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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치 |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아베의 ‘일방 정치’ - 아무리 몸부림쳐도 헌법개정은 어렵다 

일본이 군국의 길 걷지 못하는 이유는 ‘고령화와 인구감소’… 군사대국 일본을 만들 파워와 에너지는 남아있지 않다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현대> 부편집장
거품경제를 경험하지 못한 일본 차세대 정치 리더들은 ‘위축사회’를 짊어질 운명이다. 그들은 원전 재가동도, 군비확장도 하지 말자고 주장한다. ‘초식계(초식동물과 같은 온순하고 소극적인 인간)’라고 불려질 만큼 패기와 강단을 잃어버린 세대다. 주력 세대의 동력이 없이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아베의 시도는 그래서 무모하다.

▎작년 12월 24일 일본 의회 총리지명 투표로 3차 내각을 공식 출범시킨 아베 신조 총리(오른쪽)가 참의원에 출석해 인사하고 있다.
한국과 달리 일본의 크리스천 수는 3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내 주변에도 전무하다. 그래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야만큼은 사정이 달라진다. 일본인은 1년에 단 하루만, 갑작스럽게 크리스천으로 다시 태어나고, 밤에는 가족이나 연인들과 케이크를 갈라먹고 크리스마스를 축하한다. 그러나 2014년 12월 24일 밤, 도쿄(東京)·나가타초(永田町)에 위치한 총리관저만큼은 그러한 크리스마스 분위기와는 달리 급박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날 오후, 12월 14일의 총선거 결과를 보고받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임시국회를 소집, 국회에서 총리지명 선거를 거쳐 제3차 아베 내각을 발족시켰다. 아베 총리는 황거(皇居: 일본 천왕의 사는 곳)에서 천황을 앞에 두고 ‘인증식’을 마친 후, 오후 9시가 조금 지나 수상관저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아베 총리는 이 자리에서 일부러 헌법개정을 언급하며 자신의 뜨거운 생각을 이렇게 토로했다.

“저는 현재, 전후의 대개혁을 추진 중입니다. 심한 저항도 있지만 이번 총선거로 이 길로 뚝심 있게 나아가라는 국민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헌법개정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1955년의 자민당 창당 이래 계속돼온 목표였으며, 이번 선거공약에도 명기했습니다. (2005년의) 헌법개정안은 제가 자민당 간사장 시절 만들었습니다. (2014년 6월에) 국민투표법을 개정하고, 투표연령을 20세 이상에서 18세 이상으로 내렸습니다. 먼저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3분의 2 이상이 건의(동의)하고, 국민투표에 부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앞으로 국민적인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민주당 집권보다는 아베가 낫다”

아베 총리에게 헌법개정이란 ‘평화헌법의 상징’이라고 하는 헌법 제9조를 바꾸는 것이다. 헌법 제9조에서는 ‘전쟁의 포기’, ‘전력의 불보유’, ‘교전권의 부인’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을 아베 총리는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군대를 보유하는 일본’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것이다. 아베 총리가 가장 바꾸고 싶은 헌법 조항이 바로 제9조다.

일요일이었던 지난해 12월14일, 일본에서는 2년 만에 총선거가 실시됐다. 그리고 중의원 총 475개 의석 가운데, 아베총리가 거느리는 자민당은 291석(해산 전 295석)을 획득하며 압승을 거뒀다. 연립여당을 구성하고 있는 공명당도 31석에서 35석으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자민당과 공명당을 합치면 여당은 총 326개의 의석을 확보하게 됐으며 이는 곧 헌법개정에 필요한 3분의 2인 317석을 뛰어넘은 것을 의미한다.

