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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피어나는 집 | 양평 산중에 있는 박상호·이삼란 부부의 토담집 

“도시인들 불러와 산중음악회도 열죠” 

글 고혜련 월간중앙 기획위원, 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 사진 전민규 기자
낡은 흙집을 고쳐 단출한 살림집 차리고, 최신식 음악감상실 만들어 도시인을 불러들이고 자연과 벗하며 산다

좋아하는 음악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깊은 산중의 토담집. 시골집의 정취를 그대로 살리려고 되도록 옛 집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꾸몄다.
“여태까지의 제 인생 여정이 현재의 생활을 위한 준비단계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요즘에는 삶이 이렇게 행복하고 평화로울 수 있다는 걸 알아가고 있거든요.” 은퇴 후의 인생에 대해 이렇게 만족스러워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에게 이런 행복감을 안겨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연일 30℃를 웃도는 불볕더위에 이 산 저 산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아련히 메아리 치는 해발 680m의 통방산 자락에 아담한 토담집을 짓고 살아가는 박상호(54) 씨의 이야기다. 한때 CF감독으로 왕성하게 활동한 그는 이 산속의 호젓한 마을에서 아내 이삼란(52) 씨와 텃밭을 가꾸며 산다. 하지만 그들의 가슴을 들뜨게 하는 것이 또 있다.

박씨 부부가 유난히 좋아하는 클래식음악을 마음껏 들으면서 자연과 벗하며 사는 즐거움 때문이다. 도시에서라면 시간에 쫓기고 이웃의 눈치를 보느라 음악을 꽝꽝 틀어놓고 듣지도 못했지만 이곳 산속 마을이라면 거칠 것이 없다. 클래식음악 애호가인 박씨는 그토록 좋아하는 음악을 원 없이 듣게 돼 여한이 없다는 표정이다. 그는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 7년 전인 2007년 이곳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명달리에 새 보금자리를 지었다.

서울 도심에서 50㎞ 남짓 떨어진 거리지만 이 마을은 수십 개의 준봉이 겹겹이 도열해 있는 두메산골에 있다. 숲 속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민가가 보일 뿐 동네 전체가 산과 나무와 풀로 뒤덮인 생태보존지역이다.

박씨는 현역시절 제일기획·Q채널·삼성영상사업단 등에서 다큐멘터리와 CF 감독으로 활동했다. 젊은 시절부터 유난히 음악감상을 좋아해 일하면서도 언젠가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음악에만 취해 살고싶다는 목마름에 시달려왔다고 한다. 그는 20년 전부터 통방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친지와 내왕하면서 이곳을 은퇴 후의 터전으로 점찍었고, 12년 전에 1155㎡(350평)의 땅을 미리 마련해두었다.

봉숭아·과꽃 피는 소박한 시골마당


시골집의 푸근함을 느끼게 해주는 서까래.
풍광 좋기로 소문난 양평군 서종면이라고 하면 북한강과 남한강의 물길이 만나는 두물머리와 주변의 토속음식점, 펜션, 카페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곳 명달리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고개를 들어보면 수십 개의 빽빽한 산봉우리와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깊은 계곡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바깥세상의 일을 잊고 지내기에 안성맞춤이다. 오솔길 주변에는 옥수수와 도라지, 넝쿨식물들이 지천으로 자라고 있어 이곳도 농부들의 발길과 손길이 닿는 곳임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박씨는 당시 집터는 평당 50만 원에, 다 허물어져가는 초가집 네 채는 한 채당 1천만 원을 주고 구입했다. 땅주인과 집주인이 달라 집과 땅을 따로 매입했다. 박씨 부부는 이 낡은 토담집이 좋아 가능한 원형을 살려 1억5천만 원의 비용을 들여 수리했다. 소외양간을 현대식 부엌으로 고치고 지붕이나 마루바닥, 창문 등은 일일이 목수가 수작업으로 고치고 만들어 적잖은 비용이 들어갔다.

