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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이슈 | 비선 권력 의혹 ‘정윤회 사람들’의 행로 - 부풀려진 허상인가, 정권 최대 실세인가 

불투명한 정치·행정 과정이 빚어낸 사회적 병리현상… 청와대가 분명한 입장 밝히고 교통정리해야 한다는 의견도 


박근혜 대통령의 의원 시절 비서실장 역할을 한 정윤회(왼쪽) 씨와 전 부인 최순실 씨가 이혼 전인 지난해 7월 서울 근교의 한 공원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지난 7월 9일 자 〈중앙일보〉에는 “나는 떳떳하니 모든 걸 조사하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현 정부의 ‘그림자 실세’, ‘비선 라인’으로 불리는 정윤회 씨의 토로였다. 기자와 만나 자신과 관련된 각종 의혹과 소문을 정부기관이 나서서라도 공식적으로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는 야권에서 ‘만만회(박지만 EG회장,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 정윤회)’로 통칭되는 비선라인이 국정을 주무른다고 공세의 고삐를 바짝 조일 즈음이다. 또 정씨가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 회장의 뒤를 밟았다고 보도한 언론사에 소송을 제기한 시점이기도 했다. 정씨는 자신의 재산, 이권 개입, 미행 의혹, 비선 활동 등 모든 걸 조사하라며 결백을 외쳤다.

각종 풍문을 일축하는 발언이기는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는 한 학자는 이를 일러 ‘레임덕의 시그널’로 규정했다.이 학자는 “정윤회 씨가 더 이상 뒤에 있지 못 하고 저렇게 나와야 할 정도이므로 정권 출범 1년 반 만에 권력누수가 시작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씨가 언론에 나서는 순간 장막 뒤 ‘카더라’ 수준의 존재가 공론의 장에 옮겨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을 인용하는 데 조심스러워했던 언론도 앞으로 정씨 관련 이슈를 앞다퉈 공론화하게 될 것”이라고 이 학자는 전망했다.

정윤회 씨는 누구인가? 박 대통령이 원내에 첫발을 내디딘 1998년부터 2004년 한나라당 대표가 되기 전까지 비서실장 역할을 했다. 청와대 문고리권력 3인방이라 불리는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을 박근혜 의원실의 보좌진으로 발탁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모습을 감춘 그였지만 박근혜 정부 들어 ‘정권의 최대 실세’로 간주되는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정권의 2인자’라는 소문이 무성한 그가 언론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여권 인사들도 자못 놀라는 표정이었다.

앞서 언급한 학자가 예견했듯이 요즘 들어 정씨 관련 기사가 툭하면 언론 지면을 장식한다. 말로만 떠돌던 정씨의 여권내 위상이나 주변인들을 드러내는 정보들이 쏟아진다. 여권주변에 떠다니는 정황에 비하면 언론 보도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시각도 있다. 어느샌가 그는 모든 권력형 사건에 진위와 무관하게 ‘걸면 걸리는’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듯하다.

가장 눈에 띄는 보도는 독도 방문 건이다. 잠행으로 일관하던 그의 행적이 노출된 첫 사례다. 그는 지난 8월 13일 독도에서 열린 ‘보고 싶다 강치야’라는 제목의 콘서트에 참석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공식 팬클럽인 ‘호박가족(대표 임산)’ 회원들과 함께했다. 지난 대선 때 박 대통령의 선거대책위원회에 참여했던 대학교수나 의상을 담당했던 디자이너 등이 호박가족의 주요 멤버다.

“정윤회의 독도행, 청와대도 알 수 있었을 것”


테너 임산이 8월 13일 독도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노래 ‘보고 싶다 강치야!’를 열창하고 있다. 잠행을 하던 정윤회 씨가 이날 행사에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이 모임의 대표 임산 씨는 2013년 2월 25일 박 대통령 취임식에서 축가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성악가이면서도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당시 박 대통령 캠프에서 활동한 이른바 ‘원조 친박’의 일원이다. 김천 출신인 그는 대구 경원고와 경북대를 졸업한 TK(대구·경북) 출신이다.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전공하는 그는 독도 살리기에도 앞장선다. 2009년 클래식 음반 최초의 독도 관련 앨범 ‘독도아리아’를 발매했으며 ‘보고 싶다 강치야!’란 곡으로 울릉도와 독도에서 음악회를 열었다.

