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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워 인터뷰 - ‘거리의 철학자’ 강신주 - “보수는 탐욕스럽고, 진보는 생명력 잃었다” 

‘인문적 인간’은 회색인 될 수밖에 없어… 남북한에 ‘회색인’ 많아질 때 통일 이뤄질 것 

한기홍 월간중앙 기자 사진 오상민 기자
‘진짜와 가짜’를 정밀하게 분별하는 강신주 송곳 끝 인문학의 정체. 그는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는 모든 예술을 모조품으로 간주한다. 답습과 모방의 삶을 청산하고, 독창의 삶을 영위하란 것이 그의 인문학이 제언하는 메시지다.




강신주는 다양한 인문학 분야를 섭렵하며 독자 대중과 직접 소통하는 ‘재야 철학자’의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다.
10월 6일 오후 2시 ‘거리의 인문주의자’ 강신주를 그의 광화문 오피스텔에서 만났다. 그날이 바로 오피스텔에 머물 마지막 날이라고 했다. 집 주인이 전세를 월세로 돌리는 것에 반발하여 작업실을 옮긴다고 한다. 집주인에게 “월세를 놓는 것이 아마도 장기적으로는 당신에게 손해가 될 것”이란 점을 납득시키려 했던 것 같다. 그 논리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집 주인은 아마도 그 논리에 설득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매달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현금이 매우 요긴한 사람도 있으므로 당사자의 사정을 들어보지 않고는 예단할 수 없는 문제다. 그래도 기회가 있다면 월세와 전세의 경제학을, 그에게 한번 들어보고 싶다.

파워라이터 강신주의 최근 성적표를 살펴보자. 인문학 책은 1천 부를 팔기 힘들다는 출판계 현실 속에서도 강신주는 <철학이 필요한 시간> <철학 VS 철학> 등 다수의 저서를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렸다. 한 해 동안에 <강신주의 감정수업> <강신주의 다상담> 등 무려 6종의 신간을 쏟아냈다. 이 어마어마한 라이팅 파워 자체가 연구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의 강점은 특유의 기획력에 있다. 사물과 현상을 종합·분석하고 합종연횡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비틀어보기에도 능한데, 그 비틀어보기에 흔히 동반되는 경박함이 없다. 그의 최대 강점은 문학에 대한 관심과 소양이다. 그의 문학적 소양은 2012년 발간된 <김수영을 위하여>를 통해 입증됐거니와, 그는 그 책에서 시인 김수영의 삶을 반추하며 그를 위대한 인문주의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바 있다.

강신주는 요즘 영화에 빠져 있다. 지난 7월부터 영화평론가 이상용과 함께 ‘영화와 인문학’ 마라톤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CGV압구정 무비꼴라쥬관에서 매주 열리는 이 강의는 내년 1월 끝난다. ‘강신주·이상용의 씨네샹떼’다. 25편의 세계 영화사 속 걸작이 강의 소재로 다뤄진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최초의 영화 <열차의 도착>(1895), 현실과 꿈의 경계를 다룬 <셜록 주니어>(1924),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1939), 알프레드 히치콕의 <싸이코>(1960),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등이다. 책장 하나에 빼곡히 차 있는 영화 DVD 보기, 이론서 읽기에 요즘 푹 빠져 산다고 한다. 내년 3월경 그 결과물이 800쪽짜리 단행본으로 나온다. 영화 해석의 새로운 차원을 열겠다는 그의 야심이 배어 있는 기획이다.

“영화 해석의 새로운 차원 열겠다”


추상표현주의 대가 마크 로스코의 1955년 작품 <붉은색 띠>. 로스코가 강박적으로 썼던 어두운 색깔 그림으로 들어서기 전, 가장 밝게 타오른 화면을 보여준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1903∼70)가 요즘 그를 사로잡는 또 하나의 테마다. 내년 3월 예당 갤러리가 그의 전시회를 여는 게 계기가 됐다. 그에 대한 책을 쓰고 전시회 기획에도 관여한다. 마크 로스코는 두 개의 대비되는 붉은 색채와 그 사이의 심원한 간극을 즐겨 그린 20세기 세계 미술계의 거장이다. 강신주의 표현을 빌면 “화면의 색이 눈에 엄청난 힘으로 밀려들어오는 느낌을 주는, 마치 음악과도 같이 마음을 정화하는 작품”을 그렸다. 문학에서 영화로, 또 미술로…. 이 철학자의 끊임 없는 영역 확장을 경이의 눈으로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그는 관심사가 확장된 것이 아니라 ‘옮겨간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시가 재미 없어져 안보는 거다. 영화가 재미있으니까 영화를 보고, 시는 이제 재미 없으니까 안보는 거다. 좋아하는 것이 바뀌는 것일 뿐 확장은 아니다.”

