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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포커스 | 유가 폭락 공포! 우리 경제엔 양날의 칼? - 정유·화학·조선 울고, 항공·해운·물류 웃고 

시장에선 희비 교차, 배럴당 25달러까지 하락 전망도… 생산량 줄면서 배럴당 50~60달러 수준이 교두보 될 듯 

하현옥 중앙일보 국제경제부 기자, 염지현 중앙일보 경제부 기자

▎국제 유가 흐름세가 심상치 않은 가운데 이번 유가 하락은 수요보다는 공급의 측면에서 기인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지난 1월 8일 바레인 사키르 사막의 유전에서 노동자들이 작업하는 모습.
저유가 ‘뉴 노멀’ - 세계경제 뒤흔드나

원유전쟁이 티핑포인트(tipping Point·임계점)에 들어섰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 셰일업계의 전쟁도 절정으로 치닫는다. 유가는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다. 지난해 6월부터 하락한 유가는 반 토막이 났다.

시장의 공포는 점점 커진다. 유가 하락이 세계 경제에 미칠 긍정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등 파탄 위기에 처한 산유국으로 인해 새로운 경제 위기가 발생하리란 우려가 커지는 탓이다. 저유가로 인한 디플레이션의 도래도 세계 경제에는 적신호다. <뉴욕타임스>는 투자자들의 말을 인용해 “국제 유가의 지속적인 하락은 세계 경제에 불길한 징조”라고 전했다. 골드먼삭스는 저유가가 ‘뉴 노멀(New Normal: 장기 저성장 국면을 설명하는 새로운 경제질서)’이 될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기름값이 세계 경제를 뒤흔들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세계은행이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에 안정적으로 유지됐던 ‘수퍼사이클’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안질리 라발 세계은행 이코노미스트는 1월 7일(이하 현지시간) “유가는 올해도 낮은 상태로 유지될 것이며 내년에 가야 미미하게 반등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날 뉴욕 상품거래소에서 서부텍사스유(WTI)는 배럴당 46.83 달러까지 밀렸다. 5일 배럴당 50달러 선이 무너진지 이틀 만이다. 9일에는 배럴당 49달러 대에 거래됐다. 런던 ICE 선물시장에서 거래되는 브렌트유 값도 8일 배럴당 50.96달러까지 하락하며 6개월 만에 반 토막이 났다.

유가가 바닥에 근접했다는 조심스러운 분석에도 속단은 시기상조다. 시장의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의 유가 하락은 초과 공급 탓이다. 셰일오일 등 미국의 원유 생산량이 늘어난 데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도 시장점유율을 지키기 위해 생산량을 줄이지 않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현재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각각 하루 평균 1100만 배럴이 넘는 원유를 생산한다. 러시아도 하루 1090만 배럴을 시장에 공급하고 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2008~2009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경제 신뢰도가 떨어지고 경제 활동이 위축되며 에너지 수요가 둔화돼 유가가 떨어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공급과잉으로 기름값이 하락하는 것”이라며 “유가가 앞으로 몇 달 사이에 배럴당 40달러대로 내려앉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

암울한 전망은 잇따른다. 미국 경제매체인 는 최근 전문가들의 전망을 인용해 유가가 배럴당 30달러까지도 떨어질 수 있다고 보도했다. 유가정보서비스(OPIS)의 톰 클로저 글로벌 에너지 부문 대표는 와의 인터뷰에서 “풍자나 과장으로만 여겨졌던 배럴 당 35달러, 심지어 배럴당 25달러의 유가가 현실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파생상품 시장에서는 추가 하락을 점치기도 한다. <마켓워치>는 “유가가 배럴당 20달러까지 추락할 것으로 예상해 여기에 베팅하는 풋옵션 매수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시장의 우려를 증폭시키는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변심이다. OPEC 일일 총생산량(3천만 배럴)의 3분의1가량을 생산하는 사우디는 그동안 유가를 지키는 수호자이자 최후 보루였다. 유가가 하락하면 생산량을 줄여 가격을 지지해왔다. 이른바 원유시장의 ‘스윙 프로듀서(swing producer: 생산량을 조정해 수급을 원활하게 하는 당사자)’다.

