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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리포트 | 거식과 폭식의 정신건강학 - 왜곡된 미의식이 부른 신경증 ‘국민 난치병’ 부를라! 

10∼20대 젊은층 여성 20%가 섭식장애 앓아… 개인 의지 문제 아닌 난치성 질병으로 인식해 전문적 치료 받아야 

윤재원 월간중앙 인턴기자




거식증 환자는 현저하게 말랐음에도 살이 찔까봐 두려워하며 식사량을 제한한다. 양념장에 들어가는 후추의 양까지 기록하며 섭취 열량에 집착하기도 한다. / 사진·i22
#1 거식증(拒食症)을 앓는 고등학생 A양(18세).

그녀는 한때 몸무게가 56㎏까지 나간 과체중을 앓았다. 평소 성격이 소심하고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편이라, 친구들로부터 ‘뚱뚱하다’는 놀림을 받은 뒤로 몸무게를 빼기로 결심했다. 한번 체중감량을 시작하니 가속도가 붙어 39㎏까지 내려갔다. 같은 또래의 평균치 몸무게를 훨씬 밑도는 저체중이었다. 이번엔 거꾸로 주변에서 말랐다는 얘기를 듣게 됐지만 웬일인지 살을 더 빼고 싶었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부터인가 이상한 증세가 생겨났다. 다이어트 강박증이다. 적게 먹거나 아예 굶는 날이 잦은데도 체중이 늘까 두려워 늘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다. 양념장에 들어가는 마늘이나 후추의 양까지도 기록하며 섭취열량에 집착한다.

식사를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급식시간 전에 학교를 조퇴하는 날도 잦아졌다. 수련회 갔을 때는 아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을 정도다. 살이 찔 것 같은 기름진 음식과 과자를 보면 불안감이 더 증폭된다.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지나친 기대에 따른 부담감도 거식증세를 키운 요인 중에 하나다. A양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너는 내가 못 이룬 꿈을 꼭 이뤄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고 자랐다. 법관의 꿈을 이루지 못한 아버지의 바람대로 명문대 법대 진학을 목표로 스스로를 다그치며 공부했다. 그 결과 특목고에 진학했지만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너무 많고 교실 분위기도 너무 경쟁적이라서 스트레스가 많아졌다. 성적을 잘 받아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시험 전날에는 아예 음식을 먹지 않을때가 많아졌다. 배가 고프니 몸에 힘이 없고 무기력증에 시달린다. 머리카락도 많이 빠지고 얼마 전부터는 생리도 끊겼다. 감정을 조절하기도 힘들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쉽게 화가 나고 어린아이처럼 몇 시간씩 울기도 한다.



#2 폭식증(暴食症)을 앓는 대학생 B씨(23세).

그녀는 정상 체중을 가졌지만 대학에 입학한 뒤로 자신이 공부하는 패션학과 특성상 주변에 마른 체형의 친구가 많아 스스로를 그들과 비교하며 자괴감이 심해졌다. 다이어트를 시작했지만 배고픔을 참기가 힘들어 많은 음식을 한꺼번에 먹었다가손가락을 집어넣고 구토를 한 것이 발단이 됐다. 한번 토해보니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면서 살도 찌지 않고, 적게 먹고 운동해서 살을 빼기보다 쉽다는 요령이 생겼다. 그때부터는 아예 하루에 대여섯 번씩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는 날도 생겼다. 폭식이 점점 심해지면서 체중이나 몸매에 대한 불만이 생겼고 더 살이 쪄서 몸이 망가지리라는 두려움도 커져갔다. 스트레스가 가중되니 또다시 폭식을 반복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섭식장애를 고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정상식을 먹으면 다시 체중이 늘어난다는 두려움 때문에 폭식과 구토를 반복한다.




폭식증 환자는 한꺼번에 많은 음식을 먹고 체중 증가를 피하려고 일부러 구토를 하거나 이뇨제를 복용하기도 한다. 폭식증이 지속되면 생리 불순·식도염·심장 질환에 노출되며 2세의 건강에도 나쁜 영향을 준다.(위 사진은 연출된 것임) / 사진·중앙포토
거식증은 치사율 10~20% 달하는 심각한 질병

가족과 주변 친구들은 그녀가 이렇게 매일 먹고 토하기를 반복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식사 중이나 식사 직후에 한참동안 자리를 비우는 걸 이상하게 여기거나 못마땅하게 여길 따름이다.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을 때면 맘놓고 음식을 먹고 음식물을 토하지 못해 식사 약속을 잡기가 부담스럽다. 예전에는 친구 만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지만, 요즘은 학교가 끝나면 먹을 걸 잔뜩 사 들고 집에 틀어박히는 날이 잦다.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면 비참해지고 우울해져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욕을 하는 날도 있다. 구토를 반복하다 보니 식도가 상해서 목에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입에 손가락을 자주 넣다 보니 손등에는 낙인처럼 흉터까지 생겼다. 매번 그만둬야지 하면서도 쉽게 포기할 수가 없다. 이렇게 살다가 평생폭식증을 떨쳐내지 못할까 두렵다.

