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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취재 | 주민소득 전국 1위 ‘조선(造船) 도시’의 비명소리 - “수만 명 잘린다는데…” 불황공포 거제를 덮치다 

선박수주 감소, 해양플랜트 사업 부진 이중고(二重苦)로 지역경제 ‘휘청’… 내년 수만 명 인력 구조조정 소문에 지역민심까지 ‘뒤숭숭’ 

신기방 뉴스앤거제 대표

거제시는 대우·삼성이라는 세계 2·3위급 대형조선소 덕분에 IMF 한파도 비켜간 국내 주민소득 1위의 도시다. 하지만 세계 조선업의 장기 불황은 거제에도 불황의 그늘을 안겼다.
“오늘 대우조선해양 생산기술팀 상반기 성과발표회가 있었다. (…) 올해 20개 프로젝트가 내년에는 12개로 줄고, 내후년에는 10개로 지금의 절반 일감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일감 많은 해양플랜트는 올해 6개에서 내년에는 3개로, 내후년에는 하나도 없다. 지역경제에 빨간불이 켜졌다. 아니 빨간불이라도 좋으련만, 꽝이 될까 두려움이 앞선다.”

10월 30일 거제시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SNS에 올라온 글이다. 작성자는 대우조선해양에 근무하는 L씨. 모든 시민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 글이 뜨자 시민들 사이에 공포감이 현실화됐다. 민감한 내부 정보를 토대로 쓴 글이라 더 그랬다. 문제의 글 아래에는 “좋은 시절 다 갔다”는 등의 자조 섞인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나중에 L씨의 비관적인 글이 회사 전체가 아닌 생산기술팀에 한정된 내부 자료를 토대로 쓰여진 것으로 밝혀져 일부 수정되긴 했지만 조선경기의 불황에 따른 충격파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특히 글을 올린 L씨가 4선 경력의 시의원 출신이라는 점이 시민들의 위기의식을 더욱 부채질했다고 볼 수 있다.

10월 22일에는 거제시청 도시개발담당 공무원이 지역 언론에 기고한 글이 주목을 끌었다. ‘거제시 다가구 주택공급, 이대로 괜찮을까?’라는 제목의 기고문으로 주요 내용은 이랬다. “현재 각종 건축물을 계획하고 있거나, 투자목적의 다가구주택(원룸) 신축을 계획하는 시민들은 ‘과연 지금이 건축투자 시점인지, 애물단지는 되지 않을는지’ 신중에 신중을 기해 검토·시행하기를 시민 여러분께 고개 숙여 당부드린다.”

수요를 감안하지 않고 거제시에 일고 있는 원룸 신축 붐이 공실(空室)로 남으면서 자칫 지역사회 전체를 파탄의 도가니로 몰아갈 수 있다는 경고를 담은 글이었다. 지역경제의 암울한 미래를 예측한 것이어서 시민들의 공감을 불러왔다.

대한민국 남단의 섬(島) 거제시. 총면적 402㎢의 섬마을 지자체지만, 대우·삼성이라는 세계 2·3위급 대형조선소 두 개를 끼고 있어 세계조선산업의 메카로 불려도 무방하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적한 어촌이었던 거제가 80년대 이후 폭발적인 성장을 지속해온 이유다. 80년대 초 10만 명 남짓이던 인구가 2014년 10월 말 현재는 당시의 3배(외국인 포함 등록인구 25만9900여 명, 실제 상주인구 28~29만 명으로 추정)가량으로 불어났다. 겨우 입에 풀칠하는 수준이었던 주민소득도 2012년 기준 1인당 4만 달러(통계치는 3만9449달러, 전국평균 2만4천 달러)로 늘어나 전국 최고 수준이다.

IMF 한파도 비켜갔는데…!


조선업의 불황으로 거제지역 상권은 이미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고 있다. 거제시 최고의 상권으로 불리던 고현동에도 일부 건물이 텅텅 비는 공동화 현상이 생겨났다
거제시는 1998년 ‘IMF한파’로 한국 경제가 휘청거릴 때에도 끄덕 없었다. 주변의 지자체들이 인구감소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와중에도, 거제는 조선소가 들어선 이후로 단 한 번도 인구감소를 겪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도시 전체가 들썩거려 밤이면 음식점마다 회식하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다운타운의 술집과 클럽에는 새벽까지도 외국인들이 북적댈 정도였다. 주택수요도 크게 늘어나 산 허리에까지 아파트가 들어찼고, 시내의 ‘마당 있는 집’들은 태반이 다가구주택으로 개축됐다. 주민소득 4만 달러에 걸맞게 호텔·백화점·국제학교 등 생활 인프라도 속속 들어섰다. 해금강·외도 등 수려한 자연경관을 끼고 있어 관광산업과 해양레저 산업도 덩달아 일어나 말 그대로 축복받은 땅이었다. 적어도 작년까지는 그랬다.