한편 최대 야당인 민주당은 불과 73석(해산 전 62석)을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당초 100석을 목표로 했던 민주당은 자민당 의석의 고작 4분의 1을 얻는 데 그치면서 참패했다. 무엇보다 민주당의 가이에다 반리(海江田万里) 대표 자신이 도쿄 1구의 선거구에서, 2년 전까지 회사에 근무하던 직장여성 출신의 40세 자민당 여성후보에게 패배하며 국회를 떠나고 말았다. 선거분석에 정통한 전 교도통신사 정치부장 노가미 타다코(野上忠興) 씨는 이번 선거결과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많은 일본인이 아베 총리처럼 헌법개정에 기를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2009년 9월부터 2012년 12월까지의 민주당 정권에 너무나 질려버려서 아직도 그 꺼림칙한 기억이 선명한 것이다. 아베 총리는 이번 총선에서 ‘이 길밖에 없다’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선거전에 임했다. 원래대로라면 아베노믹스가 2년이 지나도록 대다수 국민에게 실질적인 결과를 내놓지 못했기 때문에 자민당은 패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민주당 정권에 비교하면 아직은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아베 총리에게 기회를 주자’고 하는 것이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민의’인 것이다.”

선거당일인 12월 14일, 오후 8시에 투표가 종료됐다. 선거 기자단은 자민당본부 4층에 마련된 선거대책본부에서 개표결과를 지켜봤다. 일본선거에서는 후보자가 당선되면 단상에 씌어진 이름 위에 진홍색의 꽃송이를 붙이는 관습이 있다. 오후 9시44분, “도쿄 1구, 야마다 미키 당선 확실!”이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베 총리의 최대 라이벌인 민주당의 가이에다 반리 대표가 낙선하는 순간이었다.

이 목소리를 듣고 아베 총리가 선발대본부에 ‘개선장군’처럼 등장했다. 큰 박수가 장내를 휘감았다. 아베 총리는 직접 꽃송이를 들어서 야마다 미키 이름 위에 힘차게 붙였다. 카메라의 플래시가 일제히 터졌고, 마이크를 향해 선 아베 총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은 일부 지역에 눈이 내리는 악천후 속에서도 자민당에 한 표를 행사해주셔서 마음속으로부터 감사드립니다. 계속해서 경제 최우선으로 국정을 운영하며 더불어 ‘지구본 외교’와 전략적 외교로 일본의 국익을 향상시키고, 일본인의 행복한 생활을 지키기 위한 안전보장과 법 정비도 진행시켜가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미소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일순 이상한 감이 잡혔다. 나중에 수상관저를 담당하는 동료에게 물으니 다음과 같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아베 총리는 선거 당일 밤, 개표결과가 나오기 시작함에 따라 얼굴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것은 자민당보다 더 우파정당인 ‘차세대당’이 19석에서 2석으로 크게 줄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가장 좌파정당인 일본공산당이 8석에서 21석이라는 대약진을 보였다. ‘뭐지? 이래서는 차세대당의 의석이 그대로 공산당에 넘어간 것이 아닌가!” 아베 총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19명의 차세대당 의원은 자민당 의원 이상으로 아베 총리가 외치는 헌법개정에 대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차세대당의 히라누마 다케오(平沼赳夫) 당수는 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민당의 정책에는 시시비비, 곧 옳은 일에는 찬성으로, 옳지 않은 일에는 반대로 대처해간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옳은 일에 해당하는 것이 헌법개정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일본공산당은 헌법개정에 반대한다. 곧 아베 총리로서는 헌법개정을 위한 이번 선거가 반대로 헌법개정으로부터 더 멀어진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일본 언론들이 아무리 ‘자민당 압승’이라고 떠들어대도 조금도 기쁘지 않은 이유다.

초선 의원 아베의 당돌한 당선 인사


▎작년 12월 14일 치러진 일본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경기 회복, 이 길밖에 없다’고 적힌 일본 자민당의 공약집을 한 소녀가 들여다보고 있다.
아베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는 외조부인 기시 신스케(岸信介) 전 총리(1896∼1987)다. 기시 전 총리의 비원(悲願)이 전후 미국의 압박 속에 만들어진 일본국 헌법을 개정하고, 자주헌법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1960년 미·일 안전보장조약의 개정과 때맞춰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후 기시 신스케의 사위, 곧 아베 신조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郎) 전 외무장관(1924∼1991)이 총리 자리 일보직전까지 올라섰으나 암으로 인해 6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1993년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은 아베 신조가 의원에 처음 당선됐을 때를 기자는 선명히 기억한다. 기자단이 “오늘부터 정치인이 되었습니다만, 국회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당시 38세의 아베는 지체 없이 “헌법개정입니다”라고 단언했다.

