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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2)] 효종의 ‘남다른 우애’가 부른 비극 

인평대군의 네 아들(4福)에 대한 맹목적 사랑이 교만과 방종 불러와… 권력자 측근일수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일신(一身) 보전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최고권력자의 친인척일수록 겸손과 근신을 배우게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교척속(敎戚屬)’이다. 그렇게 하지 못해서 권력자와 그 주변이 공도동망(共倒同亡)하는 경우를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효종과 현종에 이어 14세의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숙종이지만 4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사진은 창경궁 문정전에서 열린 조선시대 궁궐 일상 재현행사.
효종 7년(1656) 5월 12일, 승정원에 고변서가 접수됐다. 고발자는 천안군수 서변(徐忭)이었다. ‘훈련대장 이완을 비롯한 몇몇 역적이 역모를 도모했다’는 소문을 홍만시로부터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고변서가 접수된 당일, 관행대로 궁궐 안에 추국청(推鞫廳)이 설치됐다. 의금부 도사들은 고변서에 언급된 피의자들을 체포했다. 조사 결과 서변이 들었다는 소문은 조윤석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추국청 조사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어느 날인가 저의 매부 한정상 집에서 신부례(新婦禮)를 행했습니다. 저는 그날 풍정도감(豊呈都監)에 있다가 해 떨어진 후 그 집에 갔습니다. 그곳에는 한씨 친척 몇 명이 모여 있었지만 모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정선흥 역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젊은이가 방으로 들어와 자기집에서 있었던 회음(會飮)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젊은이에 의하면 자신의 아버지와 허적이 함께 모여 있었는데 야심한 시각에 승지 유도삼이 와서 망발했다고 했습니다. 정선흥이 ‘무슨 망발이었습니까?’라고 묻자 젊은이는 ‘유 승지가 술에 취해 들어와 거만한 자세로 앉자 어떤 사람이 인평대군께서 여기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유 승지는 깜짝 놀라 일어나 절하면서 ‘소신(小臣)의 불찰’이라고 말했습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망발이라고 하자 유 승지는 ‘오랫동안 승지로 있어 말이 습관이 돼 그렇게 됐다고 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 말이 소문으로 퍼졌는데 저는 같이 앉아서 듣기만 했습니다.” [출처: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서변등옥사추안(徐忭等獄事推案)>]

조윤석의 진술은 생각하기에 따라 무시무시한 파장을 불러올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유 승지가 인평대군에게 ‘소신’이라 한 말이 문제였다. 조선시대에 승지가 ‘소신’이라 자칭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국왕과 왕비뿐이었다. 그런데 승지 유도삼은 인평대군에게 소신이라 자칭했다. 술에 취해 그랬다고는 해도 충분히 대역부도로 몰릴 만한 발언이었다.

장소와 참석자들도 문제였다. 위의 젊은이가 언급한 자기 집이란 오정일의 집이었다. 오정일이 누구인가? 바로 인평대군의 큰처남이었다. 오정일이 자신의 집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매부인 인평대군을 초청했는데, 그 자리에 허적, 유도삼 등이 참여했던 것이다.

당시 허적은 형조판서로서 남인의 핵심인물이었고, 유도삼은 현직 승지였다. 왜 이들이 인평대군과 오정일의 술자리에 참여했을까? 또 왜 현직 승지는 인평대군에게 소신이라 자칭했을까? 의심하는 눈으로 보면 모든 상황이 의혹을 낳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당시 최정예 부대인 훈련도감을 장악한 이완까지 연루되었다면 단순한 의심을 넘어 역모를 의심하기에도 충분했다.

더구나 오정일의 아들이 왜 그런 사실을 조윤석을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일부러 소문을 냈을까 하고 의심하면 온갖 추측도 가능했다. 혹 유도삼의 망발은 단순한 망발이 아니라 어떤 음모 때문에 나왔고, 그 음모를 물타기 위한 역(逆)선전 또는 사람들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술책이 아닐까 하는 추측, 나아가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조윤석이 있는 자리에서 그런 소문을 퍼뜨린 저의 역시 음모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했다.