살림집 두 채는 각각 ‘ㄱ’자 형과 ‘ㄴ’자 형으로 서로 마주보는 모양으로 느슨한 ‘ㅁ’자 형을 만들고 있다. 한가운데에는 일반 한옥처럼 중간에 작은 뜰이 있는데 집안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마당에 펼쳐지는 자연정원을 내려다볼 수 있다. 봉숭아와 과꽃이 피는 정겹고 소박한 시골 마당의 풍경 그대로다.

바람벽은 붉은 황토를 발라 마감했고 낡은 슬레이트 지붕은 모두 걷어내고 새로 앉혔다.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 문이 달린 손바닥 만한 방은 하늘에서 땡볕이 내리쬐는데도 서늘한 기운이 감돌 정도로 시원하다. 눈에 들어오는 한적하고 느긋한 정경이 체감온도를 뚝 떨어뜨려주는 효과를 내는 듯하다. 특별한 가구나 장식도 없이 옛것, 낮은 것, 소박한 것, 꾸미지 않은 것들이 한갓진 아름다움을 준다.

산중에 있는 추억의 ‘명동 필하모니’


어느 때보다도 하늘이 높고 맑은 날, 박씨 부부가 야외에서 담소하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벽계천 계곡 옆에 자리한 박씨의 토담집은 사방으로 산에 둘러싸여 있다. 이 호젓한 집에서 아름다운 클래식음악을 틀어놓고 듣는다면 그보다 더한 ‘신선놀음’이 어디 있겠는가? 명달리 3반에는 모두 50가구가 살고 있는데 그중 40가구 남짓이 서울 등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라서 이웃 간의 친교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고 한다.

그들과 어우러져 별이 쏟아지는 밤에 함께 마당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작곡가들의 사랑과 죽음, 명곡을 만들어낸 음악가들의 애환과 열정을 얘기하다가 밤을 새우는 날도 적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 설레는 감동을 몇 사람만 즐기기에는 아깝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50대 중년층 이상이라면 과거 서울 명동이나 종로 등지에 있던 음악감상실을 드나들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박씨 부부도 예외가 아니어서 젊은 시절에 명동에 있던 ‘필하모니 음악감상실’을 자주 들락거렸다고 한다. 그들은 결국 ‘명필 키즈(Myung phil kids)’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됐다. 그 시절 그곳에서 말러의 교향곡과 브루크너의 협주곡을 함께 들었던 동시대 사람들과 교감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박씨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클래식 마니아로 누구나 부러워할 최고의 음향시스템과 많은 음원을 보유하고 있다. 직업상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수십 년 동안 틈틈이 모아둔 것들이다.

박씨 부부는 클래식 감상에 그만인 영국제 탄노이스피커, 라이브성이 강한 재즈나 보이스 위주의 가요·팝 등에 강한 개성을 보이는 독일제 아방가르드 스피커, 대편성 교향악을 듣기에 좋은 미국제 윌슨 오디오 등 세 가지 종류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앰프는 오디오 리서치, 보울더, 비올라 등을 비치하고 음원으로 레코드판 1만2천여 장, 콤팩트디스크(CD) 4천여 장을 보유하고 있다. 이 기기들은 음악에 빠져 살아온 그의 지난 삶을 단적으로 대변해주는, 분신과도 같은 재산이다.