기자단은 예상치 못한 이 답변에 아연실색했고 누구도 더이상 질문을 하지 못했다. 당시의 신참의원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신인입니다만, 당의 여러 선배님에게 가르침을 받아 하루빨리 자기 몫을 하는 의원으로 열심히 일하고 싶습니다”라는 식의 엇비슷하지만 무난한 발언을 하는 것이 보통 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 신인 아베 신조 의원은 황당하게도 ‘헌법개정’이라고 자신만만하게 확언한 것이었다.

그런 아베 신조 의원에게 첫 기회가 찾아온 것은 2006년 9월이었다. 5년 5개월 동안 유지된 장기정권의 수장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는 퇴임에 즈음하여 사실상 같은 자민당의 모리(森)파로 분류되는 후배인 아베 의원에게 총리 자리를 선양했다. 덕분에 아베 의원은 전후 최연소인 52세 나이로 총리에 취임했다.

‘아름다운 나라 건설 내각’. 이것이 제1차 아베 내각의 캐치프레이즈였다. 그리고 일본을 ‘아름다운 나라’로 만들기 위한 최대의 공약이 헌법개정이었다. 그 전년도인 2005년 자민당에서는 아베 의원 등이 주도하는 독자적인 헌법개정 초안이 발표됐다. 그러나 헌법개정을 목표로 삼은 아베 총리 앞에 두 가지의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었다. 하나는 국민의식과의 괴리다. 당시 일본은 15년 가까이 장기불황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은 무엇보다도 경기회복을 원했다. “아베 내각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여론조사에서는 항상 ‘경기회복’이 압도적인 차로 수위를 차지했다.

그에 반해 아베 총리가 최우선으로 중요시하고 있었던 헌법개정이라는 대답은 10위에서 15위 사이에 머물렀다. 즉 압도적 다수의 국민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슈’였던 것이다.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는 점점 “아베 수상은 경기회복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퍼져나갔다. 그 결과 2007년 여름의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의 자민당은 대패하고 말았다.

또 하나의 장애물은 아베 총리의 건강문제였다. 아베 총리에게는 궤양성 대장염이라는 지병이 있다. 후생노동성이 ‘난병(불치병)’으로 지정하고 있는 병이다. 이 병은 특히 정신적 스트레스가 늘어나면 위독해진다.

2007년 여름에 참의원 선거에서 대패하고, 내각지지율의 하락이 멈추지 않게 되자 아베 총리는 커다란 스트레스를 안게 됐다. 그 결과 궤양성 대장염이 재발했고 결국 같은 해 9월 총리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앞서 언급한 노가미 타다코 기자는 기시 신스케, 아베 신타로, 아베 신조 등 3대에 걸쳐 담당기자를 맡았고, 아베 신조의 평전도 두 권이나 출판한 소위 아베 전문가다. 이노가미 씨가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줬다.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아베 신조는 일개 국회의원으로 전락하고 나서 두 가지 일에 몰두했다. 하나는 자신의 취약 분야인 경제문제를 공부하는 것이었다. 독서를 싫어하는 아베는 경제서적을 읽는 대신 대기업 경영자나 경제학자들과 회식 등을 통해 접촉하면서 생생한 경제이야기를 들었다. 또 하나는 지병의 극복이었다. 2009년 연말에 ‘아사콜’이라는 궤양성 대장염의 특효약이 인가된 덕분에 그는 극적으로 회복되었다. 이렇게 경제와 건강이라는 2가지 문제를 극복하는 것으로, 아베는 와신상담했다.”

2007년 가을에 아베 총리가 퇴진한 후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아소 타로(麻生太郎) 두 사람의 총리가 각각 1년씩 정권을 짊어졌지만 일본 국민은 자민당 장기정권에 질려 있었다. 일부 부유층만이 기득권과 이익을 손에 넣고 대다수의 국민은 장기불황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2009년 8월의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역사적 대패를 당했고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정권이 탄생했다. 일본인은 이를 계기로 21세기에 새로운 일본이 탄생하는 꿈을 꾼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의 꿈이 ‘악몽’으로 변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중국은 미국과 동등하게 중요하다”, “오키나와의 후텐마 미군기지를 오키나와 밖으로 내쫓겠다” 등의 발언으로 보수적인 일본인을 경악 시켰다. 아니 누구보다도 오바마 대통령이 경악했으며 워싱턴에서는 “일본에 또 하나의 북한이 탄생했다”라고 숙덕거렸다.