그런 사우디가 변했다. 스윙 프로듀서의 자리를 내던질 기세다. 지난해 11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OPEC 전체 회의에서 ‘감산은 없다’는 합의를 주도했다. 게다가 알리 빈 이브라힘 알나이미 사우디 석유장관은 지난달 한 인터뷰에서 “유가가 배럴당 20달러까지 떨어져도 OPEC은 원유 생산을 줄이지 않을 것”이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심지어 “신규 수요가 발생하면 산유량을 오히려 늘릴 수 있다”고 밝혀 시장을 경악하게 했다. “가격보다 시장점유율을 지키겠다”고 공개 선언을 한 셈이다.

‘스윙 프로듀서’ 사우디의 변심

사우디의 변심은 감산의 후폭풍을 경험한 과거의 트라우마 탓이다. 사우디는 OPEC의 맏형으로 스윙 프로듀서의 역할을 맡아왔지만 감산으로 인한 고통을 온몸으로 겪었다. 1980년대 북해 유전이 발견된 뒤 유가가 급락하자 1985년 생산량을 75%나 줄이며 유가 방어에 나섰다. 하지만 가격 하락을 막지 못했고 재정 적자만 쌓였다. 이 적자에서 회복되는 데 16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사우디가 ‘치킨 게임’에 나선 더 큰 이유는 달라진 시장 상황이다. 러시아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캐나다, 미국까지 원유 공급 시장에 가세하면서 시장을 지키는 것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고유가에 채굴 기술 등이 발전하면서 미국의 셰일오일과 캐나다의 오일샌드, 브라질의 심해원유 등이 채산성을 확보하게 됐다. 산유량이 늘어나며 미국은 심지어 원유 수출국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 등 고비용의 원유 생산업체와 맞선 ‘펌프 전쟁’에서 살아남을 필승 전략은 저유가라는 계산에 이른 것이다. 알 나이미 장관은 “사우디가 감산에 나서면 유가는 회복되겠지만 러시아와 브라질, 미국의 셰일오일 업계가 사우디의 시장을 잠식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밝혔다.

적을 고사시키려는 사우디의 도박은 사실 ‘제 살 깎아 먹기’다. 현재의 유가 수준으로는 사우디도 손해를 피할 길이 없다. 도이체방크에 따르면 사우디가 손해를 보지 않는 유가는 배럴당 90달러 수준. 하지만 막대한 외환보유액(7500억 달러)을 바탕으로 올해 재정 지출(8600억 리얄)을 사상 최대로 늘리며 이미 전투 대세를 갖췄다. 뉴욕 에너지 헤지펀드인 ‘어게인 캐피털’의 파트너 존 길더프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사우디가 시장의 약자를 끝장내려는 총력전에 돌입 했다”고 말했다.

사우디가 겨냥하는 적은 미국의 셰일업계다. 도이체방크는 “국제 유가가 배럴당 60달러 밑을 맴돌면 에너지 기업의 수익이 악화되며 투자 부적격 등급인 미 에너지 기업들의 디폴트(채무불이행) 비율이 높아질 수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미국의 원유 공급 증가율 전망치를 하향 수정하는 상황까지 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당분간은 사우디와 미국 셰일업계 양측의 힘겨루기가 이어질 전망이다. 사우디의 도발에 미국 셰일업계가 백기를 드는 모습은 아직 나타나지 않아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가가 최고치보다 40% 이상 떨어졌지만 아직 미국에서 생산량이 줄어드는 신호는 없다”며 “미국 원유 생산업체가 경비절감에 나서겠지만 생산량을 줄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콘티넨털 리소시즈’는 올해 자본 지출계획을 지난해보다 41% 줄였지만 원유 및 가스 생산량은 16∼20%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파이어니어 내추럴 리소시즈’도 유전을 적게 뚫기보다는 비용을 줄이는 방향을 고려하고 있다.

