 과장들까지도 이 ‘비밀 아닌 비밀’을 공유하게 됐다. 원래는 싱가포르에서 정상회담 협의를 마무리하기로 했지만 협상 도중 서울에서 결론을 내리지 말고 최종 서명은 통일부에 넘기라는 지시가 전해졌다. 임태희 장관과 김양건 부장은 싱가포르에서 1차 합의를 하고 최종적으로 통일부-통일전선부 회담에서 마무리하여 발표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그것이 이른바 ‘통통회담’이다.


▎베네통 시리즈 광고 ‘UNHATE’에 나타난 이명박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정치적으로 대립해온 세계 각국 정상이 키스하는 모습을 합성사진으로 연출한다.



국군포로 문제는 ‘김정일 어젠다’

당시 임 장관은 김양건 부장과 6가지 의제에 대해 합의를 봤다. 임 전 장관은 ‘의견 접근’ 또는 ‘협의’란 표현을 쓴다. 6가지 의제란 정상회담, 국군포로 및 납북자 고향방문, 한반도 비핵화, 이산가족 상봉 및 고향방문, 인도적 지원 문제, 국군 유해 발굴 등을 지칭한다. 가장 첨예한 의제는 국군포로 및 납북자 문제, 그리고 한반도 비핵화 문제였다. 두 가지 이슈를 북측은 대화의 의제에서 제외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우리 측이 핵심의제로 생각한 것은 바로 그 두 사안을 빼고 정상회담 조율을 논하긴 어려웠다.

핵문제는 북미 간 대화의 문제라는 것이 북측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당시 청와대 일부 강경파 중에는 대화 의제로 ‘북한핵 폐기’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표현을 강요해서는 당시 회담의 지속은 불가능했다는 것이 참여자들의 증언이다. 그래서 지혜를 짜냈다. ‘핵폐기’라는 표현 대신 ‘핵문제 해결’이란 말을 쓰자는 것이다. ‘핵문제 해결을 통한 한반도 비핵화’를 의제에 올리자는 데 합의했다.

국군포로 문제 역시 가장 예민한 사안으로 부각됐다. 국군포로와 납북자는 ‘전쟁시기와 그 후 소식을 알 수 없는 사람들’로 표현했다. 이 대목에 관하여 이명박 대통령이 특히 욕심과 열망이 강했다. 납북자와 국군포로의 고향방문이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임을 분명히 했다. 여기에는 정상회담이 끝난 후 국군 포로들을 대동하고 판문점을 넘는 영웅의 판타지가 있다.

정상회담의 가시적 성과로 보수층을 설득할 수 있는 호재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양건의 생각은 달랐다. 무엇보다 이 사안은 ‘김정일 어젠다’이다. 자신의 재량을 넘는 일이고, 김정일 역시 평소 까다롭게 생각하는 안건이다. 일본 납치자 문제만큼이나 체제의 정당성에 흠집을 낼 수 있는 고약한 소재다. 북측의 논리는 이랬다.

“긴 세월이 흘렀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이미 죽었다. 전쟁포로는 적군인데, 적군의 신분으로 여기에 살 수 없다. 거의 모두 전향을 했다는 얘기다. 전향한 사람이 무슨 포로인가? 또 전향한 사람은 이곳에서 배우자를 만나 가족을 꾸렸다. 가족의 반대가 심하다. 이름을 바꾼 사람이 많아 찾기도 쉽지 않고, 설령 찾았다 해도 가족이 반대하면 강제하기 힘들다. 잘못하면 또 다른 종류의 이산가족을 만드는 업을 짓는다.”

‘통통회담’은 왜 결렬됐나?

남측의 요구도 완강했다. 보수 정권의 체면이 걸린 문제고, 지지자들을 설득할 명분의 문제이며, 그들이 남쪽 행을 원한다면 인도주의의 문제가 된다. 북측 통전부는 결국 이 사안을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고했다. 김 위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군포로와 납부자 고향방문을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삼는다는 말에 크게 고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북측은 이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갈 때 ◯명의 국군포로를 대동하고 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사인을 보내왔다. 여기서 ◯명이란 1명에서 9명 사이를 의미한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선물’이라는 표현을 쓰며 생색을 냈다. 그런데 9월에 사단이 났다.

이명박 대통령이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가능한 많은 국군포로를 송환하겠다는 대통령으로서의 책임감이 발동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대통령은 ‘고속버스 두 대’ 분의 납북자와 국군포로 고향방문을 성사시키란 지시를 내렸다. 약 60∼70명에 해당하는 수로 북측과 협상했던 실무자 입장에선 거의 불가능한 목표였다.

아니나 다를까 북측은 남측의 이 제안을 듣고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일단 최고지도자끼리 만나 물꼬를 트고 나면 차차 더 확대되지 않겠는가”라는 북측의 설득이 있었지만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는 협상을 더 진행하기는 어려웠다. 2009년 9월께 대통령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북측 입장을 들어보고 협상 결렬을 일단 막아보란 취지의 지시였다. 우여곡절 끝에 북측과 다시 접촉해 협상의 불씨를 살려 다시 싱가포르까지 오게 된 것이다.

김양건 부장은 싱가포르에서 모든 사안이 마무리될 것으로 알고 평양을 떠났다. 그런 점에서는 임태희 장관도 마찬가지였다. 밀사들이 일단 사인을 하더라도 다시 통일부와 최종 조율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데에 북측은 맥이 빠졌다. 만일 그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김양건은 아마도 싱가포르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2009년 11월 초 평양 정상회담을 확정한 협의안에 양측은 한치의 이견도 없이 동의하고 있었다. 정상회담의 정례화와 함께 2010년 상반기 이전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도 합의했다. 협상이 싱가포르에서 마무리됐더라면 정상회담은 아마도 성사됐을 것이다.