민주당의 두 번째 정권인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 시대에는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하고 후쿠시마 원전이 대형 사고를 일으켰다. 이때 간(菅) 정권의 무능하고 한심한 대응 탓에 1500년의 역사를 가진 일본이라는 국가가 소멸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세 번째 정부인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정권 때에는 센카쿠 열도를 국유화하고 중국과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다. 노다 정권의 초대 방위상(국방장관)은 취임사에서 “나는 지금까지 농업행정만 담당해와서 방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발언으로 일본 국민을 아연실색케 했다. 3개월 후 교체된 방위상은 국회답변이 무서워 국회회의장에서 도망쳐 버리기도 했다. 세 번째 방위상은 민주당 인재가 부재한 탓에 어쩔 수 없이 TV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노(老)학자를 발탁해서 방위상을 맡게 했다. 이런 꼴이었기 때문에 2012년 12월의 총선거에서는 압도적 다수의 일본인이 자민당 정권의 부활을 기대했다. 이렇게 해서 아베 신조에게 두 번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2012년 12월 26일 다시 총리의 자리에 오른 아베는 “우리 내각은 오로지 경제부흥 내각이다”라고 말하고, ‘아베’와 ‘이코노믹스(economics)’에서 ‘아베노믹스’라는 합성어를 만들었다. 이는 첫 번째 화살=금융완화, 두 번째 화살=공공투자, 세 번째 화살=규제완화와 민간의 활력증진이라는 ‘세 개의 화살’에 의해, 일본경제를 부활시킨다는 플랜이었다. 즉 아베 총리는 지금까지의 지론이었던 헌법개정을 완전히 봉인 해버린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헌법 개정하고 싶다”

실제로 2013년은 매우 화려한 ‘아베노믹스의 1년’이었다. 4월에 일본은행의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가 첫 번째 화살인 금융완화를 발표하면서 주가가 급등했다. 덕분에 7월의 참의원선거에서 아베의 자민당은 압승을 거뒀다. 9월에는 2020년의 도쿄올림픽 유치가 확정되면서 아베노믹스의 두 번째 화살인 건설붐의 기대감이 높아졌다.

그런데 2014년에 들어가면서 제3의 화살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내각지지율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베 총리는 외교에서 활로를 찾아내려 했다. 말하자면 ‘외교판 세 개의 화살’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화살’인 미국과의 TPP(환태평양파트너십협정)은 지난해 4월 오바마 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타결할 예정이던 것이 오히려 미·일 간의 균열을 심화시켰다. ‘두 번째 화살’은 러시아와의 북방영토 교섭이다. 지난해 2월 소치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해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북방영토 반환에 목표를 설정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직후에 우크라이나 위기가 발발하고, 북방영토 반환은 더욱 멀어져버렸다.

‘세 번째 화살’은 북한과의 납치교섭이다. 중국과 북한의 파이프 역할을 해오던 장성택 당 행정부장의 처형에 의해 북· 중관계가 악화된 것을 계기로, 2014년에 들어가면서 북한이 일본에 추파를 던져 양국 간의 최고현안인 납치문제의 해결에 진전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후, 러시아가 ‘탈유럽’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러시아와 북한의 관계가 급진전되자 북한은 귀찮은 일본을 잘라버렸다.

민주당 와해공작도 불사한다


▎작년 5월 도쿄에서 집단적 자위권 헌법 해석 변경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아베 총리 얼굴에 ‘독재자’라고 쓰인 포스터를 들고 있다
이렇게 해서 ‘외교판 세 개의 화살’이 모두 중간에 꺾여버리고 외교의 방향성을 상실한 아베 총리는 9월 3일 개각을 단행했다. 개각의 중심은 ‘5명의 여성각료’였다. 일본인의 반은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의 지지율을 올리면 내각의 지지율이 오른다고 즉석에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얼굴마담’ 격의 오부치 유코 경제산업각료(재경부장관)와 마쓰시마 미도리 법무대신(법무장관)의 금전스캔들이 터지고 두 여성각료가 불과 47일 만에 사임 압력에 굴복했다.

