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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윤고은의 취재파일 | 두 계절 꽃피는 배롱나무 엄마들의 인생 2막 

 

윤고은
한 시절을 온전히 어머니로 살았고 지금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또 하나의 삶을 개척해 걷고 있는 세 여성의 이야기

▎일하는 노년은 아름답다. 어떤 이의 예순 살은 서른이 되기도 한다.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에 흰머리와 주름살로 따지는 나이는 의미를 잃는다.



대학시절 우리 과의 평균연령을 높이는 데 한몫 한 사람은 일본인 하기모리 씨였다. 그는 한국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쉰아홉 살에 한국으로 건너와 대학 신입생이 되었다. 그는 늘 몇 권의 책이 들어 있는 두툼한 배낭을 메고 다녔고, 웬만한 스무 살 언저리의 동기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다가도 우리들의 술자리에 불쑥 나타나 술값을 계산해주곤 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나는 하기모리 씨의 나이를 거의 잊고 지냈다. 처음엔 나이를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때에 보면 그가 마흔 살인 것도 같았고, 서른 살인 것도 같았고, 나와 동갑인 것도 같았다. 생각해보면 내가 그의 나이를 제대로 헤아려보게 된 건 오히려 졸업한 이후였다.

서른 살이 넘어서야 나는 인생이란 한 척의 배와 같고 내가 그 배의 선장임을, 마치 자기계발서에 나올 법한 그런 문장들을 비로소 깨닫게 됐다. 그런데 그중에 하나는 모두가 같은 나이를 살고 있지는 않다는 거였다. 어떤 이의 예순 살은 보통의 마흔 살 혹은 서른 살 정도로 계산되기도 한다.

내가 하기모리 씨의 나이를 자주 까먹고 지냈던 것은 어쩌면 내 탓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가 정말 쉰아홉 살이 아니라 마흔 살, 혹은 스무 살을 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 나이 계산법에는 흰머리나 얼굴주름 같은 건 불필요하다.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면 충분하다.


▎집안사정 때문에 미대 진학을 포기했던 박현희 씨는 마흔이 넘어서야 민화 작가로 청춘의 꿈을 이뤘다. 두 아이의 엄마인 그는 제자들을 키우는 어엿한 ‘선생님’이다.
여기, 그런 나이 계산법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사람들이 또 있다. 한 시절을 누군가의 어머니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 사실엔 변함이 없지만, 비로소 또 하나의 시절을 새롭게 걷고 있는 세 사람이다. 이들에게 나이를 묻긴 물었으나, 그건 별 의미가 없었다. 세 사람의 시계바늘은 나이 따위는 무색하다는 듯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화작가 박현희 씨 - 외국인 홈스테이가 가져다 준 뜻밖의 ‘선물’

고등학교 때 미술반에서 동양화를 그렸던 박현희(57) 씨는 미대에 가고 싶었으나 당시 집안의 여건상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 후로도 취미는 늘 그림이었다. 결혼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뒤로도 손에서 붓을 놓지는 않았다. 그런 그림 취미가 어떻게 직업이 되었을까? 박씨는 “그 이야기를 하자면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저희 집이 외국 관광객을 위한 홈스테이를 한 적이 있었죠.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연스레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결정한 거였는데 아이들은 학교, 남편은 회사로 가고 나면 결국 외국 손님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저인 거예요. 자연스레 제가 그들의 서울 관광가이드 역할을 하게 되었고, 쏟아지는 질문에 답하기도 했죠. 그때 저도 우리 민화에 대해 인식하게 됐어요. 외국인들이 민화에 대한 질문을 참 많이 했거든요.”

한국인들은 오히려 당연하고 익숙하게 생각해서 잊고 지내는 것들을 외국인들은 흥미롭게 느꼈다. 궁궐에 가면 왜 늘 ‘일월오봉도’가 있는지, 그 그림의 해와 달이 무슨 의미인지 왜 그 색깔을 쓰는지, 십장생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민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인사동이나 문화센터 등에서 민화 수업을 들으며 차근차근 배우기 시작했다. 그게 1993년의 일이다. 그 뒤로 박씨는 22년째 민화를 그리고 있다. 그 사이에 박씨의 취미는 직업이 되었다.

