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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 정치’의 사회심리학 - 폭언을 ‘합리적 행동’으로 보는 거대한 착각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한 ‘분노사회’의 병리 현상… 지역주의 정치구조를 온존케 하는 대통령 단임제, 소선거구제 보완해야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의 발달로 정치적 폭언의 대중화 시대가 도래했다.
소수의 일탈인가, 사회적 현상인가? 최근 남발되는 정치적 폭언이 도를 넘었다. 막말을 하는 사람도 국회의원에서 판사, 검사, 인터넷 팝캐스트 진행자, 익명의 네티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 가운데 정치인의 막말이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다. 한 여당 의원은 단식농성을 하는 세월호 유가족을 향해 “국회에서 저렇게 있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어디 뭐 노숙자들 있는 그런…”이라고 말했다. 장하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진상규명에도 나서지 않는 대통령, 당신은 국가의 원수”라고 표현했다. 왜 이들은 막말을 하는 걸까? 과연누구를 위한 막말일까?

한국 정치의 막말 파동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 대통령을 겨냥한다. 1998년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의 한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은 너무 거짓말을 많이 하여 공업용 미싱으로 입을 박아야 한다”는 막말로 파문을 일으켰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공격도 심했다. 한나라당 의원 24명은 연극 <환생경제>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빗댄 극중 인물 노가리를 향해 ‘육XX놈’, ‘개X놈’ 등 욕설을 퍼부었다. 당시 박근혜 대표는 박수를 치며 연극을 관람했다.

야당이 된 민주당도 폭언에 가세했다. 한 민주당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을 “쥐박이, 땅박이, 2MB”라고 비난했다. 다른 민주당 의원은 “새해 소원은 뭔가요, 명박 급사”라는 글을 리트윗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한 폭언도 줄을 잇는다. “태어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라는 ‘귀태(鬼胎)’ 표현까지 동원했다.

정치적 폭언은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확대되면서 사회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소수의 엘리트뿐만 아니라 누구나 막말을 전달할 수 있는 정치적 폭언의 ’대중화’가 발생했다. 한 인터넷 팝캐스트 진행자는 트위터에 “그 애비(아비)도 불법으로 집권했으니, 애비나 딸이나”라는 글을 올렸다. 반면에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는 노무현 대통령을 ’놈현’ 이라고 폄훼한다. 스스로 ‘일베충’이라고 부르는 회원들은 진보·여성·전라도·외국인을 집중적으로 조롱한다. 이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한 ‘분노사회’의 사회적 병리현상이다.

설화(舌禍) 개의치 않는 ‘그룹 싱크(group think)’

더 큰 문제는 병리 현상의 주인공이 정치권 스타가 된다는 점 이다. 2012년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은 김용민 씨는 “미국 라이스 장관은 강간해 죽이자”고 말한 사실이 드러났지만, 사퇴하지 않았다. 윤창중 씨는 ‘극우논객’라는 평가와 함께 ‘막말 종결자’라는 낙인이 붙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후 시민들의 애도를 “황위병이 벌인 거리의 환각파티”라고 비난했다. 2012년 대선에서 야당 후보를 지지한 정운찬·윤여준· 김현철 씨를 “정치적 창녀”라 매도했다. 대선 후 그는 청와대 대변인이 되었다. 정치권은 막말 인사의 출세 통로가 되었다.

정치인들의 교육 수준과 사회적 경력은 보통사람들보다 높다. 대부분의 유권자도 정치인들을 지도층으로 간주하고 높은 도덕 수준을 요구한다. 그런데 왜 정치인들이 보통사람도 사용하지 않는 폭언과 막말을 일삼는 것일까? 이에 대한 분석으로 첫째, 정치인 개인의 성격을 탓하는 관점이 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한 언론 칼럼에서 막말 정치인의 특징은 ‘튀어야 산다’는 생각으로 “오버를 잘한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는 욕구에서 막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막말 정치인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영웅주의 심리가 충족된다.

