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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인터뷰 | 대우車 매각협상 주역 김석환 전 대우차 사장의 격정토로 - “경제 논리에 따랐더라면 워크아웃·매각은 없었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 나선 관료들 기업에 이중잣대 들이대… ‘세계경영’ 완성 직전에 매각돼 미국 GM에 돈방석 안겨 

글 박성현 월간중앙 취재팀장 사진 오상민 기자

김석환 전 대우자동차 사장은 외환위기 당시 수출만으로도 회사의 회생은 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8월 26일 국내 출간된 <김우중과의 대화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15년 전 대우그룹 해체 타당성을 둘러싼 논쟁을 야기한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경제학과 교수가 집필한 이 대담집에서 외환위기 당시 대우그룹 해체가 자연스런 시장의 선택이라기 보다는 의도된 정책의 산물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외환위기 원인 진단과 해법을 놓고 김 전 회장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한국 경제관료들이 돈줄을 묶고, 대우에 부정적인 시장분위기를 조성해 대우를 부실로 몰아 갔다는 것이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워크아웃 과정에서도 경제관료들의 ‘의도’와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말한다. “경제관료들이 나를 제거 하려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다고 믿는다”라고까지 얘기할 정도다. 한마디로 대우 해체는 기획됐다는 것이다.

당시 구조조정 작업을 진두지휘했던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 등은 “늘 해오던 얘기”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이 전 위원장은 “(김 전 회장이) 그간 해 오던 얘기와 다르지 않다. 대우가 정권에 의해 기획 해체됐다는 주장엔 동의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강 전 수석도 “만약 흑막이 있었다면 정권이 바뀐 뒤에 터졌을 것”이라며 “그런데 시빗거리로 표면화된 적이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런 와중에 김석환 전 대우자동차 사장(71)이 9월 초 <월간중앙>에 인터뷰를 자청하고 나섰다. 자신이 대우자동차 유동성 악화에서부터 미국 제노럴모터스(GM)로 매각되기까지 대우의 대표로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며 당시의 일화를 공개했다. 1975년 대우에 입사한 그는 1995년 대우아메리카 법인 대표에 발탁되는 등 대우그룹에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동남아시아 금융위기가 촉발된 1997년 2월 김우중 전 회장의 부름을 받아 대우차 재무·기획 담당 부사장 겸 전략기획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2000년 10월 대우자동차 사장으로 승진한 그는 2002년 10월까지 대우차 사장직을 이어갔다. 따라서 1998년 GM과 대우차의 합작 협상, 대우차―삼성차 빅딜 협상, 1999년 대우차 워크아웃 신청, 2002년 GM의 대우차 인수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대우차 해체 과정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다고 하겠다. 그는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출판 과정에도 참여했다. 김 전 회장의 주장과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공하는 실무팀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김우중 전 회장의 건강은 어떠한가?

“한동안 수술을 받았지만 지금은 건강이 좋다.”

사람들과 장시간 대화하는 데 문제는 없나?

“그렇다.”

김 전 사장에게 대우차는 어떤 회사였나?,

“6년 여 몸담던 산업은행에서 대우로 옮긴 때가 30대 초반이다. 정신없이 수출하고 일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애국심 같은게 근저에 꿈틀거리는 조직이었다. 젊은 패기로 인생을 걸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성공하기 직전에 난파당했다. 우리가 그렸던 밑그림이 산산이 다 부서지고 생산기지만 달랑 남아 있으니…. 그래도 대우차는 참 좋은 회사였다.”

그래도 다른 전직 대우 CEO들처럼 17조원에 달하는 추징금 징수는 당하지 않았다.

“그렇다. 하지만 분식회계 과정에는 나도 관여했었다. 민사상 손해배상 금액이 수백억 원에 달하는 통에 지금은 빈털터리가 됐다. 내 명의로는 통장도 하나 없다.”

“GM은 처음부터 대우차에 눈독들였다”

대우차가 2002년 결국 매각됐다. 세계경영을 표방한 대우차가 무리한 투자로 인해 유동성위기와 부실을 초래했다는 게 기존 시각인데, 생각이 다른 건가?

