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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예수의 위대한 질문⑬ -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요한복음 20장 15절) 

철저한 남성 중심의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인물 막달라 마리아, 과연 그녀는 예수의 수제자였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에게 죄 사함을 받은창녀 이미지로 오늘날까지 기억된다. 그러나 복음서에 기록된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 그녀는 예수가 가장 신뢰한 예수의 수제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스도교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다음으로 중요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사람일까?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연기한 모니카 벨루치.(왼쪽) / 사진·중앙포토
그리스도교가 2천 년 전에 시작되어 처음에는 서양문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리스도교는 예전의 영향력은 사라졌다.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과 그 당시 시작된 고고학, 특히 고대 근동지방에서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고대 이집트·메소포타미아·힛타이트 등 고대 문자들이 판독되어 그때까지 그리스도교만 독점했던 지적인 특권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사회적 영향력을 포기해야만 했다.

21세기 현대인들에게는 다윈의 ‘진화론’이나 물리학자들의 우주기원에 관한 빅뱅이론, 그와 연관된 다양한 이론이 훨씬 감동적이며 상식적이다. 과학자들의 설명과 노력이 <창세기>에 등장하는 우주창조나 인간창조 이야기보다 우리 마음을 압도적으로 사로잡는다. 우리가 성서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이유는 성서해석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예전과 같이 그 사회의 지적인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서 더욱 그러하다.

성서에 담긴 이야기는 과학적인 사실이나 역사적인 사실이라기보다 저자가 속한 신앙공동체에 정체성을 주기 위한 신앙고백이다. 과학과 고고학의 등장으로 성서가 이전의 위상을 잃게 되자 일부 그리스도교인은 ‘근본주의’로 무장하여 성서 내용을 믿지 않는 다른 그리스도교인들을 ‘이단’으로 낙인 찍고 자신들만 유일하게 신을 바로 믿는 사람들이라고 시대착오적으로 그들만의 담을 쌓고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고 있다.

오늘날 이 근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설교하고 배운 종교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믿는지, 자신들에게 설교한 종교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종교구성원들 스스로가 자신이 신봉하고 있는 ‘진리’를 깊이 묵상할 능력이 없어 그 사회의 시급하며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속한 종교는 도태될 뿐만 사라질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리스도교가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스스로 제시하고자 한다면, 극복해야 할 여러 문제 중에 하나가 바로 ‘여성의 지위’에 관한 문제다.

예수의 부활 ‘여자’가 처음 알았다


티치아노가 그린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남루한 겉옷에 가슴을 드러낸 모습은 유혹과 죄악을 상징하며, 배경의 바람 부는 광야는 속죄의 울림을 뜻한다. / 사진·중앙포토
종교는 인간의 권력에 대한 욕심이 가장 잘 보존된 집단이다. 오늘날 종교 수장의 절대다수가 ‘남성’이다. 특히 유일신 종교가 그렇다. 여성이 유대교 랍비나, 그리스도교 추기경, 혹은 이슬람교 이맘이 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 종교들은 지금부터 아주 오래전, 적어도 1400년 이전에 발생한 종교로 편협하고 극단적인 남성중심주의적 사회에서 발생했다. 더욱이 이 종교들을 유지하기 위한 교리는 남성들에 관한, 남성들에 의한, 남성들을 위한 내용이다.

1세기 그리스도교가 발생할 당시에도 이런 갈등이 있었다. 예수의 행적을 담은 네 가지 복음서에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그 사도권에 대한 미묘한 투쟁이 있었다. 예수는 시몬의 이름을 ‘반석’이란 의미를 지닌 ‘베드로’로 개명하면서 수제자로 임명한다. 그러나 예수의 삶에서 가장 긴박하고 중요했던 십자가 처형 과정과 부활의 현장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남자 제자가 무서워서 모처에 숨죽여 기다리며 좌절하고 있을 때 혜성처럼 등장한 여인이 있다. 그 여인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다. 그리스도교가 남성주의적인 비정상에서 탈피하기 위한 희망을 제공한 여자는 바로 예수의 최측근 제자인 막달라 마리아다.

예수의 제자들 중 막달라 마리아만큼 독립적이며,강인하고, 무엇보다도 예수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이해한 제자는 없었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은 복음서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과 그들이 제정한 교리에 근거한다. 막달라 마리아에 관한 초기 기록들을 조사해보면, 그이미지와 평가가 다양하다.