이 인터뷰는 5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인터뷰가 끝났을 때 작업실엔 뿌연 담배연기가 가득했다. 족히 한 갑은 넘게 피웠을 것이다. 그는 이 담배의 힘으로 30권의 책을 썼다고 고백했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샛길로 빠졌다가 큰 길로 돌아오고, 큰 길로 들어왔다 싶은데 다시 하늘을 날고 있다. 독설이 난무하는 것은 ‘진짜와 가짜’를 정밀하게 분별하는 그의 습성 때문인데, 어느새 그는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지독한 인문주의자의 모습이다.

사람들의 삶이 고단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힐링이란 말과 개념이 범람하죠. 혼란스럽습니다.

“사람들은 힘들 때 술을 마시죠. 그것도 일종의 힐링이에요. 그러나 술 마신다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청년들이 클럽 가는 것도 힐링 행위 중 하나죠. 자본주의 삶에서 오는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 힐링이라면 그 힐링 또한 하나의 상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상처를 준 체제 또는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약을 주는 격이랄까요? 힐링은 완벽한 치유가 아니고 반창고를 붙이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섹스가 관음성 되면 정치와 연결


<광장> <회색인>의 작가 최인훈. 그의 작품은 한국 문화사 전체와 20세기 세계사의 진폭을 아우르는 철학적 사색의 여정이다

소설 쓰기를 ‘자기 구제의 몸짓’이라 불렀던 소설가 이청준. 글쓰기의 의미와 존재의 조건을 치열하게 탐구한 한국문학사의 거봉이다.

<지리산>의 작가 이병주.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 이념과 자아의 문제를 끈질기게 천착하는 ‘인문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진정한 치유를 지칭할 때 ‘극복’이란 표현이 더 합당 할까요?

“삶의 핵심에 이르러야 해요. 나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가를 정직하게 응시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고통 속에 매몰된 자의 아픔은 이해하지만 본 척하면서 확 피해버려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세상이 변하고 나도 변해야 치유가 오는 건데, 힐링은 세상은 가만히 있는데 내가 변해야 한다는 겁니다. 관념적으로 세상이 변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환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실로 다시 돌아오면 다시 술을 마셔야 해요.”

세상과 나를 동시에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죠.

“마르크스가 종교를 아편이라고 했을 때 그건 종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에요. 종교라는 아편에 의지하게 만드는 현실을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죠.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병사에겐 모르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르핀을 여러 방 맞으면 사람은 죽어요. 무너집니다. 모르핀이 필요 없는 상황, 즉 전쟁을 없애는 일이 중요한 거죠.”

혁명 아니면 초월이 필요한 건가요?

“초월은 아니죠. 마르크스는 혁명을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습니다만 발터 벤야민은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라고 말했어요. 현재의 상태를 멈추는게 혁명이라는 거예요. 벤야민은 과연 멈출 수 있을까 회의했지만…. 지금보다 조선시대의 삶은 훨씬 엄혹했어요.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폭력적인 삶에 노출되었고요. 지금의 자본주의는 훨씬 더 세련된 방식으로 우리를 억압하죠. 그 기제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겠죠.”

정치도 성(性)도 타락했다는 개탄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옵니다.