2007년 경선 당시에도 ‘호박가족’을 이끌었던 임씨는 이명박 대통령 집권 후 경선 당시의 활동과 관련해 사정당국의 조사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박근혜 캠프에서 함께 일한 여권 인사는 “그런 인연으로 인해 임산 대표는 청와대 3인방과도 아주 가까운 사이로 발전해 친박 중에서도 핵심에 근접해 있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이 인사는 “임 대표와 청와대 실세들의 관계를 고려해보면 독도행사 개최를 청와대도 알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씨가 매년 진행해오던 음악회에 공교롭게도 올해는 정윤회 씨가 참석했다. 정씨는 앞서 언급한 〈중앙일보〉 기사에서 “비서실장을 그만둔 이래 7년간 야인으로 지내고 있다”, “지난 대선 때도 활동하지 않았다” 등의 발언을 했다. 하지만 독도 콘서트에 함께한 이들의 면면을 보면 그가 대선과 거리를 둔 게 아니라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게 아니냐는 의문이제기될 수 있다. 이런 추측의 강력한 연결고리가 바로 임산 대표와 호박가족이다. 게다가 정씨는 독도에 들어가면서 가명을 기재해 의혹을 더욱 부추겼다.

이번 독도 콘서트 행사에는 정씨의 지인이 또 한 사람 등장한다. 대한항공 승무원 출신의 여성 K씨가 이날 정씨와 동행했다. 정씨와 K씨는 대한항공에서 같이 근무한 인연이 있다. K씨는 1970년대 중반 승무원으로, 정씨는 1981년 보안승무원으로 입사했다. K씨는 항공업계에서는 가장 잘나간 승무원 출신 인사로 통한다. 지방 출신인 그는 서울에서 성장했으며, 대한항공 입사 후에는 대통령 전용기 승무원으로도 일했다.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 당시에는 미스코리아 출신 도우미들과 함께 독일 바덴바덴에서 홍보요원으로 활약했다. 그림에도 조예가 있어 서울 소재 대학에서 겸임교수를 역임하는가 하면 연극인 S씨 등 공연문화계 인사와도 친분이 두텁다고 여권의 한 관계자가 전했다.

K씨는 세월호 참사 당일인 4월 16일에도 정씨와 서울 강남에서 저녁을 같이한 것으로 검찰조사에서 밝혀졌다. 검찰은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정씨를 만났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이에 대한 고소사건이 접수되면서 관계자들을 불러 진위를 파악했다. 정씨는 당일 청와대에 들어간 적도 없고 대통령을 만난 적도 없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날 정씨가 만난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K씨다.

〈월간중앙〉은 K씨에게 10여 차례 전화를 걸었으나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남겨진 전화번호로 K씨의 지인이 연락을 해왔다. 그에게 전화를 걸게 된 취지를 설명하고 독도방문 동기, 정씨와의 관계 등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지인은 K씨에게 용건을 전해주겠다고 했으나 나중에 K씨와의 통화는 불가능하다는 답이 돌아 왔다. 그는 “K씨는 현재 병원에 입원 중이며 전화를 직접 받을 형편이 못 돼 내가 대신 전화를 받는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역술인 이세민 씨의 폭탄발언


1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11월 6일 국회 운영위 전체회의에 참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불리는 이 비서관도 정윤회 씨가 국회 보좌진에 발탁했다. / 2 정윤회 씨 증명사진. 정씨는 비교적 오랜 기간 국회활동을 하면서도 사진자료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 3 2012년 8월 고 육영수 여사 38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박근혜 의원과 동생 박지만 EG회장. 정윤회 씨와 박 회장은 이른바 ‘미행사건’으로 사이가 벌어졌다.
K씨 못지않게 장안의 화제가 된 인물이 있다. 정씨가 세월호 참사 당일 만난 사람이라고 알려진 역술인 이세민 씨다. 그는〈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씨와의 오랜 인연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씨에 따르면 두 사람의 인연은 박 대통령 정계입문 시점인 1998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는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일어난 해로 여당에서 야당으로 전락한 한나라당이 칩거 중이던 박 대통령에게 러브콜을 보낼 즈음이다. 박 대통령은 1998년 경북 문경·예천 보궐선거에 공천을 신청했으나 당은 연고가 없던 대구 달성군 보선 출마를 권유했다. 당시 박 대통령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던 사람이 정씨다.(이때는 지금의 청와대 3인방의 존재도 없었다. 박 대통령과 당과의 연락을 정씨가 전담했다) 당시 이씨는 “문경·예천이 아니라도 대구 달성군이면 당선이 확실하다”는 취지로 정씨에게 조언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언론에 보도된 이씨의 발언은 거의 폭탄에 가깝다. “박 대통령과 수시로 전화한다”, “지만(박지만 EG회장)이가 나를 신처럼 받든다”, “정윤회도 내 말이면 죽는 시늉까지 한다”는 등 여권 핵심부와의 친분을 과시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씨는 박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보수 논객에 의해 검찰에 고발된 상태다.

