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북한.국제

Home>월간중앙>정치.사회.북한.국제

조용헌의 인물탐구 - 정치인의 기질과 운명론 | 홍준표 경남도지사 - 차기 대권무대는 춘추전국, 시대정신 만나면 뜰 수 있다 

칼 한 자루 차고 ‘도꼬다이’로 풍파 헤쳐온 낭인 검객 이미지… 시대정신이 검객의 결단력을 요구한다면 홍준표도 유력한 반열 오를 것 

글 조용헌 원광대 불교학 박사, 사진 지미연 월간중앙 기자
지도자의 조건은 ‘세 가지 액체론’에 있다. 피, 땀, 눈물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액체를 얼마나 많이 흘렸느냐에 따라 그 그릇의 크기가 커지고 그 영혼의 깊이가 깊어진다. 이 고생을 뚫고 나오지 못하면 죽는 것이고, 뚫고 나오면 큰 인물이 되는 것이다. 홍준표는 과연 피, 땀, 눈물을 얼마나 흘렸을까?




▎경남도청 지사실에 마련된 접견실에서 처음 마주친 홍준표의 첫 인상과 몸에서 풍기는 체취는 칼을 든 검객(劍客) 같은 느낌이다.
한양 쪽에서 낙동강을 놓고 바라볼 때 낙동강의 좌측과 우측의 학풍과 기질이 다르다. 강좌(江左)와 강우(江右)가 다른 것이다. 강좌는 오늘날 경상북도이고, 강우는 경상남도이다. 강좌를 대표하는 학풍이 퇴계학풍(退溪學風)이고, 강우를 대표하는 학풍은 남명학풍(南冥學風)이다. 흔히 퇴계 쪽이 경(敬)을 강조하는 학풍이라면 남명 쪽은 의(義)를 강조하는 학풍이라고 본다. 퇴계가 겸손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제자를 양성했다고 한다면 남명은 경의검(敬義劍)과 성성자(惺惺子)라고 하는 방울을 차고 다니면서 제자를 강하게 키워냈다. 평상시 움직일 때마다 짤랑짤랑 소리가 나는 방울을 찬 이유는 무엇일까? 항상 깨어있으려는 방편이었다. ‘멍 때리고 있지 말라’는 이야기다.

선비라 하면 평상시 자기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자기를 분리주시(分離注視)하고 있는 것이 깨어 있음이다. 평상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기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는 또 하나의 자기가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를 객관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방울 소리가 날 때마다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지 안 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셈이다. 평상시 수행법이 방울이라고 한다면 유사시에는 칼을 들고 나가 의(義)를 실천해야 진짜 선비라 여겼다. 흔히 남명을 가리켜 ‘칼 찬 선비’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경상우도에서 많은 의병이 일어나 싸웠다. 망우당 곽재우, 내암 정인홍 같은 남명의 제자가 칼을 들고 일어나 싸웠던 것이다. 우도에는 남명 이래로 칼을 든 강건한 선비의 기풍이 알게 모르게 전해져 내려온다. 거기에다 우도의 산세는 험한 바위산이 많다. 합천의 가야산이나 표충사가 있는 밀양 재약산 일대의 산세는 무골(武骨)이 많이 나올 산세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지 않던가! 과거는 과거로 끝나는 게 아니다. 유전된다. 현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역사와 산세, 그리고 기질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화왕산 자락의 ‘불꽃 기질’ 타고나


▎홍준표 지사는 불꽃을 상징하는 붉은색을 좋아한다. 그가 태어난 곳에서 지척인 창녕 화왕산(火旺山) 역시 ‘화기가 왕성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유력한 대권주자의 한 사람이자 현재 경남지사로 있는 홍준표. 남명학풍이 깔려 있는 경상남도의 지사다. 출생지도 경남 창녕의 화왕산(火旺山) 자락이다. 경남도청 지사실에 마련된 접견실에서 필자와 처음 마주친 홍준표의 첫 인상과 몸에서 풍기는 체취는 칼을 든 검객(劍客)의 느낌이다. 키는 169㎝. 몸매도 호리호리하다. 뚱뚱하면 검객이 아니다. 키가 너무 커도 검객 노릇 하는데 지장이 있다. 왜냐하면 검객은 순간적으로 칼을 찔러 베어야 한다. 뚱뚱하면 스피드가 떨어진다. 키가 크면 동작이 커지기 마련이어서 상대가 이를 눈치 채고 방어 자세에 들어간다. 키가 작고 민첩해야만 순식간에 칼을 쓴다. 그래서 검객 몸매는 따로 있는 것이다.