‘거식증’과 ‘폭식증’을 이르는 섭식장애 환자 수가 급격히 늘어간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통계에 따르면 2008년 1만940명에서 2012년 1만3002명으로 5년 만에 19%가량이나 증가했다. 이들 섭식장애 환자 2명 중 1명은 10~30대의 젊은 연령층이며, 여성이 남성보다 4배나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청소년건강행태온라인조사 결과 국내 여성 청소년 중 거의 절반이 다이어트 경험이 있으며, 그중 거식증·폭식증의 섭식장애를 경험한 이가 20.1%(2012년 기준)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섭식장애(攝食障碍, eating disorder)’란 거식증(신경성식욕부진증)과 폭식증(신경성 폭식증)을 통칭하는 용어다.

앞서 두 사례에서 보듯 거식증은 몸무게가 늘어나는 것을 비정상으로 두려워하고, 날씬한 체형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증상이다. 이에 반해 폭식증은 자신을 실제보다 살이 찐 것으로 인식하는 등 왜곡된 생각으로 섭식장애를 앓는 질병이다.

거식증 환자의 경우, 극단적인 체중감량을 지속하는 것이 특징이다. 90%가 여성으로, 영양이 가장 많이 필요한10~20대에서 주로 나타난다. 현저하게 마른 체형인데도 살이 찔까 두려워하며, 강박적으로 운동을 하거나 식사량을 제한하는 증세를 보인다. 이들 거식증 환자는 대부분 자신이 심각한 저체중(체질량지수 BMI 18.5 이하, 160㎝ 여성의 경우 47㎏ 미만이 저체중)임을 인정하지 않고 치료받기를 거부한다. 그 결과 거식증은 치사율이 10~20%에 달할 정도로 심각한 병이다. 거식증이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저절로 사라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치료받지 않고 방치하다 증세가 악화되면 죽음에 이를 수 있다.

폭식증 환자의 경우는 반대로 배고픔을 느낄 때 폭식을 한 후 이로 인한 체중 증가를 우려해 일부러 구토를 하거나, 하제와 이뇨제 복용, 과도한 운동 혹은 굶기 등의 행위를 취한다.

대개 빠른 속도로 많은 양의 음식을 먹으며, 음식이 떨어지거나 배가 불러 신체적 불편함이 극심해질 때에야 먹기를 그만둔다. 거식증 환자와 달리 자신이 섭식장애라는 것을 인지하며, 체중은 정상이거나 정상을 약간 넘는 경우가 많다.

폭식증의 전형적 특징으로 자신감 저하 및 사회활동 위축, 체형과 체중에 대한 지나친 중시,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극단적인 사고방식과 행동 등이 나타난다. 폭식 및 구토 행위를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겨 숨기기 때문에 함께 사는 가족이나 배우자도 수년 이상 증상을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식사 후 구토를 위해 갑자기 사라지거나 음식을 감춰놓고 먹는 등의 이상행동을 한다. 섭식장애의 원인은 심리적, 대인관계적, 생물적, 사회문화적 요인 등 다양하다.

먼저 심리적 요인에는 자신감 부족·완벽주의 성향·우울·불안·분노·공허감, 외로움 등이 있다. 대인관계에서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거나 체중이나 체형과 관련해 놀림을 받은 적이 있는 경우, 부모가 자녀의 성취에 과도한 기대를 보이는 경우 등이 포함된다. 생물적 요인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섭식장애 환자들에게서 배고픔·식욕·소화 등을 관장하는 뇌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이 발견됐으며, 발병 요인의 50%가량은 유전성으로 알려져 있다.

섭식장애는 특히 사회·문화적 요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 질병이다. 우리나라는 체중조절이 자신감을 얻거나 주위의 선망을 받는 수단이며, 마른 사람을 자기 조절에 성공한 사람이라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대중매체는 날씬함을 아름다움으로, 비만을 추함으로 여기는 분위기를 조장하는데 일조한다. 이에 환자는 마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감을 얻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다이어트를 실행한다.

진범섭 헬스커뮤니케이션학회 연구원은 ‘대중매체의 영향력’과 ‘집단 순응성’을 섭식장애의 증가 요인으로 꼽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영어권 문화에 비해 주변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고 그에 순응하는 경향이 강하다”라면서 “특히 외모에 민감한 10~20대 연령층은 매스컴을 통해 왜곡된 미(美)의 기준을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미국·유럽과 달리 섭식장애를 질병으로 보는 인식이 부족하다. 섭식장애는 개인의 의지에 따른 문제가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희귀·난치성 질환이다 / 사진·중앙포토
매스컴이 섭식장애 조장한다

섭식장애가 초래하는 부작용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듯하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거식증의 경우 영양부족으로 인한 골다공증·무월경·심혈관계 이상 등의 부작용이 생길 수 있고,심할 경우 뇌 손상을 부르기도 한다. 폭식증 환자도 무월경 및 각종 신체 합병증에 노출될 위험이 높다.