억만금의 돈으로도 환산하기 힘든 소중한 가치를 가졌다고 자부한다. 최고의 음악감상실을 차려놓았지만 대체 누가 이 깊은 산중 음악감상실까지 달려와 줄 것인가? 당초 가족들과 주변 친구들은 상당한 비용이 소요되는 음악감상실을 만드는 데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박씨 부부는 음악에 심취해 홀로 고단한 영혼을 달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곳까지 찾아나서는 이들이 하나둘 생겨날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결국 박씨는 이곳으로 이사온 지 3년 뒤, 집 옆의 땅 1650㎡(500평)를 추가로 구입해 연건평 330㎡(100평)의 2층짜리 음악감상실을 지었다. 1층에는 음악감상실, 2층에는 음악을 들은 후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음악감상실은 공사를 시작한 지 8개월 만에 완성돼 2012년 4월 문을 열었다. 이름하여 ‘까르페 더 뮤직’. 라틴어의 한 시구에서 유래된 말로 영화<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잘 알려진 ‘까르페 디엠(Carpe diem)’, 즉 ‘현재를 즐기라’는 문구를 인용해 ‘음악을 즐기라’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지친 심신 달래려는 방문객 늘어


방바닥 가까이 구멍을 낸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면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바람이 잘 통하는 흙집이어서 겨울철에는 보온을 위해 장작난로를 따로 설치했다.
살림살이용 흙집과 이 음악감상실을 잇는 마당에는 온갖 색상의 야생화들이 아름다움을 뽐내며 피어있다. 파란 잔디밭의 느티나무 그늘에서는 바깥경치를 감상하면서 그네를 탈 수도 있다. 박씨는 살림집 이외에 작은 흙집 두 채를 더 지어 내방객들이 언제든 구들방에 누워 목청 큰 대화나 낮잠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지인들을 제외하고는 길가던 한쌍의 부부가 음악감상실을 우연히 들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아주 조금씩 느리게 소문이 나면서 2년이 흐른 요즘은 하루 평균 5~10명 정도가 이곳을 다녀간다.

방문객들이 있든, 없든 부부는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많은 사람이 오면 그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호기심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들려주면서 정감 어린 대화를 나누어서 좋다. 방문객이 뜸한 날이면 단 둘이서 밀린 집안일을 하거나 텃밭의 작물을 돌보면 된다. 더 한가한 날은 마을을 에워싼 산허리를 한나절만 돌아도 온갖 나물이나 야생열매를 채취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무아지경에 이르는 일이 이 산골짜기에는 지천으로 널려있기 때문이다.

“아내도 함께 하는 일이 있어 좋아해요. 처음에는 서울의 친구들과 소원해져 아쉬워하기도 했는데 이젠 이곳에서의 삶에 푹 빠져 있어요. 우리가 하루 종일 너무 붙어 지내다 보니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보는 불편함이 흠이라고나 할까요.”(웃음)

깊은 산중에서 듣고 싶은 음악도 맘껏 듣고 취미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려 정담을 나누니 더 이상 부러울 것도, 원하는 것도 없다. 거기다 조금씩이나마 수입도 늘어가 생활비도 충당할 수 있으니 재미가 새록새록 붙는다. 감상실 입장료는 1만 원을 받는데, 부부가 커피나 차를 대접하되 감상실 안으로는 들여가지 못한다는 규칙이 있을 뿐이다. 박씨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음악을 듣기 위해 먼 곳까지 찾아와주는 친구들이 있는데 더 이상 무얼 바라겠어요? 더 바라면 그것은 욕심이죠.”

격주 목요일에는 정기음악회 개최


박씨 부부가 음악의 종류에 맞춰 다양하게 갖춰놓은 음향기기들. 이들이 소장한 1만6천여 장의 음원과 최고급 스피커 등이 음악 마니아들을 산중으로 하나둘 불러들이고 있다.
가끔은 직장 생활에 지친 남성들이 하루를 온전하게 쉬고 싶다며 아침 일찍부터 찾아오는 일이 있단다. 그런 분들은 집에서 조금 떨어진 산채나물 밥집에서 식사를 해결하게 하고 종일 듣고 싶은 음악을 들려주는 DJ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박씨가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은 젊은 시절, ‘너무 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던 어느 날’의 일에서 비롯됐다.