이소룡도 키가 아마 170㎝ 정도 되었다. 미국 태권도계의 대부 이준구 사범도 170㎝가 안 되는 키였다. 계룡산 연천봉(連天峰) 밑에서 수련하는 기천문(氣天門)의 장문인인 박사규 문주도 만나보니 키가 170㎝가 안 되었다. 공통적으로 키가 그리 크지 않고 날랜 몸집이다. 무술 고수는 작아야 한다. 스피드가 생명이기 때문이다. 검객의 생명은 정확한 타이밍을 포착한 다음에 정확하게 찌를 지점을 파악하고, 온 몸을 던져 칼을 찔러야 한다. 만약 이 계산이 잘못되면 자기가 죽는다. 칼을 쓸 때는 자기도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세상만사 ‘리스크 테이킹’이다. 안전빵은 없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말이 그렇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타고난 기질과 성장과정, 그리고 자기가 하는 직업적 탁마(琢磨)와 관련이 있다.

오늘도 홍준표 지사는 붉은 넥타이를 매고 있다. 빨갱이도 아닌데 붉은색을 좋아한다. 붉은색은 원래 귀신을 쫓는 색이다. 그래서 중국 황제들은 붉은색을 좋아했다. 도장 찍을 때 쓰는 인주의 재료도 경면주사(鏡面朱砂) 아닌가. 한자문화권에서 붉은색은 아무나 쓸 수 없는 색이었다.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색이었던 것이다. 불꽃을 상징하는 색 아닌가.

출생지가 창녕 화왕산(火旺山) 자락이라고 들었다. 요즘 이 산자락 밑에서 태어난 인물이 많다고 하던데….

“나는 화왕산 남쪽에 해당하는 남지읍(南旨邑)에서 태어났다. 야당의 박영선 의원도 창녕 남지 태생이다. 설훈 의원은 남지다. 박원순도 역시 화왕산 자락인 장마면이다. 작년에 서울대 총장이 된 성낙인도 역시 화왕산 자락이다. 성낙인은 창녕 대지면(大池面) 출생으로 안다.”

화왕산은 ‘화기가 왕성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창녕의 지네명당(지네처럼 발이 많은 명당)인 오공혈(蜈蚣穴) 1만평 저택인 성부자집 앞산이 화왕산이다. 성부자집 대청마루에 올라서 화왕산을 바라보면 불꽃이 이글거리는 화체(火體)의 산으로 보인다. 게릴라전의 명수이자 왜군에게 결코 패하지 않았던 명장 망우당 곽재우 장군이 산 위에 산성을 쌓고 왜적과 싸웠던 곳이 바로 화왕산이다. 화왕산 자락에서 태어난 인물들은 한결같이 화기가 많다. 홍준표도 화가 많은 검객이고, 박영선도 저격수이고, 설훈도 강골이다. 박원순도 겉으로 보기에 생김새는 순한 것 같지만,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지 않는가.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고 하는데 근래에 이 화왕산처럼 인물을 많이 배출한 산도 드물다고 여겨진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로 영남 남인(南人)들이 기호노론(畿湖老論) 정권으로부터 탄압받고 있을 때에는 강우(江右) 지역에서 인물이 나와도 행세를 못하였다. 때를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961년 5·16 이후로는 강좌와 강우를 비롯한 영남 남인들의 시대가 왔다. 때를 만난 것이다. 인물이 나와도 시대를 만나야 써먹는다. 천시(天時)가 이때 작용한다. 지리(地利)와 인사(人事)도 천시를 만나야 발복하지 않던가!