왜냐하면 조윤석은 자의대비 조씨의 친정 큰오빠인데, 만약 그가 이런 소문을 듣고 자의대비에게 알릴 경우, 자의대비의 반응에 따라 다음 단계를 음모하려는 술책이라고 의심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의심들은 특히 서인 사이에 횡행했다. 그때 서인들 사이에는 남인이 서인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인평대군과 자의대비를 이용하려 한다는 의심, 아예 남인이 인평대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의심 등이 횡행했다. 무엇보다도 인평대군의 처가인 동복 오씨가 남인의 대표가문일 뿐만 아니라 동복 오씨의 중심인물인 오정일이 인평대군, 허적과도 빈번히 접촉했기에 이런 의심들을 불러왔다.

효종의 공평하지 못했던 사건 처리

서변의 고변은 사실상 위와 같은 서인의 의심에서 비롯됐다. 이런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인평대군, 오정일 그리고 허적을 체포해 조사해야 했다. 조선시대 관행으로 한다면 추국청 조사에서 언급된 연루자는 무조건 조사해야 했기에 조윤석의 진술에 언급된 그들을 조사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이들을 체포하자는 추국청의 요청에 대해 효종은 예상외로 거부의사를 표시했다. 왕은 승지 유도삼이 술기운에 소신이라 자칭한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도리어 왕은 누군가가 서변을 사주해 고변했다고 의심했다. 인평대군을 해치고 남인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고변했다고 의심한 것이었다.

하지만 서변의 고변이 서인 일반의 의심을 대변했다면 효종의 의심은 국왕 개인의 의심일 뿐이었다. 따라서 공평한 조사가 되기 위해서는 서변의 무고 가능성은 물론 인평대군과 오정일의 역모 가능성도 함께 조사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왕은 그렇게 하지않았다. 왕은 서변의 고변을 무고라 단정하고 그 배후를 캐기 위해 직접 추국청에 참여해 누가 사주했는지 집요하게 추궁했다. 연이은 고문에 시달리던 서변은 매를 맞다가 죽었다. 서변에게 소문을 전한 홍만시 역시 매를 맞다가 죽었다. 그 결과 서변의 고변은 무고로 확정됐다.

그렇다면 서변의 고변은 정말 무고였을까? 현재 상황에서 무고인지 아닌지 확인할 증거는 없다. 무고일 가능성도 있고 아닐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인평대군과 오정일도 조사했어야 하는데 효종은 독단으로 이들을 조사에 포함 시키지 않았다.

만약 당시에 인평대군을 조사했다면 그는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역적들에게 추대됐다는 혐의만으로도 생사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인평대군은 물론 왕 자신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바로 이 점을 우려해 효종은 일방적으로 서변을 무고자로 몰았다.

여기에 반발한 대사간 유철이 추가 조사를 요구하자 오히려 왕은 그를 서변의 배후자로 지목해 국문하라 명령했다. 이에 신하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효종은 “오늘날의 나랏일은 내가 알 바 아니니 그대들 마음대로 해라. 내게는 단지 동생 하나가 있을 뿐인데 기어코 죽이고자 하니, 어찌 이처럼 간악하고 음흉한 자가 있단 말인가?”라며 울부짖기까지 했다.

극단적으로 나오는 왕의 위력에 신하들은 입을 다물었다. 대사간 유철은 곤장을 맞은 후 귀양에 처해졌고, 서변의 고변은 무고로 마무리됐다. 인평대군을 살리기 위한 효종의 우애가 불러온 결과였다.