이씨의 행적을 수소문해보면 정말 독특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유년시절 TK지역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어려서부터 비범한 면모를 과시했다고 한다. 길가는 임산부의 뱃속에 있는 태아의 성별을 기가 막히게 맞췄다고 이씨의 인척을 잘 아는 A씨가 전했다. “워낙 족집게라는 소문이 인근에 퍼져 그 아이를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들었다.”

과거 이씨의 행적은 국정원(당시 안기부)의 안테나에도 잡혔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민자당 김영삼 후보가 대구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대선 후보들은 유세버스를 타고 전국 표밭을 누볐다. 대구의 한 호텔에서 행사를 마친 김 후보가 버스에 오르자 30대 중반의 풍채 좋은 청년이 그 뒤를 따랐다. 김 후보 옆에 앉은 청년은 귓속말로 후보에게 얘기를 건네는 등 거리낌없이 대했다고 한다. 그가 바로 이세민 씨다. 이때는 김 후보의 당선이 유력시되던 시점으로 아무나 버스에 오르지 못했다. 더구나 후보 옆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최상의 예우를 받는다는 걸 뜻했다. 당시 현장을 지켜본 국정원 관계자에 따르면 “서른 살 가까운 나이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듯 편하게 행동했다”고 돌이켰다. 이 국정원 관계자는 “김 후보가 아주 신뢰한다는 느낌을 들게 했다”고도 했다.

“정윤회 보좌 시절엔 실수 없었다!”


1998년 4월 2일 대구 달성 보선에서 당선된 한나라당 박근혜 후보가 선거사무실에서 지지자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정윤회 씨는 박 대통령 정계입문 때부터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이씨는 김대중 대통령 내외는 물론 정윤회 씨 등 박 대통령의 측근과도 통하는 인물이다. 새누리당의 한 국회의원은 “이씨는 여와 야를 다 아우르는 행보를 보였다”면서 “정권을 넘나들며 VIP(대통령)와 그 가족들과도 참 잘 지내는 재주를 가졌다”고 돌이켰다. 실제로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는 이세민 씨와 가까이 지냈다고 스스로 공개했다. 박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정윤회 씨와도 막역한 이씨가 역술적 측면에서 남다른 능력을 보유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의 정체가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이씨는 2006년 특정인을 법정구속시켜주는 대가로 4억원을 챙겨 실형을 선고받은 전과가 있다. 또 최근에도 건강식품사업의 투자금을 빼돌린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그는 관련 혐의를 부인하고 있지만 함께 조사받은 지인은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되는 등 주변에 금품 관련 잡음이 잦은 편이다. 피해자들은 이씨가 정씨를 비롯한 여권 거물인사들과의 친분을 내세워 금품을 요구했다고 주장한다.

이씨나 K씨의 공통점은 과거엔 정씨와 알고 지내는 정도였다가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는 점이다. 이세민 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서로 바빠 한동안 뜸했으나 최근엔 정씨를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만난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이씨는 서울에 일우생명문화융합센터를 열어 세계적 영성철학자로 알려진 디팩 초프라 초청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당시 이 행사는 몇몇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정부 관계자가 언론인들에게 강연회 행사 취재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씨가 여권 핵심부와 선이 닿아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정씨의 활동 반경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정씨가 새로 사람들을 잘 소개받지 않고 어울리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대한항공 시절 친구들 두세 명은 지금까지도 자주 만난다”고 말했다. 나아가 “정씨는 조용한 성격으로 명석하고 치밀해 그가 보좌하던 시절엔 박근혜 대통령이 실수한 적이 없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는 박 대통령의 측근도 인정하는 바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선대위는 큰 위기에 몰렸다. 추석 이후 기대됐던 박근혜 후보 지지율은 답보상태를 면치 못했다. 정수장학회의 MBC 지분 매각설이 터져 나온 뒤인 10월 중순 박 후보(39.2%)는 안철수 후보(52.2%)에게 13%포인트 차로 뒤처졌다. 선대위 핵심 인사들은 외부인사 영입에 반발해 당무를 거부했다. 새누리당은 당대로 지도부 총사퇴 요구가 분출됐다. 여권 전반이 통제불능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박 후보의 용인술과 리더십에 짙은 회의가 번지기 시작했다.

