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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현지 리포트① 한국기업의 엘도라도? 베트남을 가다 - 생산기지에서 소비 대국으로 경제시프트 

한국, 지난해 일본 제치고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 올라서… 실용적 사고와 근면성 강점, 현지 정서 이해가 성공의 밑거름 

도로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행렬이 마치 물고기떼처럼 일사불란하게 도시를 누빈다. 고층건물에는 어김없이 다국적기업들의 네온사인 간판이 걸려 있다. 거리 곳곳에는 우리에게 ‘월남 패망일’로 알려진 ‘사이공(남베트남) 해방’ 40주년(4월 30일)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화려한 조명으로 밤거리를 수놓고 있다. 베트남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전 인구의 3분의 2가 40세 미만이고, 사회주의를 고수하면서도 외국인과 자본주의에 배타적이지 않은 곳. 최근 수년째 고도 성장을 이어가는 베트남의 경제의 저력은 여기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해외 기업이 이곳에 투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마치 황금의땅 엘도라도로 몰려든 대항해 시대의 유럽인들을 연상케 한다. 그중에서도 한국은 가장 적극적인 투자국 중 하나다. 월간중앙은 베트남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한국 기업들을 찾아가보았다. 이들이 겪은 시행착오와 성공의 발자국이 앞으로 베트남으로 향할 더 많은 기업에 이정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호치민시는 베트남에 몰려드는 외국 자본의 집결지다. 호치민 시내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바이텍스코 타워(높이 206m)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사이공강 주변의 전경. 왼쪽 강 건너편에 신도시 건설을 위한 토지조성공사가 한창이다.
베트남 제2도시 호치민시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를 1시간 30분가량 달리다 보면 나타나는 빈증성. 우리나라로 치면 경기도와 같은 곳이다. 빈증에 들어서면 각종 외국기업의 대형 광고판이 마치 사열을 하듯이 줄지어 서 있다. 그중에는 한국 기업의 광고판도 곳곳에 눈에 띈다. 이곳은 베트남 산업의 전초기지 같은 곳으로 외국 기업의 대형 공장들이 밀집돼 있다. 사이공강과 메콩강을 이용한 내륙 수상운송과 해운에 유리한 입지를 가졌기 때문이다. 베트남 남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대부분 이곳 빈증 일대에 몰려 있다.

빈증성 벤깥현 미푹3공단에는 금호타이어 베트남공장이 있다. 빈증성에 투자한 외국 기업들 중 가장 큰 규모다. 공장 부지의 길이만 1㎞를 넘을 정도다. 전체 면적은 31만5천㎡로 금호타이어 국내·외 8개 공장 중 광주공장(41만5천㎡)에 이어 둘째로 넓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매캐한 고무냄새와 함께 열기가 뿜어져 나온다. 컨베이어벨트로 연결된 거대한 기계가 쉬지 않고 돌아가는데 거의 모든 공정이 자동화돼 기계를 조작하는 인력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생산라인에서는 얇게 가공된 고무와 섬유 등 각종 원단이 포개지고 눌리며 타이어의 온전한 형태를 갖춰나간다.

금호타이어 베트남공장은 2008년 3월 가동을 시작했다. 2억6100만 달러가 투자됐다. 연간 330만 개의 승용타이어를 생산한다. 광주(1600만 개)나 전남 곡성(1500만 개), 중국(4개 공장 2850만 개)의 공장들에 비하면 작은 규모지만 영업이익률은 월등히 높다. 인건비가 낮고 생산능률이 높아서다. 종업원 수는 불과 756명. 이곳에서 만들어진 제품은 대부분 북미와 중동, 동남아시아 등으로 수출된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국내 기업 중에서 대우그룹과 함께 이곳에 진출한 가장 오래된 한국기업 중 하나다. 한국과 베트남의 수교(1992년) 직후인 1993년에 아시아나항공의 취항을 통해서다. 개방 초기에는 기업들이 사회주의국가에 대한 선입관과 위험부담 때문에 투자를 꺼렸다. 초기의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20년 넘게 꾸준히 투자를 해온 금호아시아나그룹에 대해 베트남 정부가 갖고 있는 애정은 각별해 보인다. 2011년 11월 9일 한국을 국빈 방문한 쯔엉 떤 상 베트남 국가주석이 서울 신문로에 있는 금호아시아나 본사를 방문해 박삼구 회장과 환담을 나눴을 정도다. 두 사람의 만남은 2007년부터 이때까지 다섯 번이나 된다. 지난해 3월 12일에는 베트남 정부가 박삼구 회장에게 우호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민간기업이 베트남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것은 처음 이라고 한다.