1999년에 주불한국문화원의 주최로 파리에서 전시회를 하게 되었던 것이 프로로서 첫 발을 내딛게 해준 계기였다. 외국인들은 동양화에는 먹그림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화려한 색감이 있는 줄 몰랐다며 민화에 감탄했고, 민화가 품고 있는 이야기들에도 흥미를 보였다. 민화는 선과 화려한 색, 그리고 늘 주제가 있어야 한다는, 다소 까다로운 조건을 갖고 있는 그림이지만 그래서 또 매력적인 장르이다.

외국 사람들은 연꽃 그림에는 항상 새 두 마리가 들어가고 그 두 마리가 부부화합을 상징한다는 것을 흥미롭게 여긴다. 연밥에 씨가 박힌 것은 자식을 낳고 번창하길 바라는 것을 새롭게 듣는다. 그 전시회가 끝나고 나서 박씨는 국립중앙박물관대학에 들어가 전통건축과 한국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론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2000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패랭이꽃과 방아깨비를 그려 넣은 명함도 갖게 되었다. 2008년 1월부터 지금까지 민화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문화센터에서 하는 수업의 경우 대부분의 수강생이 전업주부다.

“민화는 세밀한 필치를 요구하는 작업이라 노년층에는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이만한 취미가 없거든요. 노년기에는 특히 더 취미가 있어야 해요. 동적인 취미와 정적인 취미를 함께 누릴 수 있다면 이상적이죠. 민화는 정적인 취미가 될 수 있어요. 그리고 한 사람의 생이 끝나도, 그가 그린 작품 한 점은 세상에 남을 수 있죠.

내가 과연 저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 라고 물어보시는 분이 많은데, 그분들께 자신감을 불어넣는 것이 제 수업의 시작점이에요. 쉬운 것부터 시작하면 되죠. 호랑이 중에서도 털이 많지 않은 종류의 호랑이를 그린다든지. 스스로 그린 작품으로 주변에 선물을 하자, 직접 그린 그림이 들어간 부채라든지 하는 아주 사소한 것도 충분히 가치 있다, 고 말씀드리면 그때부터 다들 분명한 목표지점이 생기죠.”

평생 취미, 평생의 벗 곁에 둔 즐거움

일주일에 세 번, 강의를 하고 틈틈이 박씨 자신을 위한 공부도 해야 한다. 화요일은 온전히 자신을 위해 비운 날이어서 오전에는 서예를 하고, 오후에는 외국어를 배운다. 10월 1일부터 예술의전당에서 전시회를 열 예정이어서 요즘에는 전시회 준비로도 바쁘다.

“민화를 취미로 그렸을 때와 지금은 몹시 달라요. 책임의식이 생긴 거죠. 비로소 내 자신의 삶을 내 스스로 주도하게 된 거예요. 아들이 고3이었을 때, 민화가 취미였다면 계속 그릴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해야 할 일들이 있고, 민화 수업을 듣기 위해 약속한 사람들이 있으니 그럴 수 없어요. 제가 감기라도 걸리면 제 수업을 들으러 오시는 분들께 폐를 끼치게 되니 쓰러져서도 안 돼요. 그래서 운동하고 밥도 잘 챙겨먹어요.”

2년 전, 이제 장성한 두 아들이 ‘엄마도 엄마의 공간이 필요한 것 같다’고 의견을 내면서 지금의 이 공간이 생겼다. 인사동에 화실을 갖기 전까지는 집 안의 방 하나를 작업실로 썼는데 아무래도 집이다보니 주부로서 모두 손이 가야 하는 살림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주부가 자신만의 방 한 칸을 집안에 가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이렇게 오로지 민화를 그리고 생각하는 공간이 생긴 건 너무 감사한 일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래서 일주일에 5일은 꼭 이 화실에 온다. 외부 강의 등으로 시간이 전혀 나지 않는 날에도 예외는 없다. 잠깐이라도 이 공간에 와야 마음이 편하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여기엔 ‘민화작가 박현희’의 그림들이 곳곳에 보인다. 이미 태어난 그림들, 그리고 곧 태어날 그림들.