미국 셰일업계가 섣불리 감산에 나설 수 없는 건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 용의자들이 협력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각자의 이익을 좇다 결국 모두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되는 것)’ 때문이다. 은 “미국의 원유 생산업체가 함께 감산하면 전체적으로 이익이지만 담합 행위가 위법인 만큼 할 수 없다. 그리고 특정 업체가 먼저 생산량을 줄이면 시장점유율만 줄어들어 ‘남 좋은 일’이 될 수 있어 감산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사우디만큼이나 미국 셰일업계도 시장 지키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에너지 애스펙츠’의 앰리타 센 연구원은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사우디의 전례 없는 행보가 유가 불확실성의 씨앗을 싹 틔우고 있다”며 “이런 점이 석유기업들로 하여금 자본투자 규모가 큰 프로젝트를 지속해야 할지 여부에 대해 의문을 심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사우디 vs 셰일업계의 ‘치킨게임’


▎1. OPEC은 가격보다 시장점유율 지키기에 나섰다. 지난해 11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OPEC 전체회의에 참석한 알나이미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 / 2. 셰일 유전지대에서 파이프를 연결하는 미국 근로자들. 미국 셰일업계는 사우디의 강력한 산유 경쟁자로 등장했다.
저유가는 일반적으로 세계 경제에는 호재로 여겨졌다. 기름값이 싸지며 기업의 생산 원가가 줄어들고 기업과 가계의 실질 소득이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와 소비가 촉진될 수 있어서다. 때문에 원유 수입국에 저유가는 영양제 주사를 맞는 것과 같다. 중국과 인도 등 신흥국은 저유가 수혜를 톡톡히 누릴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은 기름값이 싸지자 원유를 사들이며 비축분을 늘려가고 있다. 인도와 인도네시아는 저유가 덕분에 유가 보조금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선진국도 저유가의 혜택에서 예외는 아니다. 기름값이 싸지며 소비자의 지갑이 두터워지고 세금을 깎아주는 것과 같은 효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저유가 덕분에 올해 미국의 에너지 비용은 최대 750억 달러 줄어들 것으로 예상됐다. 전미자동차협회(AAA)에 따르면 유가하락으로 미국 소비자는 지난해 140억 달러의 비용을 줄일 수 있었고 올해는 500억~750억 달러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제이콥 루 미국 재무장관은 “유가 하락은 세금 감면과 같은 것으로 단기적으로 에너지 가격이 내리면 내수와 소비 심리를 개선하는 촉진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리 아키라(甘利明) 일본 경제재생담당상은 1월 9일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나타난 유가 하락이 일본 경제에 7조엔 규모의 부양 효과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진단했다.

세계 경제의 성장 전망치도 상향 조정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최근의 유가 하락으로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이 최대 0.75%포인트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은 1월 4일 뱅크오브아메리카 메릴린치의 자료를 인용해 유가가 10% 떨어질 때마다 한국 등 아시아 국가의 국내총생산(GDP)이 0.2~0.45% 늘어난다고 전망했다. 리서치업체 ‘옥스퍼드 이코노믹스’에 따르면 2015~2016년 유가가 배럴당 40달러에 머물 경우 미국과 중국 등의 경제 성장률은 각각 3.8%와 7.1%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유가의 ‘자유 낙하(Free Fall)’가 계속되면서 디플레이션 공포도 번져간다. 유가 하락이 경기 회복세를 지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영향을 받은 곳은 유로존이다. 지난해 12월 유로존의 소비자물가가 0.2% 떨어지며 디플레이션 상태에 빠졌다. 중국의 디플레이션 우려도 커진다. 지난해 12월 생산자물가지수(PPI)가 전년 동기대비 3.3% 하락하며 34개월간 하락세를 이어갔다. PPI는 소비자물가의 선행지표격인 만큼 중국의 물가 상승률이 한동안 낮게 유지될 것으로 예상된다. <뉴욕타임스>는 “지나친 수준의 유가 하락은 1974년 유가 파동이 초래한 동요와 같은 심각한 경제 위기를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저유가로 국가 경제의 지형도도 달라지고 있다. 저유가의 충격파로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산유국이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저유가의 펀치에 녹다운 위기에 처했다. 지난해 초 불거진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서방의 경제 제재에 저유가로 인한 충격까지 더해지며 국가 경제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해 9월 이후 미 달러 대비 루블화 값이 절반 이상 떨어지자 루블화 가치 방어를 위해 기준금리를 17%로 인상했고, 외환보유액을 동원해 시장 개입에 나섰다.