베트남 정부가 금호그룹에 이토록 각별한 애정을 쏟는 이유는 뭘까? 김현호(53) 금호타이어 베트남법인장은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의리를 지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베트남인들도 중국의 ‘꽌시(关系)’처럼 의리를 대단히 중하게 여긴다고 한다. 김 법인장은 “베트남이 처음 시장개방정책을 펴던 시기에는 외국 기업들이 반신반의하며 선뜻 투자에 나서지 않았다. 금호그룹은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때에도 현지 투자를 유지했다. 이런 태도에 대해 베트남 정부가 고마움의 표시로 일종의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존재감이 희미해진 ‘대우’를 베트남에서 여전히 최고 기업으로 기억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말 기준 3100여 개 한국기업 진출


▎(왼쪽)외국 기업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호치민의 위성도시 빈증성 관문의 조형물 옆으로 금호타이어의 대형 광고판이 서 있다.
현지의 한국 기업 관계자들은 기업활동을 하기에 베트남처럼 좋은 조건을 갖춘 곳도 드물다고 입을 모은다. 김 법인장이 꼽은 베트남의 매력은 ▷안정적인 정치 구조 ▷낮은 생산원가 ▷잠재력이 큰 시장성이다. 베트남 정부는 1986년 공산당 제6차 대회에서 경제 개방을 결정했다. 이른바 ‘도이모이(쇄신을 뜻하는 베트남어) 정책’이다. 이후 개방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정책의 일관성은 기업이 해외에 투자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요소 중 하나다. 또 임금인상, 근로조건 개선 등 노사 갈등의 요소들을 정부가 나서서 통제하기 때문에 갈등 해결 비용을 줄이고 생산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베트남의 인건비는 국내의 10분의 1 수준이다. 베트남 정부는 올해 최저임금을 월 315만 동으로 결정했다. 한화로 약 18만4천원이다. 금호타이어 공장에서 현지인 근로자가 받는 급여는 이보다 꽤 높은 편이다. 그래서 베트남 근로자들의 충성도와 능률이 매우 높다고 한다. 현지 영업과 관리를 총괄하는 김철환 상무는 “중국보다 인건비가 절반 정도로 저렴하고 손재주와 머리가 좋아 업무의 능률도 높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한국의 기업들에 베트남은 중국을 대체할 해외 생산기지로 급부상했다.

지난해 11월에는 한국이 일본을 투자규모에서 앞질러 1위 투자국에 올랐을 정도다. 삼성전자의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삼성전자는 2008년 베트남 북부에 위치한 홍강 델타 지역의 박닌성 옌퐁공단에 휴대전화 공장을 설립했다. 연간 1억2천만 대 생산으로 세계 최대 규모다. 이어 지난해 2월부터는 타이응우옌성 옌빈공단에 최대 1억5천만 대 연산 규모의 공장을 추가로 가동하고 있다. 삼성전자 전체 휴대전화 생산량의 절반이 이곳 베트남에서 만들어진다. 지난해 11월에는 2공장이 있는 옌빈공단에 30억 달러를 추가로 투자하기로 결정했고, 남부 호치민 사이공하이테크파크 공단에는 2017년까지 가전공장을 설립할 예정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KOTRA) 호치민무역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한국의 베트남 누적투자액은 372억 달러, 4110건에 이른다. 한국 기업의 베트남 투자는 2007년44억6200만 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국제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2012년까지 침체기를 겪었다. 그러다 2013년부터 기업의 현지 진출이 다시 늘어나면서 지난해 투자액 61억2800만 달러, 투자 건수 505건으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베트남 전체에 3100여 개의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고,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에 50%, 하노이를 비롯한 북부지역에 35%가 집중돼 있다. 코트라 호치민무역관의 홍석균 차장은 “베트남은 미국·중국·홍콩에 이어 우리나라의 넷째 투자대상국이며 아세안지역에서는 최대 투자대상국”이라고 말했다.