부주의한 행동으로 단명 재촉한 인평대군


▎경기 여주군에 있는 효종대왕릉. 소박하면서도 간결하고 짜임새 있게 조성됐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서변의 고변은 무엇보다도 인평대군의 부주의가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그가 큰처남 오정일을 비롯해 허적, 유도삼 등을 자주 만났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관행에 의하면 대군이 관료를 만나는 것은 금기시됐다. 예컨대 어느 왕자가 이언적을 사모해 찾아오자 이언적은 그날로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다는 이야기가 미담으로 전해지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인평대군은 현직 관료인 허적, 유도삼 등을 스스럼없이 만났던 것이다. 이것이 많은 의심과 소문을 양산했다.

당시 효종이 좀 더 객관적이었더라면 인평대군은 몰라도 최소한 오정일과 허적은 조사해야 마땅했다. 서인의 의심을 조금이라도 풀기 위해 또 인평대군과 남인에게 최소한의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효종은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을 권력으로 찍어 누르고 탄압했다. 당연히 서인의 불만은 커졌고 인평대군의 불안 역시 커졌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서변의 고변이 있은 지 2년 후에 인평대군은 37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고변 때문에 인평대군이 제명에 죽지 못했다고 생각한 효종은 직접 제문을 짓고 글씨까지 썼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아아! 역적 서변의 변괴는 말하고자 하면 참혹해 사람으로 하여금 기가 막히게 한다. 간악한 정상이 탄로났기에 극형에 처해 그 원한을 통쾌하게 풀었지만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으리요. 지금까지도 분노한 마음이 그때와 같이 삭아들지 않는구나. (…) 의지할 곳 없는 너의 아이들과 슬픔에 젖은 너의 처는 내가 모두 길러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 너는 항상 가득 차는 것을 두려워해 매번 겸허한 덕을 삼갔는데 어찌 이다지도 보답을 받지 못한단 말인가? 하늘의 도가 무상하니 창천을 우러러 길게 부르짖는다. 저승으로 갈 날이 닥쳐오는데 너는 어찌하여 내 꿈에 들어와 평생의 지극한 회포를 풀어주지 않는단 말이냐? 마치 낭랑한 너의 웃음 소리를 듣는 듯하고, 네가 문득 눈앞에 있는 듯도 하니 내 어찌 잠시라도 너를 잊을 수 있겠느냐? 세월이 흘러도 애통함을 누르기 어렵구나. 세상에 남겨진 너의 아이들은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고, 나 또한 실의에 차서 이 세상일에 즐거움이 없으니 비로소 만가지 인연이 이에 허사가 되었음을 알겠구나.” [<효종 어제어필, 이요치제문(李?致祭文)> 중에서]

인평대군이 세상을 떠났을 당시 슬하에 4남2녀가 있었다. 4남 중 첫째 복녕군이 스무 살, 둘째 복창군이 열여덟 살, 셋째 복선군이 열두 살 그리고 막내 복평군이 열한 살 이었다. 이들은 복자 돌림이기에 통칭해 제복(諸福) 또는 4복(四福)이라 했다. 복녕군과 복창군은 이미 혼인했고, 복선군과 복평군은 혼전이었다.

이들 4복을 키운 여성은 윤 상궁이었다. <숙종실록>에 의하면 윤 상궁은 인조 때 궁녀였는데 당시 궁중실세 조 귀인에게 미움을 받아 인평대군방으로 쫓겨났다. 인평대군은 바로 이 윤 상궁에게 아이들 양육을 맡겼다. 윤 상궁이 궁녀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자와 역사에 통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4복을 양육하던 윤 상궁이 어느 날 궁중에 들어왔다. 그때 세자였던 효종이 인조에게 수라를 올렸는데, 조 귀인이 은 첨자(籤子)를 뽑아 생선탕에 꽂았고 색이 변했다. 조 귀인은 “색이 변하다니 몹시 괴이합니다”라고 했다. 탕에 독약이 들었다는 뜻이었고, 세자가 인조를 독살하려 한다는 뜻이었다. 세자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때 마침 옆에 있던 윤 상궁이 “뜨거운 생선탕에 은을 담그면 색이 변합니다. 다른 생선탕으로 시험 해보소서”라고 했다. 시험 결과 과연 그랬다. 인조의 의심이 풀려 세자는 살아날 수 있었다. 이후 세자는 윤 상궁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겼고 왕이 되자마자 지밀상궁으로 입궁시켰다.