그런 거제가, 올 들어 급속히 격랑 속으로 빠져든다. ‘10여 년 전 비켜간 IMF한파가 지금 몰려오고 있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흉흉하다. 조선소 구조조정에 따른 직영근로자 감원설이 올 초부터 끊이질 않은데다 협력사 근로자들의 이동이 매월 수천 명에 이를 정도여서 불안감이 도시를 감돌고 있다. 상가들도 매출이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고 아우성이고, 유흥주점은 태반이 죽을 쑤고 있는 실정이다. 가격이 싼 족발집이나 닭발집에 손님들이 몰리고, 덩치 큰 고깃집이나 횟집은 벌써 여러 곳이 문을 닫거나 업종을 바꾸었다. 도시 곳곳에 우후죽순 격으로 신축된 다가구주택들도 공실화가 진행돼 또 다른 문제를 낳게 되리란 우려가 파다하게 퍼져 있다.

통계상의 지표(인구·주민소득·개발허가·관광객 추이 등)에는 큰 변화가 없는데도 실물경기는 왜 이렇듯 급작스레 위축되는 것일까? 원인을 세세히 따지다 보면 문제가 복잡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간단하다. 지역경제 비중의 8할을 차지하는 조선산업의 침체가 현실화됐기 때문이다. 다가올 불황공포에 주민이나 소비처 모두가 지레 겁을 먹고 떨고 있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2007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의 선박수주 침체로, 두 조선사가 대체 주력상품으로 파이를 키워왔던 해양플랜트 산업이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해양플랜트 불황에 도시 전체가 ‘침울’


공급과잉 다가구주택의 공동화 현상은 거제지역 경제를 또 한 번 뒤흔들게 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나온다. 우후죽순 생겨난 시내 원룸가의 모습.
해양플랜트는 일반인에게 생소한 개념이다. 깊은 바다에서 원유나 가스를 뽑아 올릴 때 바다 위 기지역할을 하는 해상구조물이라고 보면 된다. 이 해양플랜트가 국내 조선시장의 주력상품으로 떠오른 것은 5~6년 전이었다. 발단은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야기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리먼브라더스 파산 등)였다.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본격화되자 조선해양산업도 직격탄을 맞았다. 해상물동량이 급감하면서 선박 신조시장이 급격히 얼어붙은 것이다. 회사당 한 해 100척 안팎(2007년 대우조선해양 특수선 포함 137척 수주)에 이르던 상선수주가 급감했다.(대우의 경우 2008년 54척, 2009년 26척)