베네수엘라는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에 직면했다. 도이치뱅크에 따르면 베네수엘라는 유가가 배럴당 162달러가 돼야 손해를 보지 않는 국가다.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돈을 찍어내면서 지난해 1~11월 물가 상승률은 63%나 됐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베네수엘라가 환율 관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올해는 물가가 1천% 넘게 오를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저유가가 지속되면 이란과 이라크·리비아 등도 주요 산유국의 경제도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독일 <타게스차이퉁>지는 1월 6일 “저유가가 장기간 이어지면 러시아와 베네수엘라, 이란, 나이지리아 등 국가 경제의 붕괴 위험이 확산하고 해당 지역의 다른 국가 경제에도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보도했다.

희비 쌍곡선 불구 - 한국경제엔 축복의 단비


▎저유가 추세의 최대 피해자는 러시아다. 서방의 경제제재와 겹쳐 루블화 가치는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유가 하락은 국내 실물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지난 1월 12일 서울에서는 휘발유 1L당 1300원대에 파는 주유소가 등장했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강서구 개화동 주유소가 1399원으로 포문을 열고, 뒤이어 영등포구 도림동의 강서오일 주유소가 이보다 1원 내린 1398원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월 L당 1800원 대였던 전국 주유소의 휘발유값이 1년 새 1542원으로 뚝 떨어졌다. 현재 1300원대 휘발유를 판매하는 주유소는 전국에 75곳이 있다. 이중 충북 음성의 상평주유소가 리터당 1285원으로 가장 저렴하게 팔고있다.

지난해 초 98달러였던 미국 텍사스원유(WTI) 가격은 1년 새 50달러 초반대로 반 토막 났다. 지난 1월 5일엔 장중 한때 49.77 달러까지 밀렸다. 유가 급락 소식에 다음날 국내 증시가 가장 빠르게 반응했다. 예상보다 빨리 유가 50달러 선이 깨지자 투자 불안감이 눈덩이처럼 부풀어졌다. 결국 외국인 투자가와 기관투자가가 쌍끌이 매도에 나서면서 코스피 지수는 1900선을 내주며 1882.45로 장을 마감했다.