노동집약 산업에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 중


▎국내에서 사양길에 접어든 섬유가공산업이 베트남에서 활황을 맞고 있다. 세계 유명 패션브랜드에 납품하는 의류제조업체 FTN 베트남공장의 전현수 법인장(왼쪽)이 작업 과정을 지휘하고 있다
전통적인 노동집약산업에서도 한국 기업의 투자가 늘고 있다. 금호타이어 공장으로부터 자동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봉제공장을 찾아가보았다. 길이 100m가 넘는 공장 내부에는 여러 갈래의 긴 작업대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가 옷감을 재단하고 봉합하느라 손길이 분주하다. 한국의 의류 수출 전문업체인 FTN 베트남공장의 모습이다. 2006년 11월 가동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만든 의류는 버버리, DKNY, 캘빈클라인, 바나나 리퍼블릭 등 유명 패션브랜드의 상표를 달고 수출된다. 진출 당시 종업원 1천 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3200명으로 규모가 커졌다. 국내에서 쇠락한 섬유가공산업이 이곳에선 활황을 맞은 것이다. 미국을 비롯해 12개국이 참여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영향 때문이다.

베트남의 섬유산업은 TPP 최대 수혜업종으로 지목돼 한국 섬유업체들의 투자 열기에 불을 지폈다. 한세실업은 남부 띠엔장성의 기존 공장에 10만 평 규모의 공장을 신축하고, 한솔은 벤쩨성에 세 번째 공장을 짓고 있다. FTN도 중국 공장의 규모를 줄이는 대신 베트남의 생산시설을 30% 정도 증축하고 있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섬유업체는 약 500개. 그중 350여 개가 중남부에 몰려 있다. 이들의 현지인 고용규모는 모두 25만 명에 이른다. 베트남 중남부섬유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전현수(52) FTN베트남 법인장은 “미국 의류업계의 OEM(주문자상표부착) 생산물량의 70% 정도를 아시아에서 담당하고 있는데 베트남에서 생산된 상품에 대해 바이어들의 만족도가 특히 높다”고 말했다. 전 법인장은 지난해 12월 제51회 무역의날 행사에서 국무총리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는 “베트남에 진출한 기업들의 활약과 베트남 시장의 높아진 위상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지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베트남을 “지금보다 미래가 더 기대되는 나라”라고 입을 모은다. 호치민 거리를 나서면 그 말이 빈말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수많은 오토바이 행렬속에도 BMW, 벤츠 등 독일 고급차가 유독 많다. 상대적으로 자동차가 적어서 자주 눈에 띄는 것이겠지만 거꾸로 그만큼 고급 승용차 수요가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중하위층이 많이 거주하는 벤탄시장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이들이나 택시기사들이 아이폰 최신 모델을 익숙하게 사용하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아이폰은 베트남인들의 월급 두 세 달치와 맞먹는 고가품이다.