민화는 한때 벽장 문, 가리개, 병풍 등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만큼 흔해서, 무명의 화가들이 같은 그림을 똑같이 모사한다고 해서 예술성이 낮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서나 볼 수 있다는 사실은 그 발전 가능성과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는 얘기가 되기도 한다.

요즘 박씨의 고민은 기본 민화의 특징은 살리되, 유연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들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다. 그의 화실에서는 채도를 낮춰 더 곱게 느껴지는 파스텔톤 색감의 작품이 많이 보인다. 민화의 기본을 깨지 않으면서 민화에 대한 고루한 편견은 깨는 작품들이다. 민화는 속성으로 배울 수 있는 장르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슬로우’ 정신이 필요한 분야다. 그래서 평생의 취미이자 벗으로 곁에 두기에 좋다. 그런 벗을 만나게 돼 박씨의 삶은 늘 즐겁다.


▎칠순을 바라보는 안월성 할머니는 경력 6년 차의 어엿한 바리스타다. 그가 일하는 성남의 카페에서 일하는 8명의 바리스타와 종업원은 모두 환갑을 넘긴 ‘흰머리 청년’들이다.



할머니 바리스타 안월성 씨 - “ 노인만 오냐고요? 천만에, 젊은 손님 많아요”

안월성(68) 씨는 몇 달 동안 도서관에서 콕 박혀 살았다. 두꺼운 교재를 보고 또 보고, 외우고 또 외웠다. 자신의 인생에서 바리스타 자격시험을 볼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안씨는 예순여덟 나이에 당당하게 필기시험을 통과했다. 세 번째 도전 끝에 거둔 결실이라 더 값졌다.

“식구들이 공부할 시간을 만들어줘서 고맙죠. 아무리 외워도 알 듯 말 듯 기억이 자꾸 안 나니까 남보다 더 많이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필기시험을 보던 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뛰어요. 이제 곧 실기시험을 보게 되는데, 요즘에는 한 잔 한 잔 커피를 만들 때마다 마치 시험 보는 기분이에요. 오늘 아침에도 손님이 카푸치노를 시키셨는데, 거품이 너무 곱고 부드럽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말 한마디에 힘이 나고 그래요.”

안씨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성남에 위치한 ‘베이커리&카페 마망’이다. 카페 뒤에 있는 베이커리 생산장에서 14명, 그리고 카페에서 8명이 일하는데 모두 환갑이 넘은 분들이다. 대부분이 전업주부로 평생을 살았던 이들이고, 안씨도 그중 한 명으로 카페 마망에서 일한 지는 벌써 6년째다. 노인복지관이나 문화센터 등을 이용해서 스포츠댄스라든지 이것저것 다양한 프로그램을 듣다가 마망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던 것이다. 마망은 바로 옆에 위치한 수정노인복지관에서 노인일자리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카페다.

지난 2005년 카페 마망이 문을 열었을 때,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들이 빵과 커피를 만드시는 곳 정도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지금 카페 마망은 이름 그대로 그 골목, 그 동네, 아니 우리 모두의 ‘엄마’처럼 자리해 있다. 마망 1호점의 성공 스토리를 바탕으로 2호점도 문을 열 수 있었다.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문닫는 카페가 줄을 잇는 요즘, 카페 마망이 승승장구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안씨는 마치 큰 비밀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저희가 사실 값이 싸요. 그래서 학생들도 많이 오거든요. 근처에 도서관도 있고 해서요.”