이런 시각은 자질론을 강조한다. 정치인이 평균 이하 자질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국회의원은 국정 운영을 고민하기보다 ‘언론플레이’를 통해 이름을 알리는 일이 정치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정치권에서는 웬만한 설화(舌禍)는 개의치 않는 ‘그룹 싱크(group think)’가 있다.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끼리만 소통한 결과, 그 의견이 전부인 것처럼 판단한다. 심지어 “자신의 부고 빼면 언론에 나올수록 좋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요새는 “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는 말이 있다. 많은 정치인은 사회문제의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돌출발언을 하거나 대선후보 줄서기에 몰두한다. 그러나 자질론은 왜 멀쩡한 사람도 국회의원이 되면 폭언을 일삼는지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둘째 관점은 정치인들의 폭언을 나름대로 ‘합리적 행동’이라고 본다. 지지층을 결속하려는 정치적 계산이라고 본다. 특히 대선 패배의 분풀이를 위해 대통령을 겨냥해 폭언을 퍼부으면 효과가 더욱 커진다. 야당은 대통령을 정조준하고, 이에 여당은 발끈한다. 광고 마케팅에서도 긍정적 이슈보다 부정적 이슈가 대중에게 강력하게 인식되기 때문에 ‘노이즈 마케팅’ 효과가 더 크다고 본다. 최근 SNS를 통해 이름을 알리려고 노이즈 마케팅에 나서는 정치인이 늘고 있다. 그러나 2012년 선거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막말 정치’가 반드시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최근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저서 <싸가지 없는 진보>에서 “싸가지 없는 언행은 파렴치한 짓을 하면서도 용감하고 의로운 행동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고 분석한다. 야당에는 “논쟁을 ‘싸가지 없기 경연대회’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정치인은 소신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소속 집단에 호소하는 수단으로 전략적으로 막말을 선택한다. 막말을 한 사람들은 소속 집단에서 “할 말을 했다”, “용기 있다”는 식으로 칭찬을 받는다. 심지어 ‘스타 정치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정치전략은 진보의 참담한 실패를 야기했다.


2012년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의원을 ‘그년’이라고 표현한 민주통합당 이종걸 의원을 규탄하는 새누리당 여성 당직자들.

책임과 윤리가 실종된 한국 정치

독일 철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일에서 나치당은 유대인과 공산주의를 적으로 규정하고, 온갖 증오의 언어를 퍼부었다. 테러·전쟁·대량학살은 언어를 통해 다른 사람에 대한 적대감을 선동하는 정치과정을 거치며 등장했다. 한국 정치에서도 폭력적 언어가 발생하는 중요한 토대는 적대적 정치구조다. 오랫동안 독재정권이 유지되면서 민주와 독재의 대립적 구도가 온존했는데,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지역주의 정당이 출현하면서 지역주의의 ‘정치화’가 발생했다. 지역주의 정당 경쟁은 지역갈등을 부추기는 한편, 적대적 정치를 강화했다.

한국의 적대정치는 권력구조 및 선거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통령제와 소선거구제를 통해 승자 독식 정치가 일상화되고 있다.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면 권력을 모두 장악하지만, 야당은 철저히 소외된다. 소선거구제에서 다수당은51% 의석을 차지하면 국정을 좌우하지만, 야당은 무력한 세력이 되고 만다. 승자독식 정치에서 여당과 야당은 서로 상대방을 완전히 적으로 간주한다. 선거는 ‘전부’ 아니면 ‘전무’의 전쟁이다. 이런 정치적 조건에서 소속 정당에 대한 맹목적 충성이 요구된다. 정치인의 신념과 책임은 사라진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구분했다. 베버는 “신념 윤리형 정치인은 자신의 신념을 좇아 행동하지만, 결과는 책임지지 않는다. 반면에 책임 윤리형 정치인은 신념에 매달리기보다 결과에 따른 책임을 중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 정치에는 신념 윤리도 책임 윤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정당의 이익과 자신의 당선만 중요하다. 생계형 정치인이 판치는 정치권에는 이념도 정책도 존재하지 않는다.


7월 4일 대구지역 71개 단체로 구성된 세월호참사 대구시민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새누리당 대구시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유가족에게 막말을 한 새누리당 의원들을 규탄했다.

네거티브 캠페인은 보수정당에 유리

1990년 3당 합당 이후 지역별로 ‘싹쓸이 정당’이 공고해지고,공천권을 장악한 정당 지도부의 권력이 강해졌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지적한 대로, 한국 정당은 대중 정당이 아니라 계파 정당이기 때문에 ‘패거리 정치’만 강화된다. 여당에는 ‘친박’과 ‘반박’만 있고, 야당에는 ‘친노’와 ‘반노’만 남았다. 스스로 보수와 진보를 자처하지만 무엇이 보수이고, 진보인지 말하지 않는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인신공격과 비방만 존재할 뿐이다. 2012년 대선의 최대 쟁점은 박정희 대통령의 ‘5·16 쿠데타’와 노무현 대통령의 ‘NLL 발언’이었다. 대안 제시보다 네거티브 캠페인이 부각되고, 미래를 위한 논쟁이 아닌 과거사 논쟁이 선거를 지배한다. 이러한 적대적 정치구조는 상대 정당에 대한 정치적 폭언을 부추기고, 막말 정치인이 정치생명을 계속 유지하게 만든다.

정치인은 막말을 통해 패거리 정치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강화한다. 우리 편이 폭언을 통해 상대방을 비난하면 환호하고, “바른말을 했다”는 쾌감을 느낀다. 막말 정치는 국가와 같은 큰 집단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작은 집단만 우선시하는 ‘부족 정치(tribal politics)’의 표현이다. 그런데 문제는 폭언 난투극에서 피해를 보는 쪽은 주로 진보 세력이라는 점이다. 미국 역사학자 토마스 프랭크는 미국 정치에서 네거티브 선거가 격화될수록 노동자의 투표 참여가 저하된다고 지적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정치적 무당파는 주로 청년세대이며, 대체로 진보성향이 강한 편이다. 폭언으로 얼룩진 정치권에 대한 환멸이 커질수록 진보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은 낮아진다. 네거티브 캠페인은 보수정당에 더 유리하다.