인평대군이 죽자 효종은 “의지할 곳 없는 네 아이들을 내가 모두 길러줄 것”이라 공언한 그대로 복선군과 복평군을 궁중에 들여 키웠다. 이들을 딱하게 여긴 효종은 윤 상궁에게 양육을 맡겼다. 그렇지 않아도 불쌍한 복선군과 복평군을 엄한 남자선생님에게 맡기기가 안쓰러웠던 것이다. 윤 상궁은 이들을 마치 아들처럼 아끼고 돌보며 철없이 키웠다.

효종은 세자에게도 4복을 친형제처럼 대우해야 한다고 누누이 가르쳤다. 당시 세자는 훗날의 현종으로 복창군과 동갑인 열여덟 살이었다. 친형제가 없어 외로웠던 세자는 4복 중에서도 특히 복창군과 친하게 어울렸다. 복창군은 동생들을 만나기 위해 또 세자를 만나기 위해 수시로 입궁했다.

복창군과 세자는 나이와 혈연 이외에도 인연이 깊었다. 세자는 김육의 손녀사위였고 복창군은 김육의 외손녀사위였다. 즉 세자는 효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김육의 아들인 김우명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복창군은 김육의 딸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복창군과 세자는 나이로는 동갑, 혈연으로는 4촌 그리고 혼인으로는 청풍 김씨 김육 가문의 사위였던 것이다.

복창군이 수시로 궁에 드나들고 나아가 복선군과 복평군이 궁 안에서 철없이 자라면서 무수한 소문과 의심이 난무했다. 그러나 효종이 생존한 상황에서 이런 소문과 의심은 겉으로 드러나지 못했다. 이런 문제를 언급하기만 해도 효종은 극단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효종의 절대적인 동정과 보호 속에서 4복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며 살았다.

하늘 높은 줄 몰랐던 ‘4복’의 방자함


▎사약(賜藥)은 고관대작이나 왕실의 지친 등이 대역죄를 지었을 때 내려진 벌이었다.
인평대군이 죽고 1년 만에 효종이 승하했다. 당장 서인 측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효종 승하 후 2개월 만에 송준길은 상소문을 올려 4복으로 인해 제기되는 각종 의혹과 불만을 공개했다. 송준길은 세종 때 광평대군의 어린 아들 영순군을 궁에 들여 양육하다가 문종이 즉위하자마자 출궁시킨 전례를 들어 복선군과 복평군을 속히 출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학덕이 뛰어난 사람을 골라 복선군과 복평군 및 복녕군과 복창군 등을 훈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종은 선왕인 효종의 유지를 들어 거절했다. 효종의 왕비 장씨 역시 선왕의 뜻이라며 4복을 감싸고돌았다. 이런 상황을 더욱 부채질한 사람은 대비 장씨의 측근으로 있던 윤 상궁이었다. 그녀는 4복을 아들처럼 생각하며 무조건 보호하려고만 했다.

그 결과 4복은 효종 때보다도 더 강력한 동정과 보호를 받게 됐고 여전히 세상 무서운 줄 모르며 살았다. 그들은 국법을 어기고 경기 각처를 돌아다니며 사냥과 유흥에 빠져 지냈다. 심지어는 사냥개의 먹이까지도 가난한 백성들에게 마련하도록 책임을 지워 도처에서 분란이 생겼다.

이를 보다 못한 송시열이 현종 9년(1668)에 상소를 올려 4복을 단속하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송시열과 송준길도 어쩌지 못하는 4복의 교만은 더더욱 기승을 부렸다. 현종 11년(1670)에 복녕군이 죽었지만 나머지 3복의 교만은 더욱 높아졌다. 간혹 삼사가 3복 문제를 제기했지만 그때마다 무시됐다. 현종의 지극한 우애가 불러온 결과였다.