맞는 말이었다. 마망에서는 아메리카노가 1500원, 생과일 주스가 3천 원 정도의 저렴한 가격에 팔린다. 빵과 함께 한 끼 식사를 충분히 해도 부담스러운 가격이 아니다. 요즘 들어서 카페 마망은 부담 없는 가격이나 어르신들이 운영한다는 수식어를 빼고도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다. 자식과 손주에게 먹일 것을 손수 만드는 마음으로 최대한 좋은 재료를 쓰기 때문이다. 1호점의 경우 카페에서 커피를 만들고 빵을 굽는 분들은 모두 여성이지만, 배달하는 할아버지들이 따로 있다. 3만 원어치 이상을 주문하면 어디든 직접 배달된다. 전화 한 통으로 갓 구운 빵을 받아볼 수 있는 것이다.

“할머니들이 하는 곳이라 손님도 할머니만 있을 것 같죠? 아니에요, 젊은 손님이 대부분이에요.”

마망은 동네 어른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지만, 먼 곳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도 적지 않다. 사랑은 다시 사랑으로 뻗어나간다. 올해 초부터는 조손가정(부모 없이 조부모와 손자녀가 사는 가정)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이곳은 원래 경로당 건물이었고, 저 통유리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녹음도 없었다. 처음엔 빵이 계속 생산되는데, 그게 다 팔리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때는 모두가 빵을 들고 경로당 바로 위 공원에 올라가서 직접 판매를 하기도 했다. 할머니들이 밖으로 나가 홍보지도 돌렸다. 마망의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카페가 3년 정도 되었을 때부터였다. 근처 공원에 구름다리가 생기고, 원래 있던 나무들도 부쩍 자라 숲을 이루게 되었다. 지금은 카페의 어느 자리에 앉아도 그 앞의 녹음을 누릴 수 있다.

할머니들은 굽고 할아버지들은 배달

마망의 할머니들은 모두 수준급의 커피를 만든다. 수정노인복지관에서는 한국능력개발원을 통해 바리스타 교육을 체계적으로 진행한다. 안씨는 동료들과 아침 9시부터 3시, 혹은 오후 3시부터 9시의 스케줄로 교대로 일하는데, 모든 할머니가 이미 전문가다운 솜씨를 발휘한다.

카페의 8명 할머니 중에서 4명은 바리스타 실기시험까지 통과했고, 남은 4명은 필기를 통과한 후 실기시험을 준비 중이다. 다시 실기시험 얘기가 나오자 안씨는 수줍게 웃는다. 긴장감도 역력해 보인다. 그러나 확실히 즐거운 표정이다. 안씨에게 커피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물었더니, ‘정성’이라는 흔한 대답 대신 이런 답이 돌아온다.

“속도. 그리고 레시피대로 꼭 따르는 거예요.”

커피의 세계는 광대했다. 알면 알수록 또 보였다. 원두콩 하나하나가 다르다는 사실도 배웠다. 그 세계에서 안씨는 정말 인생 2막을 시작하고 있었다. 동네 스타가 된 것도 같다. 지하철이나 마트에서 종종 사람들이 알아본다. 카페 할머니라며 살갑게 다가오는 학생들도 많다. 지금 안씨는 그동안 한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시간을 살고 있다.

2014년의 카페 마망의 목표는 모든 직원이 바리스타 자격증을 실기까지 취득하는 것이다. 그럼 2015년의 목표는? “3호점이죠.” 수정노인종합복지관에서 노인일자리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김미정 과장의 말이다. 김미정 과장은 빵의 세계가 이렇게 넓은지, 빵 종류가 이렇게 많은지, 자신도 카페 마망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제빵 강사의 지도 아래 주기적으로 새 레시피를 연구한다. 차도 마찬가지다.

“일자리는 종합선물세트예요. 일을 통해 돈도 벌고, 그 자체로 여가활동 역할도 되고, 제2 사회 참여도 되죠. 어르신들이기때문에 당연히 한계가 보이는 부분이 많아요. 그렇지만 한계가 없다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저도 배우고 있어요.”