대권주자로서 밀리지 않는 급수의 태몽

태어날 때 어떤 인물이 지령(地靈)을 받고 태어났는지 여부는 태몽을 물어보면 알 수 있다. 어떤 태몽을 꾸느냐도 상당히 중요하다. 4차원에서 3차원으로 넘어올 때 한 커트 보여주는 장면이 태몽이다. 한국 사람은 90% 태몽을 꾼다. 태몽은 함축적이다. 태몽 속에는 여러 가지 숨은 그림이 들어 있다.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이 상징과 함축을 어떻게 푸느냐가 그 사람의 운명을 예시해준다.

태몽이 무엇이었나?

“어머니가 달을 치마폭에 안는 꿈을 꾸었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무학(無學)이라 글을 못 읽었다.”

어머니가 학벌이 좋다고 해서 좋은 아들이 잉태되는 것은 아니다. 자식은 몇 대 위의 조상이 오는 경우가 있다. 물론 친가나 외가의 조상도 해당된다. 달을 치마폭에 안는 꿈은 좋은 꿈이다. 용이나 호랑이를 안는 꿈보다 차원이 높다. 해와 달은 하늘의 별이다. 지상의 동물보다 높은 차원이다. 대체로 해나 달이 나오면 높은 영계(靈界)에서 왔다고 본다. 달을 안았다는 태몽을 들어보니 노무현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생각난다. 노무현이나 홍준표는 같은 과다. 검객 과(科)라고 볼 수 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지점을 정하면 과감하게 돌진하는 점에서 비슷하다.

솔직하고 단순하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2002년 12월 말 노무현 당선자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노무현의 태몽을 물어보니 백마(白馬)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백마는 총칼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지휘관이 타는 말이다. 마권을 걸고 뛰는 경마장의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홍준표는 검객이라는 측면에서는 노무현과 여러 가지로 비슷한 면이 있는데, 태몽의 내용에서는 좀 다르다.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에 역시 필자가 이명박 시장과 식사를 하면서 태몽을 물어보았던 적이 있다. 이때 이 시장은 ‘뒷동산에 보름달이 떠오르면서 동네가 환해졌다’는 태몽을 이야기해주었던 생각이 난다. 그래서 이름을 명박(明博)이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홍준표도 달을 치마폭에 안았다는 태몽이 사실이라면 이 꿈은 상당히 귀한 꿈이다. 이명박의 보름달 꿈 유형에 속한다. 대권주자로서 밀리지 않는 급수의 태몽이라는 생각이 든다.

큰 인물이 되는 데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우선 팔자에 타고난다. 운명적 요소가 있는 것이다. 기독교식의 주님 섭리를 인수분해하면 사주팔자이고, 불교식으로 이야기하면 전생 성적표가 팔자다. 그런데 이 팔자에 고생이 들어 있다. 반드시 고생하도록 프로그램이 되어 있는 것이다. 고생 안하고 인물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우주에 공짜는 없다는 이치 일까? <맹자>에 보면 그 고생 프로그램에 관한 유명한 문장이 나온다. 조선시대 유배길에 오르던 선비들이 입으로 중얼거렸던 문장이기도 하다.

“天將降大任於斯人也 必先勞其心志 苦其筋骨 餓其體膚 窮乏其身 拂亂其所爲 是故 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그 사람에게 맡길 때에는 먼저 그 마음과 뜻을 힘들게 하며, 근육과 뼈를 고통스럽게 하며, 육신을 굶주리게 하여 피골이 상접하기도 하고, 궁핍에 빠지게도 하고, 그가 하는 일들을 어지럽히고 실패하도록 하게 한다. 이러면서 참을성을 길러 아주 어려운 일도 감당하게 만든다.)”