서구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마르다와 나사로의 한 형제자매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예수의 발을 눈물로 씻고 값비싼 향유를 바른 죄많은 여인이다. 예수는 이런 극진한 대우를 받고 그녀가 범한 용서받을 수 없는 일곱 개의 죄, 성서에서 ‘일곱 귀신’이라고 표현한 죄를 몸에서 내쫓고 용서했다. 예수 간절히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그 옆에서 울고 있었다. 이 중요한 순간에 그를 3년간 따라다니던 ‘남자’ 제자들은 모두 무서워 잠적했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살로메와 또 다른 마리아, 즉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예수가 숨을 거둔 그 끔찍한 장소에서 예수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그 후에 막달라 마리아는 그녀의 동료들과 함께 예수의 시신이 천으로 감겨 무덤에 안치되고 그 무덤의 입구가 커다란돌로 닫히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마리아, 살로메, 그리고 ‘또 다른 마리아’는 예수를 따라다니며 그를 보살피던 자들이다. 여기서 ‘보살피다’라는 표현은 음식을 제공하고, 쉴 장소를 제공하고 필요한 생필품을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제공했다는 의미다. 이들은 예수의 장례를 완성하기 위해 향료를 가지고 예수의 무덤에 갔다. 그러나 그들은 입구의 바위가 열려 있는 빈 무덤을 발견한다. 어떤자가 나타나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만, 그는 살아나셨습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입니다.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십시오. 그는 그들보다 앞서서 갈릴리로 가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십시오.”

만일 그리스도의 기원이 예수의 부활에서 시작된다면, 그 부활의 복음은 예수의 공식적인 제자들이 아닌 이 여자들에게 맨 처음 전달되었다. <마가복음>은 이 여인들 중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부각시킨다. 예수가 부활한 후 맨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났다. 그녀가 자신들의 신분이 들킬까 봐 골방에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가 부활했고 그를 목격했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믿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이다.

가공된 막달라 마리아의 이미지


프랑스 국립박물관 연합 조각전의 막달라 마리아 조각상. 몸을 감싸며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인상적이다. / 사진·중앙포토
우리가 알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는 중세시대 여러 전설과 복음서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하나로 만드는 과정에서 탄생한 인물이다. 중세시대 막달라 마리아 이야기는 서로 다른 4가지 복음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하나로 엮어 만들어낸 가공인물이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는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와 같은 인물이 되었다. <요한복음> 저자는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를 ‘주께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은 여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빠다’라고 묘사한다. <누가복음>에 죄 많은 여인에 관한 기록이 등장한다.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살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잡숫고 계신 것을 알고,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등 뒤로 발 곁에 서더니, 울면서, 눈물로 그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랐다.”

중세 초기에 이미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마르다의 여동생과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죄 많은 여인이 동일한 인물이 되었다. 더 나아가 <누가복음> 8장 2절에 등장하는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이전에 등장한 마르다의 여동생이자 죄인과는 한 인물이 되었다. 이 여인은 예수의 발을 향유로 닦았을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가 로마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기 전, 그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과 동일시된다.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예수께 다가와서는, 예수께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는데, 그 머리에 부었다.”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분개하자 예수는 여인을 두둔하며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치르려고 한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특히 이 시기에 막달라 마리아는 성적으로 문란한 여인, 더 나아가 창녀가 된다. 막달라 마리아는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이 된다. 예수는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간음하다 잡힌 여자’와 같은 여인으로 해석한다. 교황 그레고리 1세(기원후 540∼604년)는 이런 막달라 마리아 상을 고정시킨 인물이다.

복음서의 막달라 마리아는 ‘중요한 인물’


제럴딘 하비엘이 그린 <과거, 현재, 미래와 대화하는 막달라 마리아> (213×244㎝, 캔버스에 유채, 2013). / 사진·중앙포토
교황 그레고리 1세는 다음과 같이 설교(<교황 그레고리 1세 설교> 33번)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누가가 죄인이라 부르고 요한은 마리아로 부른 여인입니다. 마가는 그녀를 일곱 귀신이 나간 여인으로 묘사합니다. 이 일곱 귀신은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형제 여러분! 이 여인은 금지된 성적인 행위를 위해 자신을 몸에 향수를 뿌리기 위해 이 향유를 사용해왔습니다.

