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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 일본 지식인은 한국 책을 어떻게 읽을까 

한국의 문화 가운데 ‘지(知)’ 분야는 아직 암흑 속에 함몰돼 있어… 가라타니 고진이 꼽은 책은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일본인이 한국 문화를 접대하는 격은 현격하게 높아졌다. 아직 충분하다고 여겨지지 않지만 과거에 비해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영화는 일본의 지식인에게 감탄을 자아내고 있으며, 드라마와 음악 역시 일본인의 감수성에 강렬한 낙인을 찍고 있다. 한국의 현대미술은 일본에서 높이 평가받는 정도에 머물지 않는다. 예컨대 이우환 같은 화가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일본 미술운동의 중요한 흐름인 ‘모노파’ 창시자인 그는 이론적으로, 또 실천적으로도 현대 일본미술을 견인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식민사관 논란으로 그의 업적이 폄훼되고 있는 국내 사정과는 별개로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어권의 지적 전통과 그 성과물은 일본에 어떻게 소개되고 있을까? 한국 문화를 폭넓게 수용하고 있는 양상에 비해 ‘한국의 지(知)’에 관한 물음을 꺼내놓자마자 일본어의 세계는 아연 망연해지기만 한다. 한국의 문화 가운데 ‘지’의 분야는 마치 암흑 속에 함몰돼 있는 것 같다. 이 책이 ‘한국의 지를 읽다’란 제목을 달고 있는 것도 그런 문제의식의 발로다.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 140명이 모여 그들이 만난 ‘책’을 통해 한국의 ‘지’와 스친 순간을 이야기한다.

일본어권에서 먼저 출판된 배경에는 엮은이 노마 히데키의 열정이 작용했다. 언어학자인 그는 도쿄외국어대학 교수를 거쳐 일본 국제교양대학의 객원교수로 있다. 한국에 대한 그의 관심은 대단히 본원적인 것이다. 지난 2010년 보편적인 세계문자사의 시각에서 ‘한글’의 지적, 미적 혁명성을 말하는 책 <한글의 탄생>을 저술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3만 부 이상 팔렸고, <마이니치신문> 주관 아시아·태평양 저술상의 대상을 받았다. 일본 지식인의 한글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엮은 <한국의 知를 읽다>가 만만치 않은 기획의 소산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엮은이는 140명의 필자에게 한국의 ‘지’에 대한 책을 1∼5권 선택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2천 자 정도로 써달라는 형식으로 집필을 의뢰했다. 엮은이는 일본어권 집필자들에게 자신은 한국 책을 거의 읽지 않았기 때문에 집필 자격이 없다든가, 한국의 ‘지’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고 고백했다. 일본과의 지적 교류에 무심했던 한국 지성계도 반성할 대목이 있다.

일본을 넘어 세계 철학계의 거인으로 우뚝 선 가라타니 고진도 집필진에 포함된 것이 눈에 띈다. 그는 단 한 권의 책을언급했는데, 그 책이 바로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 본인>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의 특성을 서양이나 중국과의 차이점을 통해 이끌어내는 담론이 지배적이었던 시기에 그것을 한국과의 차이를 통해 봐야 한다는 이어령의 주장에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이어령의 통찰과 예언의 능력에 감탄하기도 한다.

“일본인은 ‘축소’할 때에는 독창적이고 훌륭하지만 ‘확장’하는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아 파탄을 맞이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확장을 지향하는 일본은 위험하다고 진단한 이어령의 통찰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201502호 (201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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