필자가 생각하는 지도자의 조건은 ‘세 가지 액체론’이다. 피, 땀, 눈물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액체를 얼마나 많이 흘렸느냐에 따라 그 그릇의 크기가 커지고 그 영혼의 깊이가 깊어진다. 처절한 고독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기 혼자라는 처절한 고독 속에서 깊어진다. 세 가지 액체를 흘리면서 인간은 도를 닦는 셈이다. 책만 봐가지고는 도는 안 닦아진다. 인간은 ‘조실부모, 인생파탄’ 나면서 액체가 다량으로 유출된다. 공자도 그렇고, 예수도 그렇다. 석가는 제 스스로 집을 나가 밥을 굶고 고행을 하지 않았던가. 따지고 보면 해방 이후 이승만부터 박정희를 거쳐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박근혜에 이르기까지 모두 고생 많이 한 사람들이다. 부모 덕 없다고 한탄할 일이 아니다. 인물이 나오려면 초년 인생의 사주팔자 프로그램이 조실부모 아니면 인생파탄에 가깝게 되어 있어야 한다. 이 고생을 뚫고 나오지 못하면 죽는 것이고, 뚫고 나오면 인물 되는 것이다.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죽통병’이다. 죽거나 통하거나 아니면 병이 들거나 하는 것이다.

피눈물 나는 어린 시절의 가난


▎1. 1977년 2월 고려대 법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홍준표 지사가 포즈를 취한 모습. 2. 어린 시절 누이와 함께 찍은 사진. 4∼5세 무렵이지만 표정은 진지하고 어른스럽다. 3. 중학 시절 소년 홍준표는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가정형편은 여전히 어려웠지만 표정은 밝고 활달하다. 4. 패기만만했던 고대 법대 1학년 시절의 홍준표. 처음에는 육사 진학을 지망했지만 부친이 억울하게 무고를 당하는 모습을 보며 법대로 진로를 바꿨다.
이 공식에 비추어 본다면 홍준표는 피, 땀, 눈물을 얼마나 흘렸단 말인가? 그가 2009년에 중간 결산으로 자신의 지난 인생을 정리한 <변방>이란 책을 보면 책의 3분의 1이 유년시절에 겪었던 배고픔과 가난에 대한 내용이다. 이렇게도 못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성장과정에서 겪었던 밑바닥 체험을 들었다. 육성 내용보다도 <변방>에 나온 내용이 더 압축적이어서 책 내용을 직접 인용해본다.

“그 시절 나의 유일한 낙은 일요일 아침에 아버지가 주시는 1원을 받아 들고 영화 2편을 동시상영하는 노동회관에 가서 하루 종일 굶어가며 외국 영화를 이해될 때까지 보고 또 보는 일이었다. 우리는 대구에서 보낸 2년 동안 고향의 전답을 다 팔아먹고 다시 고향 근처 시골로 가게 되었다. 아홉 살이던 그해 12월 27일. 눈보라 속에서 우리는 또다시 손수레에 짐을 싣고 걸어서 창녕으로 이사를 떠났다. 월배를 지나 화원, 논공을 거쳐 위천에 도착하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위천 여관방에서 밥 두 상을 사서 먹었는데 한 상은 아버지와 내가 먹고 나머지 한 상은 어머니와 누이 세 명이 나누어 먹었다. 밥 한 그릇을 네 사람이 나누어 먹은 누이 세 명은 배가 고파 그날 밤 여관방에 매달려 있는 메주를 뜯어 먹고 밤새 도록 설사를 하였다. 그 이튿날 창녕읍으로 내려가면서 아버지는 허기를 채워 줄 목적으로 엿을 사서 전 가족에게 나누어주었다. 심이리에 이르렀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은 서커스 단원들이 온 것으로 알고 우리를 감싸고 돌면서 마치 원숭이 구경하듯 놀리기도 하였다. 참으로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우리 가족이 밤늦게 창녕에 도착하여 짐을 꾸리고 있는데, 주인 할머니가 자식들이 많아 방을 내줄 수 없다며 내일 당장 나가라고 하는 바람에 하루 만에 쫓겨 나와 술정리에 있는 곰보 아저씨의 집 아래채에 자리를 잡았다. 창녕에서 부모님은 대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손수레를 끌고 시골로 돌아다니면서 양은그릇 장사를 했다. 그러나 외상값도 받지 못하고 손해만 늘어 더 이상 장사로는 살 길이 없어 6개월 만에 여동생만 데리고 본업인 농사를 짓기 위해 합천 산골로 또 이사를 했다. 창녕읍에는 작은누나와 나만 학업관계로 남고 나머지 가족은 합천으로 이사를 가기는 했으나 그곳에서도 살기 어려웠다. 더구나 하천부지 모래밭만으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해 추석 무렵 낙동강 물이 불어나 합천에서 양식이 오지 않아 작은 누나와 나는 꼬박 3일을 굶을 수밖에 없었다. 양식을 가져온 어머니는 두 자식이 거지처럼 살고 있는 것을 보고, ‘가자,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면서 합천 산골로 우리를 데려갔다. 6개월간 두 집 생활을 하다가 나는 부모님이 계시는 합천 산골로 다시 전학을 하였다. 초등학교 6년 동안 다섯 번이나 전학한 것이다.”(18∼20쪽)