베트남 현지인들의 소비경향을 조사한 호주계 ANZ은행은 베트남인들의 높은 계층 상승 욕구가 소비행태에도 반영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신흥 소비계층인 젊은 소비층이 브랜드에 민감하고 소비 경험을 공유하는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다. 베트남 인구는 9300만 명으로 세계 14위 규모다. 국토는 남북을 합친 한반도의 1.5배다. 평균연령은 28세로 한국(38세)보다 훨씬 젊다. 30세 이하 인구가 56%를 차지한다. 코트라 호치민무역관은 보고서에서 “베트남의 중산층 인구는 약 17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20%에 못 미치고, 전체 인구 중 34%만 도시에서 생활하는데 이는 그만큼 베트남이 소비시장으로서 성장 잠재력이 크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 보고서는 베트남의 중산층 인구가 2020년까지 매년 200만 명씩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런 베트남인들의 소비 수요는 한국의 유통·문화산업 기업들에도 큰 호재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한국 기업들의 현지화 전략도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인 롯데리아는 지난해 9월 베트남에서 200호점을 돌파해 글로벌 브랜드인 KFC를 앞질렀다. 호치민 시내 곳곳에서 롯데리아 매장이 쉽게 눈에 띈다. 시장점유율도 49.6%로 선두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는 지하 5층, 지상 65층(높이 272m)의 복합빌딩 ‘롯데센터 하노이’가 지난해 9월 완공돼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롯데그룹의 주요 계열사가 입주해 있는 베트남 사업의 컨트롤타워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호치민에 대형유통점인 롯데마트 10호점이 문을 열었다. 사이공강 동남쪽 미개발지역에는 롯데자산개발이 2조원을 투자해 ‘에코스마트시티’ 건설을 추진 중이다. 호치민시 2군 뚜띠엠 개발지구인 이곳은 호치민시가 2002년부터 신도시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곳이다. 롯데가 개발하는 구역은 총 10만㎡ 규모로 백화점 등 상업시설과 호텔, 오피스, 아파트 등 주거와 상업이 결합된 공간으로 개발될 예정이다. 지금은 부지 조성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현지 정서 숙지하는 게 성공의 밑거름


▎베트남은 적극적인 외국 자본 유치정책을 통해 동남아에서 가장 투자하기 좋은 나라로 발돋움하고 있다. 호치민의 야경을 수놓은 마천루는 베트남 경제 부흥의 상징이다.
CJ의 멀티플렉스 영화관 CGV도 현지에서 고급엔터테인먼트 시설로 자리 잡았다. 2011년 7월 베트남 최대 복합상영관 체인 ‘메가스타’를 인수하며 현지 문화콘텐트 시장에 뛰어든 CJ그룹은 지난해부터 메가스타 대신 자체 브랜드인 CGV를 내세웠다. 한류열풍에 힘입어 한국형 멀티플렉스가 현지에서도 통할 것이란 확신이 있어서다. 그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CGV는 베트남 내 박스오피스 기준으로 5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9월 기준 총 16개 극장과 110개 상영관을 보유하고 있다. CJ는 한국영화 상영편 수를 확대해 한류 플랫폼의 이미지 기반을 다질 계획이다. 김도훈 호치민 한인상공인연합회(KOCHAM) 전문위원은 “투자 내용이 과거에는 봉제·섬유 등 노동집약적 산업 중심으로 투자가 이뤄졌으나 2013년 이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변화가 뚜렷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기업이 베트남 시장 공략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시장의 조건으로 볼 때 대기업의 경우 대체로 실패할 가능성이 작다. 철저한 시장 조사와 잘 갖춰진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고, 중앙정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확천금의 환상과 의욕만 갖고 뛰어든 중소기업이나 개인 사업가들에게 베트남은 무덤과 같은 곳일 수도 있다.

A중소기업은 베트남의 제도와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고 현지 진출을 서둘렀다가 낭패를 본 경우다. A업체는 베트남 투자 열풍이 불던 2006년경 중국에 있던 공장을 베트남으로 이전했다. 값싼 노동력과 외국인 투자기업에 대한 베트남 정부의 혜택에 매료돼 투자를 서둘렀다. 50년 임대 조건으로 토지사용권도 확보했다. 초기에는 꽤 높은 이익을 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로 경영이 악화됐다. 결국 몇 년 만에 철수를 결정했다. 하지만 사용권을 획득한 토지의 가치가 높아져 임대차 비용을 정산하면 손해는 보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베트남 지방정부가 임대 이전 원형토지의 잠재 가치를 정산에 포함시키면서 오히려 돈을 더 내놓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결국 이 기업 대표는 공장 자산을 포기하고 야반도주를 택했다.