김 과장은 어르신들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전문직에 몸담았던 어르신들일수록 은퇴 후에 ‘내가 어떻게 저런 걸 해?’라는 폐쇄적인 사고를 갖고 계신 분이 더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 2막 아닌가. 밖으로 나오면 세상은 또 새롭게 펼쳐진다. 카페 마망, 이곳의 오븐 안에서 부풀어가는 것은 단지 빵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일 수도 있다. 이곳의 커피 한잔이 말하는 것은 단지 커피 이상의 무언가일 수도 있다.


▎평생 전업주부로 살아온 주민순(가운데) 씨는 노년에 접어들면서 깊어진 ‘잘 노는 방법’의 고민이 새 인생의 출발점이 됐다. 주씨는 서울시 인생이모작센터를 통해 공원놀이지도사 교육을 받았다. 서울숲은 그의 일터이자 놀이터다.



공원놀이지도사 주민순 씨 - “나이 먹고도 일이 있어 화장하는 기분 아세요?”



주민순(63) 씨는 올해 초부터 서울시 인생이모작지원센터를 통해 공원놀이지도사로 일하고 있다. 20년 넘게 식당을 운영했지만, 그 일을 접은 뒤로는 무료한 일상이 이어졌다. 또래의 친구들을 만나거나, 구청에서 하는 문화프로그램들을 듣곤 했는데, 집 안에 혼자 있지 않으려고 애쓰긴 했지만 뚜렷한 목표지점은 없는 동선이었다.

주씨에게 또렷한 목표가 생긴 건 지난봄. 지인이 보내준 휴대전화 메시지를 받고 나서였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인생이모작지원센터’에 관한 내용이었다. 주씨는 인생이모작지원센터를 찾아가 서류를 제출하고 왔다. 그때만 해도 뭐가 정말 바뀔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냥 시에서 하는 거라니까 믿고, 서류나 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연락이 왔다. 주씨는 ‘정 담은 정원’이란 프로그램에서 공원놀이지도사 교육을 받았다. 사회적기업 숲자라미에서 위탁교육을 했고, 소양교육과 직무교육, 시연과정을 거쳐 모두 다섯 명의 공원놀이지도사가 서울숲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이재 씨는 원래 숲해설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숲과 놀이는 닮은 구석이 있다.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이다. 공원놀이지도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그는 사실 놀이를 지도해주기보다는 놀이의 효용을 일깨워주는 역할이 더 크다고 말한다. 놀이는 지도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노는 것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만 놀이를 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는 것이 공원놀이지도사의 역할이다.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지만 몸을 쓰는 놀이라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사고에도 대비해야 한다. 구급함과 의료용구도 챙겨두었다. 청소년을 위한 생태프로그램들은 있지만 노년층을 위한 프로그램은 전무했던 탓에 처음에 공원놀이지도사의 개념을 잡고 세부 구성을 짤 때 참고할 만한 사례가 없었다. 자문을 구할 만한 곳이 아무데도 없어서 결국 맨땅에 헤딩하듯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갔는데, 그 결과 지금은 외국에서도 자문을 구하러 찾아오는 성공사례가 되었다.

“대부분 지금까지 전업주부로 살아오신 분이라서 대중 앞에 서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처음 사나흘은 앞에 나와서 아랫배에 힘을 주고 미소를 짓고 자기소개를 하는 것에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이를테면 ‘안녕하십니까, 공원놀이지도사 누구입니다’라는 말을 자신있게 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했어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은 몹시 에너지가 넘치시죠. 어떤 분은 교사가 평생 꿈이었는데, 이렇게 놀이선생님이 된 것에 너무 기뻐하셔서 온라인 모임의 닉네임도 ‘선생님’이에요.”

이 활동을 시작하기 전, 주씨는 집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때면 그냥 싱크대 앞에 서서 밥을 물에 말아 후루룩 마시다시피하며 먹곤 했다. 그러나 이 일을 시작한 뒤로, 식사 방식부터 달라졌다. 아침을 잘 챙겨먹기로 한 것이다. 잘 먹어야 그만큼 잘 활동할 수 있으니까.