거제시의 조선사들로서는 당장 먹고 사는 일이 과제였다. 신조시장 냉각이 1년 넘게 이어지자 이대로 가다간 한국의 조선산업이 일본의 조선산업 쇠퇴의 전철을 밟게 되리란 위기감마저 감돌았다. 거제시의회가 일본의 조선산업의 몰락 이후 지역경제 재생사례를 찾기 위해 일본 나가사키 등 10개 도시를 둘러보러 간 것도 이때였다.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구세주처럼 찾아온 것이 해양플랜트 산업의 활황이다. 엑슨모빌·로얄더치셸·쉐브론·BP 같은 국제석유회사(IOC)들이 탁발에 나섰고, 원유값 폭등이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2008년 초 미국 텍사스산 원유가는 배럴당 90달러에서 같은 해 하반기로 넘어가면서 140달러대로 폭등했다. 유사 이래 최고의 고유가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원유값이 폭등하자 글로벌 오일메이저들은 그동안 경제성을 이유로 미뤄뒀던 심해원유시추 시장을 앞다퉈 노크했다. 해저바닥에 기둥을 박고 원유를 뽑아 올리는 대륙붕 천해(淺海)시추와, 5천~7천m 심해에 무려 10만t 내외의 구조물을 띄워 원유를 캐내는 심해(深海)시추는 차원이 다른 기술을 필요로 했다. 세계 조선강국으로 부상한 국내 조선사와 글로벌 오일메이저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렸던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이 주력상품의 무게중심을 해양플랜트로 옮겨간 것도 이때부터다. 2010년부터 엄청난 물량의 수주량이 쏟아졌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상선건조가 주춤했지만, 그 자리를 해양플랜트가 갑절로 메우면서 양대 조선사가 각각 매년 13조~15조원 규모 매출을 꾸준히 올렸다. 상선에 비해 3배가량 많은 현장인력을 필요로 하는 해양플랜트는 조선사들의 현장인력(협력사 중심)도 크게 늘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대우조선해양은 2008년 조선산업 1차위기 당시 총원이 3만 명(직영 1만2천여 명, 협력사 약 2만 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으나, 해양플랜트 수주가 폭주한 2014년 현재 4만6천여 명(직영 1만3천여 명, 협력사 3만3천여 명)으로 증가했다. 삼성중공업도 인력규모와 추이에서 대우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결국 양대 조선 종사자는 종전 7만 명 수준에서 무려 9만5천 명 안팎으로 증가했고, 거제지역 경기를 최고정점으로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쯤에서 ‘해양플랜트’라는 단어는 거제시 미래산업의 핵심키워드로 떠올랐고, 양대 조선은 물론 행정까지 이쪽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집중시켰다. 거제시는 2013년 1월 창원·김해 등 인근 5개 지자체와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해양플랜트산업지원센터’ 거제유치를 확정하기도 했다. 장목면에 들어설 이 시설은 해양플랜트 기반 기술개발, 현장애로 및 실용화 기술개발, 기자재 업체의 엔지니어링 및 마케팅 교육 등을 맡게 된다. 총 1천억원 규모의 시설비는 전액 국비로 충당된다.

이보다 앞선 2012년 3월에는 지식경제부 산하 출연기관인 (재)한국조선해양기자재연구원 거제분원 성격의 ‘해양플랜트 기자재 시험인증센터’를 연초면 오비일반산단에 유치해 개소식을 가졌다. 거제시는 더 나아가 권민호 거제시장과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공약임을 이유로 사등면 사곡만 앞바다 381만1200㎡(약115만평)를 매립, 이곳에 해양플랜트 국가산단(특화산업단지)을 조성하겠다고 나섰다. 총 사업비 1조2664억원이 소요될 이 사업은 민관합동특수목적법인을 설립해 오는 2020년까지 완료하겠다는 복안이지만, 국가산단 지정이나 사업성사 여부는 다소 불투명한 편이다.

유가하락·셰일가스 상용화의 ‘직격탄’


삼성그룹은 올해 중공업의 경영진단에 나서 조선소 인력 감축에 나섰다. 삼성중공업 정문 앞에 쓰러진 자전거를 한 직원이 쳐다보고 있다.
2009년 이후 조선산업의 총아(寵兒)로 불리며 전체 조선물량의 40%대에서 많게는 70%대까지 차지하던 해양플랜트 시장은 2013년 이후 수주량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한국의 해양플랜트 수주는 2009년 52억 달러, 2010년 89억 달러, 2011년 176억 달러, 2012년 218억 달러를 기록하며 정점을 찍다 2013년 182억 달러로 줄어들더니 올해는 3/4분기 기준으로 34억 달러로 급격히 떨어졌다. 대우조선의 경우 올 들어(3/4분기 기준) 쇄빙LNG선 등 상선분야에서 78억 달러를 수주하며 선전했지만, 해양플랜트 수주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삼성도 예년 수준에 못 미치는 상선수주(36억 달러)에다 해양플랜트에서도 지난 3월 말레이시아 국영기업과 계약한 FLNG(부유식 액화천연가스 생산·저장·하역설비) 등 2기를 수주하는 데 그쳤다. 삼성의 해양플랜트 2기 수주가 국내 조선업계의 유일한 성과였다. 2009년 이래 회사마다 연간 10기 안팎의 덩치 큰 해양플랜트 수주 행진을 이어오며 거제시의 미래산업으로 극찬 받던 해양플랜트 시장이, 왜 이렇듯 갑작스레 쇠퇴한 것일까?

대우조선해양의 한 임원은 “유가하락이 직접적 원인이고, 미국의 셰일가스 상용화 및 수출이 기름을 부은 격”이라고 진단했다. 심해 유전개발은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섰을 때 경제성이 있지만, 80달러 밑으로 떨어지면 경제성이 없어 오일메이저들이 발주를 하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셰일가스가 세계 에너지 시장을 빠르게 점유해가는 각국의 ‘에너지 믹스’ 전략변화로, 향후 원유값이 60달러까지 떨어질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추가발주를 기대하기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만큼이나 어려운 상황”이라고 부연했다.