“1960년대 우리나라의 최고 수출 품목은 가발이었다. 가발을 수출하기 위하여 원료로 처녀들의 긴 머리카락이나 머리 빗을 때 나오는 탈모뭉치를 수집해 가공하여 가발을 만든다. 어머니는 마을 아주머니들을 따라서 바늘, 실, 여자들 노리개 등 방물을 머리에 이고 서부 경남지역으로 다니면서 머리카락과 방물을 수집해 오면 가발상이 와서 머리카락을 저울에 달아 현금을 줬다. 해질녘이면 나는 낙동강 선창가에 가서 건너편 백사장을 바라보면서 어머니가 오시기만을 기다렸다. 달비(머리카락) 장사를 하면 대개 식사는 방문하는 집에서 얼렁뚱땅 얻어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런 요령이 없던 어머니는 얻어먹지도 못했다. 그런 어머니가 걱정되었다.

내 여동생은 학교 갔다 오면 홀치기로 돈을 벌고 있었다. 홀치기는 일본 여자들 옷인 기모노의 허리 장식품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 시골처녀들은 홀치기로 외화를 벌어들였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선창가에서 피라미 낚시로 아버지의 횟감을 마련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보름 후 저녁 무렵에 돌아온 어머니는 기진맥진해 쓰러졌다. 같이 간 아주머니는 넉살이 좋아 밥을 얻어먹고 다녔는데 어머니는 하루에 한 끼도 먹지 못했다고 했다. ‘다시는 가지 마라. 사람 잡겠다’며 아버지는 화를 버럭 내셨지만 측은했던지 손수 미음을 끓여 어머니께 주셨다. 그날 밤 나는 낙동강변에 나가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실컷 울었다. 우리 가족이 이렇게 사는 것도 분하고, 어머니의 기진맥진한 모습을 보고도 부모님을 도울 길이 없다는 것이 분했다. 막노동이라도 해서 보모님을 도울 수만 있다면 나서 보겠는데 나는 키도 작은 꼬마였고 힘도 없었다. 내가 꼭 해야 할 일은 공부라도 열심히 하는 길밖에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8㎞ 떨어진 옥야중학교에서 오라고 했으나, 나는 그 제의를 뿌리치고 보리쌀 두 말을 들고 대구로 유학을 떠났다.”(30∼32쪽)

홍준표의 성장과정은 가난과 배고픔, 그리고 어디에다 기댈 곳이 없는 밑바닥 삶이었다. 성장과정에서 가난하게 살았다고 해서 다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삐뚤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런가 하면 가난을 딛고 일어나 자수성가하는 인물이 되더라도 돈에 너무 집착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 그 놈의 돈에 한이 맺혔으니 돈이나 실컷 모으자. ‘황금만능교’ 신자가 된 사람도 많이 보았다. 짠돌이로서 일관된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그것이다. 사업가 중에 자수성가한 사람치고 돈에 후한 사람 별로 못 보았다. 돈에 아주 짜다.