금융시장이 흔들리자 유가 급락을 둘러싼 전문가의 의견은 두 갈래로 갈렸다. ‘시장의 변동성을 키우는 악재’라는 비관론과 ‘한국 경쟁력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는 낙관론이다. 비관적 시각을 가진 전문가는 유가가 급락하면 당장 한국을 포함한 신흥국 금융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한다. 김학균 KDB대우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유가 하락은 장기적으로 실물 경제에 도움을 주지만 단기적으로 금융시장을 교란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과거 1980년대 중반 사우디 저유가 정책으로 유가가 20달러까지 떨어진 적이 있다”며 “지금도 유가 바닥이 얼마인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확실성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서동필 IBK투자증권 연구원도 “유가 하락 속도가 빠르면 실물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주기 전에 금융시장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유가 하락이 디플레이션 압력을 키울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공급적인 요인 뿐 아니라 세계 경기 침체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수요가 줄어든 점도 빼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저물가 상황에서 유가 하락에 따른 기업들의 생산비 감소가 제품 가격 하락으로 이어지면 디플레 압력을 가중시켜 경기를 침체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대로 경기 회복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기본적으로 기름값이 떨어지면 기업의 생산 비용이 줄어든다. 생산 비용 감소로 제품 가격이 낮아지면 소비가 늘면서 경기가 살아나는 선순환 구조가 이어진다는 분석이다. 김효진 SK증권 연구원은 “원유 수입 비중이 큰 한국엔 유가 하락은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유가 하락이 경제에 호재로 인식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만큼 올해 2분기 이후 경기가 회복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안기태 NH투자증권 연구원도 “유가가 20% 하락한 지 1분기가 지나면 국내총생산(GDP)은 0.2%포인트 줄지만, 2분기가 지나면 연간 GDP성장률을 0.13%포인트 높여줄 것으로 예상 한다”고 설명했다.

유가 하락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확인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원자재 가격 변동은 이를 가공한 완제품의 가격에는 바로 반영되지만, 생산 비용에는 시차를 두고 영향을 준다. 대부분의 기업이 가격 변동에 따른 불확실성을 막고자 원자재 도입을 미리 계약하기 때문이다.

물가구조 개선에 적극 활용해야


▎1월 7일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유가하락이 적기에 소비자 가격에 반영되도록 물가구조 개선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도 낙관적 입장이다. 1월 7일 한국개발연구원(KDI)·산업연구원·금융연구원·에너지경제연구원·대외경제정책연구원 등 5개 국책연구원이 공동으로 정부에 제출한 ‘유가 하락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 분석’ 보고서에서 올해 유가 하락으로 한국 경제성장률이 오를 것으로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두바이유 기준 연평균 배럴당 63달러가 유지되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0.1%포인트 상승하고, 물가상승률은 0.1%포인트 떨어질 것으로 봤다. 경상수지는 52억5천만 달러 늘 것으로 전망했다. 유가가 49달러까지 하락하면 경제성장률 0.2%포인트 상승, 물가상승률 0.4%포인트 하락, 경상수지 102억 1천만 달러 증가 등 영향이 크게 확대될 것으로 봤다.

특히 기업의 비용 절감효과가 크다고 전망했다. 유가 10% 하락하면 한국 기업의 생산비는 0.76% 감소해 일본(0.34%),중국(0.36%)보다 두 배 이상의 혜택이 기대된다. 제조업의 경우엔 생산비 감소 효과가 1.03%에 이른다. 단 유가 하락이 국내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려면 기업의 생산비용 감소가 서비스 가격 하락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분석했다. 만약 반영되지 않을 경우 경제 전체에서 늘어나는 구매력 10조4천억원 중 9조4천억원이 기업에 귀속되고, 나머지 1조1천억원만 가계의 민간소비로 이어지는 ‘기업 독식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전망했다.

1차 경제관계장관회의가 열린 이날 최경환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이번 유가 하락은 공급요인에 기인한 것으로 수요 부족에 따른 디플레이션과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는 “유가 하락이 적기에 소비자 가격에 반영돼 국민이 체감할 수 있도록 물가구조 개선 등의 노력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정부는 공기업과 공공요금 관련 분야에서 유가하락을 반영할 부문이 있는지 검토 중이다. 앞서 1월초엔 국제유가 하락을 반영해 도시가스요금을 평균 5.9% 내렸다.