칼을 빼든 숙종의 모후 김씨

그러던 와중인 현종 15년(1674) 2월 23일에 왕대비 장씨가 세상을 떠났다. 효종의 왕비였던 장씨는 남편의 뜻을 받들어 평상시 3복을 아들처럼 대우했다. 이런 왕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3복은 모두 입궁해 장례에 참여했다. 3복 중의 맏이인 복창군은 대전관(代奠官)에 임명됐다. 현종 대신 왕대비의 영전에 전(奠)을 올리는 임무였다.

어느 날 현종은 왕대비의 유산을 처분하게 됐다. 그 자리에 왕대비의 아들인 현종, 딸들인 공주 그리고 아들처럼 대우받던 복창군 등도 참여했다. 왕대비의 궁녀들도 참여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여한 복창군과 왕대비의 궁녀 중 한 명인 상업(常業)의 관계가 심상치 않았다. 야릇한 눈빛이 오가고 행동이 수상했던 것이다. 현종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지만 드러내놓고 말할 수도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궁궐의 치부를 드러낼 수도 있었고 복창군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현종은 왕비 김씨에게 말해 둘이 어떤 관계인지 은밀하게 알아보게 했다. 확인 결과 복창군은 궁궐에 들어올 때마다 간절하게 상업을 찾았다. 이미 궁녀들 사이에는 상업이 임신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3복 중의 막내인 복평군과 귀례(貴禮)라고 하는 궁녀와의 추문도 퍼질 만큼 퍼져 있었다. 복창군과 복평군 형제의 추문은 조선시대 종친이 일으킨 추문 중에서는 최고의 추문이라 할만 했다. 상황을 전해들은 현종은 “남녀의 욕정이란 사람이 억제하기 어려운데 지금 복창군의 기색을 보니 큰 환난을 일으키겠구나”라고 근심했다.

하지만 현종은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이런 사실을 공개할 경우 복창군과 복평군의 목숨이 위험하고, 방치하자니 궁궐 기강이 엉망이 되기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고민하던 현종은 왕대비 장씨가 세상을 떠난 지 6개월 후에 홀연 승하했다.

뒤이어 숙종이 14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분개하고 불안해진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현종의 왕비이자 숙종의 모후인 김씨 였다. 대비가 된 김씨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복창군과 복평군은 은혜를 원수로 갚은 불한당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효종과 현종의 지극한 동정과 보호에 힘입어 세상 편히 살았다. 그런 그들이 궁녀를 건드려 임신까지 시켰고, 그 때문에 고민하던 남편 현종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했다.

더구나 아들 숙종은 겨우 열네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숙종의 삼촌인 복창군은 서른다섯 살이었다. 단종과 수양대군 때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혹시라도 복창군 또는 그 동생인 복선군이나 복평군이 딴 마음을 품으면 어찌할 것인가? 3복 뒤에는 동복 오씨와 남인이 있었다. 궁궐 안에는 수십 년에 걸쳐 3복과 인연을 맺은 환관과 궁녀가 무수히 많았다. 이들이 합세하는 날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비 김씨가 이런 의심을 한 것은 무엇보다도 3복의 처신 때문이었다. 친형제처럼 지낸 현종을 배신하고 궁녀를 건드리는 복창군과 복평군이라면, 조카인 숙종에게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불안에 빠진 대비 김씨는 친정아버지인 김우명을 설득해 3복의 비리를 고발하게 했다. 김우명은 이런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 복평군 형제가 효종께 친아들과 같은 은혜를 받았고, 선왕으로부터도 친형제와 같은 은혜를 입은 것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 궁녀를 임신 시키기까지 한 사람을 금지하지 못한다면, 전하의 가법(家法)이 손상되는 것이 어떠할 것이며, 또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은혜를 미루어 법을 베푸시고 일찍 결단하여 적당히 처치하소서.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마음을 경동하여 욕심을 참고 행실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진다면 궁궐 안이 맑아질 것이고 국가도 크게 다행일 것입니다.” [<숙종실록> 권3, 1년(1675) 3월 12일]