파친코 수사 때 100억원 주겠다는 제안 받아


▎검사 시절 선후배 검사들과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있는 홍준표. 사진제공·홍준표 046-
돈을 벌기는 어렵다. 그러나 쓰는 것은 예술이다. 돈을 제대로 쓰기가 정말 어렵다. 돈 쓰는 법은 레슨 받아야 안다. 그렇지 않으면 모른다. 홍준표의 경우는 고려대 법학과를 나와 고시를 합격하고 검사가 되었다. 검사가 돈 버는 직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과 아주 거리가 먼 직업도 아니지 않은가? 검사는 칼자루 잡은 직업이다. 그래서 돈도 모을 수 있다. 물론 변호사 개업해서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홍준표가 검사로서 한국사회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드라마 <모래시계>라고 볼 수 있다. ‘모래시계 검사’가 홍준표라고 세간에 알려져 있다. 1990년대 초반에 파친코 업체를 수사한 실화를 소재로 해서 만들어진 드라마가 모래시계인데, 여기에 등장하는 검사가 홍준표의 체험을 소재로 했다고 한다.

당시 파친코 업체를 수사할 때 이야기 좀 해달라. 수사를 하다 보면 돈에 대한 유혹도 들어왔을 텐데, 어땠나?

“고위층을 통해서 사건에서 손을 떼고 수사를 중지하면 100억원을 주겠다는 제의가 들어왔다. 파친코 수사는 정식 번호가 달린 사건도 아니었다. 순전히 나 혼자서 진행해왔던 것이 었다. 검찰의 공식적인 수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수사를 중지한다고 해도 하등의 문제가 될 게 없었다. 그러나 받지 않았다.”

1993년 당시 100억원이면 지금의 1천억원쯤 되는 액수 아닌가? 그 돈 가지고 검사 그만두고 외국 나가서 편히 살면 될 텐데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나?

“그 돈을 받으면 삶의 목표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그것으로 끝난다. 놀고 먹고 살면 의미가 없다. 인간은 자기의 이상과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돈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현실적으로는 당시에 100억을 받을 배짱도 내게는 없었다. 뇌물을 받으려면 배짱이 있어야 한다. 100억원을 현찰로 계산하면 사과궤짝으로 50개 분량이다. 사과궤짝 1개에 2억씩 들어가니까. 이 50개 분량을 어디다 보관할 텐가? 만약 100억을 받으면 무기징역쯤 형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왜 범죄자의 삶을 살아야 하나. 정직하고 속 편하고 정정당당하게 인생을 살아야지. 그렇지만 100억을 나에게 제의한 고위층에게 ‘나를 100억원이라는 비싼 금액으로 평가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전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수사를 계속해서 비리를 터뜨려버렸다.”

밥 굶고 학교에 가야 하는 가난한 청소년 시절을 겪으면서 생계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 밥은 굶지 않아야 된다는 그런 강박감 같은 것 말이다.

“고시에 합격하고 검사로 발령 나면서 ‘이제는 굶지 않겠구나’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검사생활만 올바르게 하면 월급 나올 것 아닌가. 검사 후에는 변호사를 해도 되고. 검사 월급을 받고 보니 이 정도 금액이면 재벌도 부럽지 않았다. 생계에 대한 불안감은 완전히 떨쳤다. 나는 이 월급이면 충분하다. 검사라는 명예가 있다. 돈과 명예를 다 쥐려면 천벌받는다. 그 이상 바라면 멍청한 인간이라고 다짐하곤 했다.”

여러 번 고시에 낙방했다고 들었다. 고시 공부를 하는 동안 부인이 뒷바라지를 했다고 하는데, 부인은 어떻게 만났나?”