유가 하락으로 국내 기업들의 희비는 엇갈린다. 직격탄을 맞은 곳은 원유를 직접 다루는 정유나 석유화학업체다. 정유업계 1위인 SK이노베이션이 지난해 37년 만에 적자를 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사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3분기까지만 해도 2388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하지만 4분기 두바이유 가격이 급락하자 재고평가 손실이 커졌다. 정유업체가 원유를 수입해 판매하는 데 40~50일 소요된다. 만약 이 기간 동안 원유값이 떨어지면 재고 가치가 덩달아 낮아지면서 재고평가 손실이 발생한다. 증권업계에선 4분기에만 6천~7천억원에 달하는 재고평가 손실을 낼 것으로 전망한다. 박재철 KB투자증권 연구원은 “4분기 1567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적자가 지속될 것”이라며 “두바이유가 하락하면서 재고손실은 6600억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정유·화학업계는 위기를 느끼고 비상 경영체제에 들어갔다. SK이노베이션은 우선 신성장 사업을 발굴하고, 사업 포트폴리오를 개편하는 PI(Portfolio Innovation)실을 만들고, 유가 급락이나 정제마진 악화 등의 대외적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에너지전략본부도 신설했다. GS칼텍스 역시 유가하락에 대비하기 위한 원가절감 등 다양한 대책을 마련했다. 몸집도 줄였다. 지난해 5월 석유화학사업본부와 윤활유사업본부를 1개 본부로 통합하고, 경영지원본부를 없앴다. 이를 통해 사업본부 조직은 7개에서 5개로 줄고, 임원 수도 약 15% 축소했다.

조선업체들도 유가 하락 소식이 반갑지 않다. 산유국 경기가 침체되면 원유시추나 생산설비 발주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지난해 수주 급감에 저유가로 휘청대던 조선업체들은 올해는 아예 역성장을 할 전망이다. 현대중공업은 올해 매출과 수주 목표를 각각 10%, 25%가량 낮춰 잡았다. 이경자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조선 빅3의 지난해 합산 수주액은 331억 달러로 2013년에 비해 23%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며 “올해는 작년보다 수주가 더 줄어들 수 있기 때문에 고정비를 최소화하고 잘 버티는 게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건설사도 타격을 받는다. 그동안 해외 수주의 ‘텃밭’이었던 중동에서 급격한 유가하락으로 사업 발주를 줄이거나 늦추기 때문이다. 또 이미 수주한 현장조차 발주사들이 비용을 줄이려고 해 국내 건설사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

앉아서 돈 버는 항공·해운·페인트


▎유가하락으로 한진해운은 올해 2100억원의 영업이익을 낼 것으로 기대된다. 사진은 한진해운의 1만 TEU급 컨테이너 화물선 한진 코리아호.
반대로 국제유가를 반기는 곳은 ‘항공’과 ‘물류’다. 국내 항공업계는 유가 하락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전체 매출액의 40%를 유류비에 사용하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3분기까지 2407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2013년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50.3%나 늘어난 수치다. 유류비 지출이 770억원이나 줄어든 효과다. 아시아나항공도 지난해 11월까지 유류비가 2013년 같은 기간보다 900억원 줄었다. 항공업계에선 유가가 배럴당 1달러 내려갈 때 대한항공은 연 340억원, 아시아나항공은 연 157억원 유류비를 아낄 것으로 본다.

유가하락 수혜주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주가는 연일 상승세다. 대한항공 주가는 최근 땅콩회항·유상증자 결정 등 다양한 변수가 발생했지만 연초 이후 0.44% 올랐다. 홍진주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유상증자로 인한 주식가치 희석은 유가하락으로 상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유상증자로 주식 수가 늘어나지만 유가 하락으로 이익 상승분을 반영하면 현재 주가순자산비율(PBR)은 1배에 불과해 주가가 추가로 오를 여력이 충분하다”고 보았다. 아시아나항공 주가 상승세는 더 가파르다. 지난해 11월 초 4천원 대에 거래됐던 주가는 두 달새 87% 오른 7460원(1월 13일 종가)이다.