“김우중 전 회장이 한 말이 있지 않나? 대우자동차는 GM에 거의 공짜로 넘어갔다고. 1990년대 말 GM은 대우차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GM은 대우차 때문에 중국에서 성공하게 된다. 2000년대 상하이GM 매출의 70%를 차지한 베스트셀러카 ‘뷰익 엑셀(Buick Excelle)’은 우리가 개발한 누비라의 이름만 바꾼 것이었다. 상하이GM의 성공에 기여한 ‘쉐보레 스파크(Chevrolet Spark)’도 대우 마티즈의 후신이다. 상하이GM이 중국시장 1위 자동차회사로 발돋움한 데에는 대우차가 핵심적 역할을 했다. 대우의 기술력과 잠재력을 증명하는 사례다. 이런 회사를 어떻게 부실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의 설명은 대우그룹 해체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이던 이헌재 씨가 2012년 발간한 회고록 <위기를 쏘다>에서 대우차가 워크아웃 당시 “기술 자립이 어려웠다”는 입장을 밝힌 데 대한 반론이다. 이헌재 전 금감위원장은 이 책에서 “김우중 대우 회장은 GM과의 전략적 제휴에 모든 걸 걸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애초부터 불가능한 협상이었다. 대우의 오랜 협력합작사였던 GM은 대우의 사정을 김 회장만큼 잘 꿰고 있었다”, “조건을 바꿔가며 질질 끌더니 1998년 7월 협상을 깨고 만다”는 등 1998년 GM과 대우의 합작협상 결렬 과정과 책임소재를 설명했다.

이헌재 전 위원장 말대로 김우중 전 회장은 GM과의 제휴에 모든걸 걸었나?

“솔직히 말해 우리는 GM 합작 협상이나 삼성과의 빅딜을 큰 기회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당시 대우는 국내에 150만 대, 해외에 100만 대 생산설비를 갖춰가는 중이었다. 삼성차는 연간 20만 대 생산하는 수준이라 이미 규모의 경제를 갖춘 우리 입장에서는 그리 큰 고려 사안도 아니었다. 이미 한 번 같이 일해 본 GM에도 굳이 매달릴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1997년 5월인가에 김우중 회장이 점심식사 자리에서 ‘GM이 우리에게 오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지나가는 말로 툭 던졌다. GM의 휴스 해외사업 총괄사장이 제의를 해온 걸 그때서야 알았다. GM과는 합작을 깰 때도 좋게 헤어졌기에 별 문제 없다고만 생각했을 정도였다.”


1 김석환 전 사장은 1999년 대우차 워크아웃 신청 이후에도 GM이 대우차 인수에 적극적이었다고 강조한다. 2 GM이 당시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 앞으로 보낸 인수의향서 사본.

그래서 어찌됐나?

“양측 간 사전접촉을 거쳐 1998년 2월 합작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그 뒤인 5월 군산 공장을 방문한 휴스 사장을 GM 대표단이 소형차 마티즈를 보고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1992년 합작 청산 이래 몇 년 만에 이런 차를 만들었으리라 생각도 못한 거다. 군산은 또 중국 바로 옆에 있어 수출 입지로도 매력적이었다. GM은 ‘이렇게 짧은 시간에 성공한 한 비결이 뭐냐’며 귀를 쫑긋 세웠다. 그해 하반기에 최종계약을 하도록 돼 있었는데 갑자기 정부 쪽에서 엉뚱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정부, 산업 현장의 실상 제대로 파악 안 해”

어떤 얘기 말인가?

“1998년 10월부터 대우차의 유동성이 나빠졌다느니, 회사채 발행을 제한한다는 등의 소문이 쏟아졌다. 그러더니 한국 사정에 밝은 GM이 급진전되던 협상을 어느 순간부터 늦추기 시작했다. 본계약도 차일피일 미뤘다. 정부는 그룹별 단자 한도액을 만들어 6개월 만에 줄이라고 압박했다. 대우조선·대우건설 등 대우 자산을 6개월 안에 팔아 빚을 갚으라고 압박했다. 사실 대우조선은 정부가 우리에게 떠넘긴 기업 아니냐?