“고대 법대 재학시절에 하루는 국민은행 안암동 지점에 돈을 찾으러 갔다. 은행 창구에 달덩이처럼 보이는 여직원이 한 명 눈에 띄었고, 결국 그 여직원과 결혼했다. 유목민으로 떠돌아다니며 살다가 와이프를 만나 처음으로 정착민이 된 것 같은 안정감을 느꼈다. 집 사람은 전북 부안이 고향이고, 군산에서 여상을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한 것이었다. 전라도 여자다. 처갓집이 전북이다. 결혼 초창기 무렵 대선에 YS와 DJ가 나왔을 때 지지자가 달라서 부부싸움을 한 적도 있다. 영호남의 화합 문제는 부부간에 살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홍준표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돈에 사로 잡히지 않고 그 어떤 이상을 추구하는 팔자였던 것 같다. 그가 검객이 될 수 있었던 자질 가운데 하나가 어렵게 컸으면서도 재물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가난을 겪은 사람이 재물을 극복하고 ‘정의’라는 명분을 가지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이미 찢어지게 어렵게 살아보았는데, 더 이상 고생이 와도 두렵지 않다고 말이다. 칼 한 자루 차고 천하를 떠돌아다니는 낭인 검객 같은 기질이 형성될 수 있다.

검객은 잘라야 한다. 칼로 자르는 게 결단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결단한 사례를 몇 개 꼽아달라고 하니 홍 지사는 네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등록금 안 내는 육사를 가려고 했다가 막판에 방향을 바꿔 대학에 간 일. 둘째는 아내를 선택한 일. 셋째는 정치판에 들어와서 1999년 한나라당을 탈당하지 않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일이다. 넷째는 2011년 경남지사 보궐선거에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한 일이었다.

육사를 가지 않고 대학에 진학하게 된 계기가 흥미롭다. 육사 원서를 쓸 무렵에 시골에 사시던 아버지가 남이 훔친 비료를 취득한 장물취득 혐의로 지서에 잡혀 가는 사건이 있었다. 정황을 알아보니 동네의 유지였던 농협조합장에게 찍혀서 그렇게 누명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조합장은 새마을 자금을 상수도 놓는 데에 쓰자고 했으나 아버지는 마을회관을 짓는데 쓰자고 다른 의견을 주장한 탓이었다. 조합장은 양조장을 하니까 상수도 설치가 자신의 사업에 중요한 이득이 되는 일이었지만, 아버지가 보기에 마을회관은 주민 모두에게 골고루 이로운 일이었기 때문에 조합장 의견에 반대했던 것이다.

유연하면서 휘는 칼이 더 예리하다


▎홍준표가 ‘검객’이 될 수 있었던 자질 가운데 하나는 어렵게 살았으면서도 재물에 눈뜨지 않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육사가 아니라 법대로 진학하여 힘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당하는 일이 없애야 한다고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홍준표가 이 사건을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계기로 생각하는 것은 사회정의에 눈뜨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 홍준표는 이때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그가 ‘없어도 곧게 살았다. 경우에 어긋나지 않게 살았다’는 점을 크게 꼽았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경우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이 유전자로서 자신에게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렇게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곧은 성격이 칼잡이 검객으로서 홍준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대목이다.

둘째, 여상(女商)을 졸업한 여자와 결혼한 것도 곱씹어볼 대목이다. 어떻게 연애는 했다고 하더라도 고시 패스하고 결혼할 때쯤이면 고무신 바꿔 신고 부잣집 딸에게 장가 가는게 정석 아닌가? 고시패스 하면 열쇠 몇 개 주는 부잣집에 장가가야 정답 아닌가? 홍준표는 그런 속물은 아니었다. 가난한 수재 총각이 고시 합격해서 부잣집으로 팔려가지 않는 것도 쉽지 않은 결정이다. 이런 기로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은 그 사람의 타고난 어떤 기질이 작용한다. DNA가 작용한다고나 할까.

셋째는 1999년 6월에 한나라당을 탈당하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한나라당에서 DJ 저격수를 하는 바람에 DJ가 정권을 잡자 ‘보복’이 들어왔다. 보복은 선거법 위반이었다. DJ측근이 탈당하면 무혐의로 해주겠다는 제안도 들어왔다. 이틀간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다.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38명이나 탈당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국 탈당하지 않았다. 잠을 안 자고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하루 전 그는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내 팔자로 알고 받아들이겠다’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넷째는 경남지사 보궐선거 출마였다. 최대의 고민은 자신의 계파(系派)가 없다는 점이었다. 도지사 선거에 나오려고 하니까 어려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계파가 없어도 창업(創業)은 가능하다. 본인 능력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계파가 없으면 수성(守成)이 어렵다. 어려움에 몰려도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경남지사 선거는 어떻게 운 좋게 개인기로 돌파한 셈이다. 이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능성 높이면 세는 모아진다”