미국 독립 직후 토마스 제퍼슨은 “언론의 악의·상스러움·허위의식은 고쳐질 수 없는 악이지만, 우리의 자유는 언론의 자유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막말도 표현의자유 차원에서 허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미국 대통령에 대한 막말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하는 사례는 드물다. 하지만 한국 대선 시기에 박근혜 대통령 비방에 고소·고발이 잇달았다. “생식기만 여성”이라는 성적 비하는 정말 지나치다. 그렇다고 정부가 과연 막말을 규제할 수 있을까?

과거 군사정부 시절에는 ‘국가원수모독죄’가 있었다. 1967년 장준하 <사상계> 발행인은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독립 광복군에 총부리를 겨누었다”라고 말했다가 옥고를 치렀다. 5공 때에도 전두환 대통령을 비판한 재야인사들이 수난을 겪었다. 민주화 이후 여야 합의로 국가원수모독죄는 폐지됐다. 아무리 대통령에 대한 막말이 심해져도 국가원수모독죄를 부활하자는 새누리당 일부 의원의 주장은 시대착오적이다.


국회 본회의장에서도 여야 간 욕설과 고성, 막말을 쉽게 접할 수 있다. 2013년 11월 이우현 새누리당 의원이 경호실 관계자와 야당 의원의 몸싸움을 비판하자 야당 의원들이 항의하고 있다.

‘권력이 강제하는 타협’이 필요하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폭언은 정치권뿐 아니라 사회의 일상생활이 되었다. 이는 적대적 정치가 사회적 차원에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적대적 정치문화를 완화하기 위한 정치개혁이 시급하다. 현재의 대통령제와 소선거구제는 지역주의 정치구조를 온존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적대적 정치가 지속적으로 재생산된다. 비례대표제, 대선결선투표제, 합의민주주의를 강화해야 지역주의에 의존하는 분파정치 대신 복지·조세 등 전국적 의제를 중심으로 연합정치의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 프랑스 정치학자 모리스 뒤베르제가 말한 대로 “권력이 강제하는 타협”이 필요하다. 대화와 협상을 강제하는 헌법과 법률은 사회적 폭력을 제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른 중요한 문제는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줄여야 정치적 양극화도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 정치학자 제이콥 해커와 폴 피어슨이 <승자독식정치>에서 지적한 대로 중산층이 약해지고 정치적 극단화가 심해지면 “내용을 보지도 말고 무조건 반대하라”는 적대적 정치가 강화된다. 오바마 대통령에 대해 원색적인 비난이 난무하는 <폭스뉴스> 등 보수 성향 라디오 토크쇼 프로그램이 셀 수 없이 많다. 사회 양극화가 정치적 폭언의 기반이 된 것이다. 막말을 약화시키려면 두 가지 차원의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먼저, 불평등을 완화하고 복지제도를 강화하는 개혁이 필요하다. 모든 국민이 교육·의료·사회서비스의 보편적 혜택을 받는다면 공동체의식이 강화될 것이다. 실제로 보편적 복지제도가 발전한 북유럽 국가에서 시민의 신뢰 수준이 높고 사회적 자본도 풍부하다. 동시에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시민문화를 강화해야 한다. 무조건 남보다 나아야 한다는 지나친 경쟁주의 문화에서는 공동체 정신이 자라나기 어렵다. 실제로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이 <혼자 볼링 하기>에서 지적한 대로, 미국에서 사람들이 혼자 볼링을 하고 공동체가 와해되는 시기는 정치적 양극화의 시기와 일치한다.

이와 같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정치권의 역할이 중요하다. 미국 정치학자 E.E.샤츠슈나이더가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말한 대로, 정치는 갈등을 만드는 동시에 통합을 이루는 역할을 수행한다. 정당은 사회의 다양한 이익집단을 대표하면서 사회적 균열을 반영하고, 사회적 갈등을 정치의 장으로 끌어들인다. 동시에 정당은 대화와 타협의 정치적 과정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해결한다. 이런 점에서 정당은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사람들은 정치인들보고 “싸우지 말라”고 하지만, 정치인들의 주요 업무는 자신의 지지자를 위해 “싸우는 일”이다. 그래서 영어로 정당은 ‘파티(party)’이다.

그러나 모든 정치인이 지지자의 이익만 우선한다면 정치권은 이전투구의 장이 될 것이다. 정치인은 지지자의 이익과 함께 국가의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 정치인의 언어는 칼보다 날카로울 수 있지만, 결코 품위를 잃어서는 안 된다.

201410호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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