“아베 총리는 이대로는 헌법개정을 할 수 없어진다는 생각에 초조해졌다. 자신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정치가가 된 것인가? 무엇 때문에 아베노믹스를 추진해온 것인가? 이 모두 헌법개정 때문이 아닌가? 총리실에 걸린 기시 신스케 전총리의 사진을 바라보며 자문자답하는 매일이었다.”(앞서의 수상관저 담당 기자의 증언)

“무슨 일이 있어도 헌법을 개정하고 싶다.”

고뇌 끝에 아베 총리는 중의원 해산과 연말 총선거를 결단했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어디까지나 ‘아베노믹스의 추진’을 전면에 내걸고 헌법개정은 ‘자민당의 선거공약’에 눈에 잘 보이지 않도록 끼워 넣었다. 그리고 선거전에서도 ‘아베노믹스의 추진’만을 연호했다. 이 전략이 성과를 거둬 아베의 자민당은 12월 14일의 총선거에서 2012년 12월의 중의원 선거와 2013년 7월의 참의원 선거에 이어 3연속 압승을 거두었다. 이렇게 해서 2년 동안 세 번의 총선을 치러온 아베 총리는 2015년에 들어 드디어 봉인하고 있던 헌법개정을 전면에 내놓게 된다. 다시 한번 노가미 씨의 해설을 들어보자.

“아베 총리는 헌법개정 전 단계에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문이 3개 있다. 첫째 관문은 안전보장법제의 정비다. 이것은 헌법 제9조 개정에 즈음해서 꼭 필요한 조치다. 이 제1관문은 2015년의 통상국회(1∼6월)에서 여당의 압도적 다수의 파워로 관철시킬 생각이다. 둘째 관문은 중의원 의석의 3분의 2를 확보하는 것. 그리고 셋째 관문이 2016년 여름의 참의원 선거다.”

이노가미 기자가 거론한 ‘세 개의 관문’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첫째 관문인 안전보장법제의 정비다. 아베 총리는 2014년 7월1일 집단적 자위권을 용인하는 내각 결정을 단행했다. 그 밖에도 헌법 제9조를 개정하기 위한 몇 가지 준비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이를 완비하기 위해서는 자위대법을 시작으로 헌법의 하부법률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이를 2015년의 전반기에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특히 3월에 2015년도 예산안(2015년 4월∼2016년 3월)이 국회에서 가결된 후 이 안전보장 법제의 정비에 집중할 예정이다. 만약 6월까지의 통상 국회 회기 중에 관련법안을 가결하기 힘들게 된다면 아베 총리는 한 달 혹은 두 달 국회 회기를 연장해서라도 가결할 생각이다.

이어서 둘째 관문은 ‘평화의 당’을 표방하는 공명당이 아베 총리가 목표로 하는 방향에서의 헌법개정에 반드시 찬성하리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자민당 단독으로 291석밖에 없기 때문에 3분의 2인 317석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공명당의 의석인 34석을 더하기 위해서는 ‘평화의 당’인 공명당의 주장대로 크게 궤도 수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베 총리는 그것이 싫은 것이다. 계획대로라면 자민당에 우호적인 우파의 ‘차세대당’이 편들어줄 것이었는데, 19석이었던 차세대당의 의석이 불과 2석으로 줄어버려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럼 아베 총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앞서 언급한 수상관저 담당기자의 말을 다시 한번 빌려보자.

“아베 총리는 최대 야당인 민주당의 우파, 곧 마에하라 세이지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에 손을 뻗으려 하고 있다. 마에하라파 의원들은 적게 잡아도 15명 전후다. 이 그룹에 정치자금을 주고 민주당을 탈당시켜서 자민당에 우호적인 당을 만들게 하려는 것이다.”