그녀가 부끄럽게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사용한 것을 이제 칭찬받을 만한 방식으로 하느님께 바치고 있습니다. 그녀는 욕망의 삶을 살아왔지만 이제는 고해성사와 회개로 세상욕심이 눈물로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얼굴을 내보이기 위해 치장했지만, 이제는 자신을 머리카락으로 눈물을 닦습니다. 그녀는 입으로 자신을 자랑하였지만, 이제는 주님의 발에 입 맞추고 자신의 입을 대속자의 발 위에 갖다 댑니다. 그녀는 모든 쾌락을 자신을 위해 사용했지만, 이제는 스스로 불태웠습니다.”

중세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신학 교리는 ‘고해성사’였고 막달라 마리아는 고해성사를 통해 새로운 인물이 된 죄인으로 최적의 인물이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오늘날까지 예수를 사랑함으로써 용서함을 받은 창녀 이미지로 강하게 남아 있다.

니코스 카잔차스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마틴 스콜세지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나 멜 깁슨의 <그리스도교 수난>와 같은 영화들, 그리고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과 같은 뮤지컬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오랫동안 그리스도교 전통이 만들어낸 막달라 마리아로 묘사되고 있다.

그렇다면 복음서에 등장한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은 어떤가? 복음서를 면밀히 살펴본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아마도 예수가 가장 신뢰하고 예수의 미션을 가장 잘 이해한 수제자일 가능성이 많다. 그녀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다음으로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한 여인이다. 아니,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제자였다. 복음서에서 그의 이름은 예수의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더 많은 12번 이상 언급된다. 막달라 마리아의 행동은 1세기 가부장적인 팔레스타인 유목문화를 감안하면 더욱 충격적이다. 예수의 삶에서 가장 충격적이며 중요한 순간에는 늘 그녀가 있었다. 예수가 로마 병사에 의해 처형당한 골고다 언덕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 밑에 있었다. 또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인물이다. 이런 복음서 기록은 그 후 그리스도교 역사 내내 남성 중심적인 그리스도교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남자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의 부활을 알리자, 그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우선 자신들의 초라함 때문에 자괴감에 빠져 이 놀라운 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3년 동안 가족도 버리고 예수를 메시아로 여기고 따라다녔다. 예수가 자신이 십자가형으로 처형된다는 예언을 하자, 예수를 이해할 수 없어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회유하였다.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자신들과 함께 승리하는 메시아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예언하자 베드로가 그럴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한다. 예수는 그에게 말한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는 자신이 수제자로 선택한 베드로를 ‘사탄’으로 불렀다. 물론 ‘사탄’은 ‘악마’라기보다는 ‘예수의 미션을 방해하는 자’란 의미다.

복음서들 중 가장 나중인 기원후 110년경에 기록된 <요한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예수의 무덤을 방문한 자가 오직 막달라 마리아 한 명이었다. 그녀는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이 옮겨져 있는 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뛰어가 이 사실을 알린다. 이들은 예수가 없어진 사실을 무덤 안에 들어가 확인하였지만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전한다. 이들이 다시 숙소로 돌아간 후, 무덤 밖에서 홀로 남아 울다가 부활한 예수와 만난 사람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다. 그리스도교의 탄생에 가장 중요한 순간인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한 자가 막달라 마리아였다.


예루살렘 성지순례 중 예수가 못 박힌 11지점에 해당되는 곳. 예수 옆에서 무릎 꿇고 우는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다. 어머니 마리아는 옆에 서 있다. / 사진·중앙포토

‘막달라’를 ‘위대한’이란 뜻으로 풀이하기도

1세기 팔레스타인은 남성만이 인간으로 대접받던 시절이다. 이 시절에 막달라 마리아가 중요한 인물로 언급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특히 2∼3세기를 거쳐 신약성서를 그리스도교 경전(經典)으로 확정하는 사람들은 모두 남성 교부였다. 막달라 마리아는 당시남성 교부들도 그 내용을 삭제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상상할 수 있다. 4세기 최고의 신학자 어거스틴은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들의 사도”라고 불렀다.

