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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적 | 영화 <국제시장> 속 한 장면 ‘흥남철수’의 주인공들 - 역사상 최대 구출작전 마르지 않는 피란민의 눈물 

민간인 포함 1만4천 명의 탈출 도운 메러디스 빅토리호 기네스북에 올라… 탈출 도중 배 안에서 기적처럼 태어난 ‘Kimchi 5’ 등 피란민들의 어제와 오늘 

송락규 월간중앙 인턴기자

▎1950년 12월 23일 폭파되는 흥남부두. 유엔군은 흥남철수작전이 완수되자 중공군의 항구시설 이용을 차단하기 위해 흥남항에 폭격을 가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 홀로 왔다”(트로트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 1절)

새해 들어 첫 번째 천만 영화로 기록된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는 손녀가 이 노래를 부르자 좋아라 한다. 그러나 가족들은 아이에게 왜 이런 구식 노래를 가르쳐줬느냐며 핀잔을 준다. 당연하다. 가수 현인이 이 노래를 처음 부른 것이 60여 년전인 1953년이니 말이다. 전후 세대 이후 사람들에게는 이 노래의 감성이 지나치게 ‘올드’하게 들릴 수밖에 없을 터이다. 그럼에도 이 노래는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다. <슈퍼스타 K6>의 우승자 곽진언과 준우승자 김필은 이 곡을 리메이크해 불렀다. 노래가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앞 세대의 아픈 기억의 세포가 후손들에게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일까? 생사를 넘나들던 6·25전쟁 당시의 슬프고 고달픈 기억 말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덕수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처럼 흥남부두에서 목놓아 누이를 찾던 또 다른 ‘덕수’들은 아직까지도 그 장면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흥남항의 그 장면들은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것 같다고도 말한다.

미국 오하이오주 툴리도시에 거주하는 재미교포 원동혁(78) 씨는 그날의 장면들을 ‘구사일생’으로 기억한다.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지 못했다면 아마도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함께 배에 타지 못한 가족·친척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날 흥남부두에선 무슨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자유 찾아 탈출 감행한 10만 명의 피란민


▎이북 동포들의 피란을 가능하게 만든 현봉학 박사.
1950년 12월, 영하 20도의 흥남부두는 10만 명이 넘는 피란민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함흥과 흥남 일대로 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흥남 교두보를 끝까지 지켜내느냐, 포기하느냐의 문제였다. 장진호 전투 이후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판단한 유엔군사령부는 12월 8일 철수 명령을 내린다. 1950년 12월 15일부터 24일까지 전개된 흥남철수작전의 시작이었다.

이 작전은 미 10군단 지휘 하에 진행됐다. 이미 원산이 적 수중으로 넘어간 터라 철수는 해상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우선순위는 명확했다. 병력이 1순위, 군수물자가 2순위. 작전 초기만 해도 민간인은 철수 대상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 10군단의 지휘 아래 12월 15일 미 해병 1사단의 출항을 시작으로 17일 국군 수도사단, 21일 미 7사단이 차례로 흥남항을 벗어났다. 이제 남은 병력은 흥남의 최후 방어선에서 중공군과 맞섰던 미 3사단뿐이었다.

60여 년이 흐른 시간의 무게를 느끼면서 서울 신길동에 있는 동천교회에서 당시 피란을 나온 교인들로부터 흥남철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교회는 함경남도 함주군(現 락원군)에 있던 덕천교회 출신의 교인들이 서울에 세운 교회다. 서슬 퍼런 공산정권이 다시 들어설 걱정에 당시 이계실(71년 작고) 담임목사는 덕천교회를 비롯한 인근 교회의 교인 130여 명을 인솔해 미군을 따라 흥남으로 내려왔다. 남쪽으로 12㎞를 걸어 흥남부두에 도착한 그들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진 피란 인파를 보고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흥남부두는 전쟁고아들의 울음소리와 아이를 찾는 부모의 애끓는 목소리가 뒤섞여 난리도 아니었어요. 몇몇 돈 많은 사람은 조그마한 배를 구해서 타고 남쪽으로 갔지만 대부분의 피란민은 부두에 정박하고 있는 군함과 상선만 넋 놓고 쳐다보고 있을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18세 청년이었던 한용빈 장로(83)의 목격담이다.