정씨, 조만간 공개활동 재개할 수도


10월 13일 청와대가 주최한 ‘제17회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선수단 격려 오찬’에 참석한 승마 국가대표 정유연 씨(뒷줄 왼쪽에서 둘째). 정윤회 씨의 딸인 그는 자력으로 우승해 특혜 논란을 잠재웠다.
그때도 정윤회 씨가 막후 실세라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지금은 박 대통령의 청와대 3인방으로 불리는 한 인사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정 실장(박 후보 참모들은 정씨를 정 실장으로 불렀다)님 말이에요? 정말 몰라요. 그분이 어디서 뭘 하는지. 저희는 연락 안 하고 지내요. 오래전부터 본 적도 없는 분을 두고 왠 말들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요즘같이 지리멸렬한 상황이라면 차라리 정 실장이 계셔서 일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 정도예요.” 은연 중에 튀어나온 말이지만 이 참모도 정씨의 일처리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세민 씨는 한술 더 떴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비선 의혹을 받게 하지 말고 차라리 대통령 비서실장을 시키면 지금보다 훨씬 잘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예비후보 검증 당시 박근혜 후보도 “정윤회 비서는 능력이 있어 도와달라고 했고 실무 도움을 받았다”면서 “법적으로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실력이 있는 사람이면 쓸 수도 있는 것이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정씨를 접해본 여권 인사에 따르면 정씨도 조만간 공개적인 활동에 나서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한다. 정씨는 지난 3월 자신의 박지만 미행설을 보도한 〈시사저널〉 기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박지만 “정윤회가 나를 미행했다”’ 제하의 기사가 자신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이유에서다. 이 사건이 마무리되는 시점에는 자연인으로서 활동에 나설 가능성이 점쳐진다. 이 여권 인사는 “정씨는 박근혜 의원이 국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박 대통령을 마음에 새겼다고 한다”면서 “그래서 국회 보좌진 4인방을 직접 뽑아 하드트레이닝을 시키는 등 오로지 박 대통령을 위해 일했다”고 말한다. 정씨는 ‘비서실장’으로 일하던 시절 기자 접대 등 박 의원을 대신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까지 그를 만난 언론인들에 따르면 정씨는 정가의 돌아가는 얘기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주요 인사들의 동향 파악에서 열심이었다. 또 언론인들과 강남의 단골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속마음을 나누는 등 정무적 기능에도 충실했다는 것이다.

이 여권 인사는 요즘 정씨가 청와대 3인방과 소원한 것도 사실이라고 전했다. “따로 연락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들에게 실망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이제는 이런저런 족쇄를 다 벗고 대외 활동을 재개할 시점이라는 게 이 인사의 전망이다. 정씨도 올 초 〈시사저널〉과의 통화에서 “나는 솔직히 얘기해서 정말 비참하게 살고 있다. 아무것도 안 하고, 하고 싶은 일도 못하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다”고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올해는 정씨 가족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된다. 하나는 부인인 최순실 씨와의 이혼이고 다른 하나는 승마를 전공한 딸 정유연 씨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 명문대 진학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씨는 올 상반기 서울가정법원에 정씨와의 소송을 통해 이혼을 확정했다. 법원의 조정 결과 자녀 양육권은 최씨에게 넘어갔고 위자료 청구나 재산 분할도 없었다. 결혼 중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누설하지 않기로 하고 비난도 하지 말자는 조건이 조정 내용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에서는 정씨가 박 대통령과의 연결고리였던 최태민 목사 일가와 결별한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최씨 딸, 아시안게임 우승 이어 올림픽 도전


집권 2년 차에 비선 권력 논란이 제기되면서 청와대의 고민도 깊어진다.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확실한 입장 표명을 통해 교통정리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런 최씨가 지난 9월 20일 인천 서구 백석동에 있는 드림파크 승마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천아시안게임 승마 마장마술 단체전 결승전이 열리던 날이다. 마장마술은 60m×20m 넓이의 평탄한 마장에서 기수와 말이 규정된 코스를 따라 호흡과 동작을 얼마나 잘 표현하는가를 겨루는 경기다. 단체전에는 국가별 4명까지 출전해 상위 3명의 성적을 합쳐 순위를 가린다. 최씨의 딸 정유연 씨는 마장마술 단체전 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해 한국대표로는 3위, 전체 출전 선수 32명 중 5위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유연 씨는 인천아시안게임 승마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과정에서 특혜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으나 이날 선전으로 그간의 의혹을 말끔히 씻었다.

최씨는 이날 코칭 스텝과 함께 대표팀의 경기를 관전했다. 예전 같으면 정씨와 함께했겠지만 갈라선 뒤로는 두 사람이 같이 온 일이 거의 없다고 승마 관계자가 전했다. 유연 씨가 금메달을 따는 순간 최씨도 크게 기뻐하며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던 것으로 현장에 같이 있던 사람들은 기억한다.