거제시 사등면에서 협력사 기자재공단을 운영하는 이성신대표는 “심해 유전개발 발주는 이미 3년 전 유전탐사가 전제 돼야 한다. 오일메이저들이 2010년을 전후해 뚫은 시추공 물량이 전부 소진됐고, 추가 탐사도 없는 상태”라며 “지금 유전탐사에 들어가더라도 발주는 최소 2~3년 뒤에나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에너지 시장에서 셰일가스가 갈수록 뜨는 반면, 유가는 계속 떨어지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해양플랜트 시장부흥은 기대하기 어렵다”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더 안타까운 건, 국내 조선사들이 해양플랜트 제작에 따른 핵심기술(설계 및 공정관리)이 없는 상황에서 하도급 수준의 조립제작에만 매달리다 보니 실적리스크가 더욱 커졌다는 점이다. 해양플랜트에는 똑같은 설계가 아예 없다. 보통 한 기에 수조 원하는 해양플랜트는 설치 장소나 용도에 따라 설계가 달라진다는 얘기다. 예컨대 오일메이저가 FPSO(부유식 생산저장 하역설비)를 발주하면, 설계는 노르웨이나 프랑스·미국 등 선진국에 맡기고, 이 설계에 따라 국내 업체가 제작시공을 맡는 식이다. 문제는 기본 설계에서 변경이 있을 경우 연쇄적으로 생산설계를 바꿔야 하고, 수만 개의 기자재도 달라지게 된다. 공사비용도 덩달아 늘어나고, 공기도 지연된다. 여기서 발생하는 손해액의 1차 책임은 설계사에 있지만, 생산 및 공정관리, 수주계약 노하우까지 부족했던 국내 조선사들로서는 손해를 떠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 결과가 최근 불거지고 있는 삼성이나 현대의 수조 원대 실적쇼크다. 해양플랜트 전망자체가 최악인 상황에서 이를 국내 조선업계가 감내해야 할 ‘성장통’으로 보기엔 너무나 큰 고통이 아닐 수 없다.

해양플랜트 제작에 따른 실적 악화는 국내 ‘빅3’ 조선소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다. ‘부실 깊이를 모른다’는 대우조선해양은 노사 협상이라는 창구를 통해 대규모 영업 손실을 공사손실충당금으로 털어버렸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주인이 있는 삼성중공업은 사정이 다르다. 조선실적 부진은 곧바로 그룹차원의 경영진단으로 이어졌다. 삼성은 올해 2월 그룹 구조본 차원에서 50여 명의 감사인력을 거제에 파견, 6주간 일정으로 내부 경영진단에 나섰다. 통상적으로 한 달 반이면 끝나는 경영진단은, 연말이 다가오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사실상 강도 높은 감사였다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세 자리 숫자 이상의 직영사원이 옷을 벗었다.(삼성 측은 그만둔 직원이 두 자리 숫자를 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올여름에는 이에 반발한 직원의 자살소동이 지역언론에 보도되면서 일반 시민들이 조선 경기가 심상치 않음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대규모 구조조정의 후폭풍 걱정


국내 조선업의 몰락을 막아낸 일등공신인 해양플랜트는 최근 들어서는 수주량이 거의 없다. 대우조선해양이 최근 인도한 반잠수식 시추선의 모습.
항간에는 해양플랜트 물량이 줄어드는 내년에만 양대 조선협력사 근로자 2만 명 안팎이 감원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한 조선소 관계자는 “가스운반선 수주증가로 해양인력을 상선 쪽으로 돌리면 감소폭은 크지 않다”고 강변하면서도, 감원전망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해양플랜트 수주물량이 거의 소진되는 2년 후에는 인력감축이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이 같은 인력감축은 지역경제를 자칫 파탄의 구렁텅이로 몰아갈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사람은 경기흐름에 따라 왔다갔다할 수 있지만, 늘어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구축한 기반시설(주택·상권 등)은 다시 물릴 수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주택이다. 현재 거제시 주택보급률은 104% 로 공급이 넘쳐난다. 그런데도 2010년 1월부터 2014년 9월말 현재까지 건축허가 건수는 무려 5100여 건에 이른다. 허가건의 상당수가 다가구주택이나 아파트, 펜션 등이다. 아파트는 덩치가 큰 업체에서 나름 수요를 예측해서 분양하고 있고, 투자목적의 집장만 붐까지 편승하다 보니 지금까지 분양에 실패한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다가구주택은 사정이 다르다. 2010년 이후 신축됐거나 신축 중인 다가구주택만 630여 건에 5천 실이 넘는다. 조선경기 흐름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개인들이 눈앞의 현상만 좇아 이른바 ‘마당 있는 집’을 헐어 원룸으로 개축한 것이 태반이다. 해양플랜트 물량증가에 따른 일시적 잉여인력을 겨냥한 시설투자였다. 그 인력이 빠져나가게 되면 그 집들은 고스란히 공실로 남을 공산이 높다. 이런 우려는 지난 여름부터 시내 곳곳에서 현실도 나타났다. 설상가상으로 삼성중공업에서 조선소 인접 장평지역에 3100명 수용규모 기숙사를 짓고 있고, 삼성협력사도 협의회 차원에서 1700명 입주 규모 기숙사를 내년 말 준공을 목표로 건설 중이다. 대우도 아주지역에 기숙사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