한씨는 운이 좋은 경우였다. 이들의 전언에 따르면 당시 1군단 사령관 김백일 장군(1951년 순직)이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군인 신분이 아니면 배에 오를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사정이 여의치 않자 김 장군은 피란민의 자원입대 신청을 받았다고 한다. 이북에 남은 청년들을 국군 병력으로 받아들이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당시 한씨도 곧장 1군단 보충대에 편입되어 12월 14일 노르웨이 병원선을 타고 강원도 묵호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 그 같은 방식으로 피란 온 인원이 2천 명을 넘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교인들은 어떻게 탈출할 수 있었을까. 특히나 어린 아이들이나 노약자나 부녀자들 말이다. 그들 중에는 19일 이후 상선이나 군함 등에 몸을 실어 탈출한 이도 있었다. “미군들이 새끼줄을 쳐놓고 구역을 나눴어요. 그 줄을 잡아야만 배를 탈 수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어떻게든 줄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죠. 그 과정에서도 이산가족이 많이 생겼을 겁니다.” 박영자(87·여) 씨는 승선과정을 떠올리며 지금도 당시 탈출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 “한마디로 기적이었죠. 중공군은 흥남부두로 밀려오고 밤마다 포격이 계속되는데 그 와중에 탈출에 성공했으니 말이에요.”

그런 기적을 만든 사람 중에서 한국의 쉰들러라고 불린 현봉학 박사(2007년 작고)도 있었다. 그는 흥남철수작전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현 박사는 당시 민사부 고문으로 미 10군단에 소속돼 통역 일을 하고 있었다. 함흥이 고향인 그는 이들 피란민이 이북에 남아 모진 고초를 겪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국군과 유엔군을 도왔던 피란민들이 공산당의 숙청 대상이 되리란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고향 사람들의 어려움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군단의 총책임자 에드워드 알몬드(1979년 작고) 장군을 찾아가 함흥 사람들의 사정을 설명하고 민간인의 철수를 고려해달라고 간청했다. 그 과정에서 10군단의 부참모장이자 흥남철수의 실무 책임자였던 포니(1965년 작고) 대령이 힘을 실어 줬다. 그러나 알몬드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10만 명에 이르는 10군단 병력을 철수하는 것도 불확실한데 섣불리 민간인을 철수 계획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고 했다. 당시 흥남부두와 선박 규모로는 피란민을 모두 대피시키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피란민들 중 인민군이 끼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그를 고심하게 만들었다.

어려운 여건과 불확실한 가정 속에서도 현 박사는 설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알몬드 장군에게 “적들이 사방에서 쳐들어오고 있는 마당에 함흥과 흥남의 민간인들이 갈 곳이 어디에 있겠느냐”며 하소연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포니가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각오하고 우리를 도왔다”며 거들었다. 현 박사는 “군의 편의를 위해서 그들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거듭되는 그의 설득을 외면할 수 없었던 알몬드는 결국 민간인 구출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1950년 12월 초순, 4천여 명의 함흥 사람은 함흥에서 흥남으로 향하는 열차에 빈틈없이 몸을 실었다. 열차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은 얼어있는 논밭을 걸어서 흥남으로 향했다. 이들 모두가 흥남부두에 도착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군용차량이 출입할 수 있는 도로의 확보와 간첩의 차단을 위해 헌병들은 피란민들을 돌려보내는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를 향한 피란민의 행렬은 애당초 막을 수가 없었다. 피란민들은 얼어붙은 성천강을 건너서 결국 흥남부두에 도착했다.

어렵사리 흥남에 도착한 피란민의 수가 10만 명을 넘었다. 그러나 수많은 시련을 건너온 이들에게 또 다른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흥남에는 추위를 피할 마땅한 시설이 태부족이었다. 일부 운 좋은 사람들은 버려진 학교 건물이나 빈집에 들어가 지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 운동장 같은 노천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에서 칼바람을 고스란히 맞아야 하는 혹독한 시련이었다. 그때 추위를 견디지 못해 동상에 걸려 결국 목숨을 잃은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살아남은 피란민들은 배를 타고 이남으로 내려가기를 희망했다.