우리가 인수한 뒤 1980년대에 적자 보는 가운데서도 계속 투자했고, 1980년대 말에 7200억 원을 들여 경영을 정상화했다. 당시 워낙 덩치가 큰 회사여서 선뜻 나서는 이가 없는 가운데 6개월 내 매각을 요구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게다가 수출금융(수출 주문 시 받은 환어음을 은행에서 할인, 현금화해주는 것)도 막혀버린 상태였다. 결국 대우차는 유동성 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워크아웃으로 직행하고 나중에 GM에 헐값에 매각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헌재 씨는 일국의 금감위원장으로서 우리나라 산업 구조조정을 총괄한 인물이다. 대우자동차에 대해 그렇게 모르고 구조조정을 지휘했다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2002년 대우를 인수한 GM이 반전의 계기를 잡았나?

“GM은 시종 대우차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중국 시장은 우리 차를 가지고 먹었다고 해도 빈말이 아니다. GM 관계자들도 아시아와 유럽에서의 성공의 핵심이 GM대우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우차의 경쟁력의 요체를 설명한다면?

“그 시절 대우차의 경쟁력은 중급 기술력에 있었다. BMW나 포르쉐 같은 첨단 기술이 아니다. 가격과 성능에서 충분히 통하는 중급차를 제작·공급하는 능력에서 앞서 나갔다. 당시 연산 200만대 생산 체제라는 규모의 경제를 갖춰 원가경쟁력도 있었다. 게다가 1995년부터 시작한 5개년 품질혁신 운동이 성과를 거두면서 중급차 생산 능력이 진일보하게 된다.

2000년 7월 미국 가 산출한 소비자 만족도에서 대우 레간자가 4위를 차지한 것도 이런 노력의 산물이다. 최고경영진에 몸담은 입장에서 말하자면 대우차는 한 단계 도약하는 과정에 진입해 있었다. 이런 회사니까 GM이 탐을 냈다. 자기네가 차 한 대를 개발하는 데 10억 달러가 든다면 대우는 3천억 원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싸게도 차를 만든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1999년 8월 청와대에서 열린 정·재계 간담회에 앞서 당시 김우중 전경련 회장, 이헌재 금감위원장(가운데)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우사태와 관련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 뒤 대우는 어떤 경로를 거쳐 GM 손에 들어갔나? 김우중 전회장은 대담집에서 ‘정부가 대우차를 잘못처리해서 한국경제가 손해 본 금액만 210억 달러(약 30조 원)가 넘는다’고 주장했는데.

“GM은 대우차가 워크아웃에 들어가고 한 달 뒤인 1999년 12월 비밀리에 이헌재 금감위원장 앞으로 인수의향서를 보냈다. 당시 50억~60억 달러의 기업 가치에 대우차를 인수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더해 미국의 포드차가 인수경쟁에 뛰어들면서 2000년 6월 대우차 첫 번째 국제 입찰에서 포드가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됐다. 대우에는 바람직한 경쟁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그해 9월 최종 제안서 제출을 앞둔 포드가 내부 사정 등을 이유로 돌연 인수를 포기하면서 대우차 매각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아 망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한국GM, 내수 하청기지로 전락할 우려

어째서 그런가?

“이제 공은 GM으로 넘어가는데 대우차 파는 데 급급한 우리 정부는 ‘GM 아니면 안 된다’고 다그치는 형국이었다. 결국 GM이 하자는 대로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고 당시 나는 대우차 대표로서 굴욕적인 협상에 2년 가까이 내몰렸다. 협상과정에서 ‘평생에 이런 협상은 두 번 다시 못한다’고 외쳤을 정도였다. 심지어 ‘당신네들 사기꾼도 아니고 이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며 따졌던 기억도 난다. 2002년 10월 GM은 13억 달러에 대우차를 인수하면서 현찰은 4억 달러밖에 내지 않았다. 불과 3년 전인 1999년 50억~60억 달러에 대우차를 인수하고자 했던 GM 아닌가? 피눈물이 났다.”