베트남은 사회주의체제 국가로 개인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토지 공개념이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다만 ‘토지 사용권’이란 용어로 개인의 소유를 어느 정도 묵인해준다. 부동산을 사고 팔아 시세차익을 얻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개인, 그중에서도 베트남 국민에게만 허용될 뿐이다. 이런 점을 혼동해 기업을 일으켰다가 한 푼도 건지지 못하는 피해가 종종 발생기곤 한다. 외국인 토지소유가 금지돼 있어서 현지인 명의로 토지를 확보했다가 나중에 철수 과정에서 차명 토지주가 협조해주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다. 주로 개인사업가들이 이런 일을 겪곤 한다. 하지만 이럴 경우 베트남 정부로부터 어떤 구제도 받을 수 없다. 토지 차명사용이 불법인 데다 베트남 정부가 자국민을 우선적으로 보호하기 때문이다. 자영업자도 마찬가지다. 현지인의 명의를 빌려 점포를 열었다가 아예 재산을 모두 떼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운영권을 빼앗기고 나면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입장이 역전되는 것이다. 호치민 한인회의 한 관계자는 “막연한 기대만 갖고 베트남에 왔다가 사업에 실패하거나 현지 사업 파트너와 불화 때문에 재산을 떼여 한국으로 돌아가지도 못 하고 이곳에서 숨어 지내는 한국인도 꽤 있다”고 전했다.

이런 문제가 비일비재하지만 한국 정부나 공공기관이 나서서 도움을 주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불법행위까지 보호할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도움을 주려 해도 당사자들이 잠적해버리는 경우가 많아 쉽지 않다. 사전에 주의사항과 현지 정보를 알려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베트남에 진출하기 전에 스스로 시장조사와 준비를 철저히 하는 방법밖에 없다. 현지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기업인과 교민들은 베트남인들의 정서를 이해하는 게 성공의 밑거름이라고 입을 모은다. 베트남에서 10년 넘게 섬유 가공업체를 운영하는 기업가 B씨는 “베트남인들의 체구가 왜소하고 한국보다 가난해 얕잡아보거나 게으르다는 편견을 갖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잘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말했다. 그는 “동남아 국가들 중 베트남인들의 평균 IQ가 싱가폴에 이어 2위 수준이란 연구가 있을 만큼 지적 수준이 높다”며 “연중 기후가 따뜻하고 먹을거리가 풍부한 환경 때문에 낙천적인 생활 방식이 우리가 보기엔 느린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B씨에 따르면 베트남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보수적이어서 경영자의 도덕성을 높이 평가한다. 만약 현지인 직원들이 오너를 따르지 않고 기업운영이 잘 안 된다면 경영자 스스로의 태도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B씨는 자신이 경험한 일화를 소개했다. 베트남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바이어를 접대하면서 유흥업소에 갔는데 다음날 매니저급 베트남 직원이 전날 밤 자신의 동선을 꿰뚫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베트남 직원에게서 ‘사장님이 그렇게 행동하면 직원들이 말을 안들을 것’이라는 충고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베트남인을 얕보거나 저급한 행동과 언행이 경영 리더십을 실추시킨다는 것이다. B씨는 그날 이후로 유흥업소 출입을 일절 하지 않게 됐다고 한다.