“섹스는 남녀관계의 완성이란 관점이 우리의 성과 사랑을 타락시켰습니다. 섹스는 남녀관계의 시작일 뿐입니다. 신혼여행에 가서 첫 관계를 맺겠다는 커플의 성 관념을 뒤집어보면 결국 섹스하기 위해 결혼한다는 말이 되어요. 섹스가 목적이기 때문에 1∼2년 사이에 관계가 심드렁해지고 둘 중 누군가 바람을 피우게 되죠. 어떤 남녀가 잠을 같이 자고, 우리 이제 뭐 하지, 이렇게 되는 거죠. 섹스를 한 후 남녀가 할 일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저 사람과 영화도 보고 싶고, 음악도 듣고 싶다…. 그래서 섹스는 관계의 시작이 될 때에만 건강해집니다. 타락한 섹스라는 관점에서 보면 일본에는 아주 묘한 성매매 관행이 있어요. 여자가 온 몸을 다 벗고 보여주는데 만지면 안 된다는 조건이에요. 관음성의 섹스죠. 섹스가 관음성이 되면 정치와 연결됩니다.”

재미있는 관점이네요.

“관음성이 낳은 세계가 스펙터클의 세계죠. 정치는 관음성을 만들어요. 항상 지켜보게 만들잖아요. 좋은 이슈든, 나쁜 이슈든…. 관음증의 세계는 시선의 세계인데, 나치시대의 전당대회 같은 경우가 그 극단적인 경우죠.”

일본식 관음적 성매매가 보여주는 관계의 타락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 건가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죠. 남녀가 사랑을 할 때는 불을 꺼야 해요. 키스를 할 때 보통 눈을 감게 되죠. 남자가 눈을 뜨고 눈 감은 여자와 키스한다면 그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보는 자는 우월하고, 눈을 감은 자는 열등하죠. 야생 동물이 한밤 고속도로에서 자주 차에 치이죠. 동물은 본능적으로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피하지 않으려 해요. 그 불빛을 포식자의 눈으로 봐요. 그 눈을 피하는 순간 자신이 포식자에게 잡아먹힌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불빛을 끝까지 바라보다 결국 죽음을 맞게 됩니다. 시선에는 이렇게 권력과 대결의 요소가 숨어 있어요.”

온몸으로 부딪혀야 비로소 시가 된다


강신주는 “나의 글을 읽고 삶이 변화했다는 독자의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련이 무너진 뒤 20년이 더 흘렀는데도 한국사회엔 보수와 진보의 이념논쟁이 치열합니다. ‘수구 꼴통’이니 ‘좌빨’이니 하는 말이 횡행하고, 편가르기식 사고와 판단이 너무도 일상화돼 있어요.

“한국 소설가 중엔 이병주와 최인훈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보다 이병주의 <지리산>에 더 공감합니다. <지리산>의 주인공 중엔 이념을 혐오하는 지식인 하영근이 나오죠. 끊임 없이 고뇌하고 의심하는 회색분자입니다. 최인훈의 <광장>에는 거제도 포로 석방 때 남과 북을 거부하고 제3국인 인도행을 택한 이명준이 나옵니다. 그도 역시 ‘회색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저는 본질적으로 인간이란 회색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집단에 매몰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고하는 ‘인문적 인간’은 회색인이 될 수밖에 없어요. 거제도 반공포로 석방 시 12명이 인도행을 선택했습니다. 회색인들이죠. 남북한을 통해 그런 회색인이 아주 많아지면 저는 통일이 이뤄질 수 있다고 봐요. 사람을 중간에 설 수 없게 하는 사회는 잔혹합니다. 계속 선택을 강요하고, 결국 중간에 있는 사람이 죽어요. ”

김구 선생의 운명이 생각나네요.

“김구 선생이야말로 대표적인 회색인이죠. 우리 작가 중 인문정신에 투철한 분이 세 분 있어요. 김수영·이병주·최인훈 같은 작가죠. 이청준 선생도 그 범위에 있죠. 김구 선생은 이들 인문적 작가의 정치적 보스라 부를 만합니다. 김구 선생은 남북을 왔다갔다하며 고뇌해요. 남에서 죽었지만 북에 갔더라도 아마 죽임을 당했을 겁니다. 북에 소비에트 체제가 들어서서 공산주의 광풍이 불죠.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열심히 공부하며 체제에 적응합니다. 그런데 그 지배 엘리트의 사상 뒤에는 그들의 탐욕과 기득권이 있었어요. 김구 선생은 그걸 정확히 보고 있었을 겁니다.