유연 씨는 훈련량이 굉장히 많은 노력형에 가깝다. 다른 선수들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 위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이혼 전에는 부부가 늘 함께 훈련장을 찾았지만 갈라선 뒤로는 최씨만 따로 오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한때 승마를 취미 활동으로 삼은 정윤회 씨도 지극 정성으로 유연 씨를 뒷바라지했다. 강원도에 목장을 만들려고도 했다. 이혼 전의 정씨 부부는 2004년부터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일대의 땅을 사들였다. 이 부지에 대규모 목장(실내외 마장 포함)을 조성하는 공사까지 착수했다가 2013년 들어 공사가 중단됐다. 인근 주민들이 무료로 경작하는 부지로 활용됐다. 승마에 대한 정씨의 강한 애착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아시안게임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유연 씨는 2015학년도 대학 입시 수시모집에서 서울의 한 대학으로부터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이제 그의 최종 목표는 올림픽 출전 및 메달 획득이라고 유연 씨의 스승이자 마장마술의 ‘명인’으로 불리는 서정균 씨가 말했다. 마장마술의 올림픽 출전은 국가대표에 선발된다고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게 아니다. 국제승마연맹(FEI)이 승인하는 국제 마장마술 대회에 출전해 일정한 성적을 거둬야 한다.

이 과정이 바늘구멍이다. 서씨는 “한국이 속한 8그룹은 호주, 뉴질랜드, 동남아 국가 등 20여 개 국가로 이뤄져 있다”면서 “여기서 딱 1명에게만 올림픽 출전권이 주어진다”고 말했다. 마장마술 올림픽에 출전하자면 국제대회에서 점수를 따야 하고 전지훈련도 밥 먹듯 해야 한다. 자연 말과 함께 해외에 체류하는 시간이 많다. 그 비용은 개별 가정이 감당해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서씨의 설명이다. “개인의 노력은 물론, 집안의 뒷바라지와 기업의 후원이 일체가 될 때 올림픽 출전이 가능하다.” 유연 씨는 일단 2016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하계올림픽은 경험삼아 도전해보고, 2020 도쿄올림픽에서 진검승부를 펼친다는 계획인 것으로 전해진다. 유연씨는 부모의 이혼, 자신의 대표 발탁을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등 예기치 않은 사건과 의혹들로 마음고생이 컸다고 한다. 서정균 씨는 “유연이는 눈물을 달고 살았다”면서 “그래도 대범하고 멘탈이 강한 친구라 역경을 극복하고 자신의 세계를 창출했다”고 말했다.

각종 억측과 소문을 즐기는 세력들

불과 몇 달 사이 정윤회 씨 주변의 많은 인물이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그들은 대부분 외부의 전화를 받지 않거나 아예 휴대전화를 꺼놓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병원에 입원 했다거나 해외출장 중이라는 답변도 돌아왔다. 이중에는 진짜 공연한 의심을 사거나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고픈 이들도 있을 것이다. 정치판은 의혹이 꼬리를 물고 확대재생산 되는 곳이다. 섣부른 해명은 그게 빌미가 돼서 다른 의혹으로 번질 수도 있어 몸을 사린다는 전언이다 .

정윤회 씨 관련 보도와 관심, 의혹과 관련해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정씨가 대통령과 아무리 가까운 측근이라고 해도 그가 실제로 국정에 행사한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우리 정부의 정치 과정과 행정 과정이 투명치 못 한데서 ‘숨은 실세’이니 ‘그림자 권력’이니 하는 부풀려진 허상이 한국사회를 활보한다는 분석이다. 그는 “오히려 비선 라인 주변에서는 그런 소문과 추측을 엔조이하면서 즐기는 세력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정권 2인자에 관한 소문은 역대 정부에서도 파다했다. 과거 정부의 경험에 견줘볼 때 그런 소문이 크게 빗나간 적이없다. 국민의 의혹이 해소되지 않으면 대통령의 리더십에 균열만 키운다. 임기 중반으로 접어든 박 대통령이 비선 의혹을 안고서는 국정을 제대로 이끌기 어렵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정윤회 씨 관련 의혹이 가십성에 불과 하더라도 청와대가 나서 확실한 입장을 표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구체적인 인사 개입이 드러난 것도, 불법을 저지른것도 아니지만 그냥 두면 수습이 안 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신 교수는 “청와대가 정씨 관련 소문이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다고 교통정리를 하면 될 것을 가만히 있는 게 이상하게 느껴진다”면서 “이런 현상을 방치하는 게 바로 레임덕을 부른다” 고 일침을 놓았다.

201412호 (201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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