이러한 간절한 바람이 알몬드 장군에게 전해졌을까. 1950년 12월 19일 그는 마침내 민간인들의 승선을 허락했다. 약 10만 명의 피란민은 비로소 부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현 박사도 12월 21일 서전트 앤드류 밀러호에 승선 명령을 받았다. 배에 몸은 실었지만 그는 남겨진 피란민들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이튿날 그가 탄 배가 흥남부두를 떠났다. 포격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철수했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의 민간인 철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고 한다.

기적의 메러디스호와 ‘크리스마스의 선물’


▎1. 1만4천 명의 목숨을 구한 기적의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가득 채운 피란민들의 모습. / 2. 입추의 여지 없이 피란민들이 승선해 있다. / 3. 밧줄을 타고 배에 오르는 피란민들.
그러나 기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그 주인공이다. 메러디스호는 7600t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무역선이었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탱크·화포·탄약 등을 운송하는 목적으로 사용됐고, 6개월 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군수물자를 실어 날랐다. 이 배의 레너드 P. 라루(2001년 작고) 선장은 흥남으로 오라는 긴급타전을 받았다. 메러디스호가 흥남부두에 도착했을 때는 철수작전이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던 1950년 12월 20일이었다.

메러디스호가 해변에 닻을 내리자마자 미군 대령 몇 명이 승선했다. 그들 중 한 명은 “지금 당신의 배가 이 지역에 남은 마지막 배들 중 하나입니다. 당신이 자원하여 배를 갖고 들어가 해변의 피란민 중 얼마라도 태우고 나올 수 있는지 묻고 싶소. 상급선원들과 협의해서 결정을 내려주십시오”라며 부탁했다. 10군단은 민간인 선장에게 피란민을 탑승시키라는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사실상 최종 결정권은 라루 선장에게 있었다.

당시 메러디스호는 총 59명의 인원이 탈 수 있도록 설계된 화물선이었다. 배에는 이미 선장을 포함한 상급선원 12명과 승무원 35명이 타고 있기 때문에 12명의 여유 공간만 있을 뿐이었고, 여분의 물과 식량도 남아있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미처 하역하지 못한 300t의 항공유였다. 당시 흥남 연안에는 북한군의 기뢰가 부설되어 있었고 북측의 잠수정도 이따금 출몰했다. 이들의 공격을 받기라도 하면 자칫 유례없는 선박 화재가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라루 선장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피란민 구호를 약속했다. 곧이어 최대한 많은 수의 피란민을 배에 태우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항공유를 제외한 모든 물자를 내려놓은 뒤, 12월 22일 오후 9시 반부터 피란민 탑승 작업이 시작됐다. 이튿날 아침까지 무려 1만4천 명의 피란민이 바지선을 이용해 이 배에 올라탔다. 배의 모든 공간이 말 그대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12월 23일 메러디스호가 흥남부두에서 마지막으로 출항하자 미군은 중공군의 항구 사용을 막기 위해 흥남부두를 폭파했다.

당시 메러디스호의 사무장이었던 로버트 러니(86)는 “피란민이 갑판·창구 등 배 여기저기에 꽉 차 있었다”며 “아이가 또 다른 아이를 업고, 어머니가 갓난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노인이 아이들의 손을 꼭 붙잡고 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한편 당시 초급 기관사였던 멀 스미스(87)는 흥남철수 첫날밤 당직을 서다 경험한 일화를 기억해냈다. “고요한 밤 이상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한 피란민이 몸짓으로 물을 달라며 양철 컵으로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양철 컵만 보면 그때 생각이 납니다.”

메러디스호에 올랐을 때 13세 소년이었던 원동혁씨는 당시 배 위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물 한 모금도 식량도 없었으나 그 불편함 속에서도 사람들은 단 한 건의 다툼이나 소란도 없이 조용히 자리를 지켰습니다. 아마도 지옥에서 탈출해 살 수 있는 곳으로 간다는 희망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당시 저는 배의 하부 화물칸에 있었는데 그 공간은 사람들의 숨소리와 따뜻한 입김 그리고 누군가 용변을 한 듯한 악취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피란민들의 힘겨운 남한 정착기


▎1. 2010년 흥남철수작전 60주년 기념식을 맞아 한국을 방문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원들. 왼쪽부터 멀 스미스, 로버트 러니, 벌리 스미스. / 2. 64년 만의 만남. 왼쪽부터 ‘Kimchi’ 5호 이경필 씨, 포니 대령의 손자 네드 포니, 현봉학 박사의 딸 헬렌·에스더 현.
그렇게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이 피어났다. 승선 당시 출산이 임박했던 만삭의 임산부들이 산통을 이기지 못하고 배 위에서 아기를 낳기도 했다. 12월 23일을 시작으로 25일까지 3일 동안 5명의 아기가 태어났다. 메러디스호의 선원들은 아기들을 ‘Kimchi 1’부터 ‘Kimchi 5’라고 불렀다. 러니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조산원들이 말없이 산모들의 출산을 도왔다. 그건 정말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다”고 회고했다.