‘잘 노는 방법’ 고민이 새 인생의 출발점 되다

“일을 시작하고서 가장 좋은 건 화장을 한다는 거예요. 제 스스로도 화장을 하고, 옷도 갖춰 입고 보면 기분이 달라지거든요. 딸이 요즘 맨날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느냐고 묻는데 ‘놀 궁리하러 다닌다’고 했어요. 저한테는 놀 궁리가 곧 살 궁리거든요.”

서른 살 딸에게는 아직 비밀이라고 했다. 힘들다고 걱정할까 봐 말을 안 했다는 것이다. 딸이 11월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결혼을 하고 나면 이야기할 계획이라고한다. 주씨는 항상 딸이 시집을 간 후에 내가 혼자 남으면 어떻게 놀아야 할 것인가, 그것이 마음속 깊은 고민이었다.

영화도 잘 보러 다니고 청계천을 걷기도 하고 등산도 주기적으로 해왔던 것은 즐거워서이기도 하지만 혼자되는 데 익숙해지기 위한 ‘노후준비’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일이 노는 것이 되어버렸다. 주씨는 신이 난다. 그런 주씨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덩달아 신이 난다. 비밀인데, 이 글을 딸이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주씨는 이렇게 말했다.

“알면 할 수 없고요, 어차피 좋은 거잖아요! 제 인생에서 이 일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거든요.”

놀이는 전래놀이, 생태놀이, 민속놀이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중 공원놀이지도사들이 진행하는 것은 전래놀이다. 20여 가지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고, 지금도 프로그램 연구는 계속된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흥미를 느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 관건이다. 회의를 하다 보면 다섯 명의 공원놀이지도사 머릿속에서 아이디어가 줄지어 나오는데 대부분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다.

공기라든지 굴렁쇠라든지 비석치기라든지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맞아, 그땐 그렇게 했었잖아” 하는 말들이 연이어 나온다. 경험이 가장 큰 자료인 셈이다. 물론 현대에 맞게, 안전하게 변화도 시도한다. 비석치기는 돌이 아닌 콩을 주머니에 넣어 하는 식이다. 당연히 서울숲을 찾는 노년층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어린시절에 대한 향수 때문일 것이다.

주씨가 맡은 프로그램은 투호다. 그가 투호의 유래를 간단히 설명하며 놀이하는 법을 알려준다. 주씨는 투호를 잘 하시는지, 혹시 백발백중하는 비법이 있는지 묻자 그는 연습은 엄청 한다며 웃었다.

“저도 잘 못해요. 어렵더라고요. 그렇지만 비법은 집중력이 아닐까요? 한 번이라도 성공한 분들께는 화살이 목표지점에 들어갔을 때의 감각을 기억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주죠.”

주씨는 지금 자신의 삶에서도 성공했을 때의 감각을 기억하고 더듬는 중이다. 투호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감각은 지난 과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아직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미래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긍정적인 마인드인 것이다. 행복지수는 놀이문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주씨를 통해 이 숲을 찾는 사람들은 덩달아 즐거워진다.

숲해설가 이재 씨는 필자에게 배롱나무를 아느냐고 물었다. 서울숲에서도 몇 그루의 배롱나무를 만날 수 있다. 배롱나무는 화무십일홍이란 말을 모른다. 7월부터 9월까지, 거의 100일 가까이 꽃을 피우고 있어서 나무계의 백일홍이란 별명도 갖고 있다.

“그 배롱나무가 인생 2막을 여는 사람들과 닮았지 않습니까? 두 계절을 사는 배롱나무의 꽃이 2막을 준비하는 어머니들께 어울리죠. 요즘 같은 100세 시대에 인생도 두 번의 계절을 거치니까요. 꽃말은 ‘내 과거를 생각한다’예요. 과거의 나를 돌아보며 새로운 나를 준비하는 시기에 와 닿는 나무죠.”

201407호 (201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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