그러고도 GM에 매각된 대우차는 지금은 내수 하청기지로 전락해간다고 김 전 사장은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미국GM은 유럽시장에서 쉐보레 브랜드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유럽에 공급되는 쉐보레 차량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한국GM(GM대우의 후신)이 막막해졌다. 한국 GM은 연 65만 대 정도를 생산해 이 중 18만 대를 유럽에 수출해왔다. 다른 판로를 개척하지 못한다면 공정을 단축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않았나?

“2001~2002년 GM과 대우차 매각 협상을 할 때도 ‘대우’라는 브랜드와 해외 수출기반 확보에 전력을 기울인 기억이 난다. 그래서 R&D센터도 꼭 필요하다고 버텼다. ‘대우’라는 브랜드가 사라지고 해외 수출도 막힌다면 대우차는 단순히 GM의 생산 하청기지, 즉 OEM(주문자상표부착) 제품을 만드는 공장으로 남게 된다. 생산라인을 뜯어서 중국으로 옮기면 대우차를 그야말로 끝이라는 절박감을 갖고 협상에 임했다.

지금 보면 우려했던 징후가 나타난다. 1999년 2만2천 명 에 달하던 한국GM 직원 수가 지금은 1만7천 명밖에 안 된다. 일감이 달리는 군산공장은 주 3일 근무를 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가면 부평과 군산공장 규모는 계속 줄어 결국 내수시장에만 의존하는 옹색한 회사로 전락하게 된다.(김 전사장은 2005년 10월부터 2007년 9월까지 GM대우 사장을 지냈다.)”

당시 IMF 관리체제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정부도 나름대로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대우차와 관련한 정부의 공식입장을 살펴보자. 금융감독위원회는 1999년 11월 4일 ‘대우그룹 워크아웃 추진현황 및 향후 계획’을 밝혔다. 대우그룹 해체의 비망록에 해당한다. 이에 따르면 대우그룹은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축소경영에 나선 여타 그룹과 달리 세계경영을 기치로 한 투자확대를 멈추지 않은 상태에서 밀어내기식 수출과 이로부터 창출된 매출채권을 기반으로 운전자금을 조달했다. 매출이 큰 폭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외상 매출금 등 매출채권 급증에 따른 현금흐름은 오히려 크게 악화 되면서 자금부족 현상이 심화됐다.

대우는 이러한 자금 부족을 자산 매각 등 자구노력으로 조달하기보다는 CP(기업어음)·회사채 등 금융차입을 통해 조달했다. 신용경색 상황에서 회사채·CP에 의존한 대규모 자금조달은 높은 금융비용을 요구했고, 이에 따른 수익성 악화는 신용하락을 초래해 더욱더 비싼 금리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으로 번졌다. 1998년 7월 및 10월에 걸친 정부의 CP 및 회사채 보유한도 규제 조치로 차입 경영에 제동이 걸렸다.

차입금 증대를 통한 확대경영이 어려워지자 대우는 1998년 말부터 구조조정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그해 12월 삼성의 자동차와 전자부문 맞교환을 빅딜 대상에 포함키로 삼성과 합의했다. 이어 12월 28일 자동차, 중공업. 무역/건설, 금융서비스 등 4개 업종을 핵심업종으로 하고, 계열사를 대폭 축소(41→ 10개)하는 내용의 ‘재무구조개선약정’을 주채권은행과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1999년 상반기 대우그룹의 자구노력은 전체 계획(13조6천억 원)의 4.3%로 크게 미흡한 상황에서 대우의 구조조정 이행 가능성에 대한 시장신뢰가 급속히 저하됨에 따라 대우는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직면했다.


한국GM 창원공장의 ‘스파크EV’ 생산라인. 한국GM에서 생산하는 최초의 전기차다.