흥남철수 당시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대부분 거제도에 정착했다.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아 왔지만 앞으로 살길이 막막했다. 나중에는 조선소가 지어지고 천지개벽이 되다시피 했지만 그 시절의 거제도는 말 그대로 외딴 섬에 불과했다. 고된 여정에 지친 피란민들은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피란 과정에서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한 가족과 이별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서로 다른 배에 타는 바람에 남쪽에서도 만나지 못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산의 아픔은 흥남철수도 비껴갈 수 없었다.

그런 아픔을 그나마 어루만져준 건 인심 좋은 거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오갈 곳 없는 피란민에게 집을 빌려주거나 마당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도록 편의를 봐줬다고 한다. 또 유엔군으로부터 배급받은 물자도 나눠주기도 했다. 박영자 씨는 거제 사람들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뿐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군이 한 사람당 한 홉씩 쌀을 배급해줬는데 거제 사람들이 그걸 또 십시일반 나눠서 우리 몫도 줬을 정도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종교의 힘도 컸다. 함주군 덕천교회 사람들은 잃어버린 가족, 친지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거제도 교회로 모여들었다. 거제도 교인들은 어려움에 부닥친 이북 동포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한용빈 씨는 “흥남탈출 당시 뿔뿔이 흩어졌던 사람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다시 만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때 다시 모인 130여 명의 신도는 그 뒤로도 서로를 부축하면서 생활했고, 1955년 서울로 올라와서는 신길동의 동천교회를 세웠다. 한씨는 “흥남철수 당시 단체로 내려온 사람들은 우리가 유일할 것”이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했다.

메러디스호에서 태어났던 아이들은 어떻게 자랐을까? 현재까지 신원이 파악된 이들은 두 명이다. ‘Kimchi’ 1호 손양영(65) 씨와 ‘Kimchi’ 5호 이경필(65) 씨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자신이 흥남에서 마지막으로 탈출한 배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 인지한 채 수십 년을 살아왔다. 그러다가 2006년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가 출범하며 관련 행사가 개최되고, 흥남철수 관련 다큐멘터리가 속속들이 제작되면서 자신들이 ‘Kimchi 5’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함경남도 북청 출신의 손씨는 현재 서울에서 철강무역회사를 운영한다. 부모님과 무일푼으로 피란을 떠나온 그는 학창시절부터 기를 쓰고 공부해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효성에 입사해 그는 철강무역 분야에서 신화적인 업적을 썼다. 1981년엔 1천만 달러 계약을 따내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던 그다. 가족사를 묻자 그가 쉬 말을 잇지 못했다. 피란 당시 아버지는 만삭인 어머니를 데리고 모든 식구를 배에 태울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아홉 살 형님과 다섯 살 누나를 삼촌에게 맡기며 부모님은 이틀만 내려 갔다가 다시 올라오겠다고 약속하셨다고 합니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부모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을 죄인처럼 사셨어요.” 불거진 눈시울로 말하면서도 그는 이북의 형제·친척들에게 혹시 폐를 끼칠지 모르겠다며 조심스러워 했다.