끝내 화(禍)를 피하지 못한 3복


▎숙종의 어필(御筆) ‘경이직내 의이방외’.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는 뜻이다.
숙종은 의금부로 하여금 복창군과 상업 그리고 복평군과 귀례를 체포해 조사하게 했다. 그들은 늘 그렇듯 처음에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자 의금부에서는 형신(刑訊) 즉 고문을 요청했다. 당시로서는 당연한 요청이었다. 그런데 숙종은 “남의 말을 믿고 골육 지친을 헤아릴 수 없는 처지에 빠지게 하였으니 나는 매우 부끄러워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 (…) 이렇게 억울하고 애매한 사람을 잠시도 감옥에 가둘 수 없다. 즉시 석방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매우 이례적인 판결이었다.

관행대로라면 형신이 당연한데 오히려 석방 판결이 났기 때문이다. <숙종실록>에서는 이 판결에 대해 “주상이 이미 엄폐됐기에 이렇게 처분했으며, 또 처분이 꼭 주상에게서 나왔는지도 알 수 없다”고 논평했다. 누군가가 어린 숙종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석방 판결을 끌어냈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그 누군가는 윤 상궁 같은 궁녀 또는 3복에 밀착된 환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숙종의 판결에 언급된 ‘남의 말’은 다름 아닌 김우명의 말이었다. 김우명은 대비 김씨의 친정아버지이자 숙종의 외할아버지였다. 분개한 대비 김씨는 다음날 숙종과 조정중신들의 회의장에 무단 참여해 울부짖으며 김우명의 고발이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남인은 대비가 국정에 간여한다고 크게 반발했다. 대비 김씨는 자기의 말을 믿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3복 문제로 왕과 생모, 종친과 외척, 서인과 남인이 서로 비난하며 치고 받는 소동이 전개 됐다. 파국을 피하기 위해 숙종은 복창군과 복평군을 일단 유배에 처했다가 곧 석방했다. 대비 김씨의 입장 그리고 3복의 입장을 두루 반영한 처분이었다.

이런 소동이 벌어진 것은 무엇보다도 3복의 철없는 행동에서 비롯됐다. 그들이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3복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나마 궁녀 간통 사건에서 자유로웠던 복선군이 외삼촌 오정창 그리고 허적의 아들 허견 등과 어울렸던 것이다. 당연히 이들이 역모를 도모한다는 고변이 뒤따랐다. 이것은 효종 때 인평대군이 큰처남 오정일 그리고 허적과 어울리다가 고변을 당했던 사건의 판박이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사실이 있었다. 인평대군은 전과가 없었지만 3복에게는 ‘전과’가 있었다. 숙종은 복선군과 허견의 역모를 사실로 인정해 이들을 사사했다. 이 와중에 복창군도 사사당하고, 복평군은 유배에 처해졌으며 남인은 모조리 쫓겨났다. 이 사건이 숙종 6년(1680)에 있었던 이른바 ‘경신대출척’이었다.

3복의 비극 그리고 경신대출척의 뿌리를 찾아보면 거기에는 효종의 남다른 우애가 자리 잡고 있다. 아름다워야 할 우애가 비극으로 끝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3복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불쌍하리만큼 더 엄하게 훈육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3복은 평생에 걸쳐 윤 상궁의 일방적인 편애와 효종과 현종의 절대적인 동정을 받으며 자랐다. 그렇기에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실수를 되풀이하다 참혹한 최후를 맞은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모두를 비극으로 몰아넣었다. <대학연의>에서는 이런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교척속(敎戚屬)’을 제시한다.

친인척을 엄히 훈육해 겸손과 근신을 알게 하는것, 그것이 바로 ‘교척속’이다. 자손을 엄히 훈육하지 않아 교만과 방종에 빠지게 했다가 자손도 패가망신하고 스스로도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고금에 넘쳐나니 슬픈 일이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502호 (201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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