▎부인 이순삼 여사는 전북 부안이 고향이다. 군산에서 여상(女商)을 졸업한 후 은행에 취직해 일하던 중 홍 지사를 만났다.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돌진하는 칼잡이가 자신의 인생 역정에서 겪은 결단의 순간이었다. 이런 결단을 겪으면서 칼이 좀 더 유연해졌으리라. 경험이 쌓이면서 유연해지는 법이다. 처음에는 청룡도를 선호했을지라도 실전을 겪으면서 칼이 좀 더 유연하고 부드러워지기 마련이다. 고수가 될수록 유연해진다. 크고 무거운 칼은 자유자재로 휘두르기 어렵다. 청룡도로 내리쳤을 때 빗맞으면 자기가 죽는 수가 있다. 경직된 칼은 빼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유연하면서 휘는 칼이 더 예리하고 상황변화에 적응한다.

홍 지사에 대한 세간의 별명이 ‘도꼬다이’다. 일본어로 특공대(特攻隊)라는 뜻이다. 무슨 일을 여럿이 하지 않고 혼자서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주변과 상의 없이 자기 독단적 결정을 많이 한다는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는 별명이기도 하다. ‘튄다’는 뜻도 있다. 도꼬다이가 되면 세(勢)가 약해진다. 정치에 대해서 3김씨는 한마디씩 남겼다. YS는 ‘세(勢)’라고 했고, DJ는 ‘생물’, 그리고 JP는 ‘허업(虛業)’이라고 했다. 각자의 기질과 인생철학이 들어가 있는 말이다. 칼잡이 검객의 이면이 ‘도꼬다이’가 아닌가 싶다. 동전의 양면이다. 도꼬다이는 ‘세’가 없다는 약점이 있다. 이 점이 정치인 홍준표의 약점으로도 지적된다.

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세가 없이 대권 잡을 수 있겠는가?

“대권에 근접했다고 느껴지면 자동적으로 ‘세’가 모인다. 김대중·김영삼 시대는 동지, 의리가 필요했다. 오랜 세월 쌓인 신뢰가 중요한 자산이었다. 지금은 자기 이익으로 이합집산하는 시대다. 손해를 보면서 의리를 택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대통령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될 때 세는 모이게 되어 있다. 국민으로부터 대통령감이라고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는 절대 강자가 없다. 춘추전국시대다. 지금의 대권주자 지지율은 참고자료일 뿐 크게 의미가 없다. 폭발적인 계기를 만나면 뜬다. 뜨면 지지율은 순식간에 올라간다. 또 하나의 특징이 여·야 대표선수가 된다면 진영싸움이 되어버리는 상황이다. 관건은 대표선수가 되는 일이다. 대표선수가 되려면 ‘저 사람 내 보내면 대권 잡을 수 있다’는 합의점이 있어야 한다. 여기까지(대표선수)는 본인의 노력이 필요하다. 시대정신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지도자의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결단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경남지사라는 자리에 있지만 홍준표는 칼 한 자루 차고 도꼬다이로 풍파를 헤쳐온 검객의 이미지다. 여기까지 오면서 그가 칼 맞고 죽지 않은 덕택은 ‘달을 치마폭에 안은’ 어머니 태몽꿈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다가오는 시대정신이 검객의 결단력을 요구한다면 그는 대권을 잡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못 잡을 것이다. 과연 천시(天時)는 무엇인가?

조용헌 - 원광대 불교학 박사. 지난 20여 년간 한·중·일 3국의 1천여 사찰과 고택, 영지(靈地)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재야의 수많은 기인, 달사를 만나 교유했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천문·지리·인사 등 강호동양학의 3대 과목을 한국 고유의 문화 콘텐트로 자리매김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조용헌의 사찰 기행>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방외지사> 등이 있다.

- 글 조용헌 원광대 불교학 박사, 사진 지미연 월간중앙 기자

201502호 (2015.01.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