네 개의 복음서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마리아’라는 이름을 지닌 여인들과 구분하기 위해 ‘막달라’라는 칭호를 붙인다. 헤롯왕(기원전 37∼기원전 4년 치리)의 부인 이름이 ‘마리암네’였기 때문에 1세기 가장 흔한 팔레스타인 여인 이름은 ‘마리아’였다. ‘막달라’라는 칭호는 갈릴리 바다의 해변 마을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히브리어 ‘미그달’, 아람어로는 ‘마그달라’라는 명사에 ‘요새; 성벽’ 혹은 ‘위대함; 훌륭함’이란 의미가 있어 영어로 번역하자면 Mary the Great, 즉 ‘위대한 마리아’ 정도로 번역된다. 팔레스타인의 가장 흔한 여인의 이름 ‘마리아’로 출발해 ‘위대한 마리아’가 되었다는 건 뭔가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4개 복음서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까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유일한 예외가 <누가복음> 8장 1∼3절이다. “그 뒤에 예수께서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그것을 복음으로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예수와 동행하였다. 또한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도 동행하였는데,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

여기서 ‘일곱 귀신’이란 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질병을 의미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열두 제자 틈에 있었다. 이 여인들은 예수가 복음을 전하러 다닐 때 먹고 자는 문제를 경제적으로 도와준 재력 있는 이들이었다. 예수를 따라다니던 12명의 제자는 요즘 말로 하면 실업자들이 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능력이 없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삶과 그리스도교 발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 장면, 즉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소, 예수의 장례 그리고 예수의 부활의 순간을 모두 목격하는 유일한 여인이다. 주목할 점은 그때까지 따라다니던 예수의 제자들이 자취를 감춘 점이다.

제자들의 부재는 ‘막달라 마리아’의 등장으로 대치되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그 순간을 목격한 인물로 이름이 언급된다. 네 복음서 가운데 <누가복음>만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대신 ‘갈릴리에서 그를 따라온 여인들’로 대치한다.

그 후 아리마데 요셉이 예수를 매장하는 장면을 목격한 두 여인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인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다. 이 대목에서 <누가복음>은 다시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면 때 사용한 어구인 ‘갈릴리에서 그를 따라온 여인들’로 표현한다. <요한복음>에서는 니고데모만 목격자로 등장한다.

예수의 시신 찾으려 끝까지 애쓴 주인공은?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막달라 마리아 혼자서 빈 무덤을 발견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주간의 첫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문을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 여자는 뛰어서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로 가서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무덤으로 갔다.

둘이 함께 뛰었는데,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뛰어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 그는 몸을 굽혀서 고운 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그를 뒤따라와서 무덤 안으로 들어가보니 고운 베가 놓여 있었고, 예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은 그 고운 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한 곳에 따로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예수의 빈 무덤을 보고도 예수가 부활한지 모르고 제자들은 일상으로 다시 돌아갔다. 예수의 사라진 시신을 찾으려고 끝까지 애쓴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밖에 없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누누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알려주었지만, 제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지점에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신비를 알려고 노력한 유일한 제자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인간의 최선의 잠재력을 보여주었던 예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울다가 다시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본다.

그 안에는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고, 또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가 본 이 천사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성서에는 종종 천사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을 천사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구약성서 <창세기> 18장에 아브라함에게 3명의 천사가 나타났지만, 아브라함에겐 그저 3명의 나그네일 뿐이다. 아브라함은 이들이 떠날 때까지 천사인 줄 알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막달라 마리아도 이들을 천사로 인식하지 못하고 무덤을 지키는 동산지기로 생각했다.

두 천사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묻는다. “여인아, 왜 우느냐?” 이 ‘여인’이란 명칭은 예수가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가나의 혼인잔치와 십자가상에게 부르던 호칭이다. 상황을 인식하지 못했던 막달라 마리아는 두 천사에게 다시 묻는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이렇게 말하고 그 두 천사에게 돌아섰지만 두 명의 천사가 한 명의 예수가 되었고, 그 한 명이 예수인 줄을 알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다.

<창세기> 18장에서도 아브라함을 방문한 세 명의 천사가 한 명의 주(‘야훼’)로 변해 아브라함에게 말했지만 아브라함이 이 사실에 놀랐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이 장면에서도 두 명의 천사가 변해 한 명의 예수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하지만 그녀는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자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한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막달라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화를 낸다.