체제의 논리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사고의 힘으로 체제의 구조를 꿰뚫어보는 통찰이 있었어요. 회색인이며, 인문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김수영은 진보적인 시인이었지만 좌와 우를 싸잡아 공격하기도 합니다. 3년 전 최인훈 선생을 만났을 때 많이 연로하신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최 선생은 자기 몸으로 부딪혀 좌로도 가고 우로도 가봤습니다. 동구권이 무너진 후 우리는 어떤 준비를 했느냐는 자문을 해봅니다. 최인훈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지금 타락한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자꾸 이념으로 사람을 가르고, 생생한 인간의 몸과 영혼을 재단하고 축소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인문주의, 인문학이란 말을 자주 씁니다. ‘인문학’이란 말이 누구나 편리하게 갖다 쓰는 상투어가 된 느낌도 듭니다.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어요. 인문학의 주어는 ‘나’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고유성이 드러나지 않은 저작은 인문학 책이라고 볼 수 없어요. ‘우리’라는 것을 섣불리 언급해선 안 된다는 말이지요. 제가 좋아하는 시인 김수영이 당시 참여시 계열의 시를 비판한 것은 그들의 시에 ‘나’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나’라는 것이 먼저 드러나서 ‘우리’라는 대표성이 발현되면 좋은데, 생뚱맞게 ‘우리’가 먼저 등장하는 거죠. 그래서 억압적 체제 하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재미가 없습니다. 문학 작품에서는 ‘내’가 움직이면서 민중이 드러나야 해요. 작가가 민중을 끌고 가려 하거나, 민중 뒤에 숨어 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김수영은 시를 ‘온몸’으로 쓴다고 했어요. 여기서 ‘온몸’이란 바로 ‘나’이지요. 민중이나 거대한 역사는 관념입니다. 머리 속에서 짱구를 굴리는 건 관념이지 시가 아니다, 온몸으로 부딪혀야 비로소 시가 된다고 말합니다. 내 몸을 밀고 들어가 시를 쓸 수 있다면 민중이나 혁명이 드러나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에요. 김수영의 입장은 단호합니다. 시를 쓰는 사람이 ‘나’라는 생각이 없으면 시가 아닌 거죠. 인문학은 창작의 주체, 바로 그 사람이 느껴지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자기 얘기가 성숙돼서 보편성의 공감을 획득해야지 갑자기 보편성을 먼저 생각하면 가짜가 됩니다.”

계몽적 지식인이 직면한 파국


시인 김수영은 자신의 존재 기반을 끊임 없이 회의하며 온몸으로 시를 쓴 진정한 인문주의자였다.
그래서 저서 <김수영을 위하여>의 부제로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이란 부제를 달았군요?

“김수영의 시는 가슴을 치고 머리까지 들어와요. 김수영은 산문도 탁월합니다. 시와 산문에 일관된 소통과 흐름이 있어요. 시와 산문이 된다는 것은 지성과 감성이 한 인격 안에 통합돼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문학적인 측면으로만 봤을 때 김수영의 시는 거칠어요. 서정주와 같은 서정성이 엿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의 시에는 자신만의 리듬이 있어요. 제대로 읽으면 호흡이 가빠집니다. 예컨대 김수영의 매력은 여자가 떠나려 할 때 꽃을 따주는 게 아니라 ‘가지 말라’고 악을 씁니다. 그래서 절절하죠. 그런데 저는 김수영과 결별을 하기 위해 그 책을 썼어요. 어떤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은 ‘객관적 거리’가 생긴다는 뜻이고 그 거리가 확보되면 비로서 글을 쓸 수가 있어요. 반대로 글을 쓰는 순간 그 사람과 멀어집니다. 누군가 헤어지려 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에 대해 글을 쓰는 겁니다. 글이 완성되는 순간 결별도 완성되죠.”

객관적 거리와 이별의 이론은 사람 간의 사랑에도 적용될 수 있겠네요?

“그래요.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냥 가슴팍에 묻어둬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을 보기 시작하면 멀어 집니다. 글도 마찬가지죠. 고통에 대하여 글을 쓰기 시작하면 신기하게도 그 고통이 사라집니다. 고통이 객관화되기 때문입니다. 고통에 빠져 죽는 사람들은 말과 글로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죽어요. 모든 예술은 고통에서 출발하죠. 행복한 사람은 예술가가 될 수 없습니다. 나의 고통과 외로움을 좀 알아달라고 하는 게 예술이에요.”