흥남 출신의 이씨는 줄곧 거제에서만 살았다. 그는 현재 거제도에서 장승포동물병원을 운영하는 수의사다. 그의 할머니는 중공군이 밀려들어 온다는 소식에 아들과 만삭인 며느리에게 어서 배를 타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할머니는 정작 배에 타지 않으셨다. “부모님 말씀이 할머니는 ‘보름이면 국군이 다시 올라오지 않겠느냐’라며 집을 지키겠다고 하셨답니다.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부모님은 할 수 없이 마지막 배인 메러디스호에 겨우 몸을 실었던 거고요. 그 배에 오르지 못했다면 지금의 저는 아예 없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북녘에 남아 고초를 겪으셨을 할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흥남철수 64주년을 맞아 지난 12월 26일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는 뜻 깊은 행사가 열렸다. 국가보훈처가 ‘12월의 6·25전쟁 영웅’으로 현봉학 의학박사를 선정한 것을 축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 행사에는 현 박사, 포니 대령의 후손들과 ‘Kimchi’ 5호 이경필 씨가 참석해 첫 대면을 했다. 이씨는 직접 만든 감사패를 생명의 은인들에게 전달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현 박사의 둘째, 셋째 딸인 에스더 현(56)과 헬렌 현(53)은 “당신이 바로 크리스마스의 선물이군요. 생일 축하합니다!”라며 반갑게 인사했다. 포니 대령의 손자인 네드 포니(51)는 “할아버지가 전쟁 당시의 한국 이야기를 자주 해주셔서 한국에 관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의 아들 벤 포니(29)는 현재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공부 중이다.

“한국인들에게 잊혀진 전쟁 되지 않길”


▎메러디스호의 기적은 2004년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헬렌은 “아버지는 1990년대 전까지는 흥남철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며 “아버지가 이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계셨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됐다”고 말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흥남철수 관련 다큐멘터리가 제작된 뒤로도 아버지는 별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아마도 그때의 행동을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여기신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흥남철수 때문에 오늘의 이산가족이 생긴 건 아닌지 자책하시기도 했고요.”

그 때문이었을까? 현 박사는 미국에 거주하면서도 한때 남북통일을 돕기 위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가족들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현 박사는 의료구호 활동을 위해 북한을 여러차례 출입했다. 하지만 나중에 그가 흥남철수의 주인공으로 세상에 알려지자 북한은 비자 발급을 중단했다는 것이다. 다시는 고향 땅을 찾을 수 없게 되자 그는 아쉬운 마음에 나중에는 백두산 주변 국경지역을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헬렌은 “6·25전쟁은 제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 사이에 일어나 미국의 젊은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전쟁이었다. 전쟁의 당사자였던 한국의 젊은이들에게만큼은 잊혀진 전쟁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2012년부터 거제도 장승포에 흥남철수기념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지만 아직 추진이 지지부진하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기념공원 조성 필요성을 역설했다. “당시 배를 타고 온 피란민들은 대부분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배에서 태어난 제가 벌써 65세입니다. 제가 아무리 말하고 다녀도 한 세대만 지나도 흥남철수를 기억하는 이들이 적어질 겁니다. 기적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라도 꼭 공원을 조성해야만 합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이끌어낸 메러디스호는 ‘세계 전사(戰史)에서 단일 선박으로 가장 많은 인명을 구한 배’로 2004년 세계 기네스북에 올랐다. 하지만정작 메러디스호는 1993년 중국에서 분해·철거됐다. 중공군에 맞서 자유를 향해 닻을 올린 배가 중국에서 그 수명을 다한 것이 아이러니하다. 거제시는 “메러디스호의 자매선이자 함께 흥남철수작전에 투입된 레인 빅토리호를 인수하는 작업을 2011년부터 추진 중”이며 “레인호 인수 후 기념공원을 조성해 전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메러디스호의 라루 선장은 휴전 후 미국으로 건너가 마리너스라는 영세명으로 평생 수도자의 길을 걸었다. 이후 그가 속해 있던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성베네딕도회 뉴턴 수도원이 재정난을 겪자 이 소식을들은 한국의 베네딕도회에서 기금을 마련해 전달해 보은하기도 했다. 이 결정이 내려진 이틀 뒤인 2001년 10월 14일 마리너스 수사는 눈을 감았다.

감동의 흥남철수작전이 일어난 지 64년. 하지만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이는 점점 줄어든다. 관련 서적도 적지만 그마저도 대부분 절판돼 국내에서 책들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다. <국제시장>의 흥행으로 흥남철수작전이 언론의 반짝 조명을 받았지만 관심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이렇게 노래를 끝맺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영화 속의 ‘덕수’는 천만 관객을 울렸지만 현실 속의 수많은 ‘덕수’는 백발이 된 나이에도 애타게 헤어진 ‘금순이’를 찾는 중이다.

- 송락규 월간중앙 인턴기자

201502호 (201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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