“여보세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 갔거든, 어디에다 두셨는지를 말해주십시오. 내가 그분을 모시겠습니다.” 예수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길래 막달라 마리아가 알아보지 못했을까? 예수를 3년 동안 따라다니며 온갖 수발을 다 든 막달라 마리아가 왜 예수를 볼 수 없었을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장면을 그린 위대한 화가가 있다. 이 화가의 도움으로 그 이유를 찾아보자.

수많은 화가가 이 결정적인 순간을 그렸다. 특히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화국출신 화가 티치아노(1488∼1576)는 이 순간의 핵심을 포착한다. 예수를 일생 동안 따라다녔던 막달라 마리아는 실의에 차 예수의 무덤으로 갔지만 그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티치아노는 이 그림에 ‘놀리 메 탄게레(Noli me tangere)’라는 라틴어 제목을 붙였다. 번역하자면 “내게 이렇게 매달리지 말아라!”다. 너무 매달리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제 그만 하지!” 정도로 번역할 수도 있겠다.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절망과 고뇌에 찬 막달라 마리아는 낯선 동산지기가 그녀 옆에 서있는 줄 알았다.

티치아노 그림에 나타난 사랑의 의미


영화 <다빈치코드>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가 결혼한 것으로 설정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 사진·뉴시스
티치아노는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내용 대부분을 생략한다. 무덤도, 천사도, 후광도 없다. 성서의 장면을 유추할 수 있는 물건은 예수의 손에 들린 곡괭이와 막달라 마리아의 손에 있는 향유뿐이다.

그 동산지기가 ‘마리아야!’라고 부르자 마리아는 ‘랍보니’라고 깜짝 놀라 소리친다. 이 아랍어 단어를 번역하자면 ‘나의 스승님!’이다. 신비한 사건을 목격하고 외친 한마디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제 눈이 아니라 귀로 예수를 인식한다. 그녀가 본 그 사람은 무덤을 관리하는 동산지기였으나,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그 동산지기가 예수임을 깨닫는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하나님 맙소사!’ 혹은 ‘어찌 이런 일이’ 정도 아닐까. 막달라 마리아는 이 장면이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하고 싶어 예수를 만지려 손을 뻗는다.

그러자 예수가 말한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내 아버지에게 올라가지 않았다. 너는 나의 형제들에게 가서 말해라. 이제 너는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내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내가 올라간다.”

티치아노는 이 성서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한다. 그는 이 장면의 배경을 1세기 팔레스타인이 아닌 베네치아의 평화로운 교외로 선정하였다. 티치아노는 막달라 마리아를 당시 베니스 귀족 여인처럼 머리장식과 하얀색 실크 상의와 그 위에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으로 그렸다. 티치아노는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라고 말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 순간부터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한 예수를 인간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로 사랑해야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시신에 바를 향유병을 들고 왔다.

그러나 그녀 앞에는 죽음을 초월한 예수가 나타났다. 그의 몸은 창백하고 그의 손과 발에는 십자가 처형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는 빛나는 흰색 천으로 만든 옷을 감고 있다. 이 옷은 부활의 상징이다. 그는 막달라 마리아가 알던 과거의 예수가 아니다. 막달라마리아도 새로운 예수를 인식하도록 변해야 한다.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를 책망과 연민이 섞인 얼굴로 내려다본다. 막달라 마리아가 뻗은 손을 피해 그의 몸은 활처럼 휘어졌다. 그러면서도 그의 상체는 그녀에게 다가간다.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한다. 예수는 육체적인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는 이제 전혀 새로운 영적인 사랑의 대상이다. 막달라 마리아의 손을 보면 이런 이중적인 모습이 극적으로 숨겨져 있다. 예수를 만지기 위해 뻗은 손이 더 나가지 못하고 멈춰 있다. 이들은 마치 발레를 하는 것처럼 몸으로 반응하고 있다. 티치아노는 인간적인 사랑과 신적인 사랑을 절묘하게 엮어 전체 구도를 기획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배경으로 한층 깊이를 더한다. 막달라 마리아 쪽 배경은 인간의 삶이 배어 있다. 무릎을 꿇은 마리아의 등선 가운데 서 있는 나무의 오른편이 인간세계다. 그녀의 몸 뒤쪽에는 농가가 있고 한 농부가 개와 함께 좁을 길을 내려오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의 눈은 예수가 서 있는 영적인 세계를 갈망하고 있다.