서사가 살아 있는 <반지의 제왕>을 좋아한다고 했죠? 서사와 공동체가 사라진 것에 대한 회한입니까?

“철학도 인문학도 ‘나’와 ‘너’의 문제입니다.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서 파생되는 것이죠. ‘나’와 ‘너’가 사라진 공동체는 공허합니다. ‘우리’를 강조하게 되면 계몽이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은 모세가 되어요. 가짜가 되는 거죠. 인문학자의 자제력이 거기에 있는 겁니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문학적 대부였던 김지하 시인은 말년에 거대담론으로 사람들을 계몽시키려 했죠. 그러나 청년들은 스스로를 교육하고 각성시킵니다. 그러자 계몽자로서의 시인은 존재가치가 사라졌습니다. 계몽적 지식인이 직면하는 파국이랄까요? ‘우리’ 또는 ‘공동체’라는 차원은 아주 나중에 공감이 되도록 제기돼야 합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려 할 때’ 지식인은 파국을 맞게 되는군요? 우리 사회 보수세력의 직분과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선배와 후배의 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저는 선배를 ‘밥 사주는 사람’으로 규정합니다. 밥을 사주면서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선배의 직분입니다. 선배가 밥 먹는 자리에서 말을 많이 하려면 밥을 자주 사줘야 합니다. 카드(회사 카드 말고)를 먼저 긋고 일어나면서 ‘잘들 놀다 와라’ 해야 선배란 말입니다. 그런 선배가 밥을 사주면 후배는 선배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이런 선배 같은 존재가 바로 보수입니다. ‘가오’를 잡을 수 있어야 보수입니다. ‘나는 선비다, 너희들하곤 다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장에 나가는 장수는 가장 먼저 적진에 가서 가장 늦게 빠져나와야 합니다. 부하들이 그러죠. 저 사람은 비범하다고. 자신의 권좌가 그래서 유지됩니다. 태종이 신문고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영의정 한 사람이 하인을 시켜 그 신문고를 치게 합니다. 자기도 백성 중 하나라면서. 장수가 도망치면서 ‘나도 인간이다’라고 말합니다. CEO는 정리해고를 하면서 ‘나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보수가 아닙니다. 전부 가짜죠. 우리 사회엔 진정한 보수가 없습니다. 헌신과 인내, 처절한 노력이 필요한데, 어디 보수적 선비 되기가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진짜 보수가 출현하면 진보 세력도 그를 만만하게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진짜 진보가 있느냐. 저는 없다고 봅니다. 진보의 권위주의도 만만치 않습니다. 진보가 보수 행세를 합니다. 앤디 워홀과 같은 사람이 진짜 진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회에 등원할 때 머리를 물들이고 청바지를 입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진보는 기존의 형식과 권위에 도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보수와 진보가 갈등하면서 공존해야 사회가 건강해지는 것이죠. 그런데 진보는 생명력과 활력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문학이 없다


“아우슈비츠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서정시는 계속 쓰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
사랑의 열병을 앓는 청춘, 지식과 사상에 목마른 젊은이가 많습니다. 독서를 해도 지혜는 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일과 사랑, 공부와 일상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요?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답을 구해보겠습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읽는’게 아니라 ‘읽어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 작가의 글에 빠져 다른 글은 통 읽지 못하게 되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아주 절실하고 치열한 독서체험이죠. 저는 김수영과 니체, 스피노자, 마르셀 푸르스트, 나가르주나를 그렇게 읽어버렸습니다. 물론 중간에 다른 작가도 많이 있었고, 그들을 다 열거하기도 힘들지만 이들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는 다른 글이 쓰레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계속 통과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강력한 편애, 강력하게 좋아했다가 버리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자기 실존의 스타일과 리듬을 가진 작가와 만났을 때 그 용솟음치는 시너지는 대단합니다. 그래서 진짜 혼을 바쳐 읽어버리는 것이죠. 어린 아이의 책 읽기와 닮았습니다.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른 채 책 한 권을 몰입해 다 읽어버리는 아이들의 순수한 경험입니다. <철학 VS 철학> <감정수업> 등은 이렇게 ‘읽어버렸던’ 독서의 결과물입니다. 다독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100명의 여자와 잠을 잔다고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죠. 한 여자와 정말 지독하게 사랑을 해야 비로소 사랑을 알게 됩니다. 젊은 여자들이 그러죠. 나는 쿨하게 마음에 드는 남자와 하룻밤을 잔다고. 그럼 저는 묻죠. 잔 거냐, 자버린 거냐. 그냥 잔 거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자위행위에 불과한 거다, 이렇게 말해줍니다.”