민주당은 가이에다 반리 대표가 낙선했기 때문에 1월 18일에 당대표 선거를 실시한다. 마에하라 전 대표는 지난해 말 마지막까지 대표직 출마 여부를 두고 고민했는데, 그 배경에 아베 수상 관저로부터 들려왔던 ‘달콤한 속삭임’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헌법개정을 위한 셋째 관문은 참의원이다. 헌법개정을 위해서는 참의원 전체 242석 가운데 3분의 2에 해당하는 162석의 찬성이 있어야 하지만, 현재는 자민당 114의석, 공명당 20석으로, 자민당과 공명당을 합해도 134석으로 28석이 모자란다. 그 때문에 아베 총리는 2016년 여름 참의원 선거에 ‘헌법개정 선거’라는 이름을 붙이고 필사적으로 달려들 태세다. 어쩌면 한 번 더 중의원을 해산하고 헌법개정을 위한 중· 참의원 동시선거를 실시할지도 모른다.

헌법 규정에 의하면 국회의 중의원·참의원에서 3분의 2 이상이 찬성한 후에는 국민투표에 부친다. 그리고 헌법개정에 찬성하는 유권자가 반대하는 유권자보다 많으면 당당하게 헌법개정이 되는 것이다. 일단 국회를 통과하게 되면 과반수의 국민은 아마도 찬성하지 않을까 하는 전망이 유력한 상황이다.

앞으로의 시나리오는 대충 이런 흐름이 되는 것이다. 그럼 가까운 미래의 일본은 아베 총리의 지휘 하에 ‘평화헌법’을 파기하고, 다시 군국주의의 길을 걷게 될 것인가?

그 대답은 노(NO)다. 주된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 때문이다. 먼저, 아베 총리의 건강문제다. 아베 총리는 앞서 지적한 대로 궤양성대장염이란 불치병을 앓는 환자다. 지금까지 스테로이드를 복용하면서 무리를 거듭해서 2년간을 견뎠다. 지난해 말의 선거전에도 29곳의 지방에서 총 73회나 연설을 하고 유세를 위해 총 1만4383㎞를 주파했다.

건강 문제로 은퇴 가능성 커


▎일본 도쿄의 자위대 주둔지 아사카 기지에서 ‘74식 전차’가 트럭에 실려 출발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소위 ‘전쟁을 할 수 있는 정상적인 나라’를 꿈꾼다.
환갑을 맞는 그의 신체는 이제 많이 지쳐 있다. 그 증거로 2012년 12월 26일과 2014년 12월 24일의 아베 내각 발표 기자회견의 영상을 비교해보면 마치 딴 사람인 것 같다. 2014년의 영상에서 아베 총리는 2년 전에 비해 훨씬 피로에 물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아베 총리는 2007년과 마찬가지로 건강상의 문제로 머지않아 은퇴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비원의 헌법개정을 미완으로 마감하며 부득이 후임에게 ‘유지’를 맡기는 것이 아닐까? 정치기자 25년의 경험으로부터 나는 이런 예감에 사로잡힌다.

일본이 이후 군국주의의 길을 걷지 못하는 둘째 이유는 ‘고령화와 인구감소’다. 일본 사회에 군국주의의 길로 가기 위한 파워와 에너지는 이미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연말의 총선거로 각지를 취재하고 나서 이를 더욱 통감했다. 이번 선거에서 당선된 한 젊은 자민당 의원은 내게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거품경제를 경험하지 못하고 자랐으며 고령화와 인구감소라고 하는 ‘위축사회’를 짊어지고 가야 하는 우리 세대는, 아베 총리와 엄청난 세대차를 느낀다. 일본은 원전 재가동도, 군비확장도 하지 말고 더 조용히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목소리가 일본의 차세대를 짊어진 자민당 의원들의 혼네(본심)다. 지금 일본의 젊은이는 소위 ‘읽어버린 20년’이라고 말하는 시대에 성장했다. ‘초식계’(초식동물과 같은 온순하고 소극적인 인간)라고 불릴 만큼 패기가 부족하고 건강함을 잃어버린 세대다. “내일을 오늘보다 좋게”가 아니라, “내일이 오늘보다 나빠지지 않게” 되기에 급급하다. 이런 세대가 보는 아베 총리는 단순한 과대망상증에 머리가 꼴통 같은 화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베의 자민당은 선거에는 이겼지만, ‘고령화와 인구감소’라는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싸움에 직면할 운명이다.

-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현대> 부편집장

201502호 (201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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