예수 쪽 배경은 사뭇 다르다. 뒤쪽은 성스럽고 목가적인 이상향이다. 예수 뒤 목초지는 양으로 가득차 있다. 예수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선한 목자다. 그 뒤로는 하늘보다 더 파란 언덕들이 굽이굽이 펼쳐진다. 예수는 자신의 희생으로 하늘보다 더 하늘 같은 천국을 지상으로 내렸다. 그는 얼마 후 바로 이곳으로 승천할 것이다. 예수의 몸은 바다와 농가가 만나는 선으로 이어진다. 그림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멀리서 떠오르는 해가 농가를 서서히 비추고 있다.

티치아노는 일상의 공간과 영적인 공간이 서로 융합된 신비한 세계를 그린다. 티치아노는 이 성서 이야기의 본질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에게 가졌던 인간적인 사랑을 신적인 사랑, 즉 영적인 사랑으로 변하는 순간을 표현하였다. 그는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인간의 육체적인 사랑이 영적인 사랑과 함께 존재하며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티치아노의 이 그림은 그리스도교에게 묻는다. 육체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이 분리될 수 있는가?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특별한 관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순간을 그린 티치아노의 <놀리 메 탄레게> (91×109㎝, 캔버스에 유채, 1512년경, 런던 내셔널갤러리소장). / 사진제공·배철현
이 결정적인 순간을 풀어줄 또 다른 단서가 있다.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등장하는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를 그리스 원전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다. 라틴어 번역 ‘놀리 메 탄게레’에는 이 장면이 의도한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그리스 원전에서 이 구절은 ‘메 무 하프투(me mou haptou)’이다. <요한복음> 저자는 ‘메 무 하프투’라는 그리스어 문장에서 여러 가지 숨겨진 의미를 전달한다.

먼저 동사 ‘하프투’이다. 이 동사는 그 대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기 위해 손가락으로 느끼기 위해 ‘만지는’ 행위가 아니다. ‘하프투’는 ‘휘어잡다; 쥐다’라는 의미로 대상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손으로 휘어감는 행위다.

‘하프투’는 ‘하프토’라는 동사의 특별 명령형이다. 고전 그리스어 동사형에는 두 가지 명령형이 존재한다. 하나는 단순 명령형으로 ‘지금 이 순간에 금지하는’ 명령형이다. 예를 들어 수업시간에 떠드는 학생에게 선생님이 “떠들지 마”라고 하는 것은 지금 떠들지 말라는 명령이다. 그러나 고전 그리스어에는 또 다른 명령형이 있다. 이 명령형은 지속적인 금지명령이다. 예를 들어 ‘거짓말 하지 마라!’와 같은 명령으로 우리가 지속적으로 결심을 통해 지켜야 할 명령이다. 성서의 십계명은 모두 이 지속적인 금지명령으로 되어있다.

<요한복음> 저자는 바로 이 지속적인 금지명령형 ‘하프투’를 사용하였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단순히 떨리는 손으로 살짝 만진 것이 아니라 예수를 온 힘을 다해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는 그녀에서 “더 이상 나에게 이런 식으로 매달리지 말아라!”고 말한 것이다.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도록 허락했지만, 더 이상 매달리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메 무 하프투’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와의 특별한 관계를 전한다. 막달라 마리아의 위상은 100년 전부터 발견되기 시작한 소위 영지주의 문서들 특히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 <빌립복음서>에서는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이 영지주의 복음서들에서 수제자는 막달라 마리아다. 그녀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오히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이 영주주의 문서들은 2세기부터 이미 남성 중심의 로마 그리스도교의 근간을 위협하는 ‘이단’으로 치부되었고 지난 2천 년 동안 그리스도교는 여성이 교회의 리더가 되지 못하도록 모든 장치를 마련해놓았다. 21세기에 그리스도교가 다시 한번 인류문명사에 중요한 역할을 원한다면 이런 장치들은 과감히 제거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읽어봐도 막달라 마리아가 수제자인 것 같다.

201410호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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