마르셀 푸르스트의 장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열 번 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평생 한 번 읽기도 어려운 책인데요….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그 독서욕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푸르스트의 문체는 저와 궁합이 잘 맞았습니다. 좋아했기 때문에 읽었던 것일 뿐입니다. 푸르스트를 이해하는 포인트는 영화에 있습니다. 그는 무성영화 시대에 작품을 썼는데 영화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을 소설로 써야겠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지막 편 ‘되찾은 시간’ 편에서는 이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 수 없다는 말이 되풀이해서 나옵니다. 문학의 자기정당화를 위해 만든 작품, 영화를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만든 작품입니다. 사진이 나오면서 인상주의 미술이 태동한 것과 비슷합니다. 폴 세잔의 그림은 사진으로 표현하지 못하죠. 새로운 기법이나 매체가 출현하면 구매체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합니다. 그 같은 경각심 속에서 쓰인 이 소설은 인간내면을 탁월하게 그려내며 문학사상 유례 없는 위대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물려준 두 가지 유산


인왕산 기차바위에 올라 서울시내를 바라보는 철학자 강신주. 산은 그에게 “정점을 찍었을 때 서둘러 하산하라”는 지혜와 교훈을 주는 곳이다.
한국 문학에 이전과 같은 대가급 솜씨의 작가가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읽고 싶은 시나 소설, 평론이 없다는 겁니다.

“전후문학이 원래 좋아요. 상황이 비극적일수록 사람의 사상이 깊어지기 때문일 겁니다. 전후문학 세대가 다 사라지고 나니 문학계에 공동이 생겼습니다. 박완서 문학은 보수적인 아줌마의 문학이지만 리얼리티가 있어요. 그분은 역시 좋은 작가였습니다. 아도르노가 그랬죠.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서정시가 쓰일 수 없다고…. 그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정시는 쓰여야 한다고요.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없으면 문학은 붕괴합니다. 서정시의 깊이를 말해주는 게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여자에게 배신당하고 실연했다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것…. 그 사랑은 다른 사랑과 깊이가 다르죠. 한 아이가 키우는 강아지가 죽었어요. 다시는 키우고 싶지 않겠죠. 어머니도 권하지 않아요. 그런데 아이가 어느 날 어머니에게 그러죠. ‘엄마, 나 햄스터를 기를래요.’ 그 아이는 사랑을 배운 거예요. 그 대상이 죽어가는 것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인간의 극악(極惡)까지도 끌어안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런 위대한 전통이 우리 문학에서 사라졌어요. 그래서 이병주나 이청준, 최인훈 같은 작가의 작품을 반복해서 읽게 됩니다.”

강연을 많이 다니면서 무엇을 배우고 느끼나요?