때마침 우연히 듣게 된 멘델스존의 교향곡 4번을 10여 분간 들은 뒤 몸과 마음이 진정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 후로 박씨는 삶이 고단해 쉬고 싶을 때마다 ‘무아지경의 희열감’을 주는 음악을 듣는 것으로 위로를 삼았다. 그는 일 할 때나 쉬면서, 걷거나 잠들 때도 늘 음악과 함께해왔다. 김추자·이은하가 부르는 우리 가요부터 가곡, 베토벤의 9번 교향곡, 바하의 마태수난곡, 말러의 5번 교향곡 등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감상 범위는 다양하다.

“클래식 음악은 그 본질을 알아야 더 잘 들려요. 많은 악기가 총동원되는 교향곡의 숨은 음 하나하나를 살려서 들으려면 공부가 필요한 거죠. 애호가들이 더 잘 듣고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알고 있는 지식, 갖고 있는 자료를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어졌어요.” 그는 또 “사람은 누구나 죽을 때까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희망이 필요한데 음악을 들으면서도 쉼 없는 공부가 필요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면서 “이웃과 함께 발전할 수 있는 소재가 있고 그를 목표로 정진하니 행복이 저절로 따라온다”고 즐거워했다.

박씨 부부는 지난 7월 초부터는 음악 마니아들과 지인, 마을사람들을 위해 정기음악회를 마련해왔다. 음악회는 매달 둘째, 넷째 목요일 오후에 두 시간씩 열린다. 미국의 전설적인 지휘자 겸 작곡가인 레너드번스타인이 뉴욕필하모니의 연주와 함께 펴낸 감상지침 자료 비디오에 박씨가 해설을 곁들이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이들은 1주일에 한 번 쉬는 일요일에는 서울 쌍문동에 있는 본래의 살림집으로 돌아간다. 28년째 산행을 같이하는 지인들과의 만남을 위해서다. 아내를 처음 만났던 모임이라 더욱 뜻 깊고 소중하다. 이제는 70대 ‘올드 멤버’에서 그들의 손주인 어린 아이들까지 3대가 함께 산행을 하며 서로 정을 나누는 만남이다.


토담집 한켠에 있는 아내 이삼란 씨의 장독대. 농사를 지어 직접 담근 된장·고추장은 물론 야산에서 채취한 각종 열매와 나물들이 보관돼 있는 보물단지다.
“행복은 소소한 일상에서 순간순간 느끼는 것”

박씨는 “은퇴 후 긴 여생을 살려면 곱씹을 자산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음악과 산, 독서를 병행할 수 있는 이 삶이 만족스럽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소박하고 꾸밈이 없어 편안함이 돋보이는 아내 이씨.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즐겨 듣는다는 그녀도 남편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산중 생활은 도시에서는 가질 수 없는 많은 것을 선물해줘요. 틈틈이 산에서 채취한 야생복숭아, 산딸기 같은 걸로 차도 만들고 자연 염료를 활용하는 공부도 하게 되니 삶이 더욱 풍요로워진 것 같아요. 조금만 부지런하면 자연은 말없이 많은 것을 얻게 해주거든요.”

낮에는 자신들의 ‘일터’인 음악감상실에서 ‘근무’하다가 산중에 땅거미가 질 때쯤이 되면 열 걸음 거리의 흙집으로 퇴근해, 텃밭의 채소를 따서 함께 밥상을 차리는 부부의 삶은 무위자연 모습 그대로다. 박씨 부부가 다시 말을 잇는다.

“행복이란 너무 거창한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일상의 순간순간 소소한 것에서 느껴야 내 것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야말로 ‘현재를 즐기라’는 ‘카르페 디엠’이 정답이란다. 박씨 부부의 삶은 어느 철학자가 한 이 말을 몸소 실천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것만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진짜 재미이며 재미의 세계가 넓을수록 행복의 기회가 많아지고 운명의 지배를 피할 수 있게 된다.”

201409호 (2014.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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