싱가포르 회담이 최종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해 11월 7일과 14일 개성에서 남측 통일부와 북측 통전부 국장급 책임자가 만나는 ‘통통회담’이 열렸다. VIP의 최측근이 조율하지 못한 협상을 국장급 관료가 만나 마무리하기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최종 결렬의 이유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바 없다. 당시 회담에 참석했던 통일부 관료들과 현인택 당시 통일부장관 등이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 임태희 팀은 싱가포르 회담이 끝난 후에는 남북 협상 테이블에 접근하지 못했으므로 그 내막을 알 수 없다.

다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북한이 정상회담을 대가로 쌀과 비료의 선지원을 요구하면서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 등 싱가포르 협상안을 뒤집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북측 책임론이다. 둘째는 남측이 싱가포르 협의 때보다 많은 ◯명, 즉 10명 이상의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고향방문을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남측 약속 파기설이다. 셋째는 정상회담의 장소와 관련해서다. 싱가포르 협상에서는 일단 ‘평양’으로 못 박았는데 남측이 서울 혹은 판문점으로 변경을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역시 남측의 약속 파기가 원인이라는 설이다.

실무 협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에 냉정한 시각을 갖고 있었다. 즉, 김정일은 상징적으로 1명의 대동 귀향을 허용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거기에 김정일의 ‘선물’ 형식으로 한 명을 추가해 보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는 것이다. 한 가족 전체를 보내는 방법도 강구되었다고 한다. MB가 생각했던 규모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그 상징성 측면에선 무시할 수 없는 북측의 결단이란 시각이다.


▎2009년 9월 26일 금강산면회소에서 열린 남북이산가족 단체상봉에서 남측 이정호(왼쪽)씨가 국군포로 출신인 형 쾌석씨를 만나고 있다.



정상회담 결렬이 천안암 사건의 원인?

가장 논란이 컸던 대목은 회담 결렬 이유가 북한이 5억 달러를 현금을 미리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먼저 2009년 추석 때 이산가족 상봉은 역사상 최초로 북한에 대한 식량 지원 없이 이뤄졌다. 남측은 노무현 정부 시절 일단 합의했지만 이후 관계 경색으로 지원이 미뤄진 옥수수 5만t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제공하는 것을 북측과 협의했다. 그러나 이 협의는 흐지부지되어 결국 옥수수 5만t은 제공되지 않았다. 북 입장에서는 속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대목이다.

5억 달러 요구설은 실제 협상에 참여했던 임태희 팀에 의해 강하게 부정되고 있다. 일단 정상회담을 열고, 향후 1년간에 걸쳐 국군포로 송환, 유해 발굴 등의 프로세스를 제대로 지키면 쌀과 비료를 순차적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쌀과 비료는 정상회담의 대가가 아니라 인도적 지원에 속한다. 돈을 미리 지원하고 정상회담을 했던 과거의 사례와는 확연히 다른 접근법이다.

정부 관련부처 일각에서 바라보는 협상 결렬의 이유는 임태희 팀의 시각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북한이 구체적인 요구 조건을 들고 왔는데 현금을 요구한 것은 아니라 해도 돈으로 환산하면 5∼6억 달러에 해당하는 지원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천안함·연평도 사건은 그런 요구 조건이 거부되자 자행한 일종의 보복이라고 본다.” 정상회담 결렬을 천안함 도발의 원인으로 보는 시각은 아직 특별한 근거가 없어 논리의 비약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국군포로 및 납북자의 존재를 지금도 부정하고 있다. 임태희 팀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제대로 요구하지 못한 납북자·국군포로의 한국행을 협상 어젠다에 올린 성과를 거뒀다. 국군 유해 공동발굴사업에도 ‘혁신적인 제안’을 했다. 북한의 전쟁 기록을 살펴 북한군이 승리한 지역에서 유해를 찾자는 것이다.

전쟁 기록은 통상 승리한 기록을 자세히 기록하고, 패배한 기록은 간단히 거론한다. 그러니 남쪽 우리의 전투 기록에 따라 유해를 발굴하면 북한군·중공군의 유해가 주로 발굴된다. 북한군이 승리한 곳에서 우리 국군의 유해 찾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겠다는 입장이 북측에 전해졌다. 북측도 이에 흔쾌히 동의했다는 것이 임태희 팀의 설명이다.

제3의 협상 과정도 언젠가는 공개돼야

당시 협상팀이 벌였던 ‘정상회담 준비 오디세이’는 방대한 것이다. 현재 임태희 전 장관이 언론을 통해 밝힌 과정은 지극히 포괄적인 내용에 불과하다. 협상 과정에서 축적된 정보와 구축된 인맥은 여전히 재가동이 가능한 자산이다. 디테일한 부분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고, 지금까지 전혀 언급되지 않은 제3의 협상 과정도 언젠가는 공개돼 향후 남북 대화에 참고돼야 한다. 북측도 현재까지 싱가포르 회담 팀에 대해서는 일체의 비난이나 악의적 정보 공개를 자제하고 있다.

그 ‘진실성’에 대해 인정하고 있고, 여전히 양측이 만든 방대한 합의안의 실현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회담 기획의 전 과정에 참여한 인사는 당시 협상안의 창의적 요소를 현 정부가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MB가 그때 조금 통 크게 정상회담에 임했어야 했다”면서 “그랬다면 박근혜 정부는 훨씬 좋은 여건에서 남북문제를 풀고 있었을 것”이라 주장했다.

201407호 (201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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