베트남인들은 모든 일에서 절대로 서두르는 법이 없다. 열대지방 사람들의 낙천적 성격으로 짐작된다. 취재를 위해 5일간 호치민에 머무는 동안 뛰어다니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다. 김현호 금호타이어 베트남 법인장도 “베트남에서 2년여 동안 근무하면서 현지인 직원이 뛰는 걸 본게 딱 한 번 있었다”고 했다. 10여 년 전에 개발계획을 세운 사이공강 주변 호치민 2구역 신도시 개발사업도 이제서야 부지 조성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다만 남부지방에 비해 기후가 춥고 환경이 척박한 북부지방은 다소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적이어서 한국인의 정서와 좀 더 가깝다. 코트라 관계자는 “베트남인은 배타적이지 않지만 체면을 중시하고 자국인끼리 단결력이 강하다”며 “저들의 특성을 배려하고 편견을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실리 추구 사고가 적극적 개방과 발전의 원동력


한국인이 베트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또 있다. 저들의 입장에서 볼 때 과거의 침략자에 대한 반감이 거의 없는 베트남인들의 정서가 바로 그것이다. 베트남 정부조차 10년 동안 전쟁 상대였던 미국과 한국 등에게 전쟁 중 자국민이 희생된 것에 대한 사과나 금전적 보상을 거의 요구하지 않고 있다. 대신 경제 교류 확대를 통해 자력을 키우는 길을 택했다. 2011년부터 베트남을 이끌고 있는 정권 지도부의 면면을 보면 베트남 정부의 이런 의지가 대번에 읽힌다.

응웬 푸 쫑 당 총서기는 베트남전쟁이 발발했을 때 구소련에서 유학한 호치민 엘리트 출신이다. 그는 구소련의 몰락을 곁에서 지켜보며 경제체제로서 사회주의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명목상 행정부 수반인 쯔엉 떤 상 국가주석은 당 경제위원장을 지내고 국가주석을 연임하며 당의 신뢰를 받고 있다. WTO 가입과 TPP 협상 참여, EU와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협상 등이 그의 재임 기간 중에 이뤄졌다. 쯔엉 주석과 함께 유임된 응웬 떤 중 총리도 호치민시 수산회사 사장과 내무차관, 당경제위원장, 중앙은행 총재 등을 역임한 경제통이다. 간선으로 선출되는 국회의장에도 재무부 관료(건설은행, 투자국장, 재무부 장관) 출신인 응웬 싱흥 전 수석부총리가 포진해 있다.

베트남 정부는 연간 GDP 7~8% 성장 유지, 1인당 GDP 3000~3200달러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황성원 호치민 한인사편찬위원장은 “베트남인들은 역사적으로 과거에 천착하기보다는 미래의 이해관계를 중요시하는 실용적 정서가 강하다”고 평가했다. 과거 1천 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10세기경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스스로 중국과 관계 개선에 나선 먼 과거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19∼20세기 차례로 침략해온 프랑스, 일본, 미국을 적대하지 않고 상대의 문화와 자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모습에서도 베트남인들의 낙천적이고 실용적인 국민성을 읽을 수 있다.

황 위원장은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제한된 사회여서 과거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요구가 나오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실리를 추구하는 국민성이 베트남의 대외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관심이 높아지고 경제 교류가 확대 되면서 현지에 진출하는 한국인의 연령층도 다양해진다. 과거에는 중견 사업가나 인생 2막을 꿈꾸는 40대 이상 중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최근에는 청년층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2011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을 목표로 베트남에 개설한 GYBM(Global Young usiness Manager) 프로그램은 3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로 한국 청년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2016년까지 500명의 연수생이 배출된다. 김우중 회장은 지난해 11월 <월간중앙>과 가진 인터뷰에서 “선진국에서의 행복과 우리나라의 행복은 다르다. 베트남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하던 모든 습관을 버리고, 현지여건에 맞춰서 생각하면 다 된다. 철저히 현지화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베트남 경영’을 꿈꾸는 이들이 준비해야 할 모든 것이 이 한마디에 녹아들어 있다. 한국을 뛰어넘기 위해 한국을 공부하는 베트남처럼, 우리에게도 베트남을 배워야 할 이유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201502호 (201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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