“짧은 시간 안에 청중과 교감하는 법, 그리고 그들이 듣고 싶은 것과 그 수준을 파악하는 법, 주제 전체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가장 집중도가 높은 토픽을 3시간 정도 유지하는 법 등을 익히게 되었죠. 기업에도 강연을 많이 다녔는데 CEO가 절반은 좋아하고 절반은 싫어해요. 신입사원 강연 때 그러거든요. 여러분이 회사를 그만둘 때를 알려주겠다, 이 회사 아니면 밥줄 끊어진다는 생각 들기 전에 그만둬야 한다고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회사에 뼈를 묻어라’는 말이거든요. 기업에서는 기겁을 하죠. 강연을 하다 보면 50∼60대의 호응이 아주 높은 경우가 있습니다. 원래 제가 그 정도 연배 사람들과 친하게 지냅니다. 그 사람들은 인생을 충분히 살아서 관념적이지 않아요. 20대가 제일 어렵습니다. 관념적이거든요. 특히 대학원생들이 저를 싫어합니다. 자신들이 읽은 몇 가지 명제나 이론을 토대로 엉터리 질문을 하거든요. 제가 그럽니다. ‘그런 질문으로 해서 지적으로 보이고 싶은가? 그 입 닥쳐!’라고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당시 초등학교 학력에, 평생 힘들게 밑바닥에서 일하다 돌아가신 분이었습니다. 술도 많이 드셨고요. 저를 이해하기 위해 굉장히 노력하셨지만 끝내 저를 잘 모른 채 돌아가셨겠죠. 저도 그런 아버지를 잘 모른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할 때 보니 놀랍게도 제가 쓴 책을 거의 읽으셨더군요. 그런데 밑줄 친 대목을 보니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채 읽은 것이 분명했어요. 아버지는 제게 두 가지를 물려주셨습니다. 먼저, 강건한 육체입니다. 제가 건강한 몸을 갖지 못했다면 어려운 시기에 현실과 타협했을 것입니다. 몸 하나를 믿고 저는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결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품성입니다. 아버님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남에게 기대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 점을 타고났습니다. 모든 일을 혼자 힘으로 해결합니다. 눈에 종기가 나면 바늘을 불에 달궈 피고름을 짜냅니다. 다리에 심하게 쥐가 나면 종아리를 십자로 절개해 스스로 치료합니다. 평생 거의 병원을 가지 않았습니다. 튼튼한 몸과 독립적인 기질은 분명 아버님이 물려주신 것입니다.”

“정점을 찍었을 때 하산하라”

마초의 기질이 엿보입니다. 말투도 거칠고, 생각도 직선적입니다

“한국 여자들은 마초에 대하여 공개적인 자리에서 절대 높은 평가를 내리지 않죠. 그런데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 평가가 달라져요. 그런 기질의 남자에게 분명 매력을 느끼죠. 세상에는 진짜 마초와 가짜 마초가 있어요. 제스처만 마초인 사람들은 만나보면 ‘허당’이에요. 진짜 마초는 헤밍웨이 같은 사람이죠. 그는 스페인내전에 참가해 총을 맞으며 싸운 경험이 있습니다. 아무리 정의를 위한 것이라 해도 남의 나라 내전에 자기 목숨을 거는 일은 쉽지 않죠. 아프리카에선 사자와 싸웠고, 바다에선 큰 물고기와 싸웠습니다. 성적 장애가 왔을 때 자살합니다. 그의 마초 정신에는 진정함이 있고, 그의 소설 속 리얼리티는 거기서 나옵니다.”

글솜씨와 강연 능력, 독창적인 사유로 많은 독자와 팬을 확보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절정의 인생을 맞고 있는 것 아닌가요?

“방송에도 출연하고 유명세를 타다 보니 CF 제의도 여러번 들어왔습니다. 몇 개 대학으로부터는 전임 교수직 제안도 받았고요. 그러나 다 거절했습니다. 제가 철학자라는 사실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베스트셀러의 저자이고,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줬다는 게 정점인데, 정점을 찍었다는 생각이 들때 저는 빨리 내려옵니다. 정점에서 욕심을 내면 추락합니다. 요즘 말로 한방에 훅 가는 거죠. 김수영 시인의 말처럼 글쟁이는 글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제가 산을 타봐서 아는데 툭툭 빠져나와야 합니다. 거기에 갇히면 에베레스트산 정상에서 얼어 죽어요. 사람들은 베스트셀러 작가 강신주를 상품으로 소비합니다. 그리고 관음증적으로 관찰을 해요. 정상에서 내려오지 말라고 돈까지 주면서…. 그때가 제일 위험하지요. 내려와야 합니다. 나의 글을 읽고 삶에 변화가 생겼다는 독자의 편지를 받는 것만으로도 저는 최고의 인생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진정한 예술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갖춘다는 말은 맞는 말이죠. 진정한 예술은 대중성과 상관 없다, 이건 개소리죠. 작품이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쓰는 것이란 걸 잊으면 안돼요. 시인 파울 첼란의 말대로 작품은 타인에게 보내는 유리병 편지인 거죠. 드높은 작품성을 유지하면서도 대중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던 베토벤의 경우가 참 행복했어요. 작가로서 그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더없이 훌륭한 삶을 산 것이겠지요.”

201411호 (201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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