특히 가치관이 완전히 형성되어 있지 않고 외모에 관심이 많은 십대 청소년들이 거식증·폭식증에 가장 취약한 연령층이다. 평생의 건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춘기를 전후해서 섭식장애를 겪게 되면 회복하기 어려운 골밀도 손상이나 성호르몬 부족 문제를 겪을 수도 있다.

또한 사춘기는 지적·정신사회적 성장에도 매우 중요한 때라서 이 기간을 섭식 장애로 보내고 뒤늦게 치료를 시작한다면 환자의 지적 기능이나 사회성에도 장애를 유발할 수도 있다. 섭식장애를 앓는 여성들은 2세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섭식장애가 심할수록 신생아의 선천성 기형·유산율·태아 성장장애의 위험이 커진다는 것이다.

거식증과 폭식증은 공통점이 있다. 체중 증가에 대해 지나치게 불안해하며, 자신이 실제보다 뚱뚱하다고 여기는 등 신체상이 왜곡돼 있고, 체중과 체형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해 그로 인한 자존감이 크게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사람에 따라 섭식장애 증상이 거식증, 폭식증으로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개인마다 유전적으로 뇌의 음식에 대한 만족도를 관할하는 부분이 다르게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어떤 사람은 음식에서 심리적인 만족감을 더 쉽게 얻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폭식을 하게된다. 반면 음식을 봤을 때 더 불안해지므로 오히려 먹기를 꺼리는 사람도 있다.

거식증, 폭식증에 취약한 성격 유형도 다르다. 예민하고, 완벽주의적이고, 자기비하의 성향이 강한 사람은 거식증에 걸릴 확률이 높다. 반면 폭식증 환자는 충동적이고 극적인 성격이거나 불안정한 기질의 소유자에게 많이 나타난다.

대부분의 사람은 섭식장애를 질병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섭식장애로 판단되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율리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대중매체의 보도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거식증의 경우, 극단적으로 뼈밖에 안 남은 환자만 보여줘 일반인들에게 판단의 기준을 모호하게 하는 식이다. 김 교수는 “국내에서는 젊은 여성 5명 중 1명이 섭식장애를 앓고 있을 정도로 흔한 질병”이라며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실제보다 살이 쪘다고 인식한다. 지나치게 외모를 중요시하는 사회 풍조가 섭식장애 환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 사진·i22
개인 의지에 맡기기보다 전문적 치료 받아야

섭식장애에 대한 사회적인 정보나 교육도 전무한 실정이다. 미국의 경우 매년 2월 마지막 주를 ‘국가섭식장애인식주간’으로 지정해 신체의 왜곡에 잘 대처하고 섭식장애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행사를 진행한다. 학교에서도 보건수업을 통해 섭식장애와 관련한 정보를 가르친다. 김율리 교수는 “비만의 위험성에 대한 교육은 지나치게 과장돼 젊은 청소년들이 과민반응을 보이는 반면 섭식장애는 오히려 유병율이 높은데도 질병이라는 인식이 낮아 문제다”며 “섭식장애에 대해 정부와 학교 차원에서 올바른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섭식장애는 지속기간이 평균 6년에 이른다. 그것이 질병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섭식장애가 의료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치료받기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섭식장애는 평균 지속기간이 6년이나 돼 스스로 치유하기도 어렵다. 임형택 자하연 한방정신과클리닉 원장은 “폭식과 구토의 증상을 개인의 의지에 달린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며 “그것이 질병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전문적인 치료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섭식장애의 치료법에는 인지행동치료, 약물치료, 가족치료가 있다. 환자는 인지행동치료를 받음으로써 왜곡된 생각을 교정하고 섭식장애에서 빠져나오는 법을 배우게 된다. 약물치료는 여건상 인지행동치료가 어려운 경우 시행한다. 세로토닌계 약물을 통해 폭식증상을 50%까지 줄일 수 있다. 가족치료는 환자의 회복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족들이 병에 대한 이해와 대처방안을 교육받고, 치료과정에 동참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섭식장애 환자의 치료가 의료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치료받기가 쉽지 않다. 거식증, 폭식증으로 인한 합병증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만 오히려 가장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한 섭식장애 자체는 건강보험은 물론 사보험에서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섭식장애 환자의 한 달 외래치료비는 100만 원, 입원치료비는 300만~400만 원에 이른다. 희귀, 난치성 질환은 산정특례 대상으로 치료비의 90%를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지원하는데, 섭식장애는 희귀난치성 질환임에도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한다. 환자와 가족 전체가 정신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고통까지 겪게 되는 것이다.

김율리 교수는 “이제 섭식장애를 산정특례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병율이 3%로 흔치 않은 데다 사망률이 10%에 달하고, 한 번 앓게 되면 뇌 손상 때문에 회복하기 어려운 질병이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섭식장애 같은 만성적 질환에 한 달에 몇 백만 원씩 계속 치료비로 쓸 수 있는 집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반문한다. 돈이 없으면 기본적인 치료조차 받을 수 없는 환자들을 위해 섭식장애 관련 건강보험정책이 시급하게 정비돼야 할 시점이 도래했다.

201410호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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