세계 경기침체로 업황 부진에 시달렸던 해운업계에도 유가 하락은 단비와 같다. 해운업은 기름으로 배를 움직여 화물을 나르는 사업이다. 유가가 낮을수록 해운업체는 이득이다. 연료 매입 가격이 1%만 떨어져도 70억원이 절감되는 효과가 있다. 한진해운은 유가 하락으로 연간 운영비가 3천억원 이상 줄 것으로 전망한다. 실제 3분기 기준 한진해운은 전년 동기에 비해 유류비를 1200억원이나 줄였다. 증권업계에서도 비용절감을 통해 한진해운의 수익성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한다. 김태성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한진해운은 올해 컨테이너 물동량이 지난해 비해 6%가량 늘고, 유가하락과 감속 운항의 영향으로 2100억원의 영업이익을 낼 것으로 예상한다”고 봤다.

페인트 관련 기업은 유가 하락의 ‘숨은 수혜주’로 떠오른다. 페인트의 주원료인 용제와 수지, 유기안료 등이 석유화학 제품을 원료로 만들기 때문이다. 일부 페인트 원재료 가격은 이미 20%가량 떨어졌다. 국내 페인트 업체 중에서는 시장점유율이 가장 높은 KCC가 큰 수혜를 입을 것으로 보인다. 도료 사업은 KCC 전체 매출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시장 전문가들은 KCC가 지난해 4분기 매출이나 영업이익이 예상치 보다 늘 것으로 입을 모았다.

그렇다면 국내 경제·산업에 영향을 끼치는 유가의 바닥은 어디일까? 뉴욕상업거래소에서 1월 12일 기준(현지 시간)WTI는 46.07 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이는 지난 2009년 4월 이후 최저치다. 장중 한때 46달러 선이 깨져 배럴당 45.90달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올해 들어 벌써 14% 내렸다.

상당수 전문가는 유가가 더 빠질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본다. 허재환 KDB대우증권 연구원은 “국제 유가가 20~30달러까지 빠질 수 있다”고 봤다. “현재 상황은 산유국간 경쟁국면이었던 1985~1986년과 유사하다. 미국과 사우디가 원유 생산을 줄이지 않고, 기업들의 채산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경쟁하고 있다. 당시 유가 바닥이 20달러였다”는 설명이다. 허 연구원은 “더욱이 국제 유가에 대한 투기적 순매수 규모가 여전히 커 바닥을 확신하긴 이른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향후 수년 간 100달러 이하로 가격 유지될 듯


▎1월 12일에는 서울에 1L당 1300원대에 휘발유를 판매하는 주유소가 등장했다.
김유진 NH투자증권 연구원도 “올해 상반기에도 원유 가격은 약세 기조를 이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미국의 원유생산 증가 등 과잉 공급이 여전히 확대되면서 유가를 지속적으로 떨어뜨리고 있다”며 “또 세계 원유 평균 생산원가는 배럴당 50달러 수준이나 석유개발업체들의 비용절감으로 가격이 낮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반면 유가 하락에 대한 과장된 공포를 키우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민병규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12월 산유량은 러시아·이라크 등 비OPEC 회원국의 증가분 이상으로 감소했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와 이라크 원유 생산 점유율은 2013년 기준 54.8%를 차지하고 있어 세계 전체가 늘어났다는 해석은 비약이 심하다”며 “원유 생산량의 11.5%를 점유하는 미국 원유생산량도 줄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지평 LG경제연구소 연구원도 1월 8일 ‘국제유가 신시대의 파장’ 보고서에서 “배럴당 60달러를 밑도는 유가는 지속하기 어려운 낮은 수준이며 올해 하반기 중에 국제 유가는 다소 반등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유가 60달러 수준에서는 셰일오일·오일샌드·초심해유전 등 생산비용이 높은 유전의 신규 투자가 크게 위축될 것으로 봤다. 그는 “생산 증가세가 둔화되면서 배럴당 50~60달러 수준까지 떨어진 유가 급락세에 제동이 걸릴 것”으로 전망했다.

- 하현옥 중앙일보 국제경제부 기자, 염지현 중앙일보 경제부 기자

201502호 (201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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