조선소 내 일감이 줄어들면서 야근이나 주말 특근이 사라지는 추세도 근로자들로서는 큰 걱정거리다. 이에 따른 수입 감소는 이들의 소비심리를 얼어붙게 만들고, 이것이 지역경기를 짓누른다. 근로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현장근로자 한 사람당 주말(토·일) 특근을 통해 추가로 버는 수입이 한 달에 100만원 정도다. 양대 조선 인력규모를 감안하면 이 돈만 매월 400억~500억원에 이른다. 그러나 올 초부터 일감이 줄어들면서 야근이나 주말 특근이 부쩍 줄어들었고, 하반기 들어서는 이런 현상이 아예 고착화된 분위기다. 대우조선해양 조립부에서 7년째 근무하는 Y씨는 “거제시 경기를 떠받쳤던 실질적 씀씀이는 사실상 이 여윳돈이었는데 지금은 그 돈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양대 조선 해양플랜트 수주의 급작스런 쇠퇴와 실적악화는 지역사회 전반에 적잖은 부담을 준다. 그런 현상은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우나 삼성은 지역사회공헌사업 명목으로 시설원이나 기관단체 행사에 상당한 후원과 지원을 해왔다. 대우조선해양 산하 세영학원(거제대학)까지 감안하면 양대 조선사가 사회공헌사업에 지원하는 금액만 줄잡아 수십억 원에 이른다. 그러나 현재의 추세대로 간다면 이 지원금이 반 토막 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실제 장평동에서 사회단체장 간부 일을 맡고 있는 K씨는 “예전 같으면 행사 때마다 삼성에서 물품과 인력 차량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나, 올해 들어 지원 폭이 눈에 띄게 줄었고, 절차도 까다로워졌다”고 푸념했다. 양대 조선을 상대로 공무자재나 생필품을 납품하던 수많은 사외업체도 일감부족이 소비재 감량으로 이어지면서 예전 같지 않은 영업실적에 울상을 짓고 있다.

공급과잉 다가구주택 공동화 현상도


거제의 양대 조선소인 대우와 삼성의 인력감축은 내년부터 현실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삼성중공업 내 한 직원이 가우징 작업을 하고 있다.
부서차원의 회식 등이 줄면서 음식점이나 유흥가 상권에도 타격을 주고 있다. 예전 같으면 연말 행사로 웬만한 음식점마다 양대 조선 작업복 차림의 단체손님들로 북적거렸겠지만, 최근에는 그런 광경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조선소 작업복 차림 손님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값이 저렴한 음식점이나 선술집에서 삼삼오오 모여있는 게 자주 눈에 띈다. 그만큼 주머니가 얇아졌다는 방증이다. 특히 올 2월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삼성중공업의 장기 감사는 고급 식당이나 유흥업소 영업에 엄청난 타격을 주고 있다는 설명이다. 고현동에서 유흥주점을 운영하는 B씨는 “올 초부터 손님의 발길이 뚝 끊기면서 매달 1500만~2천만원의 적자를 보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업소에서 일하는 아가씨들도 돈이 안 되니 절반이상이 가게를 떠났다”며 “회사에 경영진단을 한다고 감사를 벌이고 업소를 찾아다니면서 직원들의 뒤를 캐는 마당에 누가 유흥주점을 찾겠느냐”고 원망을 쏟아냈다.