결국 대우는 1999년 7월 19일 계열사와 김우중 회장의 보유자산(10조 원 상당)을 담보로 내놓고 채권금융기관에 그 처분권까지 위임하는 구조조정 가속화 방안을 발표했다. 8월 16일에는 ㈜대우 무역부문, 자동차 부문을 제외한 전 계열사의 연내 매각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특별약정을 주채권은행과 체결하였으나 유동성 악화 상황은 지속됐다. 결국 대우는 1999년 8월 26일 12개 주력사에 대한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여기까지가 금감위가 1999년 11월 밝힌 대우그룹의 행로다.

“관료들이 미운털 박힌 김우중을 겨냥한 것”

정부가 제시한 통계나 정황을 보면 대우그룹에 대한 기획 해체설은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나?

“강봉균 당시 경제수석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그렇게 보고를했다. 대우가 1997년 말부터 1998년 9월까지 불과 9개월 사이에 차입금이 19조 원이나 불어났다고 말이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따져보면 본질을 이해하게 된다.”

어떤 본질을 말하나?

“1999년 11월 4일 금감위의 ‘대우그룹 워크아웃 추진현황 및 향후 계획’에도 나온다. 1998년 7월 및 10월에 걸친 CP 및 회사채 보유한도 규제 조치로 대우의 차입 경영에 제동이 걸렸다.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면서 국내 금융기관이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을 맞추고자 돈줄을 죄었다. 기업 자금이 은행 등 금융기관으로 빨려 들어가던 시절이다. 게다가 수출금융도 중단됐다. 부득불 대우는 CP·회사채 발행을 통해 자금을 충당했다.”

그 결과 부채가 늘었다는 말인가?

“1998년 7월 정부가 ‘CP 발행 한도 제한조치’를 통해 그룹별 한도액을 설정했다. 이미 대우는 한도를 초과한 상태였고. 그래서 회사채에 기댔는데 또 10월 들어 ‘회사채 발행 한도 제한조치’가 내려졌다. 우리는 이를 대우를 겨냥한 것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김우중 회장은 금융위기 극복방안을 놓고 정부의 금융관료들과 자주 충돌했다.

관료들이 IMF 프로그램에 따라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면 김 회장은 반대로 생산설비와 수출을 늘려 달러를 벌어들이는 게 위기 탈출의 첩경이라고 강조했다. 사이가 좋을 리 있나? 자동차 수출로 먹고 사는 대우차의 수출금융이 막힌 상태에서 추가 제제가 가해진 것이다. 며칠 뒤에 노무라증권이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금융권에서는 대우그룹을 상대로 자금회수에 나섰고…,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1월 강봉균 전 수석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앞서의 그런 보고를 한 것이다.”

수출환어음 할인(수출금융) 거부는 BIS 비율을 맞추기 위한 금융기관 자체의 판단에 따른 것 아닌가? 회사채 발행 한도제 시행도 국제 금융감독의 원칙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한구 당시 대우경제연구소장이 언급했듯이 정부가 현대를 살리기 위한 파격적 지원의 일부만 대우에 보탰다면 부도 처리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우 워크아웃 몇 개월 뒤 정부는 현대그룹 계열사에 회사채 신속인수제도로 40조 원 가까이를 지원하지 않았나? 수출금융까지 풀어주고 해도 IMF에서 별다른 말이 없었다.”

대우그룹이 무너진 혜택을 현대가 본 것 아닐까?

“대우가 무너졌으니 현대는 살려주자? 이건 정부가 가져야 할 객관적 태도가 아니다. 국가의 정책과 제도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당시 관료들은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서 대우만 망했다고 하는데 그건 절반의 진실만 말하는 것이다.”


대우그룹 전임 임직원 모임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 복도 벽에 걸려 있는 액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저서 제목을 옮겨 쓴 것이다.

당시 정부에 수출금융을 허용해달라고 요청을 했는가?