조선시장 악화는 시민들의 소비행태에도 적잖은 변화를 불러와 지역 상권을 더욱 쪼그라들게 만든다. 거가대교 개통은 이런 분위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른바 ‘빨대효과’ 때문이다. 거제는 시민의 평균연령이 35.27세로(전국평균 39.8세)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드물게 젊은 도시다. 일감부족으로 주말 특근이 줄어들자 20~30대 젊은층 중에는 주말이면 거가대교를 타고 부산 등지로 나가는 인구가 늘어난다. 거제시의 물가가 타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싸다 보니 젊은층들은 외지에서 여가와 쇼핑을 즐기는 생활 패턴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2004년에 문을 연 거제의 디큐브백화점은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며 연매출 900억원대를 눈앞에 두다가, 올해 처음으로 ‘역신장’을 기록하며 800억원대 매출을 겨우 찍을 것이란 전망도, 이러한 현실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양대 조선이 해양플랜트 수주쇠퇴와 실적악화로 큰 홍역을 치르고, 그 여파로 지역경제까지 얼어붙고 있지만, 2008년 조선업계의 1차위기 때처럼 ‘거제지역 조선소가 문을 닫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이는 별로 없다. 양대 조선이 생산규모에서 세계 2·3위권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데다 1차위기 이후 내성(耐性)도 웬만큼 키웠다고 믿기 때문이다. 양대 조선 또한 조선산업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전망하는 데 더 무게를 둔다. 무엇보다 조선업계는 이번 위기가 2008년 글로벌 경기침체 상황에서 빚어진 수요부진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때의 상황이 재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조선업계는 유가하락에 따른 심해유전개발 해양플랜트 발주가 부진한 것은 사실이지만, 향후 3년 안팎의 조정기를 거치고 나면 유가가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내다보기 때문이다. 중동 산유국들은 생존과 직결된 유가하락을 그냥 두고만 보지는 않을 테고, 오일메이저들도 여기에 힘을 보탤 것이란 계산 때문이다. 미국의 셰일가스 개발은 현재 진행형이지만, 가스전 개발이나 육상 모듈인 옴쇼어(Omshore) 플랜트, 가스운반선 시장의 활황 등도 조선시장 전망을 밝게 해줄 것으로 믿고 있다. 선박의 대형화, 선박 재건조 사이클의 도래, 특수선 수요의 지속화도 국내 조선산업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이끄는 호재로 본다. 미국의 금리인상에 따른 달러강세 기조는 우리 수출산업에 유리하고, 철광석·철강재의 하락세도 원자재 조달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것이란 예측도 나온다.

최대 변수는 역시 유가 유동성과 중국이다. 유가는 조선업계의 바람처럼 쉽게 가격이 회복될지 의문이다. 여기에는 세계 에너지시장의 새로운 대체상품으로 등장한 셰일가스의 명운을 먼저 살펴야 한다. 인류가 향후 200년은 족히 쓴다는 셰일가스에 대한 각국의 ‘에너지 믹서’ 전략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느냐에 따라 유가의 향방도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셰일가스가 향후 세계 에너지시장의 대체상품으로 확실히 인식된다면 석유시장의 미래는 암울하다.

거제의 조선산업, 희망의 불씨는 살아있다

시장이 회복되더라도 그 사이에 중국 조선기술이 우리를 따라잡을 경우 해양플랜트 시장 회복은 사실상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저임금 노동집약형으로 무장한 중국이 기술력까지 갖출 땐 국내 조선업계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게 업계의 일반적 견해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연비가 좋은 LNG 선이나 쇄빙선·드릴쉽 같은 특수선 제조에서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고 있지만, 앞으로 그 격차를 얼마나 더 벌이느냐에 따라 조선산업의 미래가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해양플랜트 분야의 설계기술 향상도 시급히 요구되는 과제다.

지역경제가 호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람이 많아야 한다. 그 사람들이 편하게 먹고 놀고 잘 수 있게 배려한 것이 곧 기반시설이요, 이들의 활용척도가 곧 지역경기의 지표다. 지금, 이 지표가 흔들리는 형국이다. 사람이 빠져나간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와 관련, 양대 조선의 관계자는 “해양플랜트 작업물량이 남아있고, 올부터 수주가 늘어나는 LNG운반선등을 감안하면 급격한 인원변동은 없을 것”이라 입을 모은다. 인원의 급격한 변동(감소)이 없는 한 지역경제의 급격한 침체도 없다는 점은 자명한 이치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경기침체 공포가 단순한 공포에 그칠지, 아니면 실질적인 불황으로 이어져 지역경제를 파탄 낼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201412호 (201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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