“여부가 있나? 수출금융이 막히면 금융기관 차입금이 늘어나니 속히 풀어달라고 노래를 부르다시피 했다. 정부가 구조조정을 하라고 기업을 하루가 멀다 하고 조이는 상황에서 제정신을 가진 기업이라면 9개월 사이에 19조 원의 차입금을 늘릴 수가 있겠나? 19조 원이 증가했으면 그 원인이 뭔가를 우리에게 물어나 봐야 하는 것 아닌가? 강 전 수석은 아무런 현장 확인도 없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현대그룹 지원 일부만이라도 대우에 줬더라면”

왜 그랬다고 생각하나?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IMF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통령까지 나서 한국의 구조조정을 다그치니까 그룹 하나쯤은 날려서 뭔가 일한다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게 아닐까? 그 틀에 우리가 걸려든 게 아닐까? 아주 묘한 상황이었다.”

당시 환율도 급등하고 해서 수출 기업은 돈을 벌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겠다.

“800원 하던 달러당 원화 환율이 한때 1900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환율이 1600원이라고 쳐도 수출기업은 돈벼락을 맞는다. 그런 대우자동차를 부실기업으로 낙인 찍었다. 대한민국에 산업정책은 없다는 말과도 같다. 사실 ㈜대우를 죽이는건 이해가 간다. 대우자동차를 도와주려고 돈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익 창출 체계를 다 갖춘 대우자동차를 부실기업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수출을 통해 흑자를 획기적으로 늘리면 기업의 신뢰 회복은 시간문제다.”

경제 관료들은 왜 반대로 갔다고 보나?

“좋게 말하면 산업 현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나쁘게 말하면 IMF 요구에 순종한 것이다. 한국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들여다볼 생각도 않고 IMF 관리체제만 맹신한 것 아닐까? 이 참에 기업을 하나 날려야 한다면 미운털 박힌 대우를 손보는 쪽으로 말이다.”

사실 대우차는 정부가 금융제재를 가하기 전부터 부실이 많아 위험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소문이 경제심리에 영향을 준 건 아닌가?

“그게 ‘아’ 다르고 ‘어’다른 것 아닌가? 예컨대 ‘대우가 앞으로 시간을 두고 구조조정 계획을 진행한다. 또 GM과의 협상이 진행 중이므로 좀 더 기다려보자’는 식으로 시장에 신호를 주는 것과 ‘대우는 차입이 늘고 부채비율이 높아졌다’고 경고음을 내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다. 일련의 흐름을 보면 대우차 유동성 악화가 경영의 실패인지 정부의 의도인지 가늠할 수 있지 않나?”

그 말이 맞다면 대우가 정부와 IMF에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 된다. 그런데도 언론과 학계, 시민단체들은 왜 가만히 있었을까?

“그때는 외환위기를 맞아 한국의 주류 사회가 IMF 처방을 따라야 한다는 쪽으로 휩쓸렸다. 전반적 분위기가 그렇게 조성됐고, 그렇게 안 하면 망할 것처럼 관료사회가 몰고 가기도 했다. 관료의 선택이라고 본다.”

2014년 혹은 몇 년 뒤 IMF 외환위기가 닥쳐 유사한 상황이 조성된다면 지금 관료들은 그들의 선배보다 더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대처하리라고 보나?

“내가 지금 관료들이 잘한다 못한다 평가할 입장은 아니다. 기업마다의 특수한 상황을 들여다보고 그에 맞는 처방을 과연 내릴 수 있을지는 솔직히 걱정이다. 과거보다는 잘 하겠지만 외환위기 당시의 공무원들이 다 승진해서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으니….”

15년 전의 일을 진위 규명하고 책임을 가리는 게 실효성이 있을까?

“정말 안타까운 게 대우는 공적자금 떼먹고 외화를 도피한 횡령집단 비슷하게 국민들에게 각인돼 있다는 사실이다. 또 IMF 외환위기라는 큰 고통을 이 나라에 안긴 주범의 하나로도 인식된다. 사실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급여도 제대로 못 받으면서 오로지 열심히 일만 했을 뿐이다. 회사를 살리고자 그렇게 동분서주했는데 이런 불명예가 어디 있느냐? 우리는 명예회복이 절실하다.”(이 대목에서 감정이 북받쳤는지 그의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201410호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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